• 세타가야 퍼블릭 시어터에서 정기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듯한 해체신서 시리즈. DVD는 총 10편까지 나왔고, 올해 17회를 맞이하는 모양이다. 5월 18일 한다고 전단지도 받았는데 ㅠ.ㅠ
    하여간 특별히 이 DVD 표지를 올리는 건, 내가 보고 반한 만사이 상의 정좌한 자세의 아름다움 때문에. 오른쪽은 그냥 편하게 앉아계신 모습으로 정좌한 자세와 비교샷.

    만사이 상의 자세를 보고 있노라면 그냥 단정함이 옷을 입고 걸어다니고 있다는 느낌. 정갈하고 단아하고, 소나무의 굳건함이라기 보다는 대나무의 유연함이 연상되는 강건함이 느껴진다. 그건 그대로 만사이 상의 연기에도, 평상시 모습에도 배어 나온다. 억지로 꾸며서 겉치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달까.
    만사이 상의 아버지, 만사쿠 상은 교겐은 배우의 인품이 잘 드러나는 표현의 예(藝)라고 하셨는데, 그말 그대로라고 생각한다. 교겐을 많이 접한 건 아니지만, 만사쿠 상의 연기에 격조 높은 품격이 느껴지는 것, 만사이 상의 연기에서 재기발랄함과 동시에 금욕적인 정갈함이 느껴지는 것. 이런 것은 자신의 인품, 성격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 요즘 매일 새벽까지 사모은 DVD를 보느라 날 밤을 새고 있다.
    교겐과 관련된 DVD를 보면서 문득 생각했다. 만사이 상이 교겐시라 다행이다...라고. 만약 가부키 배우였다면, 얼굴에 분장을 했을 것이고, 노(能) 배우였다면, 가면을 쓰고 나오셨을 테니까. 교겐 배우는 따로 분장을 하지 않는 맨 얼굴로 무대에 오른다. 물론 교겐에서도 가면을 쓰기도 하지만, 그건 신(神) 혹은 동물을 연기할 때니까, 보통은 꾸미지 않은 맨 얼굴이다. 게다가 교겐의 곡들은 대부분 풍자와 해학을 담은 희극이라 못알아 들어도 웃을 수 있다는 점이 좋다. ^^;


  • 만사이 상을 전국구 스타로 만든 NHK 아침드라마 '아그리(あぐり)'를 보고 있다.
    이제 겨우 DVD 2장, 즉 4주차 까지 봤는데, 이게 97년도 드라마인데, 왜이리 재미있는 거냐. OTL 
    만사이 상이 연기한 에이스케가 인기 폭발이었다는 게 막 이해가 되려고 한다. 처음에 아그리의 스토리를 봤을 땐, 뭐 이런 제멋대로에 무능력하고 하여간에 룸펜인 남자인가 그랬는데.... 만사이 상, 너무 미화시킨 거 아닌가효~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어쨌거나, 이것이 평균 시청율 28% 아침드라마의 위엄!! 다음편이 궁금하지만, 내일 출근을 위해 정지 버튼을 눌러야 한다는게 괴롭다.
    덕분에 요즘 꽂혀서 무한 반복하고 있는 드라마 아그리의 메인 테마 - 멋진 나날에(素晴らしき日々へ)로 이 잡담 포스트를 마무리



4월 5일, 노무라 만사이 상,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

전부터 제 블로그를 방문해주시는 분들은 갑툭튀한 이 분이 누구신지 모르시겠지요. --;;
회사를 그만두고 싶을만큼 일에 치이고, 2주 간격으로 일본 출장을 왔다 갔다 하는 와중에 - 지금 또 일본이지만 - 저는 새로운 버닝거리를 찾아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짝사랑 하던 후배와 결혼해서 1남 2녀, 세 아이의 아버지이신 이분에게 어쩌다 빠져들게 되었는지 설을 풀어보지요.

