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곤의 선물

일   시 : 2012. 02. 23 ~ 2012. 03. 11
장   소 : 명동예술극장
관극일 : 2012. 03. 07 (수) 19:30
연   출 : 구태환, 원작 : 피터 셰퍼
캐스트 : 에드워드 담슨 - 정원중, 헬렌 담슨 - 김소희, 필립 담슨 - 이동준, 쟈비스 - 고인배, 담신스키 - 이영석, 카티나 - 박선욱, 코러스 - 박정길 조유미 박병주 최성식 노상원 방승빈 김민선 강보미
줄거리 :
‘우상들’, ‘특권’ 등 탁월한 희곡을 남긴 천재 극작가 에드워드 담슨은 48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테러리즘에 대한 강박관념이 드러난 마지만 작품 < IRE >의 엄청난 파문과 실패 이후, 두 번째 아내이자 평생의 동반자였던 헬렌과 그리스에서 은둔생활을 하던 그가 변사체로 발견된 것이다. 몇 달간 슬픔에 잠겨있던 헬렌은 어느 날 편지를 받는다. 28세의 젊은 연극 교수인 필립 담슨의 편지였다.
그는 에드워드의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아들로, 아버지의 전기를 쓰겠다고 헬렌에게 만나줄 것을 간곡하게 부탁한다. 헬렌은 그의 청을 거절하지만, 그는 막무가내로 그녀의 집을 찾아온다. 헬렌은 필립에게 꼭 전기를 쓸 것이라는 맹세를 듣고 나서야 에드워드와의 지난날의 엄청난 얘기를 들려주기 시작하는데... [출처 > 플레이DB]

- 피터 셰퍼 원작에 명동예술극장에서 올리는 작품에 대한 무한 신뢰에 따라 보러갔다. 역시 명동예술극장에서 올리는 극은 일단 한 번 봐줘야한다는 생각이 이번 관극을 통해 다시 한번 확신으로 바뀌었다. 다음 레퍼토리가 '봄날'이던데, 포스터 분위기만 봐서는 '효'에 대한 이야기 일 것 같아서 조금 망설여지기는 하는데 (눈물 쏟을까봐) 하여간, 이번 선택도 옳았으므로.

- 에드워드 담슨이 주인공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헬렌 담슨이 주인공이더라. 헬렌 담슨 역을 연기한 김소희 씨가 진정한 주인공이었고, 가장 압도적인 연기력을 보여주셨다. 등장 인물 중에 가장 이성적이라고 생각했던 여인이 점점 에드워드의 광기에 침식당해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전율이더라. 기립 박수보다 더한 찬사를 보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에 비해 에드워드 담슨 역의 정원중 씨는 웃겨서는 안 될 부분에서 우스웠고, 불분명한 딕션으로 빠르게 내뱉는 대사는 반 이상 못알아 듣겠고, 게다가 중요한 논쟁 부분에서 몇 번이나 대사를 씹으시고. 진짜 커튼콜 순서상 김소희 씨 다음에 나오시니 어쩔 수 없이 기립박수를 보냈다만, 자리에 도로 앉고 싶은 마음과 얼마나 갈등했는지. 이토록 긴장감 넘치는 꽉 짜여진 극 안에서 유일한 구멍이셨다. 다음에 재연 할 때 다시 안 봤으면 좋겠더라.

- 그 외 배우분들은 다들 무난하게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소화해내셨고, 김소희 씨와 더불어 박수를 보내고 싶은 분들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의 코러스 분들. 현대극이지만, 그리스 비극의 정서를 담뿍 담아낸 이 연극에 비장미와 생동감을 불어넣어준 분들이다. 온몸에 회칠을 해서 마치 대리석 조각처럼 보인는 몸을 하고, 때로는 무용과 같은 몸짓으로 고곤을 표현하고, 때로는 천둥같은 목소리로 신의 말을 전하기도 하는데 등장할 때마다 그 위압감이 말도 못할 정도였다. 그리고 정말 백번 칭찬해도 모자를 부분이 뭐냐면 코러스의 목소리가 정말 한 사람의 목소리처럼 싱크로가 딱딱 맞게 흘러나와서 중구난방으로 흐르지 않았다는 것. 노래는 박자에 맞추기라도 할 수 있지만, 여럿이 같이 말하는 대사는 단어와 단어 사이의 간격, 단어에 주는 강세 어디서 숨을 쉬고 어디서 내뱉느냐에 따라 소리가 흩어질 위험이 훨씬 더 큰데, 정말 얼마나 연습을 했을지, 진짜 남자 여자 목소리가 딱 한데 모아지면서, 여럿이 말하고 있는데도 한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들려서, 남자도 여자도 아닌 그 목소리가 주는 기괴함과 이질감이 신의 목소리라고 그렇게 느껴졌다. 커튼콜 인사도 어찌나 절도있고 우아하고 차갑던지. 다들 무용을 하셨던 걸까. 고곤을 형상화 하는 장면에서 손동작이 진짜 메두사 머리의 수천마리 뱀이 꿈틀거리는 것 같아서 소름이 돋는데, 하여간 너무 멋진 연출이라 감탄이 절로 났다.

- 무대는 뒤쪽을 높여서 앞쪽으로 기울어진 경사면이었는데, 그렇게 만든 이유가 1막 마지막, 2막의 마지막에 드러난다. 그리고 조명을 참 적절하게 잘 써서, 단순한 무대지만 그 무대가 전혀 비어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워낙 김소희 씨의 연기가 좋아서 그 분만 쳐다보느라 다른 건 사실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더라;

- 1막을 보면서는 어쩐지 '레드'가 좀 떠오르더라. 예술하는 사람들이 각자의 신념이 부딪치고 상호 보완작용을 거치는 그런 일련의 과정이 보이면서. 그러나 에드워드와 헬렌이 완전히 단절되는 순간부터 이 극은 뒤틀리고 부서지고 거칠어진다.
증오를 복수로 풀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에드워드와 그보다 나은 지성인이기에 사적인 복수는 허용할 수 없다는 헬렌의 신념이 계속해서 부딪히고 날을 세우고 서로를 상처입히고. 끝난 줄 알았던 전쟁이 사실은 아직도 계속 진행중이라는 끔찍한 현실을 들이밀며 극은 막을 내린다.

