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벳 (Das Musical Elisabeth)

일   시 : 2012. 02. 08 ~ 2012. 05. 13
장   소 :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
관극일 : 2012. 02. 28 (화) 20:00
대   본 : 미하엘 쿤체, 작곡 : 실베스터 르베이
연   출 : 로버트 요한슨, 협력연출 : 박인선, 음악감독 : 김문정
캐스트 : 엘리자벳 - 김선영, 죽음 - 류정한, 루케니 - 박은태, 프란츠 요제프 - 민영기, 소피 대공비 - 이정화, 청년 루돌프 - 전동석, 어린 루돌프 - 탕준상

- 이날 공연은 전반적으로 조금씩 어긋남이 있었지만, 그 어긋남을 모두 상쇄시키고도 남을 정도로 몰입해서 열연해준 배우분들 덕에 가히 레전드라 할만하겠다. 그래도 오케스트라 미스는 너무 중요한 부분에서 너무 심하게 튀었으므로 상쇄할 여지가 별로 없었지만.

- 우선 은케니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는데. 진짜 저 무시무시한 컨시스턴시에는 감탄을 넘어 감동하게된다. 무대 공연 특성상 어제 공연이 레전드라고 오늘 공연도 또 그러리라는 보장이 없는데, 은태는 매 공연 일정 퀄리티를 유지하면서 거기에 더해 회차를 거듭할 수록 점점 더 발전하는 모습이 눈에 확확 들어오니 자꾸 전관 욕심이 생기지. (그래서 내가 EMK의 ATM ㅠ.ㅠ)

삼케니가 각자 배우가 가진 개성을 부여하여 루케니라는 캐릭터를 만들어냈고, 은케니가 잡은 루케니는 한마디로 미친놈인데, 거기에 더해서 은케니가 사실은 무정부주의자 라기보다는 광기에 찬 냉소주의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은케니는 루케니 본인일 때와 해설자일 때, 극 안으로 스며든 인물일 때가 조금씩 다른데, 일단 루케니 본인일 땐 영락없는 정신병자, 미친놈이다. 그런데 일단 해설자의 위치에 오게 되면 이 세상에 가소롭지 않은 것이 없는 냉소주의자다. 권위를 조롱하고, 사랑을 비웃고, 인물이 가진 모순에 마음껏 비난을 퍼붓는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삐죽삐죽 튀어나오는 광기를 숨길 수는 없어서 멀쩡하게 이야기 하다가 갑자기 눈을 번뜩이며, 웃음으로 터트린다. 그리고 극중 인물로 녹아들 때는 그 배역에 충실하게 깨알같이 연기한다. 대표적인 게 밀크. 군중들을 향해서 우유 배달이 없다면서 당신들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듯 숙연하기까지 한 표정을 짓다가도 뒤돌 땐 그거야 니들 사정이지 씩 웃는 거 보면, 여기서 좀 더 쑤석이면 재밌는 일이 벌어질 거 같다고 머리 굴리는 게 보이는 선동가.

- 은케니가 취향을 타겠다 싶은 부분은 죽음과의 관계인데, 프롤로그에서 죽음을 소개할 때. 실상 여기서 죽음은 자기 의지로 등장한 게 아니라, 루케니에 의해 소환된 것에 가깝다. 이건 어쩌면 은케니 한정일지도 모르겠다. 왜냐면 다른 두 루케니가 '아주 위대한 분이 오셨습니다. 그의 이름은 죽음' 이라고 소개하는 것에 비해서 은케니는 '소개하지, 위~대한 죽음' 이라고 하는데, 말로는 위~대하다고 하지만 비아냥거림이 퐁퐁 떠다니는 뉘앙스라 죽음에 대한 어떠한 경의나 두려움도 없다. 은케니는 불경스럽게도 여러 증인 중 한 명으로 죽음을 소환한 것 같은 분위기다. 누구도 감당 못 할 돌아이 증명;
이후에도 은케니는 죽음에 대한 비웃음을 멈추지 않는다. "와우, 사랑의 시작~" 부터 마리오네트 씬에서 "결국엔 차인 거니까", 카페씬에 등장한 죽음을 향해 피식거리는 거며, '내가 춤추고 싶을 때' 시작 전에도 조롱의 손짓을 해보이며 퇴장한다. 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루케니는 원작 파괴라는 비난을 들을지도 모르는 해석이긴한데, 쟨 그냥 세상 무서울 거 없는 미친놈이라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모양이지 하고 이해하게 되는 건 내가 편애쟁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 뮤지컬 엘리자벳이 그저 한 인물의 일대기로 흐르지 않게 잡아주는 건 "죽음"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의인화 해서 등장시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추상적인 개념을 형상화해서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어디에고 기대야 할 구석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게 배우가 가진 아우라든, 분장이든. 쿤체의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가사는 직접적으로 관객에게 '죽음'을 납득시키는 가장 큰 무기인데, 번안 과정에서 그 싯적인 풍미가 상당부분 깎여나간 건 애석한 일이다. 그러나 쿤체의 시는 날아갔어도 음악이 남아있어 다행이다. 죽음이 등장할 때 음산하게 퍼지는 음악적 기운이야말로, 관객들에게 가장 직관적으로 '죽음'을 이해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베일이 떨어지고에서 삑사리 낸 호른은 반성 좀. 이 엘리자벳이라는 뮤지컬에서 호른이라는 악기는 그냥 악기가 아니라, 죽음이라는 캐릭터가 부여된 소리라는 걸 이야기 하고싶다. 일단 호른은 관악기 중에서도 상당히 부드러운 음색을 가지고 있다. 트럼펫이나 트럼본의 음색이 금관악기 특유의 뽐내는 듯한 소리(비웃는 거 아님;)를 낸다면 호른은 좀 더 친화적이고 웅대하면서도 부드럽게 권위를 드러내는 음색이라, 개인적으로 "죽음"과 잘 어울리는 조합이라고 생각한다.
그 호른의 음색이 두드러지는 부분이 어디냐면, 죽음이 스스로의 의지로 인간사에 개입할 때. 특히 결혼식 피로연 장면과 마이어링 왈츠에서 자, 이제 죽음 등장이요~ 하고 호른이 먼저 길을 열어준다. 죽음과 엘리자벳의 첫 만남의 장면, 그리고 마침내 엘리자벳을 손에 넣었을 때의 그 로맨틱한 선율도 호른으로 시작을 열어 그저 로맨틱하기만 한 게 아닌 장중한 분위기를 낸다.
물론 죽음이 등장할 때마다 호른이 따라다니는 건 아니다. 소리없이 다가와 음산한 그림자처럼 주변을 맴도는 그런 죽음일 때 조차 미리 전조를 알려줄 필요는 없으니까. 카페씬에서 하품하며 종말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나, 엄마를 그리워하며 혼자 두려움에 떠는 어린 루돌프, 남편에 대한 배신감으로 치를 떠는 엘리자벳, 아버지에 의해 이상이 꺾인 루돌프 등등. 그런 장면에서 죽음은 등장 인물들의 감정에 감응해서 나타난 쪽에 더 가깝기도 하고.

- 기왕 음악 얘기 하는 김에 르베이의 음악적 센스가 정말 좋은게, 황실에 대한 이야기를 진행할 때 등장하는 팡파레. 이게 정말 극 전반을 지배하는 황실의 권위에 대한 조롱과 조소가 제대로 드러나서 좋다. 메인 멜로디를 이끄는 트럼펫은 여타 팡파레와 다를바없이 여기를 봐, 황실을 찬양해라~ 라는 진행인데, 그 밑에 흐르는 트럼본과 여타 다른 악기들은 미묘하게 리듬도 화음도 헝클어져있어서,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에서부터 무너져내리고 있다는 걸 다른 설명없이 이 팡파레 음악 하나로 다 설명하고 있다.

처음엔 리프라이즈가 너무 많다고 살짝 투덜거렸는데, 듣다보니 그 배치의 절묘함에도 감탄하게 되더라. 아빠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그 노래로 죽음에게 가지마요 왕자님~ 하는데, 결국 씨씨가 원하는 자유를 줄 수 있는 건 죽음 뿐이라는 노골적인 복선이다. '모두 반가워요'가 '행복한 종말'로 리프라이즈 되는 것도 댓구를 이루는데, 뭔가 중요한 얘기를 하고 있지만, 사람들 관심밖이랄까, 사태의 심각함을 인지하지 못하고 가볍게 떠드는 그런 분위기가 비슷하게 이어진다. 엘리자벳 결혼 피로연의 왈츠가 마이어링 왈츠로 이어지면서 모자 2대에 걸친 죽음과의 인연을 보여주는 것도 절묘하다.씨씨와 조피의 신경전은 고스란히 루돌프와 요제프의 대립으로 이어지고, 요제프에 대한 엘리자벳의 환멸이 엘리자벳에 대한 루돌프의 절망으로 이어진다. 가장 균형감있게 대칭을 이루는 건 '혼자두지 말아요'와 '행복은 너무 멀리에'.