노무라 만사이(野村萬斎)

본명 : 노무라 타케시(野村武司), 1994년 증조부 노무라 만조(野村万造)의 은거명 만사이(萬斎)를 습명.
1966년 4월 5일생, B형, 도쿄 출신
조부・故6세 노무라 만조(野村万蔵)와 아버지・노무라 만사쿠(野村万作)에게 사사.
중요무형문화재종합지정자. 3살에 첫 무대. 도쿄 예술대학 음악학부 졸업.
「교겐이 있는 자리(狂言ござる乃座)」주재.
국내외에서 다수의 교겐(狂言)・노(能) 공연에 참가, 보급에 공헌하는 한편, 현대극이나 영화・TV 드라마의 주연, 무대 『아쓰오 - 산월기・명인전 -(敦—山月記・名人伝—)』『나라를 훔친 이 : 쿠니누스비토(国盗人)』등 고전 기법을 구사한 작품의 연출, NHK 『일본어로 놀자(にほんごであそぼ)』에 출연하는 등 폭넓게 활약.
각 분야에서 비범함을 발휘하고, 교겐의 인지도 향상에 크게 공헌. 현대를 살아가는 교겐시(狂言師)로서, 모든 활동을 통해 교겐 본연의 자세를 묻고 있다.
94년에 문화청 예술가 재외 연수제도에 의해 영국 유학.
예술제신인상, 예술선장 문부과학대신 신인상, 아사히 무대 예술상, 기노쿠니야 연극상 등을 수상.
2002년부터 세타가야 퍼블릭 시어터(世田谷パブリックシアター) 예술감독.
(출처 > 공식 홈페이지 - 万作の会 http://www.mansaku.co.jp)

처음 시작은 오카노 레이코의 만화 '음양사'였습니다. 10년도 전에 나온 만화에 새삼 관심이 간 건 아니었습니다. 그냥 심심풀이로 읽을 책을 책꽂이에서 찾다 손에 잡혔던 게 지금은 사라진 세주출판사 판 음양사였을뿐. 다시 보다보니 세이메이와 히로마사 콤비는 그야마로 일본판 홈즈와 왓슨이더군요.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원작 소설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만화로 만족하고 있었더랬는데, 오카노 레이코의 만화는 뒤로 갈 수록 세이메이가 웃지 않게 되었달까, 뭔가 처음의 분위기가 아니라 소설을 읽자...가 됐습니다. 다행히 손안의 책에서 라이센스가 나와있더군요. 당장에 출판된 6권을 주문해 읽었지요.
원작자 유메마쿠라 바쿠 씨의 세이메이와 히로마사는 만화보다 훨씬 더 노골적이더군요. 문장에서 풍겨오는 향기도 그윽하고.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아, 이거 영화로도 나왔었지...가 되었습니다.
예전에 케이블에서 해주던 음양사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감상은 어땠냐면, 세이메이가 입은 카리기누의 뒷태가 너무나 오리궁둥이 스러웠다는 것과, 도손의 식신이었던 까마귀가 무슨 모여라 꿈동산 수준이었다던가, CG의 허접함 같은 것만 남아, 비웃으면서 봤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음양사의 두 콤비에 마음이 끌린 상태에서 본 영화는 어땠을까요. 뭐 눈에 콩깍지가 씌였다 한들 어설픈 CG가 갑자기 세련되게 보일리는 없지만, 세이메이와 히로마사를 보는 시선은 전과 달라졌습니다. 특히나, 이분.


원작에서 묘사하는 여우를 닮은 세이메이 그대로입니다. 뭐, 원작자인 유메마쿠라 바쿠씨가 영화화 한다고 했을 때, "세이메이 역에 노무라 만사이 상이 아니면 싫다."라고 했을 정도니까요. 그 기대에 보답하듯 이 영화에서 만사이 상은 교겐으로 다져진 몸놀림, 발성을 충분히 이용해서, 우아하고도 신비한 매력의 세이메이를 표현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만사이 상에게 끌리게 된 결정적 계기는 서있는 모습이 아름답다는 데 있었습니다. 완전히 몸에 배인 자세랄까, 꼿꼿하게 등을 펴고, 턱을 아래로 끌어당기고, 가슴은 활짝 편 채 서있는 자세는 그 자체로 아름다웠습니다. 정좌하고 앉아 있는 자세 또한 우아하기 그지없어, 저는 사실 그 모습에 홀랑 반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게 시작이었습니다.
뭐, 그 뒤로는 미친듯한 검색이 있을 뿐이지요. ^^;;
그리고 검색할 수록 이분이 참으로 다양한 방면에서 자신의 재능을 펼쳐보이고 있구나 하는 걸 깨달아가 가는 과정이면서, 지름의 나날이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후~

