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벳 (Das Musical Elisabeth)

일   시 : 2012. 02. 08 ~ 2012. 05. 13
장   소 :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
관극일 : 2012. 03. 31 (토) 20:00
대   본 : 미하엘 쿤체, 작곡 : 실베스터 르베이
연   출 : 로버트 요한슨, 협력연출 : 박인선, 음악감독 : 김문정
캐스트 : 엘리자벳 - 김선영, 죽음 - 류정한, 루케니 - 박은태, 프란츠 요제프 - 윤영석, 소피 대공비 - 이태원, 청년 루돌프 - 전동석, 어린 루돌프 - 탕준상

- 5차 스케쥴 나오기 전까지는 마지막 김류은 조합이라 개인적으로 괜히 아련하기도 하고, 뭔가 기대도 있고 그랬는데, 이럴수가, 선영 엘리를 제외하고 나머지 캐스트들의 목상태는 썩 좋지 않은 편이였다. 게다가 만석으로 가득찬 객석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대감에 영향(?)을 받은 건지, 공연 초반에 다들 좀 들뜬 것 같달까. 합이 잘 맞지 않는 부분이 간혹 들리고, 은케니는 소피 대공비 소개하는 부분에서 타이밍이 어긋나서 '한번 보시죠.'는 생략한 채 넘어갔다.

게다가 지난 29일 공연에도 그러더니 '모든 질문은 던져졌다.'에서부터 좀 심하게 지직거리는 마이크 음향 사고가 나서 1막 거의 끝부분 '황후께선 외모를 가꾸신다.'까지 계속 이어져서, 보통 한 두 넘버에서 저러고 말면 모르겠는데, 이게 1막 내내 저러니까 가뜩이나 배우들 목상태 안 좋아, 음향 거슬려 극에 집중을 못하게 하더라.

그래서 사실 후기 쓰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쓰는 건 그 와중에도 근 열흘만에 다시 만난 은케니가 목상태 상관없이 이날도 Milk에서 레전드를 찍어줬고, 또 선영 엘리가 왜 원탑 여주인공인지 무대 위에서 증명해주셨고, 목상태 안 좋은 윤제프도 침몰하는 배 씬에서만큼은 쩌렁쩌렁 류토트를 눌러버릴 기세를 보여주시면서 2막에서 완성도가 올라가면서 공연 자체에 대한 만족도는 어느 정도 충족시켜줬기 때문에. 그리고 배우에 집중도가 떨어지니까 그 외적인 부분들이 눈에 들어오는데, 새삼 음악이 참 좋구나 라던가, 무대 연출 꽤 괜찮네 같은게 느껴져서.

엘리자벳이 무대가 지나치게 화려하고, 여백 없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는 느낌도 있지만, 이날 내가 처음 이런 것도 있었구나 했던 게, 바트이슐에서 황제가 오리 사냥할 때 무대 왼편에 조각상이 등장하는데, 이게 베르니니의 아폴론과 다프네 조각상이더라? 이 엄청 유명한 조각상을 그동안 어찌 몰라봤을까 그랬는데, 저렇게 엉망으로 본을 떠놨으니 알아볼 방법이 있나. 하여간 이 조각상을 보니 연출가는 나름 아폴론과 다프네를 요제프와 엘리자벳에 비유하며 '난 억지로 황후가 됐어요.'의 복선으로 설정해놓은 거 같기는 한데, 이게 바로 그 조각인지 객석에서 알아 볼 수 있겠느냔 말이지.

- 그리고 초월적인 절대자 죽음을 연기하는 건 베테랑 연기자에게도 상당히 어려운 과제겠구나 하는 걸 재차 깨달았다. 류토트가 29일과 같이 영원 불멸의 존재가 찰나를 사는 인간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게 된다...는 노선으로 가려면 이게 배우의 컨디션, 상대 배우와의 합 등등 미묘하고 가느다란 외줄 위에서 균형을 잡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줄타기 하는 건 시씨 뿐이 아니라능;) 게다가 이날 상대하는 배우들이 그날 컨디션이 가장 좋았던 선영 엘리, 죽음을 두려워하지않는 은케니, 언제나 싱싱한 젊은 피 동돌프, 엘리자벳에 대한 사랑 만큼은 그 누구한테도 지지않는 윤제프다보니, 그 모두와 힘겨루기를 해야하는 류토트 입장에서는 이게 참 보통이 아닌 에너지와 기력이 필요할 터. 저 중에 누구 하나라도 고분고분한 존재가 있었다면 좀 나았을까.
아, 그리고 류토트는 컨디션이 안 좋을 때 "ㅈ"발음이 "ㄷ"으로 발음되는 경향이 있는 듯 하다. 마지막 춤과 마디막 춤이 교차하는 후렴구를 듣다 내가 좀 당황스러워서;;

- 이날 선영 엘리는 정말 무대 위에서 가장 빛나는 주인공이었는데, 가장 압권은 '나는 나만의 것'이었다. 정말 몇 번을 반복해서 보는데도 어째 똑같은 감정선이었던 날이 없었던 곡. 왕족이지만, 비교적 자유로운 가풍에서 사랑받고 자란 공주님이 무방비 상태로 시집살이를 겪고, 믿었던 남편에게 외면당해 앞날이 막막하고, 서러운 감정을 아주 여리게 그저 흐느끼듯 부르는 초반부를 지나, 타고난 고고함을 되찾으며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고 내 인생의 주인은 나라고 당차게 다시 일어서는 모습이 참 기특하고, 대견하고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이 막 끓어오르더라. 

한 번은 다 놓고 포기하고 싶어졌지만, 다시 마음을 다잡는 최후 통첩 씬, 아름다운 외모가 곧 권력임을 깨닫고 자신을 가꾸는 장면에서 보여지는 의지 같은 것도 뭐랄까 강렬한 자기주장이 아니라, 이것 마저 없으면 끝장이라는 어떤 절박함 같은 게 절절하게 다가와서, 이후 황실을 떠나 자유를 찾아 떠도는 엘리자벳이 무작정 이기적인 여자로 비치지 않는 효과를 가져왔다. 저렇게 안했으면 진작 자살했을 거 같다는 위태로움, 병적인 우울같은게 느껴져서.

