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 오페라 락(Mozart L'Opera Rock)

일   시 : 2012. 03. 30 ~ 2012. 04. 29
장   소 :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
관극일 : 2012. 04. 08 (일) 18:30
연   출 : 김재성, 음악감독 : 서유진
캐스트 : 모차르트 - 김호영, 살리에리 - 김준현, 콘스탄체 - 이해리, 알로이지아 - 최유하, 레오폴트 - 신성우, 난넬 - 홍륜희, 디바 - 허진아, 세실리아 - 최현선, 안나 마리아 - 장이주, 로젠베르크 - 성열석, 베버/요제프2세 - 장원령
줄거리 :
콜로레도가 모차르트의 가장 든든한 후원인이었던 지기스문트의 뒤를 이어 잘츠부르크의 대주교로 취임하며 모차르트가 균형을 잃고 동요하는 시점에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새로운 군주는 엄하고 권위적이며 모차르트의 음악에 무심하고 젊음의 혈기와 인간에 대한 무례함에는 몹시 민감하다.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에서의 삶을 견딜 수 없어 한다.
그가 좀 더 나은 미래를 찾아 유럽의 한 도시로 어머니와 함께 태어난 곳을 떠나기로 결정한 때 그는 스무살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천재 작곡자의 여정은 실패와 잔인함만을 가지고 출발한다.
유럽의 어디에서도 그를 반기지 않았으며 그의 첫 사랑 `알로이시아 베버`에게는 쓰디쓴 실연의 아픔만을 얻으며 그를 내팽개치고 모욕을 주었던 도시 파리에서 어머니를 잃는다.
다시 돌아온 잘츠부르크에서의 삶은 그에게 더욱더 큰 삶의 무게를 짊어지게 되고 마침내 모차르트는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어려움과 맞서게 된다.
그의 화려한 전성기를 꽃피우게 했던 그 곳 비엔나에서... 그는 환희의 승리의 순간, 경쟁, 그리고 추락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레퀴엠`을 미완으로 남겨둔 채 생을 마감하게 된다. [출처 > 플레이DB]

- 몇 번이나 반복해서 밝혀왔지만, 난 모차르트 빠순이다. 그러니 이 뮤지컬을 또 그냥 지나칠 수 있을 리가. 사실 지금 엘리자벳 보는 것만으로도 매우 힘겨운데, 여기에마저 빠지면 답이 없다 싶어서 자체 첫공을 좀 뒤로 미루고 미루다 갔다. 거의 반년 만에 다시 들른 성남아트센터는 여전히 멀고, 그리고 좀 낯설었다. 성남아트센터는 모차르트와 특별한 인연이라도 있는 건지, 작년 뮤지컬 모차르트!로 은차르트를 이곳에서 만나고 그대로 공연 홀릭에의 전환점이 되었더랬는데, 참 아련한 기억이다.

- 오스트리아 산 모차르트!와 프랑스 산 모차르트 오페라 락(이후 모오락), 둘 다 모차르트의 일생을 뮤지컬로 만들어서 비교하기 딱 좋은 조건이지만, 우선 주제와 방향성이 다르고, 주요 등장인물의 캐릭터도 달라, 비슷한 듯 다른 평행 세계를 보는 느낌도 들면서 음악적인 방향도 참 많이 다르더라.
비슷한 점은 둘 다 모차르트를 시대의 반항아, 록스타의 이미지로 상징했다는 건데, 넘버들은 아무래도 뒤에 만들어진 모오락 쪽이 더 현대적이다. 모차르트!는 클래식한 선율에 락적인 느낌을 살렸다는 수준이라면, 모오락은 진짜 락 넘버다. 그리고 모차르트!는 철저할 정도로 모차르트의 음악을 최소한으로 썼다면, 모오락은 꽤 많은 부분 모차르트의 음악을 사용한다는 것도 다른 점이다. 그런데 모차르트 빠순이인 나로서는 아름다운 모차르트의 음악이 짧게라도 흐를 때마다 가슴이 울렁거려서 얼마나 좋던지. 특히 합창으로만 듣던 라크리모사를 디바 언니님의 솔로 곡으로 들을 땐 그냥 눈물이 줄줄 흐르더라.
그리고 찬양해야 마땅할 무용수분들!! 근래 본 뮤지컬 중에서 춤에 관한 한 모오락을 따를 작품이 없다. 프랑스 뮤지컬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진짜 무용수분들 등장할 때마다 왜 내 눈은 두 개뿐인가 싶고, 특히 2막의 '고통스러운 즐거움'은 무용수분들이 워낙 압권이라 메인 배우인 살리에리가 눈에 안 들어오는 지경이다. 부디 공연 끝까지 부상 없이 무사히 공연 마치시길.

- 아쉬운 점이라면, 앙상블 넘버가 좀 빈약하다는 것과 주인공인 모차르트를 제외하면 중요한 조연 캐릭터(특히 레오폴트와 살리에리)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야기로 보면 뮤지컬 모차르트!를 볼 때도 장면 나열식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모오락은 그 정도가 좀 더 심하다. 넘버 훌륭하고, 장면 안에서의 완성도는 높지만, 그게 유기적으로 연결된다는 인상은 받지 못했다. 일대기 뮤지컬의 한계인가 싶기도 하고.
주요 조연으로 등장하는 알로이지아나 콘스탄체는 비교적 캐릭터 설정이 잘되어있는데, 레오폴트나 살리에리에 대해서는 참으로 불친절해서, 쩔어주는 넘버 2개씩 던져주고 배우의 역량에 다 맡겨놓은 것 같더라. 이게 뮤지컬 모차르트!와 영화 아마데우스 사이에 모오락이 존재해서 생기는 일인지도 모르겠는데, 레오폴트는 그저 아들을 닦달하고 몰아세우는 존재로만 그려졌고, 살리에리는 충분히 입체적인 캐릭터가 될 수 있었는데, 좋은 넘버 2개 할당받고, 연기다운 연기는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