에드워드는 끝내 정신 승리 속에 웃고 있을지 모르지만, 난 헬렌이 에드워드보다 더 나은 사람이기를, 그리고 더 강한 사람이기를 응원해본다.
엘리자벳 (Das Musical Elisabeth)

일   시 : 2012. 02. 08 ~ 2012. 05. 13
장   소 :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
관극일 : 2012. 03. 04 (일) 19:00
대   본 : 미하엘 쿤체, 작곡 : 실베스터 르베이
연   출 : 로버트 요한슨, 협력연출 : 박인선, 음악감독 : 김문정
캐스트 : 엘리자벳 - 옥주현, 죽음 - 송창의, 루케니 - 박은태, 프란츠 요제프 - 윤영석, 소피 대공비 - 이태원, 청년 루돌프 - 김승대, 어린 루돌프 - 이준서

- 일주일에 두번만 보자던 결심도 깨뜨리고 결국 오늘도 달려간 이유의 8할은 윤제프, 태원 소피, 승대 루돌프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안정적인 (세상에 김선영 씨가 아니라, 옥주현 씨에게서 "안정"을 기대하는 날이 오다니) 엘리자벳과 비주얼만큼은 포스터에서 툭 튀어나온 것 같은 송토트 조합이 나하고 은근 상성이 맞는다고 할까. 그래도 참 비싼 티켓값과 요근래 들려오는 잦은 오케 미스와 음향 문제 때문에 몇번을 고민하다가 어쩐일로 앞자리가 툭 나와서 이런 가라는 계시구나 싶어 또 계획에 없는 지출을 했으나, 결과적으로 오늘 공연을 못봤으면 또 두고두고 후회했을 테니까 ㅠ.ㅠ

- 옥엘리도 회차 거듭할 수록 점점 더 좋아지는 게 눈에 보이는데, 특히 자신만의 해석으로 만들어낸 엘리자벳이라는 캐릭터가 단단해져가는 게 보여서 그게 참 좋았다. 무엇보다, 옥주현 씨 회차에선 노래에 대한 불안감은 싹 잊어도 된다는 것도 큰 메리트고.
옥엘리는 어린 씨씨일 때, 참으로 천진난만하고, 건강하고, 밝은 성격의 천둥벌거숭이다. 시를 쓰고, 말을 탄다는 건 사실 되게 안 어울리는 조합인데, 옥엘리의 성격까지 덧붙여지면 시를 쓴다는 것도 그 나이대 사춘기 소녀다운 감수성의 표현 정도로 보인다. 정말 진지하게 시를 좋아하는 것 처럼 보인다기보다는, 자기가 시를 쓴다는 사실 자체가 뭔가 낭만적이니까 쓴다는 느낌. 그래서 그녀의 이런 밝고 명랑한 성격이 황실에 시집가면서 어떻게 꺾이고 굴절되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면서 비극성을 키운다.

- 죽음에 대해서, 오늘 송토트는 지난 18일과 또 다른 노선으로 변신하셨다. 이분 매 회차마다 노선 변경하시는 거 아냐? 굳이 비교하자면 17일의 우수에 찬 토트의 변형에 가깝다고 할까. 송토트가 잡은 죽음은 "차갑고 냉혹한 나를 잃은 채 난 정말 그녈 사랑했어"에 가장 잘 어울리는 죽음이다. 아니, 저 상태로만 놓고 보면, 과연 송토트가 차갑고 냉혹한 적이 있었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 죽음이다. 오히려 자비롭고 연민에 가득찬 죽음에 가깝다. 그래서 송토트는 그전에는 어땠을 지 모르겠지만, 엘리자벳을 만나 자신의 근본부터 완전히 변해버린 그런 죽음이다.

- 이게 가장 잘 드러난 장면이 엘리자벳과 죽음이 처음으로 만나는 장면에서다. 류토트와 선영 엘리일 때, 류토트가 먼저 엘리자벳의 얼굴을 쓰다듬고 자리를 뜨면 가지마요 왕자님~ 이렇게 진행되는데, 이날은 옥엘리가 먼저 송토트의 얼굴을 쓰다듬는 거다. 그러면 송토트가 마치 그 동작을 따라하는 것처럼 옥엘리의 볼을 쓰다듬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은케니가 "와우- 사랑의 시작" 이라고 한껏 빈정거린다. 그리고 자리를 뜨는 송토트는 미련 철철 흘러넘치는 엘리자벳의 노래를 들으면서 마치 첫사랑에 막 빠진 것 같은 표정으로 손을 뻗지만, 가족들에 둘러싸여 멀어지는 엘리자벳을 보며 체념하는 표정으로 페이드 아웃. 확실하게 사랑에 빠진 죽음이다.

- 엘리자벳이 다른 황실 사람들과 달리 순진하고, 그래서 사람 말을 한 번 꼬아서 듣지 못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런 성격이 불러온 비극이 바로 요제프와의 결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요제프는 한 눈에 반해서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줄 기세였지만, 황후가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생각도 없고, 각오도 없이 그저 눈앞에 나타난 잘생긴 왕자님(황제지만)이 첫눈에 반했다며 결혼하자니까 별 고민도 없이 좋다고 승락한 이 철없는 아가씨. (아니, 윤제프가 너무 훤칠하게 잘생기셔서 나같아도 덥썩 그 손을 잡았을 거 같기는 하다만은;)