- 류토트와 선영 엘리를 17일 공연 이후 꽤 오랜만에 다시 만났다. 그 사이 송토트와 옥엘리의 잔영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서 그런 것도 있지만, 류토트도 선영 엘리도 연기의 노선이 계속 바뀌어가는 것 같아서 아직까지 캐릭터 파악이 제대로 안된다.

류토트는 초월적인 절대자의 분위기를 배우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데, 오늘 공연을 보니 좀 더 인간적이고, 유혹하는 죽음처럼 느껴지더라. 마지막 춤에서의 그 적극적인 대쉬는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그와 더불어 이날 공연이 내 5번째 엘리였는데, 어떤 불안함없이 가장 마음편히 죽음을 감상할 수 있었던 공연이었다.

선영 엘리는 1막에서 고음에서 목소리 끝이 갈라지는 순간이 몇 번 있었지만,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성정의 엘리자벳이라면 저런 목소리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거슬리지는 않았는데, 다만, 나만의 것 rep.에서는 좀더 위엄있고 윤택한 목소리가 나와줬으면 좋겠더라. 

류토트와 선영 엘리의 불꽃튀는 기싸움이 절정에 달하는 '내가 춤추고 싶을 때'는 배우간의 팽팽한 긴장감도 짜릿하지만, 엘리자벳의 치맛 자락이 깃발처럼 펄럭이는 게, 진짜 전투를 치르는 것 같아서 난 의상팀도 칭찬해주고 싶다. 피아노 덮개 같다고 한거 미안합니다.

이날 선영 엘리의 연기 중에 가장 인상깊은 장면은 루돌프의 장례식이었는데, 슬픔보다 더 큰 미안함, 자책감 때문에 차마 손도 못 뻗는 엘리를 보고 그러게 있을 때 잘하지 그랬나 싶으면서도, 내가 무슨 염치로 너의 죽음을 슬퍼하랴, 눈물 흘릴 자격도 없는 애미다...하는 게 보여서, 차라리 슬픔을 밖으로 터트리면 좀 가벼워질 것을 가슴에 꾹꾹 눌러담는 모습이 안스럽기도 했다. 그래서 이후에 죽음에게 데려가 달라는 부분의 감정선도 좀 달라졌는데, 전엔 그것만이 나의 구원, 너무나 고통스러운 이 현실에서 나를 벗어나게 해달라는 쪽이었다면, 이날은 나처럼 죄많은 어미를 거두어달라는 것 같더라.

- 민제프와 윤제프의 가장 큰 차이점은 어머니 소피와의 친밀감이다. 민제프는 어쩔 수 없이 엄마 뜻에 따르기는 하지만, 여차하면 박차고 나갈 반항적인 아들인데, 윤제프는 엄마는 다 나 잘되라고 저러시는 거라 믿는 말 잘듣는 아들이다. 이게 엘리자벳에 대한 태도에도 상당히 영향을 미치는데, 민제프는 어머니 눈치보랴 부인 투정 들어주랴 진퇴양난에 빠진 가운데서도 어머니의 권력이 아직은 더 막강하니, 엘리자벳보고 니가 참아야지 하는 쪽이고, 윤제프는 부인 속터지는 것도 모르고, 어머니는 너를 괴롭히려는 게 아니고, 다 너를 위해서야 라고 하니 어느 쪽이든 엘리자벳이 홧병나기는 마찬가지. 아, 그래도 내가 윤제프가 좀 더 취향인 건, 윤제프가 왈츠 출 때도, 첫날 밤 불안해 하는 엘리를 다독일 때도 너무너무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는 눈길이 솜사탕 같아서. 그리고 나는 김류민보단 김류윤의 하모니가 더 듣기 좋더라.

- 탕돌프의 여간 잔망스럽지 않은 연기도 노래도 훌륭하고, 동석이는 '내가 어머니의 거울이면 좋겠어요.'에서 애처로움이 나날이 늘어서, 무릎꿇고 두 손 모아서 비는 모습이 얼마나 절박해보이는지, 그걸 어떻게 외면할 수 있을까 싶다. 마이어링 왈츠에서 아직 몸에서 힘을 다 빼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더 이리저리 마구 휘둘려지고, 구르고, 몸놀림이 한 결 좋아져서, 처철함을 키운 것도 좋더라.

- 정화 조피는 태원 조피보다 디테일한 연기에 더 많이 신경을 쓰시는 것 같다. 사용하는 어휘도 좀 더 황실 웃전에 맞게 사용하시고. 늦잠 자는 며느리를 흉볼 때, 정화 조피는 "나태하고 게으른 철부지"라고 하고 태원 조피는 "나태하고 게으른 멍청이"라고 한다. 아무리 며느리가 마음에 안들어도 멍청이는 좀...; 그리고 씨씨와 말다툼하는 과정에서 황제에게 직접 물어보라 할 때, 정화 조피는 "황제를 모셔와."라고 하는데, 태원 조피는 "황제를 데려와."라고 해서 아무리 어머님이 수렴청정을 한다해도 아랫것들 앞에서는 황제의 위신을 세워주셔야지 않나 하지만, 음색이나 대사톤은 태원 조피가 취향이라는 미묘한 취향의 세계.

- 주,조연 배우들의 열연에 앙상블의 호연까지 곁들여진 성찬을 맛본 기분으로 공연장을 나서는데, 새삼 통장 박살나는 소리가 환청처럼 따라붙었다. 환청이 아니란 소린 말아줘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엘리자벳 (Das Musical Elisabeth)

일   시 : 2012. 02. 08 ~ 2012. 05. 13
장   소 :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
관극일 : 2012. 02. 23 (목) 20:00
대   본 : 미하엘 쿤체, 작곡 : 실베스터 르베이
연   출 : 로버트 요한슨, 협력연출 : 박인선, 음악감독 : 김문정
캐스트 : 엘리자벳 - 옥주현, 죽음 - 송창의, 루케니 - 박은태, 프란츠 요제프 - 윤영석, 소피 대공비 - 이태원, 청년 루돌프 - 전동석, 어린 루돌프 - 탕준상

- 2열도 좋다 했는데, 1열은 진짜 신세계로구나. 앞으로 잡아놓은 것 중에 1열이 딱 한 번 남았는데, 마티네라는 게 함정. 그래서 사실 표를 잡아놓고도 내가 갈 수 있을까, 못가면 양도하지 이랬는데, 오늘 보고나니 반드시!! 연차를 내서라도 가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젠장, 연차비가 표값보다 더 비싼 게 또 함정이지만 ^.ㅠ

- 도대체 같은 중앙 구역인데, 1열과 2열의 음향이 이렇게 차이나는 이유가...? 1열에선 앙상블 가사를 다 알아들을 수 있더라. 난 프롤로그에서 아기 루돌프도 노래하는 거 이날 처음 알았다. 아님, 지난주 토요일 이후로 음향 설계가 또 좀 더 좋아진건가? 하여튼 앙상블 떼창에서도 가사가 뭉개지지 않고 다 전달되어서 너무 신기하더라. 특히 카페씬에서 "자유주의자, 급진주의자, 정말로 별난 여자야" 라고 하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아들었다.

- 그리고 2열에서 본 은케니와 1열에서 본 은케니는 이렇게 다르구나 하는 걸 새삼 느꼈다. 나는 남들이 다 미친놈 은케니, 정신병원 갓 탈출한 은케니라고 할 때도 그게 딱히 와닿지 않았었다. 번뜩번뜩 날카로운 광기를 뿜어내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미친놈 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오늘 1열에서 보고 어, 너님 미친놈 맞음 하고 인정했다. 이래서 목소리에 속으면 안된다니까. 뒷쪽에서 봤을 땐 루케니에게만 집중해서 보는 것도 아니고, 대략의 분위기와 목소리로 판단하게 되니까 뭔가 광기에 차있지만, 그래도 꽤 냉정하고 냉소적인 해설자구나 했는데, 어우 1열에서 생생한 표정까지 같이 곁들여서 보니 왜 그렇게 다들 은케니 미친놈 타령을 했는지 알겠더라. 가장 인상적인 제스춰는 손가락 까딱거리며 조련하는 거랑, 목 꺽는거. 그 동작 할 때마다 어찌나 섬뜩하던지. 그런데, 시종일관 그렇게 미쳐버린 게 아니라, 멀쩡하게(?) 나타날 때도 있어서 눈빛은 보면 번들번들한데, 표정은 굉장히 차갑고 냉정해서, 저러다 언제 또 돌변할지 몰라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은케니, 무서운 아이.