- 배우들 이야기를 해보면, 피맛골 연가에서 만났던 최현선 씨(세실리아 베버 역), 넌가끔에서 만난 최유하 씨(알로이지아 베버 역)를 제외하면 다 처음 만나는 배우들이었는데, 우선 주인공 모차르트 역에 김호영 씨(이후 호촤)는 연기도 넘버 소화력도 훌륭했다. 나는 사전에 영화도 영상도 안 보고 넘버 몇 개 들어본 게 전부였는데, 그때 사실은 모차르트 넘버에는 별로 끌리지 않았었다. 살리에리 넘버 2개만 줄곧 들었는데, 뮤지컬 보고나니 모차르트 넘버들이 이렇게 좋았구나 싶었다. 거기에는 호촤의 연기력과 넘버 소화력이 한몫했는데, 특히 내가 거들떠도 안 봤던 '말썽꾼' 넘버가 이렇게 좋을 줄이야. 이날의 베스트 송을 꼽자면 단연 '말썽꾼'과 '장미 위에 잠들어'를 들겠다. 특히 '장미 위에 잠들어'를 프랑스 버전으로 들었을 땐, 이렇게 피 토하는 곡인 줄 모르겠더니, 처절하고 피맺힌 절규에 저절로 눈물이 줄줄줄. 안 그래도 모차르트 빠순이라 감정이입 장난 아닌데, 모차르트 괴로워할 때, 괴롭힘당할 때, 그리고 죽어갈 때 가슴이 아파 미치는 줄 알았다. ㅠ.ㅠ 

알로이지아 역의 최유하 씨, 신비롭고 몽환적인 분위기 하며 자신의 외모와 재능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잘 아는 영악한 아가씨 역에 참으로 잘 어울리셨고, 원래도 빔밤붐 별로 좋아하는 넘버가 아니라서 난 이 곡보다 콘스탄체와 함께 부르는 일명 '자매송'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콘스탄체 역의 이해리 씨는 내가 다비치가 누군지도 몰랐던 사람이라, 그냥 뮤지컬 배우라고 하면 그렇다고 믿을 정도로 연기며 노래며 튀지 않고 잘 어우러져서 좋았다. 예쁘고 잘 나가는 여우 같은 언니 시기하는 동생 역에 딱이더라.

1막에 알로이지아가 있다면 2막엔 살리에리가 있다. 살리에리 역의 김준현 씨도 이 작품에서 처음 만났는데, 위에도 썼지만, 내가 모촤 넘버보다 살리 넘버에 더 기대치가 높았던 탓도 있고, 성남 음향이 별로 안 좋았는지 에코가 아니라 거의 메아리 치는 음향 듣다 보니 가사도 잘 안 들리고, 배우도 어느 목소리가 내 목소리인지 헷갈릴 법도 해서, 박자 틀린 게 그 탓인 것도 같고, 게다가 무대 위에 무용수분들에게 눈이 돌아가서 표정 연기 같은 것도 음미하기 어려웠고, 이래저래 나한테는 별로 인상이 남지 않았다. 그래서 보통은 1막보다 2막이 더 좋기 마련인데, 이날은 1막 보고 올라갔던 기대치가, 2막 보고 좀 다운되었다는.

이날 나한테 가장 인상적이었던 분은 난넬 역의 홍륜희 씨와 디바 역의 허진아 씨였는데, 1막의 '불가능을 생각해.' 넘버에서부터 뭔가 찌르르하고 울리는 느낌. 레오폴트의 신성우 씨(이후 신파파)와 듀엣인데, 오히려 홍난넬이 받쳐주고 끌어주는 인상이었다. 목소리가 꾀꼬리처럼 고우면서도 힘이 있어서 저음은 단단하고, 고음에서도 소리가 맑게 쭉 뻗어 올라가더라. 그리고 디바 역의 허진아 씨는 성악 하시는 분이 어쩜 그리 몸매도 날씬하시고 어여쁘신데, 목소리는 그야말로 천상의 목소리시고. '고통스러운 즐거움'에서도 하늘로 승천할 것 같은 소프라노 음색에 홀렸는데, 라크리모사 솔로 곡에서는 진짜 가슴이 무너져내리더라. 연기까지 끝내주시는 게 '승리의 희생양' 전에 파파게노, 파파게나 흉내 낼 때, 확연하게 다른 '뽜악~'을 들려주셔서 오오~ 성악가의 위엄!! 이랬다.

그 외에 깨알같은 웃음 담당 모오락의 마스코트, 로젠베르크 역의 성열석 씨, 노래가 듣고 싶었지만, 세실리아 베버에 아주 제대로 어울리는 최현선 씨, 레오폴트의 사랑하는 반쪽 안나 마리아 역의 장이주 씨, 이름을 못찾았는데, 광대 역을 연기하셨던 배우분 모두 최고였다.