    영화 배우로서의 노무라 만사이 상  


쿠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란(乱,1985)에서 츠루마루(鶴丸) 역으로 17세에 영화 데뷔
음양사(2001) 아베노 세이메이 역, 블루리본 영화상 남우주연상, 일본 아카데미 신인상, 남우주연상 수상.
음양사 2(2003) 아베노 세이메이 역
 
    TV 드라마 배우로서의 노무라 만사이 상  


NHK 대하드라마 꽃의 전쟁(花の乱, 1994) - 호소카와 카츠모토(細川勝元) 역.
NHK 아침 드라마 아그리(あぐり, 1997) - 모치즈케 에이스케(望月エイスケ) 역. 에란돌(エランドール) 특별상, 하시다 스가코(橋田壽賀子) 신인상, 제1회 닛칸 스포츠 조연남우상 수상.
NHK 정월 시대극 창천의 꿈(蒼天の夢 松蔭と晋作・新世紀への挑戦, 2000) - 타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 역.
NHK 목요 시대극 쿠라마 텐구(鞍馬天狗, 2008) - 쿠라마 텐구(鞍馬天狗/小野宗房) 역.

    TV 교육 프로그램에서의 노무라 만사이 상  

NHK 교육 채널 일본어로 놀자(にほんごであそぼ) 2003년부터 출연, 현재진행형.

대충 이런 분위기의 어린이 용 프로그램입니다.

    현대 연극 배우로서의 노무라 만사이 상  


2002년 오이디푸스 왕(オイディプス王, 니나가와 유키오(蜷川幸雄) 연출) - 오이디푸스 역, 오이디푸스왕, 실수의 교겐으로 요미우리 연극대상 우수 남우상 수상. 2004년 그리스 아테네 헤로데스 아티쿠스에서 재연 공연.
2003년 햄릿(조나단 켄트 연출) - 햄릿, 남자배우들만의 햄릿으로 일본, 영국 런던에서 공연. 1990년 연극 햄릿에서 햄릿 역을 했었음.
2005년 아츠오 - 산월기・명인전 (敦-山月記・名人伝)의 구성, 연출, 출연. 구성, 연출로 기노쿠니야 연극상 수상, 구성, 연출, 주연으로 아사히 무대예술상 수상.
2007년 쿠니누스비토(国盗人) - 사부로 역. (쿠니누스비토는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를 일본식으로 각색한 연극.), 2009년 재연
2008년 우리 영혼은 빛나는 물과 같이(わが魂は輝く水なり) - 주연 사이토 사네모리(斎藤実盛) 역
2010년 맥베스(マクベス) - 맥베스 역
2010년 7월 파우스트의 비극 공연 예정, 파우스트 역.

    교겐시(狂言師)로서의 노무라 만사이 상  



이쪽은 정리가 안됩니다. OTL 아직 제 공부도 많이 부족하고, 그러니 대강 이런 분위기라고만...