- 결혼식 당일까지도 옥엘리는 정말 아~무 생각이 없다. 그저 예쁜 드레스를 입고, 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고, 파티를 연다는 게 즐거울 뿐. 여기서 옥엘리의 디테일이 돋보이는 장면이 있는데, 아마 왼쪽 구역에서만 보이지 싶다. 소피와 막스가 서로 자신의 아들, 딸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마음 상해하며 각자 왼쪽과 오른쪽으로 가는데, 왼쪽으로 돌아나가는 소피와 그쪽에서 돌아나오는 황제 부부가 마주치게 된다. (중앙에선 앙상블들이 이 혼사를 두고 입방아를 찢는 중) 여기서 소피에게 인사를 할 때 옥엘리가 반갑게 웃으면서 '이모'라고 부르면, 옆에서 윤제프가 살짝 눈치를 주면서 '어머니'라고 정정해주면, 옥엘리가 살짝 계면쩍은 표정으로 '어머니'라고 인사하고 중앙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앙상블은 '동화같은 이야기~ 황후가 된 소녀'를 부르고 있는데, 그 상황이 참으로 절묘하게 떨어진다.
즉, 옥엘리는 황실에 시집 온다는 게 어떤 건지 모르고, 그저 자신을 사랑한다는 남자와 살고, 이모가 시어머니니까 잘 해주시겠지 라고 막연하게 짐작했을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자신이 어떤 고생을 할지 이런 건 전혀 떠올리지도 못하고, 왈츠를 추는데, 어우 여기서 윤제프는 진짜 사랑에 빠진 새신랑 그 자체라서 눈빛에 하트가 둥둥 떠다녀. 옥엘리가 뭘 하든 마냥 사랑스러워 어쩔 줄을 모른다. 파격적인 댄스를 선보여서 주위 사람들이 흉을 봐도, '정말 활기차지 않아요? 허허' 뭐 이런 시선.

- 그렇게 행복하기만 할 것 같았던 엘리자벳의 결혼 생활이 어떻게 흘러갈지 앞날을 암시하듯 죽음이 등장하는데, 오르골 소리가 나면서 모든 등장 인물이 정지한 상태에서 옥엘리가 송토트를 발견하고 반가워하기까지 하더니, 여기서 정말 철없는 어린 소녀처럼 송토트 앞에서 '웨딩 드레스 입은 내 모습, 예쁘죠?' 라는 듯 한바퀴 빙 돌아보인다. 그러다 송토트가 적극적으로 손을 뻗으니 그제야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고 도망가고, 그런 엘리자벳을 바라보고 송토트는 엄청 상처를 받는다. '뭐야, 쟤. 지가 먼저 유혹해놓고, 이제와서 배신하는 거임?' 자존심 구긴 표정이 진짜ㅋㅋㅋ
엘리자벳을 통해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게 된 죽음은, 이제 그녀의 결혼으로 질투와 집착이라는 감정까지 얻게 되었다. 또한 이제까지 느낀 적이 없는 배신감으로 고통스러워질 수 있다는 것도.
그런 감정의 변화가 묻어나는 '마지막 춤'이라서 나는 송토트의 마지막 춤도 꽤 마음에 들더라. 초반에 부드럽고 낮은 저음으로 젠틀하게 부르다가 분위기 딱 반전되면서 날카롭고 강렬한 목소리로 엘리자벳에 대한 집착을 드러내는 부분이 좋더라. 그리고 옥엘리와 춤 추는 부분도 둘이 상당히 케미가 좋아서 위험스러운 분위기도 나고, 좀 격하게 돌리는 바람에 베일이 떨어졌는데, 그런 것도 뭔가 평탄하지 않은 결혼 생활을 암시하는 것도 같고.

- 옥엘리가 황제의 아내가 된다는 게 이런 건가 깨닫게 되는 첫날 밤이 밝은 다음날 아침. 태원 소피가 손뼉을 쳐서 깨우는데, 옥엘리는 너무너무 어리둥절한 상태라, 이게 무슨 일인지 사태 파악을 전혀 못하고 있더라. 그래서 '얘야 늦잠은 안된다'라고 하면 선영 엘리는 '왜요?'라며 조금은 반항적으로 대꾸하는데, 옥엘리는 뭐가 뭔지도 모르고 있일단 '네'라고 대답하는 느낌이다. 그리고 요제프가 좀 더 쉬라고 했어요 변명할 때도 시어머니가 아니라 이모에게 하는 듯 살갑게 대꾸하는데, 거기서 완전 찬물을 뒤집어 씌우는 것처럼 시어머니 입에서 잠자리 얘기가 나오고, 그제야 서서히 이게 아닌데 하는 걸 깨달아간다. 급기야는 믿었던 요제프마저 가재는 게편이라고 자기 엄마편을 드니, 고립무원. 여기서 드디어 옥엘리는 자신이 뭘 몰랐던 건지, 뭘 각오했어야 하는 건지를 비로소 알게된다.

그래서 이어지는 '나는 나만의 것'이 이토록 애절하게 다가온 적이 없었는데, 저렇게 천진난만하고 건강했던 한 소녀가 생각없이 황실에 시집와서 이제야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부르는 후회의 노래, 순진하고 철없는 소녀에서, 이제 나를 지킬 사람은 나뿐이라고, 하룻밤만에 웃자라는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선영 엘리가 이 한 곡으로 엘리자벳이라는 드라마를 보여준다면, 옥엘리는 소녀 씨씨가 여인 엘리자벳으로 어떻게 변화해가는지 보여준다.

- 인형극으로 보여주는 두 사람의 결혼 생활. 여기서 은케니가 목소리를 전보다 훨씬 묵직하게 눌러서 부르는데, 저음에서도 이렇게 윤기 자르르 흐르는 목소리가 나오는구나 새삼 감탄했다. 그리고 확실히 옥엘리 윤제프의 마리오네트 연기는 그게 동작뿐만 아니라, 목소리에까지 묻어나와서 뭐랄까 국어책 읽는 연기를 뮤지컬식으로 풀어내면 이럴 거 같다는 그런 대사톤과 창법으로 불러줘서 인형극 느낌이 확 산다.

- 헝가리에서 큰딸 소피를 잃은 다음에 왼편 리프트에 송토트가 등장하는데, 이럴수가, 이 남자 괴로워하고 있다! 거기다 옥엘리가 송토트를 쳐다보면서 입모양으로 '어째서'라고 하면서 원망스럽게 쳐다보는데, 송토트는 그런 원망의 눈빛을 받는게 괴롭지만, 네가 소중하게 여기는 걸 떼어 놓아서라도 너를 나에게 오게 할 거다라는 의지가 보이는 거다. 그런데 옥엘리가 그리 만만한 여인이 아니라, 보통은 요제프가 와서 쓰러진 엘리자벳을 일으켜서 데려가는데, 옥엘리는 '너는 황제를 어둠속에 빠뜨리고 있어'라는 부분에서 분개해서 벌떡 일어서더라. 그바람에 모자 떨어지고; 이미 엘리가 일어서 버려서 윤제프가 모자를 집어주지도 못하고 그대로 퇴장.
그렇게 무대에 남겨진 초록색 모자는 카페씬에서 장대웅 배우가 슬쩍 집어서 의자 위에 올려놨는데, 그 의자에는 또 나중에 은케니가 올라서서 혁명지도자 루돌프 얘기를 해야하는데 싶었더니, 1년이 지났어~ 할때 앙상블 자리바꾸기 하면서 누가 테이블 위에다 올려놨더라.