뭐 평타 레전 은케니 노래 실력이야, 늘 하던대로 잘 했는데, 마담 볼프 살롱에서 가사가 바뀌었더라. "위험을 즐기시려면 그녀가 딱이겠지요." => "그녀가 왜 위험한지 꿈에도 알 수 없겠죠." 워낙 무대에서 애드립이 없는 배우라, 나는 그새 가사가 바뀐 모양이네 했더니, 다른 횽 후기에서 보니까 쌈빡하게 "틀렸어요~"라고라고라. 허허~ 언제 이런 순발력을. 하긴 애드립엔 약해도 순간적인 사고 대처 능력은 뛰어났더랬지. 이날 정신병원 씬에서 다시 김문정 음감에게 젓가락 휘젓는 미친년 드립이 다시 돌아와서, 어제의 트럼펫 주자한테 한 건 역시 레어템이었던 건가. ㅠ.ㅠ


- 송토트는 18일 낮공연에 이어서 2번째였는데, 이날 연기의 노선을 바꿨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순정남 모드에서 완전 나쁜 남자 모드로 변신을 했나. 프롤로그에서 등장 할 때 부터 실실 쪼개면서 등장하는데 그때부터 어라, 저건 뭐지? 했다. 엘리자벳 같은 여자를 - 특히 옥엘리 - 얻기 위해서는 청순가련애잔순정남으로는 안되겠다고 판단한건가? 음, 난 사랑에 빠진 섬세한 남자st 송토트도 취향이었어서 조금 아쉬웠다. 
18일 공연에서 송토트는 송창의 씨가 원래 가지고 있는 섬세한 남자 이미지와 맞물려서 정말 엘리자벳과 사랑에 빠진, 엘리자벳을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죽음을 연기하고 있었는데, 이날 공연에서는 미안하지만 살짝 양아삘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왜 이렇게 건들거리고 실실 쪼개는 거야 싶어서, 18일 공연에서 보여준 애수에 찬 송토트가 살짝 그리웠지만, 워낙 잘생기셔서 뭘 해도 그림이 되기는 하더라.

송창의 씨의 노래가 다른 쟁쟁한 뮤지컬 배우들과 비교하면 부족한 면이 많지만, 그래도 나는 송토트가 기본적으로 가진 음색을 좋아하고, 또 안되는 건 미련없이 포기하고 자기가 잘 낼 수 있는 음역대로 낮춘 것도 괜찮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얼빠라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마지막 춤은 용서가 안되는 수준이었음. -_-
지난 18일 공연에서 내가 송창의 씨 노래중에 가장 오오~ 하면서 봤던 건 '그림자는 길어지고' 와 '내가 춤추고 싶을 때' 였는데, 애시당초 송토트가 엘리한테 너무 홀딱 반한 상태라 이 둘은 기싸움이 성립이 안되겠구나 하고 지켜봤거든. 그런데, 역시 좋은 배우는 배우다 싶었던 게, 송창의 씨는 거기에서 다 감싸안는 포용력의 죽음을 선보이더라. 그러니까 전투적인 옥엘리에 맞서 싸우는 게 아니라, 너 하고싶은 대로 마음껏 앙탈 부려봐, 나는 다 받아줄 수 있다는 대범한 죽음. 저 섬세하고 애수에 찬 죽음이 옥엘리에 그냥 캐발리겠구나...하는 예상을 뒤집어 엎는 장면이라, 여기에서 송토트에 대한 호감도 상승.
그랬는데, 이날 공연에서 나쁜 남자 모드로 돌아선 송토트. 전투력 막강한 옥엘리에 같이 맞서 싸우면 댁은 그냥 밀릴 수 밖에 없거든요....? 좀 더 수련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엘리한테 참패를 당하고서는 그 아들 루돌프를 집적(;)이러 나타난 송토트. 여기서도 18일 낮공연과 정말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소용없어, 그만두렴." 하는데, 18일 공연에선 너나 나나 그 여자한테 관심 받기는 글렀어~ 뭐 이런 연대감이랄까, 저 친밀한 유대감은 뭐지? 싶었지만 친구라는 말이 납득이 갔는데, 이날 공연에선 아주 제대로 루돌프를 꼬시고 있더라. 게다가 준상이도 18일 공연에선 그렇게 적극적으로 매달리지 않았는데, 송토트가 막 볼도 쓰다듬고 스킨쉽에 이러니까 상당히 적극적으로 붙잡는 거다. "마음먹으면 강해질 수 있어." 이 부분을 준상이는 포르테로 부르지 않아서 다른 두 어린 루돌프랑 차이가 있는데, 저렇게 막 매달리면서 부르니까, 뭐랄까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줄테니까 가지마세요~ 라는 거 같아서 더 애처롭고 뭔가 간질간질한 케미스트리가 생기더라. 거기에 확인사살 하듯, 송토트가 준상돌프 손에 키스를 똻!! 진짜 어버버 거리면서 이 가정파괴범!!! 하고 봤던 씬. 그러더니만, 그 케미가 커튼콜까지 이어져서, 커튼콜에서 송토트랑 준상이가 손잡고 나오는 거 보고 또 어버버.

- 딴길로 새는 소리지만, "마음먹으면 강해질 수 있어." 부분을 세 어린 루돌프별로 보면, 어디까지나 내 감상이지만
효준이는 씩씩하고 용기있는 자신을 어필하는 것 같다. 어젠 고양이도 쏘아죽였어요, 나 잘했죠? 그러니까 같이 있어줘요, 이런 느낌.
준서는 외모도 목소리도 아기 천사 같은 아이가 그 부분에서 반전돋게 앙칼지게 팍 치고 들어오는데, 어젠 고양이도 쏘아 죽였다는 게 살짝 협박조로 느껴지면서, 떠나려는 죽음을 억지로 잡아 앉히려는 것 같다고 할까. 그래서 너도 엘리자벳 아들 맞구나 뭐 그런 느낌.
준상이는 위에 썼다시피 거기에서 강세를 주지 않는데, 좀 더 애처롭게 매달리는 느낌이라, 어딘지 섬약한 미소년 삘이 강하다.
하여간 세 아기 루돌프들 목소리도 곱고 예쁘고, 연기도 늠늠 잘해줘서 대견하다.

- 옥엘리는 선영 엘리와 비교하면 감정을 밖으로 발산하는 타입인데, 그게 젊어서 그런 것도 있는 듯. 의지도 강하고, 자기애도 그만큼 강해서, 방랑하는 씬에서 거울을 들이 밀면, 선영 엘리보다 훨씬 격하게 반응하는데, 그게 선영 엘리는 거울과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피하는 쪽이라면, 옥엘리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늙어가는 모습을 견딜 수 없는 쪽.
옥엘리가 부르는 노래 중 이날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정신병원 씬에서 "아무 것도 없어." 인데, 이 곡이 참 선율도 일반적이지 않고, 리듬도 복잡한데다 음역도 상당히 높고, 감정을 넣고 폭발시켜야 하는 부분도 있어서, 엘리자벳 솔로곡 중에 가장 난이도가 높은 곡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가만히 서서 불러도 어려울 이 곡을 컨베이어 벨트 위를 걷고,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불러야 하니, 배우에 대한 배려가 없는 동선이라고 해야할지. 하여튼 그래서 선영 엘리가 이 곡을 부를 땐 약간 힘겨워 보이는데, 젊다는 건 역시 좋은 것인가, 옥엘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감정을 폭발시키면서 성량도 빵빵하게 질러주더라. 특히 '난 강한척 할 뿐' 할 때 아주 화려하게 터트려주고 점점 사그라드는 목소리가 마음을 울렸다.

- 난 개인적으로 요제프 역에는 윤영석 씨가 좀 더 취향인데, 옥엘리와의 케미는 확실히 민제프 쪽이 더 좋은 것 같다. 그래도 2막의 '행복은 너무 멀리에'에서 두 사람의 하모니는 잘어우러져서 만족스러웠다. 이 장면에서 윤제프와 옥엘리가 아닌, 요제프와 엘리자벳으로서의 두 사람이 참 안타깝게 느껴졌는데, 나를 용서하라고, 여전히 당신을 사랑한다는 요제프와 서로 갈 길이 다르다는 엘리자벳. 이 둘은 끝까지 소통하지 못하고,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구나 싶어서 그게 안타깝더라.

- 세 토트가 아마도 세 루케니처럼 각자의 개성과 노선이 다를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송토트가 이렇게 딱 로맨스 담당의 토트를 해버리니까 종말이니 세기말의 혼돈이니 하는 게 다 겉돌아버려서 그 점은 좀 아쉽다.