그게 가장 극대화 되어서 다가온 장면은 - 보통 다른 날은 '아무것도'였을 테지만 - 특이하게도 루돌프와 함께 부르는 거울송에서 였다. 요즘들어 동돌프가 어디 가서 연기 특훈이라도 받고 왔는지, 거울송에서 보여주는 무너져내리는 연기가 아주 일품인데, 선영 엘리가 또 여기서 너무나 아프고 시린 엄마를 연기해 주셔서. 차갑게 내치는 날도 있었고, 건조하게 바싹 마른 고목같은 날도 있었고, 나 하나 추스리지 못해 여유가 없는 날도 있었지만, 이날은 우울함의 극치랄까, '어쩔 수가 없구나' 하는 목소리가 같이 흐느끼고 있었다. 꼭 자기 눈물에 빠져 익사할 것 같은 그런 분위기.
그런데 이날 탕돌프가 감기에 걸렸는지 목소리에 비음도 좀 섞이고 원래도 연약하기론 세 애기 돌프 중 젤 섬약한 아이가, 아픈 아이 특유의 칭얼거림까지 보여준데다 동돌프는 살짝 힘만 줘도 산산조각 날 것 같은 금 간 유리 상태여서, 만약 선영 엘리가 저런 극한의 우울을 보여주지 못했다면 이후 절대로 엘리자벳의 감정선에 동조할 수 없었을 텐데, 참 귀신같은 선영님. 몇 번을 찬양해도 모자랄 연기력에 무대 감각 - 상대 배우와 합을 맞추는 - 이다.

- 목상태 안 좋아도 넘버는 클리어하는 은케니. 그럴 땐 또 거기에 대한 보상이랄지 깨알같은 연기로 치고들어오는데, 이날도 광기는 살짝 눌러 죽이고, 그 자리에 서늘한 이지와 냉소라는 말로 부족한 차가운 분노를 채워넣어왔다. 이게 제일 잘 드러난 넘버는 역시 루케니 메인 넘버인 Milk와 Kitsch인데, 우선 Milk부터.

은케니 Milk는 이제 목상태 상관없이 매 공연 꾸준하게 레전을 찍어주는지라, 사실 1막에서 집중하지 못하고 있을 때도, Milk에서 만큼은 집중도가 확 올라가는데, 이게 앙상블 배우들 기합도 또 장난이 아니라. 그러니까 루케니를 연기하는 배우 뿐 아니라, 앙상블 역시 이 넘버에서 보여주는 기백은 정말 보통이 아닌데, 앙상블이 뿜어대는 분노의 열기, 압박해오는 기세를 홀홀단신 혼자 맞서 그들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그 앙상블 소리를 뚫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게 루케니들에겐 정말 큰 부담일 것이다. 특히 이날 은케니한테 더 감탄했던 건 '민중의 자유, 민중의 해방~' 이후에 지르는 부분에서 가성을 사용하는데, 가성으로 지르다 소리가 턱 막힐 것 같으니까 중간에 진성으로 바꿔서 지르더라. 아마도 순간적인 판단으로 바꾼 인상이기는 한데, 목상태 메롱일 때도 이 정도는 거뜬히 뽑아주는구나 싶어서 새삼 놀랬다. 그리고 마지막에 '열!자~~~~~~아!!!!'쯤 오면 이건 뭐 내가 오늘 목이 나가는 한이 있어도 이건 올킬하고 간다는 근성이랄지. 어떻게 저 앙상블의 최대 출력의 소리를 뚫고 그 목소리로 확 잡아올리는지 매번 감동이다.

2막을 여는 Kitsch는 루케니 아이돌 만들어주는 곡이기는 한데, 이날 사관학교에서 단관을 와서 그랬는지, 보통 2막은 오프닝 사인이 따로 없기 때문에 박수로 시작하는 일이 드문데, 우렁찬 박수 소리와 함께 은케니가 등장해서 객석의 흥분이 남다른 날이었다. 그런데 그런 흥겨운 객석 분위기에도 은케니는 싸늘한 비웃음을 입가에 달고, 어딘가 날카로운 분위기를 두르고 있어서, 그 흥을 싹 가라앉히더라. 하여간 내가 본 중에는 삼케니 중에 은케니가 Kitsch에서 가장 신랄하다고 할지. 그 신랄함은 비단 엘리자벳과 황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당신들이 원하는 잘나가는 기념품, 허나 싸구려 대령이요~ 라고 웅변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날 정신병원 장면에서 애드립이 바뀌었는데, 애먼 음악 감독을 물고 늘어지느니 그렇게 바꾼 게 더 마음에 들었다. 미친 사람이 세상을 미치게 만들고, 또 그런 미친 세상이 정신 병자를 낳는 뫼비우스 시스템. 그런 통찰력을 보여주는 은케니라서 참 좋다. 이지와 광기라는 이중성을 어쩌면 저리 적절하게 표현해내는지.

- 윤제프와 태원 소피의 조합이 참 좋은 건, 이 둘이 엘리자벳을 만나기 전까지는 참 서로 잘 어울리는 콤비라는 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윤제프는 황제의 자리를 감당하기엔 사람이 너무 좋다고 할지. 냉혹한 권력의 속성을 견디기에 윤제프는 인간미 넘치는 따뜻한 성품이라, 그 걸 보완해주는 역할이 태원 소피였다는 생각이 든다. 냉정해~ 냉철해~를 외치는 태원 소피가 곁에 있었기에 오스트리아는 그나마 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어머니를 윤제프는 어려워하기 보다는 단단한 버팀목으로 의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민제프보다 더 마마보이로 보이게 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난 이런 따뜻한 성품의 윤제프가 좋다. 그리고 그런 윤제프가 사랑하는 엘리자벳을 위해 어머니와 연을 끊고, 죽음과 대등하게 맞서서 버럭대는 장면에서 보여주는 갭이 참 좋다.

- 극의 마지막, 비로소 안식을 찾아 떠나버린 엘리자벳과 백년 동안 매일 밤 그랬던 것처럼 밧줄에 목을 거는 루케니를 바라보며, 이 극이야 말로 루케니에게 있어 뫼비우스의 끈, 네버 엔딩 스토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엘리자벳 (Das Musical Elisabeth)

일   시 : 2012. 02. 08 ~ 2012. 05. 13
장   소 :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
관극일 : 2012. 03. 29 (목) 20:00
대   본 : 미하엘 쿤체, 작곡 : 실베스터 르베이
연   출 : 로버트 요한슨, 협력연출 : 박인선, 음악감독 : 김문정
캐스트 : 엘리자벳 - 김선영, 죽음 - 류정한, 루케니 - 최민철, 프란츠 요제프 - 민영기, 소피 대공비 - 이정화, 청년 루돌프 - 전동석, 어린 루돌프 - 김효준

- 갑작스런 스케쥴 변경으로 4월달에 김류은 조합이 한 번도 없다는데 일단 패닉. 그래서 최민철 루케니를 보고 싶어서 이 날 공연을 예매하길 정말 잘했다고 스스로를 칭찬. 이날 공연은 최민철 루케니를 만나는 게 가장 큰 목적이었는데, 더불어(?) 김류 페어를 한 번이라도 더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ㅠ.ㅠ
아, 하여튼 이날 공연에선 마이크 지직거리는 음향 사고도 있었고, 앙상블 마이크 볼륨에도 좀 문제가 있어서 라우셔 추기경은 몇 장면 생목으로 치시고, 민제프 침몰씬에서 마이크가 안나온 건지 엘리자벳 날리고 그랬지만, 공연 자체로는 참으로 만족스러웠고, 그 만족감을 채워준 데는 최케니가 한 몫 단단히 했다.