+ 아, 의상 얘기도 빼놓을 수 없는데, 패션의 나라 프랑스답다고 할지. 다소 난해한 의상과 헤어스타일은 살짝 내 취향을 빗겨갔지만, 드레스는 예뻤고, '고통스러운 즐거움'에서 무용수의 의상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 의상 제작에 심혈을 기울이느라 소홀했는지, 콜로레도 대주교의 망토는 너무 싼 티가 나서, 재질만이라도 좀 묵직한 걸로 바꿔줬으면 싶더라.
엘리자벳 (Das Musical Elisabeth)

일   시 : 2012. 02. 08 ~ 2012. 05. 13
장   소 :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
관극일 : 2012. 04. 07 (토) 19:00
대   본 : 미하엘 쿤체, 작곡 : 실베스터 르베이
연   출 : 로버트 요한슨, 협력연출 : 박인선, 음악감독 : 김문정
캐스트 : 엘리자벳 - 김선영, 죽음 - 송창의, 루케니 - 박은태, 프란츠 요제프 - 윤영석, 소피 대공비 - 이태원, 청년 루돌프 - 전동석, 어린 루돌프 - 탕준상

- 전반에 걸쳐 음향 상태 좋았는데, 다만 카페 씬에서 아마도 신문 휘두르다 마이크 장치에 문제가 생긴 듯 튀는 소리가 좀 났지만, 지엽적인 문제였던 듯하고, 배우가 박자를 빨리 들어가거나, 놓쳐서 오케스트라와 합이 안 맞은 부분이 좀 있었는데, '엘리자벳, 문을 열어주오.' 넘버에서 선영 엘리가 '당신 어머니나 찾아가시죠.'를 반박 빨리 들어가서 잠시 당황했지만, 금방 맞춰 들어갔고, 2막의 '그림자는 길어지고 rep.'에서 송토트가 '뭘 망설이지'를 박자 놓쳐서 대사 처리했다. 그리고 앙상블 넘버에서 조금 어긋난 부분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무난했다.

이번 주에 김송은으로만 연속 세 번을 달리다 보니 사실 세 공연이 비슷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는 게 역시 이런 게, 무대 공연의 묘미겠지. 게다가 아래 보듯이 조연 배역도 더블에 트리플을 끼얹어서 요제프, 소피 대공비, 루돌프가 조합이 달라지면서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도 있고. 

                      엘리자벳/ 죽 음 /루케니/요제프/ 소 피 /루돌프/어린 루돌프
12. 04. 03(화) - 김선영/송창의/박은태/민영기/이태원/김승대/김효준
12. 04. 06(금) - 김선영/송창의/박은태/윤영석/이정화/전동석/김효준
12. 04. 07(토) - 김선영/송창의/박은태/윤영석/이태원/전동석/탕준상 

무엇보다 은케니가 6일 공연부터 깨알 디테일을 삭제하고, 살짝 톤다운 된 감이 있었는데, 그게 달리는 말에 채찍질이 아니라, 잘 달리는 말 고삐를 잡아채는 쪽인 듯해서 마음이 안 좋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은케니 특유의 번뜩임, 날카로움이 죽은 건 아니라서, 특히 이날 공연에서는 어둡고 차가운 분위기가 한층 업그레이드되는 바람에, 오히려 블랙 은케니로 제대로 각성해서 죽음보다 더 다크 포스 넘치는 루케니더라. (이건 또 이것대로 무대 광풍(@유리 가면)이라고 저격당하는 거 아닐는지ㅋㅋㅋ) 디테일 뺀 부분마다 무대 한편에서 조용히 형형한 안광을 빛내면서 바라보는 시선이 어찌나 얼음장인지. 웃음기 쫙 빼고 빈정거릴 때마다 주위 온도가 1도씩은 내려가는 것 같아서 으스스했다. 게다가 한껏 눌러놨던 걸 Milk에서 폭발시키듯이 터트리는데, 매 공연 이 넘버 만큼은 잡고 간다는 기합이 단단히 들어가서 레전 찍는 Milk지만, 참 귀신같다고 할지, 목소리 하나로 이만한 감동을 주는 배우가 흔치 않다는 감탄을 다시 하게 되더라.

- 이날 선영 엘리는 평소보다 진폭이 커진 연기를 보여 주셨는데, 여릴 땐 더 여리게, 강할 땐 더 강하게, 자신감 넘칠 때는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오만해지고, 무너져내릴 때도 더 처절해져서 그 격차에서 오는 낙차 폭 큰 연기가 눈을 뗄 수 없게 만드셨다. 개인적으로 이날 선영 엘리의 베스트 송은 하루도 안 좋은 날이 없었던 '나는 나만의 것'과 '내가 춤추고 싶을 때'였는데, '나는 나만의 것'에서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혀 상처를 받고, 앞날에 대한 절망감 속에 주저앉았던 한 가녀린 소녀가 다시 일어서며 내 인생의 주인은 나라고, 이렇게 살 수는 없다고 온 마음과 영혼을 걸고 맹세하는 모습이 전율을 불러일으킨다. 이게 옥엘리는 타고난 건강함(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이 베이스로 받쳐주다 보니 비장한 느낌이 좀 덜한데, 선영 엘리는 부서질 듯 가냘픈 몸매에 정신적으로도 굉장히 섬세하고 예민한 성정이라는 게 보여서, 그런 연약한 소녀가 강철같은 의지를 내보이는 간극이 참 짜릿하다.

그리고 여제로 다시 태어나 승리감에 도취해 부르는 '내가 춤추고 싶을 때'에서 보여주는 하늘을 찌를듯한 자신감이 또 대단해서, 송토트는 시작부터 전의 상실, '내가 너에게 자유를 주겠어.'가 아니라, 거의 '당신의 발 앞에 자유를 갖다 바치겠습니다.' 처럼 보이더라. 그래도 전에는 밀어서 안 되면, 당겨보자는 정도는 보여줬었는데, 이날 원체 선영 엘리가 강한 여제 모드여서;
선영 엘리가 이렇게 강한 여제로 노선을 잡으니까, 송토트도 이날 나쁜 남자 모드를 섞었는데, 그게 선영 엘리의 연기의 진폭이 워낙 크다 보니 크게 두드러지지 못하고, 또 극이 진행되면서 루돌프의 죽음, 엘리자벳의 죽음을 거쳐서 자기가 먼저 통곡할 것 같은 감정의 흐름과 좀 대치되는 감정선이라 어떻게 좀 일관성을 찾아줬으면 좋겠다.