- 아, 이날 공연 좋았던 거. 지난 두 번의 공연(17일, 18일)에서는 마지막에 은케니가 로프에 목을 걸면 바로 커튼이 닫히는 바람에 3초만 늦춰주지!! 했었는데, 이날은 고개 늘어뜨리는 것 까지 제대로 보여주고 커튼이 닫혀서, 제대로 극이 완결된 깔끔한 느낌이 좋더라.
엘리자벳 (Das Musical Elisabeth)

일   시 : 2012. 02. 08 ~ 2012. 05. 13
장   소 :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
관극일 : 2012. 02. 18 (토) 14:00
대   본 : 미하엘 쿤체, 작곡 : 실베스터 르베이
연   출 : 로버트 요한슨, 협력연출 : 박인선, 음악감독 : 김문정
캐스트 : 엘리자벳 - 옥주현, 죽음 - 송창의, 루케니 - 박은태, 프란츠 요제프 - 민영기, 소피 대공비 - 이정화, 청년 루돌프 - 전동석, 어린 루돌프 - 탕준상

- 옥주현 엘리자벳, 송창의 죽음, 민영기 요제프, 탕준상 어린 루돌프 자체 첫공.

- 옥주현 엘리자벳은 기대 이상이었다. 공연에서는 처음 만났는데, 이 아가씨가 나름대로 뮤지컬 무대에서 경험이 쌓이더니, 이제야 빛을 보는 건가 싶을만큼 노래도 연기도 훌륭했다. 이전에 옥주현 씨의 공연을 봤던 지인들의 평에 의하면 노래는 잘 하는데, 표정 연기가 미숙하고, 상대 배우와 하모니를 이루지를 못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는데, 엘리자벳에서는 제대로 연기를 하고 있는데다가, 이제는 상대 배우와 호흡하는 법도 제대로 익힌 것 같더라. 타고난 목청이 좋다고 할지, 목소리가 확실히 트여있고, 힘있게 뱃심으로 쭉 뻗어내는 발성이 아주 시원시원 하더라. 물론 디테일한 감정 표현에서 섬세함이 좀 부족한 면이 있지만, 연기 내공 십여년의 김선영 씨와 어떻게 비교를 하겠는가.

두 명의 배우가 표현하는 엘리자벳이니 당연히 연기의 노선도 다르고 (연출의 의도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디테일이나, 자잘한 대사도 조금씩은 차이를 두고 있었는데, 가장 차이가 나는 점은 감정 표현의 방법이 선영 엘리가 안으로 끌어들여서 삭이는 표현이라면, 옥엘리는 밖으로 다 터트리는 표현이다. 그래서 숨이 막힐 것 같다는 선영 엘리가 목을 부여잡으며 질식할 것 같은 씨씨라면, 옥엘리는 가슴을 치고 숨을 몰아쉬는 쪽이다.

그리고 선영 엘리가 본질적으로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성정을 타고나서, 그 정도가 차츰 심해지는 씨씨라면, 옥엘리는 환경적인 요인(궁정 내 왕따, 고된 시집살이, 믿었던 남편의 외도 등)으로 점점 마음과 영혼이 피폐해져가는 씨씨라고 할까. 그래서 젊은 날의 전성기 시절 씨씨일 때 옥엘리는 꽤 강해서 '내가 춤출 때' 같은 경우 옥엘리는 죽음 따위! 다 물리칠 기세ㅋㅋㅋ 아, 사실 여기엔 '죽음'이라는 캐릭터와의 상성도 꽤 중요한데, 이날의 죽음인 송창의 씨는 내 보기에 세 죽음 중에 제일 순둥이가 아니었을까 싶어서ㅋㅋㅋ. 옥엘리 - 류죽음일 때 어떤 그림이 나오는지 꽤 궁금해지더라.

그리고 루돌프의 장례식 장면에서 슬픔을 표현하는 방법도 두 배우가 달랐는데, 위에도 여러번 언급했지만, 김선영 씨는 슬픔을 안으로 끌어들여 삭이다 순간적으로 탁 풀어내는 쪽이면, 옥주현 씨는 오열하며 슬픔의 감정을 발산하는 쪽이다. 게다가 옥주현 씨는 거기에서 한 발 더 나가서 요제프를 원망하며 요제프의 가슴을 치는 디테일을 집어넣었는데, 아들을 죽게 했다는 자책감 + 그렇게 아들을 몰아간 남편에 대한 원망의 감정이 더해져서 요제프가 내민 손을 거절하는 이유를 상당히 설득력있게 만들어냈다.

극의 마지막 부분, 루케니에게 찔리고 나서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에서, 선영 엘리는 검은 상복을 벗어던지고 나서 무거운 짐을 벗어놓은 것 처럼 자유롭게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데, 옥엘리는 아직 육신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해 부자연스러운 걸음걸이, 찔린 옆구리를 부여잡고 힘겹게 죽음의 다리를 올라간다. 두 배우의 해석 차이인 듯 한데, 아마도 옥엘리는 죽음의 키스를 받기 전까지는 죽은 게 아니라고 보고 그렇게 연기하는 듯 하다.
결론적으로 선영 씨의 내면 연기도 좋고, 주현 씨의 감정 전달이 쉬운 연기도 다 설득력이 있어서 두 배우의 다른 해석을 보는 즐거움이 있어 좋더라. 이런 게 더블 캐스팅의 묘미니까.

- 역시나 무대에서는 처음 만나는 송창의 씨. 죽음의 캐릭터가 달라지니 극 자체가 달라지더라. 엘리자벳 포스터에 쓰인 "죽음마저 사랑에 빠지게 한 아름다운 황후"에 가장 어울리는 '죽음'이었다. 실제로도 외줄에서 떨어진 씨씨를 공주님 안기로 들고 들어올 때 그림은 포스터 그 자체였다.
하여간에 프롤로그에서부터 죽음이 엘리자벳을 너무 사랑해! @.@ 저 잘생긴 남자가 목소리도 엄청 감미로운데, 어찌나 절절하게 엘리~ 자벳~ 하고 부르는지 원. 그래서 은케니가 날카롭게 엘리~자벳! 하고 외치니까 초상화만 쳐다보다가 고개를 홱 돌려서 루케니를 내려다보며 니가 뭔데 내 여자 이름을 부르는 거임? 하는 표정으로 엘리~자벳! 하고 노래하는데, 아, 송창의 씨는 사랑에 빠진 죽음이로구나 싶더라. 결혼식 장면에서 등장할 때, 다리 난간 위에서부터 와이어 밖으로 엘리자벳을 향해 손을 쭉 뻗는 아주 적극적인 구애를 펼치는 죽음이다.
특히 류토트랑 아예 대사부터 달랐던 장면이 있는데, 엘리자벳이 병으로 쓰러졌을 때 의사로 변장해서 등장하는데, 시녀장에게 류토트는 "이만 나가주세요."라고 하는데, 송토트는 "우리 둘만 있게 해주세요." 라고 해서 잠시 뿜겼다.

송창의 씨는 기본적으로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발성도 그만하면 괜찮은 편이고, 노래도 음역대가 안맞는 부분은 포기하고 음을 낮췄는데, 차라리 그편이 낫다. 무리하게 지르는 것보다는 안정적으로 가는 편이 관객도 덜 괴롭고. 허나, 그런 걸 떠나서 목 상태 자체가 별로 좋지가 않아서 1막에선 살짝 불안한 면이 있었지만, 2막에서는 그래도 나아져서 그 정도면 선방한 거라고 보고. 너무 관대한 평가인가? 그 비주얼이면 다 용서되는 수준임.ㅋㅋㅋ

그런데, 송토트는 이미 엘리자벳에게 너무 반해버려서 싸움도 하기 전에 지고 들어간다. 안그래도 상대는 에너지를 발산하는 쪽의 옥엘리인데. 그래서 옥엘리에게 차일 때마다 표정이 너무너무 상심한 표정.ㅋㅋㅋ 섬세한 송창의 씨 캐릭터랑 맞물려서, 가뜩이나 안스러운데. 특히 그 마마보이 요제프에 최후 통첩이라고 선전포고 날리는 씬에서, 나름 분위기 잡고 침대 위에서 엘리~자벳~ 이러고 등장하는데 (진짜 비주얼은 최강이더라;), 옥엘리가 끌려가다가 딱 뿌리치며 필요없어, 가~~~~~~~~~~~! 라고 소리를 지르니까, 충격받아서 침대에서 내려와 퇴장할 때도 막 비틀거려.ㅋㅋㅋ 웃을 일이 아니지만, 여기서 송창의 씨 연기가 정말 딱 상처받은 섬세한 남자st여서.ㅋㅋㅋ

그렇게 이 둘은 밀당이나 기싸움 자체가 성립이 안되겠구나 하며 지켜본 '내가 춤추고 싶을 때'. 와우, 송창의 씨도 그렇게 녹록한 배우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더라. 뭐냐면, 포용하는 죽음이라고 할까. 그래 마음껏 앙탈 부려봐, 다 받아주겠어, 어차피 넌 나에게 돌아오게 돼있으니까...라는 부드럽게 감싸안는 대범한 죽음이었다. 그래서 노래가 끝날 때 쯤, 전투적인 옥엘리가 머리도 살짝 흐트러지고 한바탕 전투를 치른 기색이었던 것에 비해, 송토트는 오히려 여유롭고 단호하게 엘리를 바라보더라. 역시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게지. 이 죽음 역시 만만치 않다.
그치만, 너무 순정돋게 엘리자벳을 사랑하고 있어. ㅠ.ㅠ 마지막에 엘리자벳을 데리러 왔을 때도, 마치 잠긴 문 앞에서 요제프가 엘리자벳 부르는 것 처럼, 아주 애절하게 엘리자벳을 부르더라.