- 맨 처음 루케니 프로필 사진 떴을 때, 애정도와 상관없이 내가 제일 싱크로 최강이라고 생각했던 배우는 최민철 씨였다. 진짜 이탈리아 태생의 건달. 거칠고 과격한 상남자. 그런데 내가 최민철 씨를 화선 김홍도로 만난 것 외에 다른 작품은 본 적이 없어서 어떤 캐릭터일지 감이 잡히지 않았는데, 그 사진 이미지만으로 내가 상상했던, 바로 그 루케니를 연기하고 있더라.

최케니는 일단 삼케니 중에 체격이 가장 건장하다. 그렇다고 근육질의 울끈불끈 뭐 이런 건 아닌데도 나는 최케니에게 거친 뱃사람의 느낌을 받았다. 그것도 뽀빠이 쪽이 아니라 부르투스 쪽으로. (연식 나오네;) 아주 거친 바닥에서 굴러먹은 밑바닥 인생이라고 할까. 험한 일도 많이 해봤을 것 같은 싸움꾼, 건달의 이미지. 그래서 나는 다른 평에서 보이는 것처럼 최케니가 친근하지도 구수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무척 마초스럽고, 질낮은 농담을 던지고, 과격하고 폭력적인 캐릭터로 다가오더라. 그래서 마지막 암살 장면도 최케니다운 장면으로 납득이 갔고.

재미있었던 건 죽음과의 관계였는데, 용케니는 죽음을 어느 정도 두려워하고, 은케니는 죽음과 맞짱 뜰 기세고, 최케니는 죽음의 하수인같다는 거였다. 프롤로그에서 죽음이 등장할 때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카페씬에서 둘이 마주칠 때도 은케니는 챙하고 맞부딪치는 느낌인데, 최케니는 '아, 오셨어요~' 이런 느낌. 그래서 이게 폭력단으로 비유하자면, 최케니는 행동 대장의 이미지가 강하고, 은케니는 모사꾼 쪽의 이미지가 강한데, 그게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게 밀크였다. 은케니가 민중의 자유나 해방에 관심도 없으면서 그저 여기저기 쑤석여서 세상을 뒤집어 버리라고 선동하는 쪽이라면, 최케니는 민중의 편에 서서 같이 진지하게 분노하고 동조하는 쪽이더라. 그래서 은케니의 '말이 돼?'는 보여주기 위한 과장스런 쇼 - 당신들이 생각해도 말이 안되지? - 라는 쪽이라면, 최케니는 자기가 말해놓고 스스로도 이게 말이 되냐며 분노하는 쪽이다.
그런데 최케니 디스는 아니고, 좀 단순 무식(;)한 이미지라서 Kitsch에서 냉소와 조롱의 느낌은 많이 퇴색하고 그저 같이 흥겹게 한 판 놀아보자, 남 뒷담화가 제일 재밌잖아? 이런 분위기가 형성되더라. 그리고 이어지는 일옌 - 내가 춤추고 싶을 때가 이어지는 부분에서 죽음을 향해 다시 한 번 예를 표하고 퇴장해서 죽음과 관계를 한층 더 명확하게 보여준다.

최케니의 음색 면에서도 난 꽤 만족했는데, 일단 고음 소화가 안되는 건 음역대 안맞아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 그래도 그 부분을 자신이 낼 수 있는 한 최고음을 지른다는 느낌이었고, 몇 군데는 자기 음역대에 맞춰서 음을 낮춰불렀는데, 별로 어색하지 않았다. (덕분에 '위태로운 그곳 헝가리에~'를 세가지 버전으로 다 들어봤다. 세 루케니가 다 다르게 불러ㅋㅋ) 그리고 그런 거 다 떠나서 최케니 자신에게 맞는 음역대에서 내는 소리가 진짜 울림이 풍부해서 얼마나 듣기 좋았는지. 저음역대도 강하지만, 중음역대에서의 그 깊은 울림이라니. 소리결이 부드럽고, 풍성한데다, 성량도 좋아서 고음에서 소리가 가늘어지는 거 정도야 몇 군데 안되니까. 뭐 하늘 뚫을 것처럼 치고 올라가는 맛은 없어도 단단하고 묵직하게 받쳐주는 소리도 난 좋았다.

- 선영 엘리는 이날 굉장히 고고한 공주님 노선이었다. 다른 귀족 영애들 처럼 신부 수업 착실히 받는 얌전한 아가씨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천방지축 말괄량이라고 하기엔 그저 취미가 조금 별난 공주님. 날 때부터 공주로 키워졌고, 그만큼 자존심도 높고, 도도한 새침데기. 그래서 요제프가 청혼을 했을 땐 황실에 시집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사랑하는지는 제쳐두고라도 저리 훤칠한 황제의 청혼을 받는다는 게 꽤 괜찮은 기분이기도 하고, 설사 마음에 안든다 한들 황제의 청혼을 거절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도 아는 아가씨.
그래서 정화 소피가 늦잠을 깨울 땐 자신의 나태함을 지적받는 것 같아 조금 부끄러워 한다. 그리고 이를 보이라는 둥 할 때는 명색이 나도 공주에 이제 황후인데, 이런 취급 받을 이유가 없는데, 자신을 핍박하는 소피에 질려서 요제프에게 매달려보지만, 눈치 드럽게 없는 요제프는 그 구조 신호가 얼마나 절박한 건지 알아채지도 못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나는 나만의 것에서 처음 시작은 난생 처음 받아보는 박대에 쇼크를 받아 부서질 듯 연약하고 가녀린 씨씨에서 타고난 고고함을 되찾으며 용기를 북돋는 씨씨로 변모해간다.