하여간에 이렇게 여러가지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노무라 만사이 상이십니다만, 어떻게 보면 장점이고, 어떻게 보면 단점인데, 어떤 역을 하든, 그 안에 노무라 만사이라는 개성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고 할까요. 표현자로서 만사이 상의 개성이 너무 강하다고 할까. 뭐, 이제 막 알아가는 참에 너무 주제넘게 평가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저는 그게 이분의 매력이라고 생각하니까요. ^^;
너무 뜬금없이, 마치 덫에 걸린 것 마냥 타오르게 된 분이라, 마음의 준비도 없이 속절없이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부디 앞으로도 건강하게 표현자로서의 자신을 마음껏 발산해 주시길. 생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ps. 만약 제게 시간이 허락된다면, 다음 포스팅은 아마도 그동안 접한 이분의 영상물의 감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출장 첫날 북오프로 달려간 제 눈앞에 '아그리 DVD 완전판'이 눈에 띈건 우연이었을까요. 뭐, 이러라고 버는 돈 아니겠습니까만은. ^.ㅠ
뒷북도 이런 뒷북이 없습니다만, 그렇다고 축하를 건너 뛸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ㅠ.ㅠ
한 사람의 꿈을 위해 같이 태교하는 마음으로 속을 다스리고, 같이 울고 웃고, 응원하고, 기도하고 그랬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이번 올림픽에 들어가기까지 제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리고 그 간절한 바람이 모이고 모여서 연아가 연기할 때 함께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번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은 개인적으로 참 하이라이트만 모아놓은 것 같은 경기였습니다.
첫 시작인 페어에서부터 레전드 급의 연기가 쏟아져 나왔지요. 뭐, 중간에 어라? 싶은 페어조가 있기도 했지만, 쉔 슈에/자오 홍보, 팡 칭/통 지안, 사브첸코/졸코비 모두 훌륭한 연기를 보여줬습니다.
쉔자오의 관록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NBC 플러프에서 쉔 슈에 선수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Skating with Heart" 네, 마음으로 타는 스케이팅이었기에 그렇게 큰 감동을 전해줄 수 있었던 거겠지요. 3번의 월드 챔피언에 더해 올림픽 챔피언까지, 정말 축하합니다.
그리고 팡통의 프리 연기인 "Impossible Dream"은 그야말로 전율이었습니다. 윌슨이 왜 천재인지 알 수 있는 안무였고요. 페어에서 이런 전율을 느껴본 건 2003 월드의 쉔자오의 투란도트 이후 처음이었습니다. 팡통조의 팬들의 바람은 늘 한결 같았죠. TES보다 PCS가 좀 높아봤으면 좋겠다. 쇼트에서 타임 디덕션에(모로좁 보고있냐!!!) 줄세우기 일환인 PCS 크리로 완벽한 연기를 펼치고도 4위를 마크할 수 밖에 없었던 팡통조는 프리에서 정말 자신들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면서 은메달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올림픽 경기 중 연아양 경기 외에 가장 많이 보게된 경기는 팡통의 'impossible dream'입니다. 팡칭의 공중걷기(?) 부분은 선녀강림이 따로 없습니다. 영상이 보고 싶으신 분은 여기를 클릭.
사졸의 이번 시즌 쇼트는 제가 제일 마음에 들어하는 프로그램 중 하나입니다. 올림픽에서도 아름다운 연기를 선보였지만, 쉔자오의 퍼포먼스를 뛰어넘지는 못했지요. 이 페어조의 특징은 페어의 기술중 가장 고난이도의 기술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펼쳐보인다는 것인데요, 그게 프리 프로그램에서 거의 극대화 됩니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아름다운 선율에 맞춰서 최고난도의 기술과 함께 독특하고 아름다운 안무가 곁들여지는데, 이번엔 점프에서 실수가 좀 있었습니다. 다음 월드에서 좋은 연기 보여주길 바랍니다.

아이스댄스에서는 달달한데 안 사귀는(^^;) 테사 버추/스캇 모이어, 작년부터 급성장한 메릴 데이비스/찰리 화이트, 러시아 아댄의 자존심 옥사나 돔니나/막심 샤발린이 각각 금은동을 가져갔습니다. 버모네의 연기는 물론이고 메찰조의 연기도 훌륭했습니다. 아댄은 초보자의 눈으로 보기엔 스케이팅 스킬, 기술 등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냥 흐름이 자연스럽고, 두 사람의 케미스트리, 일체감 등을 보게되는데, 두 팀다 빼어나게 아름다운 연기를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메찰의 OD 인디언 댄스가 정말 이번 시즌 저의 Favorite 프로그램 중 하나인데, 올림픽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줬으나, 발 카메라의 영향으로 아직도 그랑프리 시리즈 COR에서의 영상이 제일 나은 것 같습니다. 영상을 보실 분은 여기