아, 그리고 송창의 씨가 의외로 가창력이 좋다고 생각했던 부분이 '그림자는 길어지고' 넘버였는데, 송창의 씨도 기본적으로 벨벳 보이스 계열이라 동석이와 목소리 어울림이 좋았다. 류토트 + 동돌프 케미에야 못미치겠지만, 예상 외로 둘의 목소리가 잘어울리는데다가 송창의 씨가 그저 넘버를 소화해내는 데 급급한 그런게 아니라, 노래에 감정을 실어서 제대로 불러주더라. 강하게 샤우팅해야 할 부분(미래의 황제 폐!하!가! 같은 부분)도 제대로 질러주고. 뭐, 마이크를 키운건지 모르겠지만, 성량 괴물 동석이에게 그럭저럭 밀리지 않고 자기 소리를 내서 나는 오오~ 하면서 봤다. 무엇보다 겁나게 잘생긴 미남자 둘이 그러고 있으니 눈도 호강, 귀도 호강 ㅋㅋㅋ 아, 난 예쁜 거 밝힌다고 누누히 말해왔음;

- 지난 두 번의 공연을 모두 윤영석 씨의 요제프(이후 윤제프)로 보고, 민영기 씨의 요제프(이후 민제프)는 이날이 처음이었는데, 민제프는 확실히 더 강성이라, 마마보이에 잘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윤제프가 착하고 말 잘듣는 모범생 삘의 마마보이라면, 민제프는 어머니의 권력이 막강하기에 알아서 기는 아들이라고 할까. 그래서 윤제프가 신혼 시절 엘리자벳에게 어머니의 충고를 들어줘 라고 할 때는 나름 이해가 되는 게, 평생 그렇게 사는 게 당연한 줄 알고 살아왔으니까, 그게 무리한 부탁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쪽인데 반해, 민제프는 오히려 어머니 눈치를 보며 엘리자벳을 설득시키려고 하니까 그게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좀 비겁해 보인다. 즉, 윤제프는 이런 건 당연한 건데, 왜 이해를 못해? 라는 쪽이고, 민제프는 당신 편을 들고 싶지만, 내 입장이라는 게 있어서 말이지...라는 태도로 보인다는 거. 개인적으로는 윤제프 쪽이 목소리도 그렇고 더 취향이다.

- 이날의 애기 루돌프는 탕준상 어린이. 준상이는 모차르트!에서 내 최애 아마데였던 것도 있어서, 기대도 좀 있었는데, 어우, 이렇게 고운 목소리인 줄 몰랐다. 세상에, 엄마~ 하고 찾는 목소리부터 너무너무 천사인데다가, 그 잠옷!!! 서양 고전 영화에서 봤던 그런 천사돋는 잠옷을 입혀놓으니 또 얼마나 아기 천사 같은지. 그런데, '마음 먹으면 강해질 수 있어.' 부분에서 강세를 줘야하는데, 강세없이 그냥 죽 이어나가서 이 부분은 좀 아쉬웠다. 어디 아픈 것 처럼도 보이고.
아, 커튼콜에서 여간 잔망스럽지 않은 준상이. 이번에는 커튼콜에서 이정화 소피 특유의 손동작을 따라 하더라. ㅋㅋㅋ

- 청년 루돌프 동석이는 '내가 어머니의 거울이면 좋겠어요.' 부를 때, 도와달라며 무릎 꿇는 장면에서 정말 최대한 몸을 작게 웅크려서 저 커다란 아이가 이 사이즈가 될 수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작아져서 참 안스러웠다. 캐릭터의 상황과 맞물려서 저렇게 자꾸 작아지다가 사라지는 게 아닐까 싶은 마음. 그리고, 여기서 대응하는 두 엘리가 또 조금 다른데, 선영 엘리가 세상만사 다 귀찮고, 지친 기색으로 거절한다면, 옥엘리는 다시는 황실과 엮이고 싶지 않다는 의지를 내보이며 거절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어지는 마이어링 왈츠에서 동석이가 조금만 더 몸에서 힘을 빼주면 처절함이 더 극대화될 것 같은데, 음...무대 위에서 몸에 들어간 힘을 뺀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감각이긴 하겠지.

- 마지막으로 은케니. 노래야 매 공연 기복없이 훌륭! (세번 밖에 못봤지만;) 연기에 대해 말해보면, 왼쪽 사이드에서 보니까 깨알같은 디테일이 정말 눈에 잘 들어오더라. 루케니가 워낙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여기저기서 등장하는 장면이 많은데, 자기가 메인이 아니라도 참 바쁜 캐릭터다. 때로는 시종이 되어 높으신 분들께 차 셔틀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뱃사공으로 변신해서 이제 막 사랑에 빠진 젊은 연인들의 로맨틱한 데이트 분위기도 만들어 주고, 때로는 카페 마스터로 서빙을 하고, 기념품 판매도 하는 등 십잡스가 따로 없다.
재미있는 게 루케니의 메인 의상(가로 줄무늬 셔츠에 후줄근한 겉옷)일 땐, 해설자 루케니이고, 뭔가 의상을 갈아입고 나타나면 극 중에 스며들어 다양한 직업군을 연기하고 있더라. 이게 어떤 느낌이냐면, 관객들 눈엔 루케니로 보이지만, 극중 인물들 눈엔 때에 따라 시종, 뱃사공, 카페 마스터, 지나가는 행인 등 그 자리에 있어도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 마치 '가구'같은 존재랄까 뭐 그렇게 보여지는 것. 이건 루케니가 죽음과 함께 시간의 흐름에 지배 받지 않는 캐릭터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재밌었던 디테일을 몇 개 기억해보자면, 바트 이슐에서 헬레네와 요제프가 선을 보는 자리. 한쪽 구석에서 옥엘리가 혼자 컵케이크를 먹다가 그냥 지나치려는 루케니를 발견하고 차를 달라고 손을 든다. 그럼 루케니가 차를 대접하고 옥엘리는 자기가 먹던 컵케이크를 루케니 주고 먹으라곸ㅋㅋㅋ. 그럼 루케니가 일단 받기는 받았지만 떨떠름한 표정으로 들고 있고, 그럼 옥엘리는 자꾸 먹어보라고 권하고 루케니가 마지못해 먹는 시늉 좀 하다, 옥엘리가 곁에 다가온 요제프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루케니가 뭐씹은 표정으로 컵케이크를 쟁반 위에 올려놓는다. 이 짧은 순간 시트콤의 한 장면이 지나가는 거다. ㅋㅋㅋ
그 외에도 카페 씬에서 타자를 치며 기사를 작성하는 테이블 뒤로 가서 뭐라고 썼는지 기웃거리다 기자(로 보이는 남 앙상블)가 그걸 못보게 가리니까 에이~ 라는 표정으로 쌩하니 돌아서는 것도 귀엽고. 정신병원 씬에서 요즘은 정신 병자가 아주 많다며 김문정 음감 앞에 가서 언제부터 젓가락들고 미친년 마냥 팔을 휘저었냐고 할 때, 김음감이 머리위로 하트만들어서 응대하니까 빵터져서 웃음 참는 것도 웃겼다.
가장 칭찬해주고 싶었던 건 조명이 꺼진 뒤에도 계속 캐릭터로서 연기하는 것. 요제프와 엘리자벳의 첫날밤, 퇴장하는 루케니와 소피 대공비가 왼편 어둠속에서 스쳐지나가는데, 소피를 향해 깍듯이 절을 하고 물러나는 은케니. 이런 은케니라 좋다.

+ 커튼콜에서 송토트는 레알 아이돌 댄스를 제대로 소화해서 추더라. 연습을 정말 많이 했는 모양이다. 그리고 환호속에 등장한 꽃같이 어여쁜 옥엘리는 시종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인사하는데, 뭐랄까, 미운 오리새끼가 아름다운 백조로 성장한 걸 지켜보는 그런 기분이었다.