하여간 이렇게 고고한 성격이라 이게 이후에도 큰딸 소피가 죽었을 때, 딸아이의 죽음을 슬퍼하기 전에 자신의 행동을 자책하는 감정이 더 크다. 내가 이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아이를 죽게 만들었구나 하는. 그리고 그 감정이 그대로 2막 루돌프의 추도식에 이어진다. 아이에 대한 생각보다 자기 고집을 우선해서 소피를 잃고, '고작 자유 따위를 찾겠다고' 다시 루돌프를 잃었다. 그래서 루돌프의 관을 끌어안고 '아가~'라고 부르짖는 엘리자벳을 보며 1막에서 제대로 불러주지 못한 소피까지 떠올리게 되더라. 게다가 이날 동돌프 연기가 정말 물이 올랐는데, 그 전까지는 그래도 청년 루돌프로 보였는데, 이날은 엄마 앞에서 완전 어린 아이로 퇴행해버렸다. 그러다보니, 엘리자벳이 도와주지 않겠다고 하자 처량하게 일어서서 짓는 표정이, 엄마가 세상의 전부였는데 그 엄마한테 버림받아 이 세상에 기댈곳 하나 없는 어린 아이의 서러운 얼굴이라 울컥했다. 난 동석이가 이렇게 어린 표정을 짓는 걸 이날 처음 봤는데 진짜 가슴이 뻐근할정도로 애처롭더라.

쓰다보니 순서상 뒤로 밀린 '아무것도' 넘버. 선영 엘리가 시종일관 도도한 공주님 노선이라, 이 넘버에서 어떤 감정선을 보여줄까 했는데, 역시 선영님은 선영님. 엘리자벳이 좀 덜 지적이었거나, 자존심, 자존감이 좀 덜 단단했더라면 사는게 좀 덜 고달팠을 지도 모르겠다. 그냥 미쳐버리기에 선영 엘리는 너무 똑똑했고, 성품 또한 고고해서, 자신이 미쳤다면 저런 모습이었을까 싶은 반디쉬 부인을 바라보며 난 결코 저렇게 될 수 없을 거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당신처럼 rep.'에서 비록 바싹 말라서 껍질만 남은 고목이 되더라도 남의 동정을 사는 게 죽기보다 싫은 꼿꼿한 성격이라는 게 시녀장님과의 씬에서 보인다.

이렇게 살아도 사는 게 아닌 엘리자벳이 마침내 죽음의 품에 안겼을 때, 마치 어린 아이가 안심할 수 있는 누군가의 품에 안겨 울음을 터트리는 것 같은 그런 장면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위로하듯 토닥이는 류토트의 손길에 비로소 평안을 찾아 세상을 떠나는 선영 엘리. 그런 선영 엘리를 아련하게 바라보는 류토트의 시선에서 오랜만에 사랑, 연애, 로맨스가 아닌 초월적인 죽음을 느낄 수 있었다.

- 그동안 류토트 회차를 그래도 꽤 여러번 봤는데도 사실 난 류토트의 캐릭터 파악이 참 힘들었다. 분명 로맨스 노선은 아니고 초월적인 존재로서 죽음이기는 한데 그게 가끔은 스토커스런 구남친 삘이라 뭔가 이가 맞지 않는 느낌이라. 그렇다고 내가 류토트랑 안 맞는 건 아닌데 뭐가 문젠가 했는데, 그걸 이날 공연에서 깨달았다.
류토트의 연기와 가사 간의 간극이 문제였던 거. 프롤로그에서 '난 그녈 사랑했어'라고 하는데, 암만 들어봐도, 표정을 봐도 저건 엘리자벳을 사랑한 거 같지가 않더란 말이지. 진짜 이 장면에서 류토트에게 가장 맞는 대사는 원작의 가사 쪽이다. - 난 이게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지만, 인간들이 떠들기를 이런 게 사랑이라더라. 그렇다면 사랑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수명은 짧고 죽음은 영원 불멸의 존재. 짧게 스쳐지나가는 인간들 중에 아직도 기억에 남아 가슴을 아프게 하는 존재가 있는데 그것이 엘리자벳이라는 인상. (특별한 너 엘리자벳~ㅋㅋ) 그렇기에 류토트가 엘리자벳을 사랑했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그것도 일종의 사랑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송토트가 로맨스 노선이라 한 눈에 들어오는 사랑이라면 류토트는 존재하는 시간의 단위가 너무나 다른 두 존재간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 참 루케니 의상 중에, '계획이란 소용없어'에서 차 시중들 때, 은케니만 의상을 갈아입는다는걸 처음 알았다. 최케니, 용케니는 바트이슐 당도한 의상 그대로 차시중들고 뱃사공까지 하더라. 은케니는 뱃사공 할 때도 평소 복장에 조끼하나 걸쳐서 이 장면에서 의상 3번 체인지인데 다른 두 루케니는 한 복장으로 죽 가는게 뭔가 의상 담당이 은케니 편애했나?
엘리자벳 (Das Musical Elisabeth)

일   시 : 2012. 02. 08 ~ 2012. 05. 13
장   소 :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
관극일 : 2012. 03. 22 (목) 20:00
대   본 : 미하엘 쿤체, 작곡 : 실베스터 르베이
연   출 : 로버트 요한슨, 협력연출 : 박인선, 음악감독 : 김문정
캐스트 : 엘리자벳 - 옥주현, 죽음 - 류정한, 루케니 - 김수용, 프란츠 요제프 - 윤영석, 소피 대공비 - 이태원, 청년 루돌프 - 김승대, 어린 루돌프 - 이준서

- 김류/옥송/김송 까지 보고나서 옥류가 궁금해지는 건 당연한 수순. 그러나 옥류은은 4월이나 되야 만날 수 있는 조합이고, 마침 삼성카드에서 이벤트까지 한다해서 어차피 삼케니 다 볼 거니까, 이참에 옥류용을 클리어하자~ 는 기분으로 티켓팅. 결과적으로 이날 공연은 옥엘리 덕분에 진~짜 유쾌하게 관극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바람에 옥류 케미스트리 따위는 그냥 휘발휘발ㅋㅋㅋ

- 내가 3월 4일 공연 이후로 계속 선영 엘리만 봐오다 오랜만에 옥엘리를 다시 만났는데, 그 사이 루도비카 여사는 헬레네 황후 수업에만 신경쓰시고 차녀는 그냥 방목하셨나봄. 세상에 천둥벌거숭이? 말괄량이? 저건 그냥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 망아지임. 아놔, 어찌나 생기발랄 천진난만하고 건강미가 흘러넘치던지. 진짜 알프스 소녀 하이디 돋는 씨씨였다. 내면이 너무 순수해서 사랑에 빠지기도 쉬운 시골 처녀(그래도 공주님인데.ㅋㅋ) 보는 느낌이더라.