남자 싱글은 올림픽 전부터 가장 치열한 포디움 싸움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었는데, 막상 뚜껑을 열고보니 뭐랄까 소문난 잔치에 먹을 거 없다는 속담처럼 되었습니다.
돌아온 짜르 예브게니 플루센코의 영향인지, 남싱들은 쿼드가 없이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다들 쿼들을 넣어왔고, 장렬하게 실패들을 하셨습니다. 남자 싱글은 그래서 전반적으로 점프 실수도 많고 클린 프로그램이 많지 않았는데, 그 가운데, 자신이 준비한 것을 착실하게 깨끗하게 연기해낸 에반 라이사첵 선수가 금메달을 땄습니다.
프로그램으로 보면 올시즌 남자 싱글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다카하시 다이스케의 쇼트 "Eye" 와 패트릭 챈의 쇼트 "망명자의 탱고", 프리 "오페라의 유령", 스웨덴의 아드리안 슐타이츠 선수의 프리 "사이코 병동(이런 제목은 아님;;)" 정도입니다.
제냐의 타고난 운동 능력, 점프 컨시는 훌륭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번 복귀 프로그램은 전혀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습니다. 랜딩랜딩 열매를 먹은 듯, 아무리 점프 축이 기울어졌어도, 기어이 랜딩해내고야 마는 그 능력은 다른 어떤 선수도 흉내내기 어려운 기술이지만, 피겨는 점프만 팡팡 뛰면 되는 스포츠가 아니니까요. 그렇다고 제냐에게 다른 재능이 없냐면 그것도 아니지만, 뭐 본인이 지향하는 피겨가 그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라이사첵의 연기는 올림픽 챔피언으로서는 무난한 수준이었고, 다카하시 다이스케의 연기는 그중 군계일학이었습니다. 프리에서 쿼드를 시도해서 넘어졌는데, 만약 넘어지지 않았다면, 아시아 남성 최초의 올림픽 메달 색깔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혼자 아이스쇼를 하듯 가장 아름다운 연기를 보여준 스테판 랑비엘 선수를 빼먹을 뻔 했네요. 예술성으로는 우승을 다툴 정도였는데, 부상의 후유증은 참으로 질겼습니다. 어쩌면 다카하시 선수 대신 동메달을 따게 될 지도 몰랐는데, 프리에서 막판 체력부족이 아쉬웠습니다. 그리고 말하면 가슴 아픈 브라이언 쥬벨 선수. 진짜 뭐가 씌인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안타까운 경기를 펼쳤는데, 월드에서 심기일전 하기를 바랍니다.

여자싱글은 왜 동계올림픽의 꽃이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인지 확실하게 알게해줬다고 생각합니다. 연아 선수가 자신이 만족할만한 경기를 한다면,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건 누구나 다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올림픽 금메달 만큼은 하늘이 내려주는 것이다...는 말처럼, 다들 태교하는 마음으로 연아 선수의 경기를 기다려 왔었지요.
이번 올림픽 여자 싱글은 유례가 없을 정도로 클린 경기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거 없던 남자 싱글에 비하면,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여자 싱글 경기에서 그분이 단체로 오셨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선수들은 최고의 연기를 보여줬습니다. 올림픽이라 점수 인플레가 있기도 했지만, 그만큼 많이 준비하고 나왔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뭐 그 와중에 시원하게 망해버린 유럽 챔피언도 있었지만, 자기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연기를 선보인 라우라 레피스토, 미라이 나가수 같은 선수들이 있어 흥미진진했습니다. 이번이 시니어 데뷔 두번째 무대였던 곽민정 선수도 어쩌면 그렇게 침착하게 자기 연기를 척척 펼쳐보이는지, 대견하고, 장하고 정말 자랑스럽더군요. 유럽 챔피언보다 순위도 한 계단 위고 ^^