- 오늘의 어린 루돌프는 준서였는데, 세 어린 루돌프 중에 준서가 제일 애기같은 느낌이 든다. 몸집도 제일 작아보이고, 오늘 뒷머리가 좀 들떠있었는데, 그걸 태원 소피가 쓰다듬어줘서 손주 귀여워하는 할머니 느낌 들어서 좋더라. 뭔가 목소리는 냉정하고 단호한데, 코트 여며주는 손길이나 바라보는 눈빛 같은건 정화 소피보다 더 따뜻한 할머니 같은 느낌이다. 태원 소피는 정화 소피에 비해서 황실 여인이라는 느낌이 훨씬 더 강하게 드는데, 그래서 그 냉정함의 종류도 정화 소피와는 다른 것 같다. 훨씬 더 정치적이고, 여장부같다고 할까.

- 엘리자벳이 요제프에게 최후통첩을 선언하는 장면에서 윤제프는 정말 지쳐서 사랑하는 아내의 품에 안기고만 싶은 유약한 황제의 이미지 그대로다. 저렇게 애처롭게 매달리는데 그걸 뿌리치는 옥엘리가 독해보일 정도. 사실 나쁜 건 윤제프이건만. 그렇게 남편을 보내고 자신도 괴로워하는 엘리자벳 앞에 등장한 송토트. 그런데 이 장면에서 죽음이 엄청 유혹적으로 등장해야하는 것도 알겠고 그런데, 그게 꼭 침대 위여야 했을까. 남편은 저리 매몰차게 내치고, 다른 남자를 침실에 불러들이다니...라는 분위기가 너무 생생해서; 송토트 비주얼도 한 몫하고, 또 노선이 로맨스 노선이다보니, 이 장면에서 제일 현실 입갤된다는 게 함정.

- 밀크는 매번 전율이기는 한데, 이날의 밀크는 28일보다 더 좋아져서 완전 감동. 난 고음에서 소리가 가늘어지는 건 뭐 어쩔 수 없지않나, 고음에서도 성량이 쩌렁쩌렁하다면 좋겠지만, 그게 쉽지는 않겠지...라고 안타깝지만 알아서 자체 타협하고 듣는 일이 많았는데, 은케니가 고음에서도 저렇게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내줘서 얼마나 가슴 시원하던지. 진짜 앙상블의 최대 출력을 뚫고 들려오는 그 목소리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게 너무 좋다.

- 1막의 피날레 나는 나만의 것 rep.에서 윤제프 절절한 목소리에 막 감정이입하며 듣다가, 하이라이트 조명 받으며 옥엘리 딱 등장하는데, 정말 숨이 막히도록 아름답더라. 물론 이 장면에서 엘리자벳은 최고로 아름다운데, 윤제프 목소리에 감화가 되어서 그런가 다른 때보다 훨씬더 눈부시게 아름다운 거다. 게다가 선영 엘리는 그 문을 좀 빨리 걸어나오는 감이 있는데, 옥엘리는 그 자태를 충분히 감상하라는 듯 텀을 좀 두고 움직여줘서 좋았다. 그리고 이날 옥엘리의 연기 노선이 좀 달랐던 게, 전에는 이 장면에서 보여준 감정이 나는 아름다워~ 다 내 앞에 무릎 꿇으라~ 라는 천상천하 여왕님(?)의 모습이었는데, 등장할 때 어쩐 일인지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있고, 표정도 당당하고 위엄있는 그런 표정이 아니라, 약간 울듯 말듯한 그런 표정. 윤제프가 당신을 위해 나는 황제의 의무도 책무도 버리고, 나 스스로를 배신했다고 하는 그 고백을 듣고 마음이 조금 약해진 듯 보였다. 하지만, 자유를 찾겠다는 결심은 흔들리지 않아서, 다가오는 윤제프를 막아세우는데, 표정은 여전히 미안해하는 표정이라 그래도 아직 애정은 남아있구나 하는 느낌. 여기서 옥엘리가 윤제프를 향해 한번, 송토트를 향해 한 번 '나를 이해해주고 존중해줘'라고 하는데, 역시 두 남자의 사랑을 받는 한 여자의 이야기라고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는구나 싶더라. 옥송윤의 삼중창도 굉장히 듣기 좋았는데, 그건 윤제프의 힘이 컸다. 어디에도 잘 어우러지는 하모니를 이루는 그런 목소리를 가지신 듯.

- 2막의 오프닝인 Kitsch 부터 Eljen까지는 은케니의 개인기 시간. 첫공 때부터 음을 가지고 논다 싶었던 넘버였는데, 이젠 분위기 타서 덩실덩실 춤도 추고 엘젠에서의 트럼펫과 고음 대결은 참 언제들어도 감탄스럽다.

- 이어지는 '내가 춤추고 싶을 때' 넘버에서 관록의 김류 페어가 서로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는 느낌이라면, 옥송 페어는 옥엘리가 패왕색 짙은 전투적인 엘리라서, 송토트가 거기에 말리면 백전백패할 게 뻔한 조합인데, 송토트는 거기에서 아예 전투 자체가 성립이 안되게 만든다. 손바닥도 부딪혀야 소리가 난다고, 한쪽에서 손바닥을 치려고 덤벼도 다른 쪽에서 그 손을 잡아버리면 소리가 날 수 없잖은가. 옥엘리는 난 혼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고, 날 내버려두라고 호기롭게 뿌리치지만, 이 끈질긴 남자는 몇 번을 차이고도 계속 다가가서 설득하고 결국 넌 내게 돌아올 수 밖에 없다고 뿌리쳐도 뿌리쳐도 엘리자벳을 감싸 안는다. 이렇게 모든 걸 감싸안는 죽음이라는 노선을 잡은 송토트를 칭찬해주고 싶고, 이런 까닭으로 나는 옥엘리 - 류토트 조합에 대해서 궁금증이 더 깊어져 갈 뿐이고;;