- 황제의 자리에 있기엔 사람이 지나치게 좋아서 탈인 윤제프. 엘리에게 한눈에 반한 연기는 갈수록 설득력이 강해지면서 아주 윤제프 주위로 하트가 둥둥 떠다니는 게 보이는 듯하다. 재미있는 게, 엘리에게 청혼할 때 목걸이를 꺼내 보이는 장면에서 엘리가 '무거워~'하고 대답하면, 민제프는 그냥 농담으로 웃어넘기는데, 윤제프는 그러질 못하고 당황한다. 그러다 엘리가 웃으면서 '너무 아름다워'라고 하면 그제야 표정이 풀어지는데, 두 분 요제프가 서로 이렇게 다른 캐릭터라 보는 재미가 있다. 그리고 엘리와 소피가 고부 갈등을 일으켜서 중간에 끼어있을 때, 민제프는 '무슨 일이야? 왜 그래?' 가 먼저라면, 윤제프는 '괜찮아, 진정해'라고 토닥이며 안심시키는 행동을 보여줘서 좀 더 따뜻한 남편이라는 게 보인다. 심성이 따뜻한 윤제프는 누구에게도 상처입히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겠지만, 상냥함만으로는 사랑을 지킬 수 없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이날 특히 윤제프와 선영 엘리의 '행복은 너무 멀리에'에서의 화음이 참 눈물날 만큼 슬프고 아름다웠는데, 선영 엘리가 루돌프의 범선을 호수에 띄울 때, 마치 루돌프를 떠나보내는 것처럼 슬퍼하는 디테일이 추가되면서, 윤제프에 대한 마음이 아주 떠난 건 아니지만, 결코 예전처럼 돌아갈 순 없다는 거 같아서 더 안타까웠다.

- 요즘 연기에 물이 오른 동돌프가 이날 보여준 연기 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송토트의 연기에 맞춰서 시선 처리나 고개를 돌리는 속도 같은 걸 맞춰주더라는 거. 이게 류토트와 케미스트리가 절대적으로 좋다 보니, 연기 동선, 시선 처리, 음악에 맞춰 고개를 돌리는 타이밍 같은 게 다 류토트에 맞춰져 있어서, 송토트와는 시선을 맞추거나 할 때 합이 잘 맞지 않았는데, 그걸 동석이가 다 맞춰왔더라. 이게 가장 티가 나는 부분이 어디냐면, '그림자는 길어지고 rep.'에서 후주가 끝나가는 부분, 마지막에 일렉 기타가 촹~ 하고 마무리 지을 때, 류동 페어일 땐, 그 박자에 서로 딱 고개를 돌려서 시선을 맞추는데, 송토트는 그 부분에서 아예 시선이 허공을 배회할 때도 있고 그래서 합이 잘 맞지 않았는데, 동석이가 고개를 천천히 돌리는 걸로 바꾸면서 그나마 죽음하고 합이 좀 살아나더라. 동석이도 정말 발전하는 속도가 놀라운 것이 선배 연기자들 바짝 긴장해야 할 것 같다. 물론 아직도 무대 위에서 어색한 부분, 다듬어야 할 부분이 많지만, 성장형의 배우는 지켜보는 재미가 있으니까.

- 지난 주는 엘리자벳을 주 3회나 보는 강행군이어서, 사실 엘리자벳을 너무 많이 봤구나 싶기도 했고, 요즘 프롤로그에서 전율을 느껴보지 못한 게 참 오래 되어서 이제 좀 쉬어야 하나 했더니, 은케니가 저리 갑자기 변해서 그 모양을 또 지켜보라고 붙잡는구나. 뭐, 지방 공연 안 간다 생각하고 볼 수 있을 때 봐두는 게 나중에 후회하는 것 보다 나으니까.
엘리자벳 (Das Musical Elisabeth)

일   시 : 2012. 02. 08 ~ 2012. 05. 13
장   소 :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
관극일 : 2012. 04. 06 (금) 20:00
대   본 : 미하엘 쿤체, 작곡 : 실베스터 르베이
연   출 : 로버트 요한슨, 협력연출 : 박인선, 음악감독 : 김문정
캐스트 : 엘리자벳 - 김선영, 죽음 - 송창의, 루케니 - 박은태, 프란츠 요제프 - 윤영석, 소피 대공비 - 이정화, 청년 루돌프 - 전동석, 어린 루돌프 - 김효준

- 여러 번 재관람 하다 보니 생긴 폐해이긴 한데, 정적을 깨는 바이올린 소리와 함께 막이 열리고 바닥에 누워있는 은케니를 보고 있으면, 실제로는 있지도 않은 그 앞에 장면이 저절로 머리에서 떠오른다.
죽어서도 안식을 얻지 못한 채, 매일 밤 끊임없이 과거의 체험들이 폭풍처럼 밀려와 그를 몰아치고, 벗어나려고 미친 듯이 날뛰다가 지쳐서 마침내 자포자기 상태가 되어 뻗어버린 불쌍한 시지프스가 거기 누워있는 것 같다. 그리곤 허공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번쩍 뜨는 그 모습은 그 자체로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광경을 보는 듯하다. 시작부터 관객에게 스산한 긴장감을 느끼게 하는 이 짧은 순간, 일상의 관객들이 곧장 비일상의 극 속으로 몰입할 수 있도록 끌어들이는 기선제압으로 참 귀신같이 짜인 프롤로그라고 생각한다.