++ 집에 돌아와서 옥류은 조합을 뒤져봤더니, 3월 21일 마티네 공연이 유일하더라. 장난하냐?!!! 4차 오픈할 땐 옥류은 조합좀..굽신굽신.
엘리자벳 (Das Musical Elisabeth)

일   시 : 2012. 02. 08 ~ 2012. 05. 13
장   소 :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
관극일 : 2012. 02. 17 (금) 20:00
대   본 : 미하엘 쿤체, 작곡 : 실베스터 르베이
연   출 : 로버트 요한슨, 협력연출 : 박인선, 음악감독 : 김문정
캐스트 : 엘리자벳 - 김선영, 죽음 - 류정한, 루케니 - 박은태, 프란츠 요제프 - 윤영석, 소피 대공비 - 이정화, 청년 루돌프 - 김승대, 어린 루돌프 - 이준서

- 아무리 무대 전체를 보네 어쩌네 해도 역시 배우들 표정 생생하게 보이는 앞자리가 최고다. 다만 스모그 효과는 좀 작작 해주라. 멀리서 봤을 땐 그렇게 과한지 몰랐는데, 파도처럼 밀려오는 스모그에 정말 눈앞이 하얘지더라. 오케스트라 연주자분들 악보나 지휘자가 보이기나 했을까; 급기야 2막, 호수씬에서는 김문정 음감이 손사레를 치더라.
하여간, 11일과 다른 캐스트는 소피 대공비와 루돌프들.

- 전에도 말했지만, 극의 시작을 어떻게 풀어나가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에 관객을 얼마나 빨리 몰입시키고, 등장 인물들을 최대한 짧은 순간에 이해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엘리자벳의 프롤로그는 그야말로 기선제압에 있어서는 최고 수준. 압도적인 음악과 앙상블의 물량공세에, 캐릭터에 대해서도 황후 암살범이면서 해설자이기도 한 루케니를 한 방에 설명 끝내고, 몰락한 합스부르크 황실, 그리고 주인공인 엘리자벳에 대한 궁금증을 키우고, 마침내 "죽음"이라는 판타지스러운 존재를 들이민다.
그 죽음이 등장하는 다리는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상징적인 매개채로 오로지 죽음만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그래서 다리의 등장(?)은 단순한 무대장치의 전환이 아니라, 자 이제 죽음이 등장합니다~ 하는 신호와도 같다. 프롤로그에서 죽음은 지상으로 내려오지 않고, 그저 다리 위에서 엘리자벳의 초상화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그것은 사랑'을 외친다. 류정한 씨의 죽음은 그 본인이 원래 가지고 있는 분위기에서 풍겨져 나오는 포스로 '죽음'이라는 이미지 반은 먹고 들어가는 듯, 등장할 때마다 그 존재감이 남다르더라.

- 엘리자벳과 죽음이 처음으로 만나는 장면. 외줄타기 하다 떨어진 씨씨를 죽음이 공주님 안기로 안아들고 등장하는데, 이 장면에서 좀 웃었던 게, 안전 문제로 그렇게 밖에 연출이 안될 것 같기는 한데, 씨씨가 중력을 무시하고 너무 사뿐하게 떨어질 뿐만 아니라, 그렇게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데, 너무 멀쩡하게 죽음의 품에 안겨 등장하니까, 이게 어떻게 보이냐면, 떨어져 죽을 운명이었는데, 죽음이 그녀만 특별히 봐줘서 염동력을 발휘해서 털끝 하나 안 다치게 구해냈다...는 것처럼 보이더라는 거. 그래서 뜬금없는 가사 '특별한 너 엘리자벳~'에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연출이었다.ㅋㅋㅋ 그리고 거기에 방점을 찍는 은케니의 조롱. "와우~ 사랑의 시작~" 루케니는 자신도 죽음의 지배를 받으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을 향해 겁도 없이 비웃음을 날려주는 그런 캐릭터라 매력적이다.
죽을 뻔했던 거 치고는 참으로 멀쩡한 씨씨는 아빠처럼 자유롭게 살고싶다던 그 노래로 죽음을 향해 가지 마요, 왕자님~ 이러고 있다.ㅋㅋㅋ 같은 노래를 통해 씨씨가 꿈꾸는 자유는 결국 죽음 만이 전해줄 수 있다는 의도였다면 훌륭하오!

- 황제 요제프와 대공비 소피를 소개하는 씬에서 지난 번에 이태원 씨, 이번엔 이정화 씨였는데, 이태원 씨는 대공비 쪽으로 좀 더 무게 중심이 가있다면, 이정화 씨의 소피는 좀 더 시어머니 쪽으로 무게 중심이 가 있는 느낌이다. 음색 면에서도 이태원 씨가 우아하면서도 묵직하게 누르는 목소리라면, 이정화 씨는 엄격하고 깐깐한 느낌. 그러나 두 분 다 각자의 개성으로 황실의 웃전으로서 철의 여인이라는 느낌은 잘 살려주셔서, 누구를 보더라도 괜찮을 듯.

- 죽음과 엘리자벳의 두번째 만남은 결혼식. 바로 그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기 전까지'라는 결혼 서약이 등장하는 그 결혼식 장면이다. 지난 번에도 이 장면에서의 연출이 마음에 들었다고 했는데, 참 볼수록 괜찮은 연출이다. 무대에 영상을 덧입히는 연출은 이질감을 느끼게 할 수 있는데, 그걸 아예 영상 연출법을 들고와서 그 이질감을 없애버렸다. 카메라의 앵글과 샷을 무대 위에 재현해낸 건 정말 괜찮은 시도였다. 로버트 요한슨 연출이 영상 사용을 남발하는 경향이 좀 있는데, 하다보면 는다고, 이 분도 점점 내공이 쌓이시는 거겠지.
그리고 여기서 깔리는 왈츠곡은 또 얼마나 다크하면서도 매력적인지. 이게 2막 마이어링 왈츠에서 한번 더 사용되는데, 참 절묘한 곡 배치다. 무엇보다 자, 이제 죽음이 등장합니다~ 라고 알려주는 호른의 묵직한 한방과 서서히 내려오는 다리라던가, 이런 게 상당히 멋지게 연출된다. (출렁거리는 와이어들은 좀 불안해보이긴 하지만;)

죽음의 천사들(이후 죽천)의 호위(;)를 받으며 '마지막 춤'을 노래하는 죽음. 중앙 자리에서 보니까 제일 멋지게 눈에 들어오는 건 6명의 죽천들이 죽음 뒤로 가서 반쪽짜리 날개를 펼치는 장면. 사이드에선 제대로 안 보일 것 같은데, 중앙에서 보면 이건 3쌍의 날개를 단 세라핌이 따로 없다. 루시퍼를 연상시키는 안무지만, 류정한 씨는 죽음이라는 캐릭터에 사악함을 부여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검은 천사로 보이더라.
이 '마지막 춤'은 죽음이 엘리자벳에게 보내는 일종의 경고라고 할까. 선빵을 날린 거다. 너는 결국 나와 마지막 춤을 추게 되어있다고. (그러나 어디서 뭐하다 이제야 나타나서 넌 나 대신 황제를 선택했냐며 구남친 돋는 죽음. 그러니 허구헌날 차일 수 밖에...;;)

- 시작부터 삐걱거리던 엘리자벳의 결혼 생활. 이정화 소피는 진짜 무서운 시어머니 같은 느낌이다. 거기에 비해 이태원 소피는 사감 선생님 쪽에 더 가깝다고할까. 이건 잔소리가 아니라, 규칙이고 예법이야...라는 느낌. 그래서 좀 더 냉정한 건 이태원 소피 쪽. 이정화 소피는 아들에 대한 집착도 더 강하고, 하여간 시어머니 느낌이 훨씬 더 강했다.
아, 그리고 여기서 엘리자벳과 요제프의 결혼 생활을 인형극으로 연출한 것도 매우 좋았다. 엘리자벳의 외롭고 힘든 처지를 간략하게 설명하면서, 죽음의 입김이라고 할지, 루케니가 황실 인물들을 인형처럼 조종하는 게 참신하더라.