죽음과의 첫 만남에서, 아무리 취향의 멋진 남자가 눈앞에 나타나도 보통의 아가씨라면 내숭 정도는 떨어주고, 튕길줄도 알아야 하거늘, 이날의 옥씨씨는 너무 순진하고 순수해서 그냥 멋진 남자가 나타나서 자기를 구해주니까 (사실과 다름;) 거기에 혹해서 매달리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류토트 얼굴에 '이거 지금 유혹하는 거야?' 하는 표정이 스쳐지나가더라. 그리고 이날 류토트는 나쁜 남자 모드여서, 이 아가씨야 사람 봐가면서 건드려야지, 잘못 건드렸네 싶더라. 그게 가장 극대화 된 게 마지막 춤이었는데, 지금 먼저 꼬셔놓고 니가 배신을 해? 날 띄엄띄엄 본 모양인데, 부셔버리겠어!!! 스러웠달까ㅋㅋㅋㅋㅋ (이러다, 오늘 후기 계속 ㅋㅋㅋ로 일관할지도;)

하여간 반하기도 쉽게 반하는 이 아가씨가 윤제프를 만나서 또 첫 눈에 사랑에 빠져버렸어ㅋㅋㅋ 오리 사냥하는 모습을 멋있다고 생각했을까. 엄마가 방목(방치?)해서 키워서 자연친화적이라 총 맞고 떨어진 오리 쯤은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주워서 전해주고 그러는게 너무 자연스러울 뿐이고.ㅋㅋ 윤제프도 늘 도도하고 새침한 틀에 박힌 아가씨들만 보다가 꾸미지 않은 순수하고 건강한 매력이 흘러넘쳐서 반짝반짝하는 엘리자벳에게 이끌리는 게 설득력이 있어서, 그렇게 둘이 눈 맞아서 결혼까지 하게 된 게 그냥 다 이해가 되더라. 그러니 마치 야생에서 자란 거 같은 저 거칠고 활기에 넘치는 엘리자벳을 바라보는 태원 소피의 못마땅함까지 아주 절절히 다 이해가 되서 관극하는 내내 얼마나 재미지던지.

- 진짜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애가 보통의 혼사도 아니고, 황실에 시집을 가게 됐으니 그 앞날이야 통속극대로 흘러갈 수 밖에. 그러나, 난 태원 소피를 좋아하니까, 그분의 답답한 심정 충분히 이해한다. 도대체 저 철딱서니를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엄두도 안 날듯. 침실에서 뛰어 나가다 시녀들과 부딪힐 뻔 하고, 무슨 동작을 하던 거침이 없고, 큼직큼직해서 안그래도 긴 머리카락이 정신없이 사방으로 날리고ㅋㅋㅋ 이 다듬어지지 않은 망나니를 과연 태원 소피가 길들일 수 있을 것인가. 태원 소피의 고생길이 훤히 보이더라. 본격 야생마 길들이기ㅋㅋ

저렇게 선머슴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씨씨라서 '나는 나만의 것'이 과연 어떨까 궁금했는데, 와우, 이게 또 의외로 감정선이 이어지더란 거. 비유하자면 시골에서 막 자란 아가씨가 지체 높은 가문에 시집가서 격식이나 예절에 익숙치 않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주늑도 들었지만, 원래부터 야생 망아지, 타고난 강인함으로 극복하며 난 나야! 난 꺽이지 않는다고 결의를 불태우는 그런 노래가 되더라.

이랬던 야생 망아지 옥씨씨가 황후다운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첫 장면은 1막의 피날레인 일명 초상화씬에서다. 그 전까지는 정말 황후다운 기품, 우아함을 전혀 보여주지 않았는데, 여기에서 완전 환골탈태. 선머슴 같은 모습이 싹 사라지고, 여성스럽고 우아하고 위엄있는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정말 몇 번을 봐도 이 장면에서 옥엘리는 참 아름답다. 그리고 이날 여기서 옥엘리가 보여주는 연기가 또 참 마음에 들었던 게, 저렇게 아름답게 꾸미고 나왔지만, 아직까지 자신감이 좀 부족하달지, 정말로 자신의 힘(아름다운 외모)으로 자유를 찾을 수 있을지 아직 확신을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 요제프에게 나를 이해하고 존중해달라고 호소하고 있더라. 그리고 옆에 류토트가 나타나자 똑같은 가사를 던지는데 그쪽은 호소가 아니라 달래는 톤. ㅋㅋㅋ 그리고 마지막에 아름답게 초상화 포즈를 취해주는데 어우 그렇게 빨리 막을 닫아버리면 어쩌자는건지. 제발 그 몇 초 안되는 순간, 그 아름다운 자태를 좀만 더 보게 해주시오!!

- 진정한 황후로 거듭나 시즌2를 연 옥엘리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본성을 완전히 걷어낸 건 아니라서, 2막 내가 춤추고 싶을 때에서 그 생기 넘치는 전투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선영 엘리와 달리 옥엘리는 치마질(?)의 달인급이라 얼마나 펄럭펄럭 치마를 휘두르는지 진짜 저건 휘날리는 깃발이구나 싶었다. 빙글빙글 턴할 때마다 펼쳐지는 풍성한 치맛자락이 그대로 옥엘리 카운트로 쌓이는 느낌. 사실 내가 옥송을 보고 이 쪽은 전투가 성립이 안되니, 옥류는 어떨까 정말 궁금했는데, 이 페어는 제대로 사랑과 전쟁이더라. 그러나 승자는 아무리 봐도 옥엘리. 이건 뭐 죽음이 압박해서 뒤로 밀릴 때도 그게 반격을 노리는 맹수같은 느낌이 드니, 죽음을 밀어낼 땐 그야말로 옥장군님. 이렇게 되면 역시 태원 소피 정도는 되어야 승부가 되려나 (응?)