엘리자벳은 역사적 사실에 판타지를 섞은 팩션이라 프롤로그의 역할은 그만큼 더 중요한데, 사전지식이 없는 관객들에게 가장 중요한 엘리자벳, 죽음, 루케니라는 캐릭터를 이 장면에서 제대로 보여주지 않으면, 이후 전개가 받아들여지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프롤로그에서 은케니가 보여주는 루케니는 살아있을 때보다 죽은 상태인 지금, 더욱더 엘리자벳을 증오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엘리자벳의 동상을 쓸어보는 동작 같은 거 보면, 한 여자의 이야기를 백 년씩이나 늘어놓고 있다 보니 미운 정도 정이라고 붙었을지 모르겠지만, 그게 결코 호의적인 감정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엘리자벳을 암살한 것도, 그녀가 거기 나타났기 때문에 죽였던 거지, 무슨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죽여놓고 보니 그게 죽음의 계획이었다는 걸, 자신도 죽고 나서야 알게 된 게 아닐까. 그리고 매일 밤 잠들지 못한 채 시달리는 이유도 다 죽음이 꾸며놓은 계획에 자신은 거든 것뿐이었건만, 괘씸죄 적용인지, 자신에게만 안식을 주지 않는 죽음에게 적대감을 내비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죽음과 엘리자벳 배틀에서 보여주는 '저 여자가 도대체 뭐라고!!'라는 감정이 그런 추측을 불러일으킨다.

- 이날 송토트가 창법에 변화를 줘서, 저음을 묵직하게 눌러 부르던데, 그게 살짝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들었지만, 뭐 이건 내 취향이 꾸며낸 목소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 거니까. 하여간 지난 3일 공연 때보다는 확실히 힘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불러줘서 일단 만족했다. 죽음의 노선이 어떻든 간에 필멸하는 존재들의 지배자이기 때문에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에서도 힘이 느껴지는 그런 목소리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송토트의 연기 노선에도 변화가 있었는데, 이게 선영 엘리와 만나서 이런 노선이 된 건지 싶기는 한데, 멜로 노선이 약해지면서 인간 남자 같은 분위기가 많이 희석되었더라. 그런데 또 어떤 장면에서는 간혹 감정 과잉이 좀 보여서 갸우뚱하게 하는 면이 있는데, 아직 노선 정리가 진행 중인가 싶었다. 차라리 멜로 노선일 땐 무난하게 받아들여지던 어린 루돌프와의 만남, 청년 루돌프의 죽음, 마지막 '베일은 떨어지고'에서의 괴로움이 이날 송토트가 잡은 서늘한 죽음의 감정선과 좀 미묘하게 어긋나서, 그게 좀 더 다듬어지면 좋을 것 같다.

- '당신처럼'에서 선영 엘리는 평소보다 한두 살 더 어려진 씨씨를 연기하셨는데, 이게 소녀 시절뿐만 아니라, 극 내내 평소에 느껴졌던 연령대에서 고르게 어려지셔서, 심지어는 '아무것도'에서는 지금 내가 옥엘리를 보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이게 감정선까지 이해가 가는 노선이었으면 좋았겠지만, 뭐라고 할지, 나는 계속 미묘하게 선영 엘리와 어긋나는 느낌이라서 전에 없이 심드렁한 상태였다. 선영 엘리의 연기나 노래가 모자랐다기보다는 워낙 그동안에 좋은 연기, 감정선을 보여주셔서 그만큼을 기대하다 보니.

특히 인형극 씬에서 선영 엘리는 아예 인형극에 맞춰 연기하는 걸 포기하고, 정극에서 하듯 연기하시는데, 그게 인형극 연기가 제일 자연스러운 윤제프에 정화 소피, 인형 같은 앙상블이랑 전혀 어울리지 못하고 너무 혼자 동떨어지셔서, 오히려 엘리자벳을 바라보는 시선을 한 발짝 물러서게 만드시더라. 그렇게 심리적인 거리가 생기고 나니까 엘리자벳에게 이입하기가 어려워진데다, 크리티컬은 루돌프의 도움을 거절하고 추도식으로 이어지는 감정선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는 게 컸다.

이날 베스트 연기자를 꼽으라면 주저없이 동돌프를 꼽을 수 있겠는데, 아프면 레전드 찍는 특이체질 동석이가 3월 말부터 계속 레전드를 갱신하고 있어서. 감기 때문에 목소리에 비음이 섞여서 원래 비음 싫어하는데도 그림자는 길어지고 rep.에서 그 비음은 참 매력적으로 들리더라. 그리고 감기 걸린 상태로도 저리 쩌렁쩌렁 쩔어주는 동석이 성대는 진짜 대단하다. 그리고 연기가 아주 신이 내렸는데, 29일에 봤던 어린아이로 퇴행에서 더 나아가, 아픈 아이 특유의 칭얼거림이랄지, 엄마 아파 죽겠어요, 나를 좀 봐줘요~ 하는 오라가 아주 강하게 뿜어져 나오는데, 그걸 외면한 선영 엘리에 어떻게 공감할 수 있겠는가. 아니, 31일에 선영 엘리가 보여줬던, 자기 눈물에 익사할 것 같은 극한의 우울한 상태였으면 그래도 이해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날 선영 엘리는 내가 얼마나 힘겹게 황실을 벗어났는데, 너 때문에 그 지옥에 발을 들일 수는 없다고 네가 나를 좀 이해해달라고, 루돌프에게 호소하고 있었다. 그랬으니 추도식에서 울부짖으며 루돌프를 부르는 엘리자벳에게 어떤 동정심도 생기지 않더라.