- 어린 루돌프와 송토트와의 케미스트리도 뭐 갈수록 스킨쉽이 늘어서, 송토트는 엘리자벳을 사랑해서, 그 아들도 귀여워하는 그런 분위기가 난다. 준서가 또 노래를 참 잘 부르는 게, 이 부분에서 아이가 동요 부를 때 나오는 그 특유의 곱게 잘부르려는 그런 느낌이 전혀 안든다. 목소리 자체도 맑고 투명한 느낌이라 애처로움이 배가 되는데, '가지마세요~'하고 죽음을 붙잡을 땐, 저 어린 것이 얼마나 외롭고 무서웠으면, 낯선 남자가 나타나 '친구'라고 하니까 앞뒤 없이 매달릴까 싶어 안스럽고, '왜 날 혼자 두나요~' 하고 목소리가 점점 사그라드는데, 엘리 이 못난 어미! 소리가 절로 나오더라.

- 엘리자벳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계락을 꾸며서 남사스러운 질병에 걸린 옥엘리. 이 장면에서 옥엘리는 진짜 불같이 화를 내고 절망하는데, 자기 몸을 더럽다는 듯이 마구 털어내는 동작이 남편에 대한 배신감만큼 자신에 대한 자괴감도 커서 자존감에 깊은 상처를 입은 게 보인다. 여기서 옥엘리는 믿었던 남편에게 배신 당한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모순적이면서도 자기파괴적인 감정이 끓어올라 완전히 무너져 내린다. 이제 건강하고 순진했던 씨씨는 그녀 안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성병의 감염은 육체 뿐만아니라, 그녀의 정신에도 염증을 일으킨 것이다.

- 그렇게 도피하듯 황궁 생활을 뒤로하고 방랑을 시작하고서도 엘리자벳은 결코 자신이 원하는 자유를 손에 넣을 수 없었고, 모든 게 다 부질없는 발버둥이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어 슬퍼하며 절규하는 노래가 정신병원 씬에서의 '아무것도'다. 아무리 맞서 싸우고 노력해도, 도망가도 뒤돌면 항상 거기엔 커다랗게 입을 벌린 끝없는 심연이 기다리고 있다. 무서운 건 그 공허는 엘리자벳이 가지고 있는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 송토트와 동돌프의 그림자 송이 의외로(;) 케미스트리도 살고 괜찮았어서, 송토트 - 승돌프 그림자 송도 기대했는데, 기대한만큼 정말 듣기 좋았다. 우선 승돌프가 잡은 디테일 중에 참 마음에 들었던 게, 죽음의 등장을 알리는 전주가 깔리면서 독수리 문장이 위로 올라갈때, 다가온 죽음을 느끼고 심장을 부여잡는 거. 죽음이 보이기만 하는 게 아니라, 느끼기도 한다는 걸 보여줘서 좋더라. 그리고 '길어지는 그림자, 인간은 절대 볼 수 없지.' 하는 부분에서 죽음이 루돌프를 압박해서 무릎꿇리는 데, 승돌프가 한 번 씩 반항하듯 일어서고, 그러면 송토트가 다시 억누르고 하는데, 이게 엘리와 죽음간의 기싸움의 연장처럼 보여서, 승돌프는 역시 옥엘리 아들이구나 싶더라. 하여간 이 훈훈한 비주얼의 두 미남자가 한 샷에 들어오니 이건 여기가 천국인가 싶고, 송토트와 승돌프의 목소리도 꽤 잘어울려서 만족했다.

- 당신처럼 rep.에서 옥엘리는 뭐랄까 괴팍하고 고집센 노파가 되버렸다는 인상이 강하다. 선영 엘리처럼 정신이 병들었다기 보다는 인간불신에 자기혐오가 겹쳐져서 세상이 역겹고, 억지로 황후가 되어서 억울하고, 그때 그런 선택을 한 자신의 어리석음이 뼈아파서 어디가서 호소할 수도 없으니 죽은 이를 붙들고 하소연이나 하는 불쌍한 신세. 그러나 옥엘리는 자기연민에 빠져있다가도, 스스로 불쌍하게 여기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고, 그렇다고 자기기만을 시도하기엔 현실이 시궁창이라는 악순환에 빠져있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아들이 어떤 심정으로 도움을 청하는지도 모르고 차갑게 내치는 거다.

- 승돌프의 마이어링 왈츠를 보다보면 승돌프가 정말 몸을 잘 쓰는 걸 너무너무너무 감동적으로 느낄 수 있다. 원하는 대로 몸이 움직여준다는 느낌. 죽천이 휘두르면 휘두르는대로 움직여주고, 총을 잡으려고 점프할 때도 정말 필사적으로 뛰어오르는 게 느껴지고, 하여간에 몸에서 힘을 빼고 무대위에서 어색하지 않게 자유롭게 움직인다는 게 어떤 건지 보여준다. 총 쏘고 쓰러질 때도 정말 툭 쓰러져서 사실적이고.
여기에서도 송토트는 상당히 괴로워하는 표정을 짓는다. 엘리자벳을 사랑하게 되면서 이 죽음은 상당히 복잡한 감정을 습득해 나간듯. 모든게 계획대로~ 라는 류토트와는 사뭇 달라서 신선한 죽음이다.

- 루돌프 장례식에서 옥엘리의 연기가 사실 오늘은 좀 불필요하게 친절한 구석이 있어서 좀 그랬던게, 직접적으로 '미안해.'라고 대사를 치니까 뭔가 되게 밍숭맹숭한 느낌이더라. 선영 엘리가 목소리와 표정, 동작만으로 감정을 전달하는게 너무 좋았어서 더 비교가 되는 것도 있기는 할테지만, 감정의 발산을 대사에 기대지 않았으면 좋겠다.
죽음에게 데려가달라고 애원하는 엘리자벳을 바라보는 송토트의 표정이 어딘가 좀 묘한 구석이 있었는데, 그게 뭐랄까 루돌프까지 데려가면 엘리자벳이 나한테 넘어오겠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만들어놓고보니, 엘리자벳의 비참한 모습이 어, 내가 바란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라는 표정이었다.