- 세번째 엘리자벳과 죽음의 만남은 엘리자벳의 첫째 딸, 소피의 죽음으로 이루어졌다. 멀찍이 높은 데 서서 '길어지는 그림자'를 부르는 죽음은 좀 없어보였;;

-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카페 씬. '행복한 종말'이라는 이 넘버는 제목의 이율배반처럼, 종말을 얘기하면서도 신나는 곡이다. 게다가 루케니가 가르송 복장으로 나타나서 서빙을 보는데다가 죽천들이 카페에서 알바를 뛴다~ 아,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황태자 탄생과 관련해서 루케니가 탁자위에 올라가 솔로로 부르는 부분에서 너무너무너무 친절하게 가사 내용을 무대 뒤쪽에 재현해서 보여준다는 거. 아마도 1막에 등장하지 않는, 비중이 너무 적은 청년 루돌프를 한 번이라도 더 무대에 올리기 위한 서비스인 동시에, 나름 2막의 루돌프에 대한 복선으로 처리한 것 같다. (장면 장면 쓰려니 벌써부터 지친다;)

- 네번째 엘리자벳과 죽음의 만남은 참으로 '사랑과 전쟁'스러운 장면에서였다. 시어머니의 횡포에 견디다 못한 엘리가 마마보이 요제프에게 나냐, 어머니냐 선택하라는 선전포고를 하고난 뒤. 이 모든 구질구질한 현실을 벗어나게 해주겠다며 침대에서 이리 오라며 유혹하는 죽음ㅋㅋㅋ 아놔, 여기서 죽음의 유혹적인 면모를 보여줘야한다는 건 알겠지만, 이건 너무 대놓고 제비스러워서. 게다가 죽음에 끌려가다 정신차린 엘리자벳이 대차게 뿌리치며 필요없어! 가────!!! 라고 하는데, 뻘쭘하게 돌아서는 죽음이 또 너무 상처받은 표정이라, 죽음의 체면이 말이 아닌 장면이 되버렸다.

- 황후가 불행한 황실 생활을 하거나 말거나, 높으신 분들의 마음의 병은 사느냐 죽느냐는 서민들의 고통 앞에서 그냥 사치스러운 투정일 뿐. 비어있는 우유통 앞에서 분노하는 민중들 앞에 루케니가 나타난다. 이 장면에서 은케니의 표정 연기가 인상적이었는데, '오늘도 배달이 없습니다.' 하고 민중들을 향할 때는 그것 참 안됐군요,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답니다 근심 가득한 표정이다가 뒤돌 때 씨익~ 웃는 거 완전 소름끼쳤다. 그리고 무대 뒤로 돌아가면서 앙상블의 '누군가는 이 상황을 즐기지'라는 가사에 딱 맞춰서 또 한번 썩소를 날려주고는 정색을 하고 민중들을 향해 '모든 사실들을 알고싶나?'라고 하는데, 와, 진짜 디테일을 얼마나 다듬는 거냐.
사실, 루케니라는 역이 뭐 대단한 연기력이 필요 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쉬운 역이 절대 아닌게, 루케니는 해설자로 극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다가도, 어느 순간 극 안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야 하는데, 그 두 가지 역할을 참으로 자연스럽게 소화해내더라. 그런 장면 중 은케니의 연기력이 빛을 발하는 게 이 '밀크'가 아닐까 한다. 여기에서 은케니는 정말로 민중이 자유를 얻고, 그들의 힘으로 해방되기를 바라는 혁명가가 아니다. 그저 이 종말을 향해 달려가는 세상에 혼란을 던져줄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선동가다. 그런 냉소적인 모습이 번뜩번뜩해서 아주 빛이 난다. 게다가 탄탄한 노래 실력으로 앙상블을 받쳐주고 끌어주니, 앙상블과 환상적인 조화에 절로 탄성이 터져나온다.

- 1막의 피날레. 민중들이 굶던 말던, 나라의 음모 따위는 상관않고 외모를 가꾸기에 여념이 없는 엘리자벳. 사치스런 황실 여인의 행태로 비난받아도 할 말 없는 장면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주인공인 엘리자벳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 모든 행위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장을 하는 것과 같다. 창과 방패를 손질하듯 공들여 머리를 손질 하고, 전사가 몸을 단련하듯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고, 갑옷을 두르듯 아름다운 드레스를 걸친다. 그렇게 완전무장을 하고 전쟁터로 나서는 전사와 같이 그녀는 남편과 죽음을 대면한다. 요제프는 그녀의 위용 앞에 진작 무릎을 꿇었으며, 죽음은 분하지만, 기다리기로 한다. 시간은 그의 편이니까. 윤제프와 류토트 그리고 선영 엘리의 삼중창은 참으로 황홀하다.

- 2막의 오프닝은 루케니의 원맨쇼. Kitsch! 루케니는 화자이면서 작가를 대변하는 캐릭터인데, 이 넘버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엘리자벳이라는 인물을 냉소적으로 비평한다. 그전까지는 그저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고 하면, 이 넘버에 와서 그녀가 끌어안고 있는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조소를 퍼붓는 거다. 100년 동안 아름다움과 화려함에 가려진 그녀에게 결국 남은 게 뭐냐고. 기념품 상점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싸구려 상품으로 전락한 게 아니냐며, 엘리자벳을 비웃고, 진실에는 관심도 없고, 원하는 건 그저 싸구려 기념품 뿐인 대중들도 끌어들여서 같이 조롱한다. 일타쌍피!
그런데, 참 씐나씐나 하는 음악과 루케니의 익살을 교묘하게 포장해서 쓴웃음을 지을지언정, 기분이 상하게는 하지 않는다는게 영업 포인트! 여기서 은케니의 표정이 또 참 좋은게. 대놓고 비웃음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광대처럼 익살스러운 표정인데, 눈빛만이 냉정하고 싸늘해서 캐릭터의 균형을 잡아주고 있다.

- 헝가리의 독립을 이끌어내면서 정치적인 입지까지 확고하게 다진 엘리자벳이 자신의 성공에 도취해서 부르는 '내가 춤출 때' 넘버. 이 때가 엘리자벳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만만하게 나는 내가 춤추고 싶을 때, 내가 원하는 대로 춤을 추겠다고 선포하지만, 화무십일홍, 달도 차면 기우는 법. 세상의 꼭대기에 올라 이제는 내려갈 일만 남은 그녀의 불안을 부추기듯 죽음이 등장한다.
죽음은 석상 위에 서서 엘리자벳을 내려다 볼 때는 오히려 엘리자벳의 성취를 응원하고 격려한다. 그래 해냈어, 네가 이룬 성과를 축하하지. 그러다 오히려 석상에 내려와 엘리자벳과 동등한 위치에 서서는 그녀를 향해 그래봤자, 너는 내 손바닥 안이야 라고 압박한다. 너는 결국 나를 통해서만 자유를 얻을 수 있노라며 밀어부치는 죽음과 내가 이룬 것들을 보라고, 난 혼자서도 날 수 있다며 저항하는 엘리자벳의 팽팽한 기싸움이 볼 만한 곡이다. 선영 씨와 류정한 씨의 쩌렁쩌렁한 성량 대결도 좋았지만, 조금 아쉬운 건 두 분이 직접적인 맞대결이 없이 엘리를 휘두르는 춤은 죽천이 담당한다는 거. 뭐, 엘리의 드레스 자락이 워낙 광활하게 펼쳐져서 반경 1미터 내로 접근도 어렵기는 하겠더라만은. 하지만, 턴 할 때마다 마치 깃발처럼 휘날리는 드레스 자락은 멋졌다. 엘리의 전투복은 드레스!

- 엄마가 그렇게 자신의 성공에 도취되어 있을 때, 한 켠에서는 방치된 아들 루돌프가 외로움에 사무쳐 엄마를 찾는데, 나타난 건 엄마가 아니라, 죽음. 오늘 애기 루돌프는 준서. 11일 효준이는 형이라고 좀 더 씩씩한 느낌이라면, 준서는 진짜 너무너무너무 애기. 여기 아기 천사가 있어요~ 라는 느낌이더라. 노래하는 목소리도 어찌나 예쁘고 아련한지.
그런데, 여기서 루돌프도 역시 엘리의 아들이구나 하고 느꼈던 건, 가지 말라고 매달려도 죽음이 우린 다시 만날 거야 하며 떠나려고 하니까, 갑자기 '마음먹으면 강해질 수 있어!'하고 팍 치고들어오는데, 그 전까지는 칭얼칭얼 어린애였다가, 어제는 고양이도 쏘아 죽였다는 둥 하며, 나는 너를 강제로라도 잡아둘 수 있어! 라는 거 같아서 어우, 준서가 그런 거 까지 계산하고 연기한 건지 모르겠지만, 그 부분이 참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류정한 씨는 어쩜 그렇게 흐뭇한 아빠 미소를 지으며 애기 루돌프를 바라보시는지. ㅋㅋ 장가가세요. ^^;

- 엘리자벳의 권력이 점점 더 강해지는 걸 두고만 볼 수 없어서 계략을 꾸미는 소피와 조정 대신들. 여기서 마담 볼프의 살롱이 등장하는데, 1막에서 참 무대를 다이나믹하게 사용하는 것과 비교하면 2막은 아무래도 내용 자체가 암울하게 흘러가서 시선을 잡아끄는 연출이 없는 가운데, 마담 볼프의 살롱이 번쩍번쩍 볼거리를 제공한다. 특히 아름다운 앙상블 언니들 브라보~! 그 중에서도 마담 볼프와 루도비카 여사를 동시에 맡으신 윤수미 씨 브라보~그리고 멋지게 채찍을 휘두르고 쌍욕을 날리는, 정신병원의 엘리자벳 이고운 씨도 브라보~ 이고운 씨는 햄릿에서도 유랑극단의 여왕님이셨는데, 엘리자벳에서도 정신병원의 여왕님. 은케니는 이 장면에서 좀 더 자신을 풀어놓았으면 좋겠지만, 차츰 익숙해지겠지.