- 어쩌다 보니 계속 태원 소피를 연속으로 만나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정화 소피도 그동안에 창법이 참 많이 달라지셨는데, 위에도 언급했지만 내가 꾸며서 내는 목소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다 보니, 정화 소피가 일부러 군인처럼 굵고 단호하게 내는 목소리나 벨라리아에서의 급속하게 늙어서 탁해진 목소리가 좀 힘겨웠더랬다.
연기 디테일도 좀 달라지셨는데, 목소리만큼 무서운 시어머니 포스가 확 늘어서 저런 시어머니라면 씨씨가 아니라, 3년 동안 황후 수업받은 헬레네라도 학을 띠겠다 싶더라. 그리고 음모 씬에서도 대신들을 향해 마구 퍼부어대시는 게, 뭐랄까 태원 소피는 대신들의 무능을 질책하는 느낌인데, 정화 소피는 자기 분풀이처럼 보여서 당하는 대신들이 좀 더 불쌍하게 보이는 효과가. 그런데 이 장면에서 두 소피 분이 좋은 부분이 또 각각 달라서, 라우셔 추기경이 윤리적인 입장에서의 반대를 정치적으로는 탁월한 선택이라고 말 바꿀 때는, 태원 소피의 포스 넘치는 '그래.'가 좋고, '묻겠노니!' 할 때는 정화 소피의 톤이 더 마음에 든다.
아, 그리고 라우셔 추기경이 성호를 긋는 디테일을 새로 추가하셨는데, 진짜 사제처럼 보여서 좋았다.

- 이날 은케니는 평소대로 모든 넘버 다 잘 불렀는데,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특이하게 '마담 볼프의 살롱'이었다. 아니, 평소에도 이 장면에서 은케니는 참 귀엽다 싶기는 한데, 삼케니를 다 찍고 보니, 볼프 여사와 제일 케미가 좋은 게 뜻밖에 은케니였다는 게ㅋㅋㅋㅋㅋ. 난 당연히 최케니가 제일 케미가 살지 않을까 했는데, 이 장면에서 볼프 여사와 커플 댄스를 찐하게 추는 건 은케니 뿐이더라. 그래서 그런가, 다른 두 케니는 그런 느낌이 덜한데, 은케니는 볼프 여사의 새끼 기둥서방귀염둥이 같은 분위기가ㅋㅋ 그리고 볼프 살롱 소개 전에 부르는 '궁정 발레단의 우아한 쁠리에와 오페라의 아리아를~' 부분 '오페라의 아리아'를 부분에서 제대로 성악 발성으로 불러줘서 좋더라.

이날 은케니의 디테일 중에 사라진 게 꽤 많아서 진짜 은케니가 디테일을 빽빽하게 채워넣기는 했었구나 싶었다. 우선 황제의 집무실에서 탄원자의 아들 죽을 때, 죽천들과 같이 한쪽 팔을 들어 올리고, 기각한다 할 때 목 긋는 거 없어지고, 그냥 지켜보다 손인사 던지고 퇴장하는 걸로 바뀌었다. 그리고 '계획이란 소용없어' 에서 엘리자벳 손등 볼에 가져다 대는 거 (난 이거 개인적으로 머슴 삼돌이가 이때 아니면 언감생심 별당 아기씨 섬섬옥수 언제 느껴보겠느냐는 거 같아서 좋아했다. ㅠ.ㅠ) 빠지고, 조각배 씬에서 뱃사공 하면서 연인들의 이야기를 엿듣는 제스춰가 좀 약해지고, 대사 톤도 전체적으로 살짝 톤다운 되었는데, 가장 아쉬운 건 오를레앙 공을 살해하려고 "몇 번을 말해!!" 버럭 하는 부분이 없어졌다. 이거 프롤로그의 "정말로 원했다니까!!" 버럭과 대칭을 이루는 수미쌍관의 구조에 딱 들어맞는 거였는데, 이건 다시 살려주면 좋겠다.

- 동석이가 감기 걸린 게 걱정인 게, 엘리 팀은 어쩐지 감기는 키스를 타고 옮겨다니는 것 같아서. 요즘 날씨도 변덕스러운데 부디 배우분들 모두 감기 조심하시길.
엘리자벳 (Das Musical Elisabeth)

일   시 : 2012. 02. 08 ~ 2012. 05. 13
장   소 :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
관극일 : 2012. 04. 03 (화) 20:00
대   본 : 미하엘 쿤체, 작곡 : 실베스터 르베이
연   출 : 로버트 요한슨, 협력연출 : 박인선, 음악감독 : 김문정
캐스트 : 엘리자벳 - 김선영, 죽음 - 송창의, 루케니 - 박은태, 프란츠 요제프 - 민영기, 소피 대공비 - 이태원, 청년 루돌프 - 김승대, 어린 루돌프 - 김효준

- 먼저 음향팀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시작한다. 29일, 31일 공연 때, 마이크 지직거리는 음향 사고가 지속해서 발생했는데, 그게 과연 해결되었을까 했는데, 그 문제가 말끔히 해결된 데다가, 정말 얼마 만에 느껴보는 깨끗한 음향인지. (아니, 이게 사실 다른 공연에서는 일상이었지. 하다못해 동굴 음향이라던 유니버설도 이거보단 나았던 듯;) 이게 블루스퀘어 공연장 자체 문제인지, 하여간에 엘리자벳 공연 보면서 음향에 신경 안 쓰고 관극한 거 진짜 오랜만이어서, 부디, 앞으로도 이 상태를 계속 유지해주시길 간곡히 부탁하는 바이다.