- 전에 요제프는 확실히 윤제프 취향인데, 옥엘리와의 케미는 민제프가 더 나았다고 여겼다. 그런 내 고정관념을 깨부시듯 이날 윤제프와 옥엘리의 듀엣은 하나같이 훌륭한 하모니를 이루었는데, 행복은 너무 멀리에 넘버에서도 윤제프가 굉장히 든든하게 잘 받쳐주셔서 얼마나 좋았는지. 특히 같이 부르는 가사에서는 뒤에서 튀지않게 든든히 받쳐주다가, 가사가 갈리면서 '부디 날 용서해 사랑해 내곁에 있어줘' 할때는 강하게 호소하는 목소리로 치고 나와서 목소리의 강약에 따라 전달력이 달라지면서, 요제프의 일편단심 순애보가 잘 드러나서 좋았다.

- 침몰하는 배 씬에서는 윤제프와 송토트의 케미는 그닥 별로 였지만, 윤제프의 단호한 음성이 완전 '상남자'라 얼마나 멋지던지. '네가 감히!'라던가 '그 입 닥쳐라.'하는데 아주 위엄이 뚝뚝 묻어나서, 망해가는 제국의 황제라도 역시 황제는 황제구나 싶었다.

- 극의 마지막 루케니에 찔린 옥엘리를 데리러 내려온 송토트는 어쩐 일인지 이제야 원하던 여인을 손에 넣게 되었는데, 너무너무너무 괴로워하고 있어서 신선하더라. 한번은 손에 들어온 것을 차버렸다가, 기다림이 길어지니까 못 기다리겠어서 루케니에게 칼자루를 쥐어주고는 이제와서 내가 저 여인을 죽게했구나 슬퍼하는 죽음이라니.
손을 뻗어 이제 너에게 안식과 자유를 주겠노라 하고, 엘리자벳이 힘겹게 이승의 짐을 벗어던지고 달려가 죽음과 포옹하는데, 워낙 로맨스 페어여서 사실은 비극적인 이 결말이 참으로 해피엔딩처럼 보였다. 그게 내 주변만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이제서야 간신히 둘이 만났어~' 뭐 이런 분위기가 퍼져나가더라.
그런데, 여기서 또 재밌었던 건 기껀 엘리자벳을 손에 넣었는데, 키스하기 전에 망설이더라, 그러니 망설이는 토트 대신 옥엘리가 적극적으로 대쉬해서 키스하는 그런 형국. 그렇게 이승의 끈을 완전히 놓아버린 옥엘리를 끌어안고 송토트의 표정이 참 환희에 찬것도 아니고, 후회도 아니고, 뭐라 말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이었는데,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송토트는 로맨스 가이.

- 의도적으로 은케니 이야기는 최대한 빼고 후기를 썼는데, 사실 2월28일 공연보다 나는 이날의 은케니가 더 레전드였어서, 아마 좋았다는 말 이상 나올 것 같지 않아서;; 진짜 이대로면 잡을 수 있는 은케니 회차는 전부 잡을 기세. 제발 냉정해~ 냉철해~(feat. 소피)
엘리자벳 (Das Musical Elisabeth)

일   시 : 2012. 02. 08 ~ 2012. 05. 13
장   소 :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
관극일 : 2012. 03. 02 (금) 20:00
대   본 : 미하엘 쿤체, 작곡 : 실베스터 르베이
연   출 : 로버트 요한슨, 협력연출 : 박인선, 음악감독 : 김문정
캐스트 : 엘리자벳 - 김선영, 죽음 - 류정한, 루케니 - 박은태, 프란츠 요제프 - 민영기, 소피 대공비 - 이정화, 청년 루돌프 - 전동석, 어린 루돌프 - 김효준

- Again 2.28 캐스트에서 어린 루돌프만 효준이로 바뀐 공연. 
오늘 A구역 시야방해석 처음 앉아봤는데, 진짜 가격대비 만족도는 꽤 좋은 자리기는 하더라. 특히 루케니 핥기에 참 좋은 좌석이다. 시야 방해받는 장면이 몇 안되는 건 은혜로운데, 음향은 균형이 좀 안 맞아서, 앙상블 떼창 같은 건 별 차이가 없는데, 솔로곡의 피아니시모 부분이라든가, 속삭이듯 대사치는 건 소리가 많이 죽는다.

- 오늘 지휘자는 부음감이었는데, 그게 영향이 미친 건지 오늘 오케스트라가 초반에 박자를 놓치거나 밀려서 참으로 쓰릴한 순간이 여러번 있었고, 금관 삑사리가 너무 잦아서 슬펐고, 항상 완벽하다 했던 앙상블 마저 뒷통수를 치며 '신이시여, 지키소서 우리 젊은 황제'에서 박자를 놓쳐서 헝클어졌다. 허나, 벌써 한 달 가까이 진행된 공연이니, 이런 실수 몇으로 무너질 공연은 아니었고, 오히려 이후에는 앙상블 기합이 바짝 들어서 어느 때보다도 멋진 합일된 소리를 들려주셨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연 3인방(루케니 남주 맞;;)이 너무너무너무 잘해줘서 전체적으로 공연 자체는 참 좋았다.
선영 엘리는 28일 보다 목상태도 훨씬 좋았고, 류토트는 이제 안정적인 궤도에 올라섰다는 게 느껴졌고, 은케니는 목상태가 좀 안 좋았는지, 조심스럽게 부른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늘 어떤 기준 이상은 해내니까.