하여간에 2막에서 옥엘리는 야생마에 고삐가 채워지고, 안장이 얹어지면서 이대로 길들여지나 싶었지만, 여전히 굴레를 벗어나고 싶어서 몸부림치는 걸로 보였다. 황실에 시집와서 자의는 아니지만, 자꾸 모난 돌에 정을 대듯 자신을 쪼아대니 어쩔 수 없이 고삐도, 안장도 받아들였지만, 아직도 여차하면 다 뿌리치고 넓은 벌판으로 달려나가고 싶어하는 엘리자벳. 그러나 차츰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여가는 체념의 과정이 보여지는 '아무것도'와 '당신처럼 rep.'이 참 좋았다. 사실 2막에서 저렇게 기운이 넘치는 엘리자벳이라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일관성이 있었고, 그게 나름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오늘 내 후기는 왜이리 동물의 왕국이지;;)

- 준서 루돌프의 애잔함에 싱크로율 120%인 승돌프가 만나서 참 오늘의 루돌프들은 얼마나 짠하고 애처로웠는지. 승돌프는 마이어링 왈츠에서 정말 무대 바닥으로 패대기쳐질때마다 내가 다 깜짝깜짝 놀라는데, 뭐 배우분들이 더 잘 알고 잘 하시겠지만, 부상당하지 않게 조심해주세요.

- 윤제프~ 아 애정하는 윤제프님. 어쩜 그렇게 목소리가 달콤하신지. ㅠ.ㅠ 진짜 엘리자벳 부를 때의 그 솜사탕같은 느낌 너무 좋고, 태원 소피와 대립각을 이루는 장면에서마저 잔정이 많은 아들이라 말로는 끝이라고 하지만, 표정에서 속상한 게 보여서 좋고, 침몰하는 씬에서 보여주시는 그 깊은 절망감도 참 좋다. 여기서 윤제프 연기 디테일을 오늘 처음으로 좀 자세히 봤는데, 죽음이 줄칼을 들어보이며 이걸로 엘리자벳을 빼앗아가겠다고 할 때, 진짜 가위 눌린 것처럼 몸이 말을 안듣는 듯한 움직임을 보여주셔셔 감탄했다. 이건 너의 악몽~ 에 딱 어울리는 연기!! 와우~

- 극의 마지막까지 옥엘리는 힘이 넘쳐서, 결국 죽음도 내 선택이라는 것 같았는데, 참, 옥엘리가 이렇게 노선을 잡으니 죽음은 끝내 스토커돋는 구남친st를 강하게 뿜을 수 밖에 없어서ㅋㅋㅋ

- 음, 전에도 썼지만, 난 음이탈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그건 사고와 같은 거라고 생각하니까. 그보다 음정 플랫되는 거나 박자 안맞는 쪽이 더 신경쓰여서; 그래서 난 이날 류토트의 노래에 크게 불만 없었고, 다만 목상태는 별로구나 하고 넘겼다. 저음역도 가성으로 나긋하게 부르는 바람에 간간히 소리가 작아지는 부분은 있었지만, 고음에선 성량 빵빵하게 잘 질러주셨고. 딱히 이날 나한테 베스트 송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말아먹었다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뭐, 그런 아쉬움도 옥엘리가 다 날려주셔서 난 굉장히 유쾌하게 웃으며 극장을 나왔지만. 아~ 옥엘리 스릉흔드~

- 이날 내가 옥류 페어 자체 첫공에 용케니 자체 첫공이었는데, 사실 보러가기 전까지는 고민을 좀 했다. 내가 햄릿에서 수용 씨와 별로 좋은 기억이 없어서; 그래도 이번엔 아나키스트 루케니에 가장 잘 어울린다는 평도 있고 해서 보러갔는데, 일단 다른 건 제쳐두고 난 김수용 씨의 창법과는 참 맞지를 않다는 걸 재확인. 음절을 툭툭 내던지는 듯한 창법에다가 박자감이 좀 독특하시더라. 예를 들어 리듬이 따~라라~라~ 이렇게 이어지는 부분을 수용씨는 따 따 따 따 이렇게 부른달까. 그냥 말로 설명하기 좀 어려운데, 수용 씨가 부르는 Kitsch 앞부분을 들어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게 노래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대사를 할 때도 적용이 되는 부분이라 좀 밋밋한 설명조로 들리는데, 내가 은케니에 너무 길들여져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엘리자벳 (Das Musical Elisabeth)

일   시 : 2012. 02. 08 ~ 2012. 05. 13
장   소 :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
관극일 : 2012. 03. 20 (화) 20:00
대   본 : 미하엘 쿤체, 작곡 : 실베스터 르베이
연   출 : 로버트 요한슨, 협력연출 : 박인선, 음악감독 : 김문정
캐스트 : 엘리자벳 - 김선영, 죽음 - 송창의, 루케니 - 박은태, 프란츠 요제프 - 윤영석, 소피 대공비 - 이태원, 청년 루돌프 - 전동석, 어린 루돌프 - 탕준상

- 오랜만에 느껴보는 화요일스러운 공연. 시작부터 5분 지연. 지휘는 부음감. 음향은 1막은 빵빵하게 키워놓고, 2막은 또 줄여놨고, 오케스트라는 결혼의 정거장들에서 관악기 음정 틀림. 그 외에는 캐스트 별로 다들 컨디션도 무난한 가운데, 태원 소피께서 제일 컨디션이 좋으셨는지, 아주 쩌렁쩌렁하셔서 잘하면 뮤지컬 소피가 될 뻔. (왜 될 뻔 했는지는 뒤에) 화요일스럽게 객석도 좀 수런수런, 배우들도 배역 몰입이 좀 더디게 진행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 주조연들을 더블에 트리플 다발로 캐스트를 해놓으니, 이게 캐스트 별로, 조합별로 극이 확확 달라지는 느낌이 재관람자들에게 신선한 재미를 던져주는데, 그 바람에 회전문은 쉬지않고 돌아간다는 통장 박살의 전설이. -_- 연기 노선에 별로 변경이 없는 분들은 쌓여가는 디테일 보는 재미가 있고, 아예 회차별로 노선이 달라지는 선영 엘리라던가 송토트는 그날 그날 배우가 잡은 노선에 따라 극 자체가 달라져서, 뭔가 새로운 극을 보는 것 같달지.

이날 공연은 그렇게 매 공연 노선이 달라지는 김선영 씨와 송창의 씨가 만났으니, 또 어떤 변화를 보여줄까 하는 기대가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난 이날 뮤지컬 엘리자벳이 아니라, 뮤지컬 토트를 보고 온 느낌. 선영 엘리는 연약 노선, 강성 노선 이것 저것 시험해보시다가 그걸 적절히 섞어서 보여주셨는데, 송토트는 죽음이 엘리자벳이라는 한 여인을 만나서 감정이라는 걸 배워나가고, 사랑이 애증으로, 집착에서 시작된 자괴감이 자기혐오로 이어지는 감정의 격렬한 변화를 보여주더라.