- 그러나 음향 상태가 이렇게 좋았고, 이날 베스트 컨디션이었던 태원 소피 외에 다른 배우들도 다들 제 컨디션이었어서 목 상태에 대한 걱정 같은 것도 없이 참 쾌적한 관극 환경이었음에도 극 자체에 대한 만족도는 별로 높지 않았는데, 송토트가 목 상태가 안 좋거나 컨디션이 안 좋은 것도 아니었는데, 소리가 참 안 나와서. 마이크 볼륨 문제가 아니라, 소리에 힘이 없는 상태랄까. 목소리가 작은 것과는 다른, 뱃심이 들어가지 않은 소리처럼 들려서, 뭔가 김이 빠진 느낌이었다. 그게 그나마 회복된 건 2막의 '그림자는 길어지고 rep.'에서였는데, 송토트가 다른 넘버는 몰라도 이 곡만큼은 확실히 잡고 간다는 느낌인 게, 지난 공연에서도 베스트 송이 '그림자는 길어지고 rep.'이었거든. 송토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승돌프, 동돌프 가리지 않고 목소리의 합이 좋고, 자신이 우세를 점해야 하는 부분에서 확실하게 질러주니 그 임팩트도 상당하고, '이것이 운명~'할 때 보니까 호흡도 꽤 길게 유지하던데, 이렇게 할 줄 아는데 왜 다른 넘버에선....이라는 아쉬움이 좀 남았다.

이날 송토트는 선영 엘리를 손에 넣기 위해 하나씩 덫을 놓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큰딸 소피를 데려가면서 '넌 황제를 어둠 속에 빠뜨리고 있어'라고 반 협박했지만, 선영 엘리는 '아니야!'라고 부인하고 남편과 같이 떠났다. 아이의 양육권을 빼앗기고 모성을 박탈당한 선영 엘리가 지치고 힘들 때, 이리 오라고 유혹하지만, 역시 아직 생의 의지를 버리지 않은 엘리자벳에게 거절당하고, 그리고 결국 엘리자벳을 가장 많이 닮은 루돌프에게 손을 뻗치는데, 참 이때 표정이, 너한테까지 손대지 않았으면...너는 히든카드다 하는 게 보인다. 그래서 던진 수가 말라디 씬이랄까. 결혼한 여자라면 가장 당하고 싶지 않을 최악의 남편의 배신 - 바람 핀 것도 모자라 몹쓸 병까지 옮아온 - 이라면 엘리자벳이 자신의 품에 올 거라고 믿었는데, 이 강인한 여자는 그것마저 '내 자유의 시작'이라며 날아가 버렸다. 그래서 송토트는 비로소 히든카드로 밀어뒀던 루돌프에게 적극적으로 손을 뻗게 된 느낌이다. 내키지 않는 선택일지라도. 그런데 루돌프를 죽이고 나서 괴로워하는 연기가 좀 긴 호흡으로 가는 바람에, 이어지는 추도식과 꽤 오버랩 되는데, 그 부분은 조금 절제해주면 좋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내가 송토트에게 바라는 죽음의 모습은 서늘하고 우아한 죽음, 흥망성쇠를 반복하는 세상을 조용히 관조하며 자연의 섭리대로 세상을 이끄는 죽음이다. 그러다 한 여인을 만나서 변해가는 그런 죽음. 그런데 이 노선도 초월적인 절대자 노선만큼이나 균형 잡기가 참 미묘하고 어렵구나 하는 걸 이날 공연을 보고 깨달았다. 하여간 이 죽음이라는 캐릭터는 어떻게 노선을 잡든지 배우에게 요구하는 게 무척 까다롭구나 싶다.

- 이날 공연에서 베스트 컨디션을 자랑한 건 태원 소피였는데, 안 그래도 카리스마 넘치시는 분이 목 상태까지 쩌렁쩌렁하시니까 이건 뭐 체자레 보르지아의 여자 버전인가 싶었다. 윤제프와 태원 소피일 때, 윤제프는 비교적 고분고분한 아들에서 엘리자벳에 대한 사랑 때문에 어머니와 연을 끊는 것도 불사한다는 느낌이라면, 민제프는 그런 어머니의 카리스마에 눌려있지만, 그래도 내가 황제인데 라는 자의식이 계속 충돌하고 있는 느낌이다. 황제의 집무실에서 아들 구명하는 어머니의 탄원을 들을 때, 윤제프는 그게 어머니의 뜻에 거역하려는 것보다는 원래 동정심 많고, 인간미가 넘치는 성격이라 가슴 아파하는 쪽이고, 민제프는 내가 힘이 좀 더 강해서 내 뜻을 펼칠 수만 있다면 나는 성군이 될 수 있을 텐데 라는 쪽에 더 가까운 것 같다.

하여튼, 이렇게 여군주에 가까운 태원 소피다 보니 자기 밑에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오만한 권력자의 향기가 느껴지면서, 며느리를 고르는 기준이 "엉덩이도 튼실하군" -> "네 이빨을 보여다오." 로 이어지는 며느리 소 취급하는 게 위화감 없이 이어질 따름이고. 그러니까 저 단어 선택도 황실 여인이 쓸 법한 말이 아니라, 황실 유일한 남자의 언어라는 느낌이다.
음모를 꾸밀 때도 그 쟁쟁한 대신들 다 손 위에 올려놓고 주무르시고, 가장 약해진 벨라리아에서 마저 자신에게 반항하는 황제에게 맞서 '갈라놓을 테다!!'라고 일갈하시는 목소리에 위압감이 가득한 여제이신데, 엘리자벳이 황제에게 끼친 영향력을 과소평가한 게 실수셨지. 그러나 태원 소피가 엘리자벳을 과소평가했기에 엘리가 살아남았지, 안 그랬으면 진작 자객을 보내든, 독살이든 하셨을 거 같기는 하다.