- 신이시여, 지키소서, 우리 젊은 황제에서 앙상블의 뼈아픈 실수 이후에 진짜 기합이 바짝 들어갔다고 느꼈던 게, '모든 질문은 던져졌다.' 넘버에서. 안그래도 이 넘버 부를 때는 모든 앙상블이 가장 화려한 예장을 하고 등장하는데, 다들 표정부터가 비장하고, 소리가 합이 딱딱 맞아서, 전에도 좋았지만, 평소보다 더 좋은 소리가 나오더라. 그리고 왼쪽에 앉으니까, 엘리자벳과 요제프가 왈츠 출 때, 안보는 척 하면서 흘끔 보는 거, 엘리자벳의 파격적인 댄스(;)에 깜짝 놀라고, 세모눈 뜨고 비웃는 앙상블들 깨알같은 표정 연기가 정말 잘보여서 재밌다. 게다가 엘리 앙상블엔 왠 미녀들이 이리 많은지, 아주 제대로 눈 호강.
그리고 이런 분위기는 계속 이어져서 '황후는 빛나야해' 넘버를 부르는데, 평소에도 마치 군대 조직 보는 느낌이 들었던 시녀분들이 군기가 바짝 들어가 있어서, 소피와 함께 엘리자벳을 전방위에서 압박하는데, 이정화 소피는 진짜 며느리를 쥐잡듯이 볶아채서, 질리게 만든다. 황후는 빛나야해 넘버 자체가 마치 황실에 시집 온 여자는 그저 예쁘장한 장식이고, 애낳는 기계 취급이라, 상당히 위압적인 느낌을 주는데, 거기에 안무도 참 예술이더라. 시녀들이 손으로 왕관을 형상화 한 안무를 추는데, 보기에 아름답고 무척 우아한 동작인데, 황실에 시집 왔으니 왕관의 무게를 감당하라는 책망으로도 보인다.

- 오늘 제일 신선했던 건 어린 루돌프 효준이. 어쩐 일인지 계속 준서, 준상이만 만나서 오랜만에 효준이를 만났는데, 그동안 연기 디테일이 좀 늘었더라. 1막에서 엘리자벳 방문 앞에서 소피가 등장하니까 손에 든 장난감배 뒤로 숨는 거 보고 어라? 했는데, 시녀장이 배를 받아가니까 앞을 막아주던 게 사라져서 당황하고. 그러더니, 엄마 못 만난다고 하니까, 제발요~ 하고 소피 손을 붙들고 너무 간절하게 매달리는 거다. 효준이가 준서나 준상이에 비하면 덩치도 있고, 목소리도 막 아기같지는 않아서 참 씩씩한 루돌프네 했는데, 나름대로 저런 디테일을 넣어온 건가 싶어서 기특했다.

- 선영 엘리를 보면서 가끔 왜 신혼 초에 죽음을 불러들이지 않았을까...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었다. 시어머니는 첫날부터 달달 볶아댔지, 아이도 빼앗기고, 남편도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시녀들 조차 자기 편이 없고, 궁정 생활에 낙이라고는 없었을 그녀가 어떻게 결혼 생활 4년을 버텼는지 의문이다. 그녀의 타고난 성정을 생각해보면 죽음을 불러들여도 몇 번을 불렀을 것 같은데.

그래서 어쩌면 저 4년이 엘리자벳이 황후로서 살아보겠다고 자기 나름대로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희생했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더 이상은 이렇게 살다 진짜 죽을 거 같아서 요제프에서 최후통첩을 내밀게 되었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그 최후통첩은 선전포고가 아니라, 내가 살려면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다는 그녀의 처절한 절규인 셈이다.
이 장면에서 선영 엘리는 모든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는 모습인데, 그렇게 그동안 눌러둔 반동으로 엘리자벳 인생에서 죽고싶다는 생각이 가장 강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 장면에서 토트는 그 어느 장면에서보다 섹시하고 강렬하게 유혹적이다. 그나마도 간신히 그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던 건, 외모에 대한 자신감이 한 몫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이 뒤에 바로 연결되는 Milk - 황후께선 외모를 가꾸신다 - 나는 나만의 것 rep. 가 하나의 서사를 이룰 수 있느냐 없느냐는 저 앞에서 엘리자벳의 감정선과 각오, 결심이 얼마나 납득이 되느냐에 따라 달라는 것 같다.

웬만한 각오가 아니면 거절하기 힘든, 죽음의 강렬한 유혹도 뿌리치고, 엘리자벳은 "내 힘으로 자유로워질 거야."라고 선언했다. 그러니 엘리자벳이 외모를 가꾸는 데 목숨을 걸었다는 말은 그냥 비유가 아니라, 진실 그 자체였을 지도 모르겠다. 즉, 우유를 달라고 부르짖는 민중의 절박함과 동등할 정도로 엘리자벳의 외모에 대한 집착도 절박하지 않았을까. 뭐, 외모를 무기로 자유를 얻겠다는 그런 생각을 품었다는 거 부터가 정상은 아니지만.
(사족이지만, 외모를 가꾸는 데 신경을 안 쓰는 나같은 사람은 저렇게 살 수 있는 조건이 되도, 저건 사치가 아니라, 고문일 뿐. 머리 손질에만 6시간이라니, 그걸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려나;)

병사가 전쟁터에 나서기 전에 훈련을 하고, 무기를 손질하는 것 처럼, 몸매를 가꾸고, 머리 손질을 하고, 갑옷을 두르는 것처럼 드레스를 차려입은 엘리자벳. 일명 초상화 씬은 그렇게 새로 태어난 엘리자벳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난 여기서 선영 엘리가 변신한 외모에 걸맞게 좀 더 위엄있는 목소리와 태도를 보여주면 좋겠다. 오늘의 연기는 28일 보다 더 단단해지고, 좋아졌지만 아직 내 성에 안차서;

- 은케니는 오늘 목상태가 살짝 안 좋은 것도 있어서 그랬는지, 대사도 평소보다는 톤 다운 되어있어서, 전보다는 덜 미쳐있는 것 같더라만, 그런 생각하고 있으면 여지없이 눈동자를 떼구르르 굴리면서 광기를 내비치는데, 좀 더 악동같은 면이 늘었다고 할까. 왜 아기들은 조용하면 어디선가 꼭 사고친다고 하지 않나? 그런 느낌이더라. 폭풍 전의 고요같고. 마지막에 목 매달 때, 전에는 어떤 표정이었는지 기억이 잘 안나는데, 이날 씩 웃는 게 딱 체셔 고양이 떠오르더라.