연아 선수의 이번 올림픽 프로그램은 007 제임스 본드 메들리, 거쉰의 피아노 협주곡 바장조. 쇼트 경기날, 저는 회사에 출근해서 인터넷 생중계만이라도 보려고 했지만, 이미 버퍼링 지옥 ㅠ.ㅠ 동료의 DMB 폰을 부러워하며, 주위에서 술렁대는 분위기로 대강 어떤 경기를 했겠구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뭐, 결과는 아시다시피. 언론에서 라이벌리로 떠받들어주는 선수가 생애 최고의 연기를 펼치면서 73점이라는 고득점을 얻은 것을 바로 눈앞에서 보고도 나는 내 할 것만 하면 되는 거임..하는 표정의 김슨생은 진정 대인배라는 말로도 모자랍니다.
쇼트 경기날의 일을 교훈삼아, 프리 경기날에는 휴가를 냈습니다. 일생에 몇 번 오는 날도 아닌데, 밴쿠버까지 날아가지는 못할 망정, 경기는 생중계로 봐야겠다는 결심에서 였습니다. 그리고 전날 밤, 잠도 못이루고, 새벽에 해주는 드레스 리허설까지 보고, 까무룩 잠이 들었습니다.
어느새 1그룹 선수들의 경기가 시작되었고, 다른 때 같으면 앞 그룹은 스킵하련마는 이번엔 선수들이 다들 어찌나 잘해주는지, 그냥 계속 지켜보게 되더군요. 그리고 민정 선수 순서. 주책맞게 벌써부터 눈물이 나덥니다. 그 어린 선수가 그 가는 팔다리로 레미제라블을 연기하는데, 뭐 큰 무대라서 떨고 이런 거 없습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연기가 끝나고 저는 TV를 향해 박수를 쳤습니다. 어린 선수가 정말 장하고 큰일 해냈다고.
어느덧 연아 선수 순서. 앞의 안도 미키 경기는 귀로 봤는지, 코로 봤는지 모르게 연아 선수는 담담한데, 내가 막 긴장하고 떨려서 두근두근 대면서 봤습니다. 보는 나는 이렇게 떨리는데, 연아 선수는 오히려 침착하게 연기를 펼치더군요. 이번 시즌 프리 프로그램 거쉰의 피아노 협주곡은 그야말로 모던함, 우아함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거기에 최고 난이도의 기술이 안무로 승화되어 프로그램안에 녹아들어가 있습니다. 점프, 스핀, 스텝, 스파이럴 이런 기술 요소들이 하나하나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그냥 프로그램 그 자체인듯 스며들어있어, 다들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고 감탄할 수 밖에 없는 작품으로 완성된 것입니다. "천의무봉" 이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피겨 스케이팅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이상향. 그것을 이번에 연아 선수가 보여줬습니다. '피겨 스케이팅 여자 싱글의 새로운 표준'이 될 것이라고 예언한 독일 해설자의 말처럼, 연아 선수는 피겨 스케이팅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표를 실현해 보여준 것입니다.
정말 이런 날이 오리라고 누가 예상했을까요. 연아 선수에게 카타리나 비트, 크리스티 야마구치, 미쉘 콴 등 이름만으로 빛나는 레전드들이 기립박수를 보내고, 최고의 찬사를 보내는 그런 날이 정말로 오게되었다는 게 꿈만 같습니다.



[@ All That Skate Summer]


올림픽은 이렇게 끝이나고, 진정한 Queen Yuna로 거듭나신 여왕님의 갈라쇼로 마무리 합니다.
원래 갈라는 타이스의 명상곡입니다만, 이번만은 이 몽타주가 워낙 아름다워서, feverskating의 김마리님의 몽타주로 대신합니다.
김마리님 영상이 삭제되어 All That Skate Summer에서의 타이스로 영상 대체합니다.

대관식을 끝마치고, 오히려 수수한 차림으로 나타나신 여왕님께서 백성들에게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하고 위로를 전하는 것 같은 갈라라고 느낀 건 너무 오바일까요. ^^;;
눈물나게 아름다운 갈라 프로그램입니다.

ps. 지금 일본에 출장 와있습니다. 3/8 월요일 출근했더니 일본으로 출장 가라더군요. 내일 가나요? 했더니, 월요일 당일에 당장 일본으로 가라고 OTL
정신없이 짐꾸려서 일본에 도착해서도 정신없이 돌아다니다, 이제야 시간이 되서 올립니다. 귀국은 21일 예정인데, 설마 연기되는 일은 없........겠죠;; (그래도 벚꽃 피는 거 못보고 가는 건 좀 서운할지도)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민주화된 10년. 그 10년을 이렇게 보내드릴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가슴 아픕니다.
가라는 X들은 안 가고, 바지가랑이라도 붙들고 싶은 분들만 가시는군요.
그래도
가시는 길 부디 평안하시길
 
제가 故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배너를 100일은 달아놔야지...하고 블로그 상단에 올려놨었습니다.
5월 23일 돌아가셨으니 8월 30일까지는 올려놓자고 그랬는데, 그 100일이 오기도 전에 또 한분의 존경하는 전직 대통령께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먹구름이 낀 듯 답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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