- 언제나 믿고 보는 선영 엘리. 소녀 시절의 사랑스러움이나, 나는 나만의 것에서 보여주는 한 편의 드라마 다 좋았고, 이날 제일 좋았던 건 '아무것도' 와 '당신처럼 rep.'이었는데, 이 두 넘버에서 엘리자벳의 심리적 황폐함이 드러나지 않으면, 그냥 분에 넘치는 자리와 어울리지 않는 이기적인 여자로 끝나니까. 특히 '아무것도'에서 반디쉬 부인을 보고 '내가 저 여자였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가사가 배부른 투정쯤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최악이고.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 엘리들은 선영 엘리도 옥엘리도 이 어려운 넘버를 각자의 방식으로 캐릭터에 녹여서 굉장히 잘 소화해내서, 머리로는 황후가 되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저 자리에 앉아서....라면서도 그 절벽 위에 서 있는 막막함, 절박함을 호소하는 엘리자벳을 보고 있으면 얼마나 절망적일지 이해가 된단 말이지.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도움을 청하는 루돌프를 거절하는 장면과 추도식에서의 오열이 설득력이 있게 되는 거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엘리자벳이 섬세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여린 영혼의 소유자라기보다는 상당히 터프하고 강인한 여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건 엘리자벳이 스스로 내린 선택에 대해 어떤 결과일지라도 끝까지 끌어안고 살아갔기 때문이다. 다만, 요제프에 대해서는 '억지로 황후가 됐'다며 끝내 안되는 건 영원히 안된다고 내쳤지만. (차라리 월계수가 될지언정 아폴론의 여인이 되지는 않겠다는 다프네답다.)

- 전반적인 극에 대한 만족도와 상관없이 이날 가장 좋았던 장면은 밀크였는데, 은케니 목 상태도 근래 들어 가장 좋았던 거 같고, 이 장면에서 새삼 루케니가 점하고 있는 높이와 민중들의 관계에 대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엘리자벳이라는 극에서 높이와 인물의 관계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죽음과 엘리자벳, 루돌프 그리고 루케니만이 다른 인물들과 다른 높이의 공간을 차지한다. 죽음의 다리, 계단 위 등등. 그중에서도 루케니에게만 허용된 높이의 공간은 인형극 씬에서의 인형술사로서의 위치와 밀크에서 탈것이다.

이 밀크에서 탈것의 높이가 참 절묘한 게, 탈것에 올라탄 루케니는 군중의 손에 닿지도 않을 만큼 저 위에 있는 것도 아니고, 손을 한껏 뻗으면 닿을 정도의 높이라는 것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다는 건 아래에 있는 사람들보다 좀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고, 멀리 내다볼 수 있는 통찰력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래에 있는 민중은 자기들이 볼 수 있는 만큼밖에 볼 수 없다. 그래서 이 장면에서는 동정하는 척하며 비웃고 선동하는 은케니와 함께, 은케니가 던지는 말 한마디에 우왕좌왕 부화뇌동하는 민중들에 대한 싸늘한 시선 같은 것도 느껴진다. 사실과 진실을 구분하지 못한 채 루케니의 의도대로 이리저리 휘둘리고, 그러니, 루머에서 비롯된 분노가 혁명으로 이어질 리가 없지. 엘리자벳이라는 극 전반에 흐르는 냉소가 이 장면에서도 이렇게 진하게 느껴지는구나 싶더라.

그리고 이건 은케니일 때 더 두드러지기는 하는데, 횡적인 움직임이 일반적인 무대에서 종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캐릭터가 루케니와 엘리자벳인데, 낙하와 상승이라는 일상적이지 않은 움직임이 인물에 위태로운 긴장감을 부여한다고 할까. 밀크에서 다른 케니들은 계단을 걸어 내려오지만, 은케니는 뛰어내리면서 그런 종적인 움직임에 역동성을 부여하고, 극의 마지막 공중에서 내려오는 밧줄이야말로 루케니 종적인 움직임의 화룡점정이다. (죽음이나 루돌프는 사선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이건 단계를 밟는다는 의미, 시간의 흐름과 연관성이 있어서 속도감이 필요한 종적인 움직임과는 거리가 있다.)

엘리자벳은 극 초반에 외줄 타기에서 추락하는 장면에서 인물의 위기를, 1막 '나는 나만의 것 rep.'에서 상승하는 움직임으로 인물의 자신감과 위세를 보여준다. 그리고 연출상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침몰하는 배 씬인데, 난 이 장면이 정말 연출이 잘 됐다고 생각하는 게, 요제프가 엘리자벳을 찾으면 엘리자벳이 떠오르고 쭉 정점을 찍고선 가라앉는데, 이게 마치 타이타닉에서 두 동강 난 배가 정점을 찍고 가라앉는 그림과 겹쳐지면서, 엘리자벳이라는 한 인물의 성장과 몰락에 합스부르크를 결합하여 그 흥망성쇠를 한큐에 보여주는 장면으로 썩 훌륭한 연출이라고 생각한다.

- 극의 마지막으로 갈수록 은케니는 냉소적인 해설자의 모습에서 광기에 찬 루케니로 무게 중심이 기울어가는데, 침몰하는 배 씬에서부터 암살을 준비하는 장면에서 보여주는 불안정한 연기는 극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생생한 루케니의 모습으로 다가오는데, 그저 정보로서 저장된 '기억'이나 '사실', '이야기'가 아니라 직접 손에 피를 묻힌 '체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밧줄에 목을 거는 은케니는 자신이 이번에도 영원한 안식을 얻는 대신, 내일 밤이면 목소리에 의해 다시 일으켜질 시지프스의 운명임을 아는 듯 미소 짓는다. 하여간 그냥 오를레앙이나 살해했으면 이 고생 안 당했을 것을, 계획이란 소용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