+ 엘리자벳이라는 인물이 사실 감정이입할 여지가 많은 것도 아니고, 티켓값도 비싸서 회전문은 안 돌거야...라고 방심한 댓가를 치루는 거 같다. 피맛골연가, 햄릿, 그 패턴의 반복일 것 같아 두렵다. 당췌 학습 효과가 없는 거냐 ㅠ.ㅠ
서툰 사람들

일   시 : 2012. 02. 11 ~ 2012. 05. 28
장   소 : 동숭아트센터 소극장
관극일 : 2012. 02. 29 (수) 20:00
연   출 : 장진
캐스트 : 유화이 - 예지원, 장덕배 - 류덕환, 멀티맨 - 홍승균
줄거리 :
남의 집 털어가는 도둑질도, 도둑놈 맞이하는(?) 집주인 노릇도 영~~ 서툰, 그와 그녀의 하룻밤 대소동!
직업은 도둑이지만 이 집 저 집 배려해주며 친절하게(?) 털어주는 서툰 도둑 장덕배, 훔쳐갈 것도 없는 자기 집에 도둑이 든 게 안타까워 비상금 위치까지 알려주는 오지랖 넓은 서툰 집주인 유화이.
절대 친해질 수 없을 것 같은 이 둘은 얼굴만 마주치면 티격태격! 옥신각신! 급기야는 서로 친구가 되기로 하고. 때마침 아래층 남자 ‘김추락’은 분신자살 소동을 벌이고, 유화이를 짝사랑하는 ‘서팔호’, 화이의 유별난 아버지 ‘유달수’까지 찾아오며 상황은 점점 묘하게 꼬여 가는데…!! [출처 > 플레이DB]

- 예지원 씨, 사...사,사,사랑스럽습니다~~~

- 리턴 투 햄릿을 재미있게 봐서, 장진 감독의 또 다른 연극 서툰 사람들도 기대를 하고 갔다. 게다가 내가 참 좋아하는 배우들, 예지원 씨, 류덕환 씨가 나온다니, 어머, 이건 꼭 봐야해!! 했는데, 티켓 오픈하고도 배우들 스케줄 공지가 안 떠서 살짝 식었지만, 하여간 한 번은 볼만한 연극이긴 하더라. 장진 식의 개그 코드가 맞는 사람에겐 추천. 서툰 도둑과 물정 모르는 여자가 나오는 소동극이라고만 알고 보러갔는데, 이거 장진식의 로맨틱 코미디였다.

- 일단 극중 25살이라는 유화이라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예지원 씨. 원래 본인 나이를 잊을 정도로 귀엽고, 맹하고, 그러면서도 때로 강단있는 그 캐릭터를 어찌나 사랑스럽게 연기해주시던지. 진짜 이 연극은 예지원 씨를 위한 극이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이 언니가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남 주인공 쪽으로는 시선도 잘 안 가더라.
원래 예지원 씨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올드 미스 다이어리'에서 보여준 4차원에 사는 사랑스러운 푼수떼기의 이미지가 이 연극 서툰 사람들에서 십분 활용되고 있었는데, 그보다 좀 더 어리고 순진한 버전이랄 수 있겠다. 줄거리에 나온 내용이 극의 전부이고, 장진 극의 특성처럼 대화중에 적절히 섞어놓은 개그 포인트가 잘 맞는 사람은 빵빵 터질 수 있겠지만, 안 맞는 사람은 좀 유치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 장덕배 역의 류덕환 씨도 오버하는 법 없이 서툴어빠진 도둑을 열심히 연기하고 있었는데, 때로 오버해야 할 부분에서 어색함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 같더라. 아니, 위화감 없이 장덕배를 잘 연기하고 있었지만, 배경음악으로 Kiss me darling 나오면서 갑자기 판타지 분위기로 들어가는 순간 (그러니까, 넥스트 투 노말에서 보면, 매든 박사가 갑자기 다이애나의 환상속 롹스타로 변신하는 그런 장면 처럼) 그런 장면에서 배우가 쑥쓰러워 하면 보는 관객은 손발이 오그라드는 정도가 아니라, 눈을 감고 싶어집니다. 자신감있게, 내가 세상에서 제일 섹시한 남자라는 기분으로 연기해주면 좋겠다.

- 시종일관 웃음이 터져나오는 가운데, 이상하게도 멀티맨이 등장하는 순간 극이 루즈해지는 건 개선할 필요가 있어보인다. 두 남녀 주인공이 만들어 놓은 밀도 높은 긴장감을 멀티맨이 확 다 흐트러놓는 식이라서, 여타 대학로 소극장의 멀티맨과 차별화(?) 된다고 할까나. 굳이 왜 등장시켜야 했는지도 사실 의문이다. 뻔한 로맨틱 코메디로 흐를 수 있는 극에 갑자기 현실을 들이미는 것도 뭔가 찬물 끼얹은 것처럼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그런 걸 노리고 집어넣은 거라면, 계획대로 성공했음요. 그래놓고 마무리는 또 급 판타지스럽게 지었지;

- 결국 이 이야기는 사람과 사람사이에 어울림이 '서툰'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로운 섬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기러기 아빠, 아내와 사별하고 딸은 독립해서 혼자 사는 아빠, 고작 사진 한 번 보고 홀딱 반했다며 다짜고짜 결혼하자고 달려드는 노총각, 독립은 했지만 막상 살아보니 상상했던 것보다 고된 독신 여성, 그리고 그 처지가 어땠기에 도둑질을 업으로 삼았을까 싶은 도둑놈. 모두 참 외로움이 뚝뚝 묻어나는 캐릭터들이다. 그래서 결말이 판타지로 느껴졌던 건지도 모르겠다.

+ 동숭아트센터 소극장은 처음 가봤는데, 다른 대학로 소극장들에 비하면 비교적 쾌적한 관람 환경이기는 했는데, 시작부터 1열 앞에 보조좌석을 좍 깔아놔서 잠시 식겁했다. 내가 1열을 잡았을 땐, 내 앞에 아무도 없이 곧바로 무대를 대면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목이 아프든 어쩌든 1열을 잡는 건데 말이지. 그래도 단차가 개념이라, 앞에 앉은 사람이 시야에 걸리지는 않았지만, 발도 뻗을 수 없었고, 보조 좌석에 앉은 사람들도 좌식의자여서 그다지 편하진 않았을 것 같고. 음, 대학로 소극장에서 손님 더 받겠다고 보조좌석 까는 거야 하루이틀 일도 아니기는 한데, 그리고 열악한 수익구조 같은 것도 이해는 하는데, 그래도 꽁기한 건 내가 요즘 대극장만 너무 돌아서 그런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