이날 프롤로그 첫 등장에서 송토트가 '이 오래된 노래는 무엇일까, 아직도 내 가슴을 아프게해.' 라고 부르는 노래가 하이네 하인리히의 시 '로렐라이' 의 첫 구절이라는 인식이 들면서, 토트에게 엘리자벳은 마치 로렐라이와 같은 여인이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빠져들어서는 안되는 존재라는 걸 알지만, 끌릴 수 밖에 없는 운명. 아름다운 여인에 이끌려 결국에 좌초해버린 '죽음'이었다.
송토트는 엘리자벳을 만나지 않았다면 자신이 차갑고, 냉혹한 존재라는 것 자체를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완전한 파괴만이 나의 의무' 인데, 한 여인을 만나서 깨닫지 않아도 좋을 감정까지 알게되었고, 지금 그 감정들을 일깨워준 여인은 곁에 없다. 그래서 사랑했지만, 동시에 증오스럽고 원망스러운 죽음.
그래서 '난 그녈 정말 사랑했어' 할 때 은케니의 조소가 굉장히 통렬하다. 초월적이고 절대자인 '죽음' 조차도 한갖 사랑에 빠져 저렇게 자기를 잃고 비통함에 빠져있냐는 듯한 비웃음을 흘리는데, 그게 죽음과의 엘리자벳 배틀에서 보여주는 빠직빠직한, 전기가 튀는 것 같은 그런 따끔따끔한 느낌까지 주더라.

이왕 뮤지컬 토트가 된 김에 송토트 이야기를 더 해보자면, 이날 송토트가 잡은 죽음은 여성성이 강조된 토트였다. 남자가 여성스럽다는 그런 느낌이 아니다. 남성도 여성도 아닌 죽음이 마치 엘리자벳과 동화된 느낌이라고 할지. 노래하는 목소리도 굉장히 부드럽고 나긋하다가, 죽음 자신이 깨달은 감정을 내비칠 땐 순간적으로 거친 상남자의 모습이 튀어나오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엘리자벳 내면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설득하는 죽음이었다. 그래서 마지막 춤이나 내가 춤추고 싶을 때에서도 서로 대치하면서 팽팽하게 기싸움 하는 느낌은 거의 들지 않는다. 엘리자벳이 품고있는 불안, 혼란을 직접적으로 건드리면서 너도 사실은 다 알잖아? 그러니 내게 의지하라며 꼬시는 죽음이었다.
특히 내가 춤추고 싶을 때에서 참 특이한 경험을 했는데, 저 아래 가사에서 보면 '그래!'가 마치 엘리자벳이 하는 말을 긍정해주는 것 같은데, 송토트는 '그래?'라고 뒤에 물음표가 보이는 톤이었다.

토트: 이 세상의 흐름을 바꾸는 거야 네가 원하는대로
엘리: 이 세상이 아닌
토트: 나를 위해
엘리: 날 위해
토트: 그래!

승리했노라 의기양양해 하는 엘리를 바라보며 정말로 네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을 거 같아? 비아냥대고, 결국 넌 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적극적으로 설득하는 죽음이었다. 승리감에 도취된 엘리자벳에게 씨알도 안 먹힌다는 걸 깨달은 송토트는 이제 서서히 아들 루돌프에게 마수를 뻗힌다.

이날 어린 루돌프는 준상이. 프롤로그에서 목소리 쭉 뽑아내는 건 세 어린 돌프 중 최고인데, 여리디 여린 것도 세 어린 돌프 중 제일 여린 준상이. 태원 소피가 '얜 너무 약해 빠졌어.' 걱정하는게 진짜 이해가 되고도 남는 기가 약한 도련님이다. 그런 준상 돌프를 손에 쥐고 흔들려고 하니, 여기서 송토트는 정말 심하게 자책감을 느끼게 되고, 여유롭게 꼬신다던가 그러질 못하고 뒤돌아 서면서 보여주는 표정이 내가 이 짓까지 해야해? 라는 표정이라. 게다가 죽음이 떠나고나면 준상이가 죽음에게 뻗었던 팔을 가슴쪽으로 모으고서는 다시 엄마를 찾는데 얼마나 애처로운지. ㅠ.ㅠ

그렇게 첫만남 이후로 다시 루돌프를 만나서 부르는 그림자 송이 이날 송토트의 베스트 송이었는데, 난 초반에 하이음을 죽음이 부른다는 걸 알면서도 지금 이 목소린 동석인가? 했을만큼 풍부한 성량의 목소리가 흘러나와서 다시 한 번 귀를 쫑긋 세웠더랬다. 송토트가 목상태가 좋으면 이런 소리가 나오는구나 감탄하면서 그림자송을 들었는데, 더 깜짝 놀란 건 '세상의 종말 그 끝에 서있다' 하면서 동돌프와 거의 키스하려는 포즈까지 갔다가 동돌프가 '그래! 드디어 때가 왔어' 하면서 간신히 뿌리치고 달아나는데, 내가 관극한 중에는 처음 보는 디테일이라 매우 신선했다. 류동 그림자송에서 동돌프가 류토트를 유사 아버지로 보는 쪽이라 이런 식의 디테일이 들어갈 여지가 잘 없는데, 송토트가 여성성을 좀 더 강하게 가지고 가면서 이런 디테일이 먹혀들어가는 게, 이래서 전관해야한다는 결론? ㅠ.ㅠ 하여튼 송토트가 동돌프와 대등하게 성량에서도 밀리지 않고 그림자송을 불러주니 눈과 귀가 제대로 호강하는데다가, 계단 위라는 지상과 분리된 공간에서 인간은 절대 볼 수 없다는 광경을 죽음이 루돌프 앞에 펼쳐놓고, 그러니 네가 세상을 구원해보라며 부추기는 연출 방식이 참 마음에 든다.

그런데, 여기서도 송토트는 내적으로 끊임없이 갈등하고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자책에 휩싸여서 보는 사람이 불안할 정도로 혼란스러워한다. 그래도 결국 비장한 표정으로 루돌프를 지켜보고, 루돌프가 배신자의 낙인이 찍히는 장면에서는 기어이 저질러버렸다고 고통속에 자책한다. 아, 저 자책감은 루돌프에 대한 연민이나 미안함이 아니라, 내가 이런 짓까지 하다니!! 라는 쪽의 자책감이다. 류토트가 모든 건 계획대로~ 라는 죽음이라면 송토트는 엘리자벳이라는 여자 하나 때문에 인간사에 깊숙이 관여하게 된 자신을 참을 수 없어하는 느낌이다.

그런 송토트가 결정적으로 엘리자벳에게 사랑, 질투, 집착을 넘어 애증이라는 감정까지 품게되는 계기는 루돌프의 죽음. 여기서 송토트가 내보이는 자괴감이란, 땅을 파다파다 지구 반대편에 도달할 것만 같은 그런 격렬한 자기혐오.
그래서 죽음에게 데려가 달라 애원하는 엘리자벳을 바라보는 표정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면서, 모든 인간을 두려움에 떨게하는 절대자인 이 내가 너 때문에 이렇게까지 했어!!!! 라는 마음의 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더라.  날 이렇게 만든 널 괴로움 속에 몸부림치도록 내버려둘 거야 라며, 그러나 그 자신도 고통 속에 흐느끼는 느낌으로 '가~!'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장면에서 송토트와 선영 엘리는 정말 거울 보듯 서로 똑같이 고통스럽고 서글픈 서로의 반쪽같더라.

이렇게 자아 정체성을 잃고, 자기혐오와 엘리자벳에 대한 사랑과 증오의 감정을 동시에 품은 토트는 이미 한계용량에 다달아 버렸다. 그래서 침몰하는 배 씬에서 송토트는 진짜 자기 자신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고통과 혼란 속에 지쳐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할 정도. 난 이 장면에서 죽음이 이렇게 무너지는 걸 처음봐서 참 생소하면서도 흥미로웠다. 이제까지 내가 본 류토트, 송토트 모두 침몰하는 배 씬에서만큼은 요제프와 팽팽한 대치 상황이었는데, 이날의 송토트는 굉장히 괴로워하고 쓰러질 것 같은데 간신히 악만 남아 버티는 그런 느낌. 그러다 루케니에게 칼을 던질 때도 거의 주저않을 듯 자세가 무너지면서 될대로 되라는 식의 자포자기의 심정까지 느껴지더라. 이 감정선은 이후에 칼맞은 선영 엘리를 맞이하러 나올 때까지 죽 이어져서 칼 맞은 엘리자벳보다 그걸 지켜보는 죽음이 먼저 죽을 기세 (응?) 엘리자벳은 죽음을 통해 비로소 자유를 얻었지만, 죽음은 사랑하는 여인을 손에 넣었으나, 그것은 곧 그 여인과의 영원한 이별을 뜻하는 것이라. 그래서 이 장면은 내려오는 줄에 목을 거는 루케니와 함께 이야기를 다시 프롤로그로 되돌리는 장면이 된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이 시작이 되는 이야기. 그래서 회전문은 멈추지 않는 모양이다.

- 송토트가 워낙 신선한 해석을 들고나와서 송토트 위주로 쓰게 되었는데, 이날 다른 캐스트 분들도 다들 굉장히 좋았다.
특히 태원 소피가 어찌나 강렬한 카리스마를 휘두르시는지, 1막 황실 장면에서 헝가리 정세를 그륀네 백작에게 묻는 장면이, 정화 소피는 그륀네 백작이 자기 사람이라 그의 의견을 들어보자는 쪽이라면, 태원 소피는 그륀네 백작에게 전에 내가 일러준대로 하라는 느낌이다. 진실이 어쨌든, 겉으로는 수렴청정이니, 직접 정치적인 발언을 하는 대신 막후 조작(?)이랄까. '하, 전쟁은 다른 나라나 하라고 하세요.' 라는 대사톤에서도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는 톤이다. 2막 벨라리아에서도 정화 소피는 늙고 병들어 지쳐가는 불쌍한 소피인데, 태원 소피는 아직도 성깔이 카랑카랑한 만만찮은 노쇄한 권력가의 포스를 보여주신다. 아들에게 사랑타령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하는 대사도 며느리에 대한 견제만이 아닌, 진심으로 국정을 우려하는 모습이라 아, 이분이 가시고 나면 오스트리아는 앞날을 장담할 수 없겠구나 싶더라.

선영 엘리, 윤제프 케미스트리야 말해 뭐하겠는가.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는 참 보기좋은 한쌍이었으나, 결혼은 현실이고, 거기에 저렇게 카리스마 넘치는 시어머니를 과연 누가 이길 수 있나. 아무도 못 이김. 그래서 뮤지컬 소피가 될 뻔했; 선영 엘리는 나는 나만의 것 한 곡만으로도 엘리자벳이라는 드라마 한 편을 보여주는데, 이날도 참 여리고 청순하게 시작해서, 내 삶의 주인은 나라고 강인하게 외치는 홀로 서는 모습까지 참으로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시더라.
윤제프는 순정 넘치는 마마보이에서 좀더 강단있는 마마보이로(;) 변신하셔서, 벨라리아에서는 거의 민제프 맞먹을 정도로 패기를 보여주셨다. 전에는 어머니를 뿌리치면서도 이제껏 두 모자간에 쌓아온 정이 있어서 좀 덜 야멸차다할까 그랬는데, 이날 공연에선 진짜로 우리 사이는 끝이에요! 하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태생이 모질지 못한 윤제프라 아마도 뒤돌아서는 마음 아파하지 않았을까 하는 여운을 남겨주는 그런 요제프였다.
선영 엘리와 윤제프의 가장 멋진 하모니는 2막의 조각배 씬인데, 떨어져 지낸 세월이 그리 길어도 여전히 절절한 사랑을 전하는 요제프와 마치 매미의 허물처럼 텅 비어버려 그대로 투명하게 사라질 것 같은 엘리자벳의 듀엣은 진짜 가슴이 아파서 울컥하게 되더라.

동돌프는 회차가 거듭될수록 무대에서 힘을 빼는 법을 배워나가는 것 같아서 그게 참 좋더라. 배우가 쓸데없이 힘이 들어가 있으면, 움직임이 뻣뻣해서 보는 사람도 경직되는데, 그렇다고 늘어져버리면 연기 자체가 안되고, 무대 위에서 적당히 긴장감을 가지는 감각, 그건 아무래도 경험에서 배우는 수 밖에 없는 거라, 앞으로 점점 더 좋아질 걸 기대하고 있다. 노래야 뭐 저렇게 잘하는 데 더 해줄 말이 없고. 

아, 이날 이용진 씨 대신에 심현준 씨가 올라왔는데, 아무래도 용진 씨 특유의 개그 연기같은 건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라 좀 심심하긴 하더라. 새삼, 엘리자벳이라는 작품이 얼마나 캐스트에 공을 들였으면 앙상블 한 사람 한 사람 다들 이리도 훌륭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결론은?
이런~젠장! 통장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어요! 그걸 통장 주인만 몰라!! (feat. 은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