- 남편의 배신에 불같이 화가 난 엘리자벳. 분위기 파악 못하고 또 나랑 마지막 춤이나 추자는 죽음. 그런데 류정한 씨의 깊이 있는 저음으로 그것도 매우 경건한 목소리로 "성병입니다." 하는데 내용과 목소리의 갭에 살짝 웃음이ㅋㅋㅋ 만날 차이는 죽음이 측은하기도 하지만, 엘리자벳도 알고보면 참 터프한 여인이다. 남편의 타락이 나를 자유롭게 풀어줄 명분이 될 거라며 이때부터 방랑생활 시작.

- 방랑끝에 정신병원을 방문한 엘리자벳. 2막 무대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인데, 정신병원을 거대한 새장처럼 꾸며놓아서 아무리 마음대로 세상을 떠돌아도 여전히 새상 속에 갖힌 새 신세인 엘리자벳을 형상화해서 보여준다. 작은 새장에서 큰 새장으로 바뀌었을 뿐, 너는 여전히 자유롭지 않다고.
남들이 보기엔 전혀 공감가지 않는 사치스런 투정이지만, 원래 사람은 남이 입은 큰 상처보다 내 손톱 밑의 가시가 더 고통스러운 법이다. 자유롭기 위해서는 미쳐야만 하는가, 그러나 난 미칠 용기도 없다며 나에게 남은 건 아무 것도 없다고 절규하는 이 넘버는 음역대도 높고, 선율, 리듬 뭐 하나 간단치 않은 어려운 곡인데, 배우가 컨베이어 벨트 위를 걷고, 회전하는 계단을 오르고 내려가고, 가만히 서서 불러도 어려운 곡을 꼭 이렇게 배우를 힘들게 동선 짜야 했는가 싶더라. 안그래도 음역대가 안맞아서 가성으로 소리를 끌어올리고, 때때로 감정을 폭발시키듯 터트리고 해야하는데, 호흡이라도 편하게 해주면 좀 덧나나. 그렇게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무대를 가지고 캐릭터의 혼란스러움, 미칠 것 같은 답답함을 보여주려고 한 의도는 좋았지만, 연기하는 배우 배려도 좀.

- 이후 엘리는 점점 더 세상을 등지고 자기 내면으로만 침잠해버리면서 극의 활력 또한 떨어진다. 늙고 정신이 병들어 지쳐가는 여인의 청승을 계속 지켜보는 건 재미없지. 그런 타이밍에 등장하는 게 청년 루돌프. 11일 공연에는 동루돌프 였고, 이날은 김승대 루돌프. 일단 승대 씨는 어린 루돌프의 준서와 싱크로율이 좋더라. 그리고 원래 노래보다 연기가 좋은 배우라 노래에 큰 기대는 안했는데, 생각보다 노래가 훌륭해서 깜짝 놀랬다. 그리고 역시 연기에 대한 센스가 좋은 배우라, '그림자는 길어지고' 넘버 시작할 때, 죽음이 등장할 때, 마치 엄습한 죽음을 느끼는 것 처럼 심장을 움켜쥐는 디테일이 인상적이었다. 나오는 씬 자체가 적어서 임팩트있는 연기를 보여줄 기회가 많지 않은데, 이렇게 사소한 거 하나하나 신경써서 연기하는 거 보면 역시 좋은 배우다. 이 부분 연출에서 인상적인 건, 계단(이건 사실 뮤지컬 루돌프의 계단을 엘리자벳에서 땡겨 쓰는 거 같기는 하다만) 위에 올라 시위하는 군중들을 바라보며, 이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세상이 닥칠거라고 죽음과 함께 내려다보는 장면인데, 그러니 네가 세상을 바꿔보라고 부추기는 죽음과 반항심에 뛰쳐나오긴 했지만, 실행할 강단은 없는 루돌프의 흔들리는 시선, 불안한 심리 이런 것들이 제대로 잘 표현되었다.

결국 계획은 실패하고 궁지에 몰린 루돌프가 어머니 엘리자벳을 찾아와 도움을 청하는 노래 '내가 당신의 거울이라면' 승루돌프는 정말 연약한 유리 멘탈의 왕자님이라는 느낌이다. 여기서 아들을 도와주지 않는 엘리자벳은 이기적이고 냉정한 못된 엄마지만, 김선영 씨는 모든 것에 지치고 진절머리가 나서 나무처럼 굳어버린 씨씨를 연기하고 있어서, 그녀를 아주 이해 못할 것도 없었다. 나쁜 엄마라는 사실이 변치는 않지만.

딴소리지만, 동물들도 새끼를 낳고 모성애를 최고로 발휘해야 하는 시기에 새끼와 떨어져 지내면, 아무리 모성 본능이라고 할지라도, 모성애가 희석되버린다고 한다. 씨씨가 처한 상황이 아이들에게 애정을 쏟아부어야 할 시기에 시어머니에게 아이를 빼앗겼고, 다시 되찾았을 땐 이미 모성애는 흐려진 다음에다 자신의 세력을 키우느라 바빴으니, 굳이 이해를 해보자고 하면 그렇다는 거.

- 마이어링 왈츠 장면을 보면서 승돌프가 얼마나 몸을 잘 쓰는 배우인지 새삼 감탄했다. 동돌프는 일단 덩치가 커서 죽천들이 휘두르기도 버거워 보이기는 했는데, 거기다 몸이 뻣뻣해서 휘둘려주지도 못하는데, 승돌프는 얼마나 처절하게 이리저리 굴려지는지. ㅠㅠ 정말 죽천들에 휘둘려서 갈가리 찢겨지는 것 같은 느낌이라, 제대로 비극적인 최후더라.

- 루돌프의 죽음은 씨씨가 정신적으로 완전히 무너져 버리는 계기가 되는데, 여기서 김선영 씨의 연기가 정말. 11일에도 오열하는 모습이 슬퍼보였지만, 이날은 안으로 삭인 슬픔에 목이 메어서 소리도 제대로 못내다가 루돌프의 관을 끌어안고 "엄마야!"하고 통곡하는데 순식간에 눈물나게 만드시더라.

- 그리고 그 슬픔의 순간에 이죽거리며 등장하는 루케니. 참 어지간히 엘리자벳을 싫어하는구나 하는 느낌이 드는 장면이다. 자식 잃은 부모의 마음에 애도를 표할만도 한데, 그것마저도 높으신 분들도 슬픔 앞에서는 어쩔 수 없나봐~ 라며 이죽이죽. 황혼기의 부부가 다시 만나는 것도 로맨틱한 삼류드라마 취급.

- 처음 사랑을 속삭이던 그 장소에서 부르는 같은 노래라고 믿겨지지 않을 만큼 서글픈 '행복은 너무나 멀리에' 이게 1막의 '날 혼자두지 말아요'의 reprise인데, 세월이 흘러 나이를 먹고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도 좋으련만, 엘리자벳의 마음은 요제프를 완전히 떠났다. 참, 요제프라는 인물도 대단한게 한 나라의 황제이면서, 어떻게 평생 한 여자만 일편단심으로 사랑할 수 있었는지. 끝까지, 자신을 용서해달라며, 사랑하고 있다는 이 남자를 매몰차게 '안되는 건 안되는 거'라며 잘라낸 엘리자벳은 다시 한 번 터프한 여인이다.
엘리자벳을 신경이 예민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연약한 여인이라고 가끔 착각할 때가 있는데, 끝내 자신 밖에 모르고 타인에게 상처주는 행동을 그치지 않는 저 무신경함은 대체 어떤 종류의 연약함인 걸까. 쿤체 씨도 그런 면에서 엘리자벳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걸까나.

- 서서히 사그러드는 엘리자벳과 함께 몰락해가는 합스부르크 황실을 보여주는 '침몰하는 배' 장면. 연출의 아쉬움이 없지 않지만, 여기서는 류토트와 윤제프의 엘리자벳 배틀이 아주 볼만하다. 그리고 드디어, 도구로서 루케니를 선택한 죽음. 이제까지 죽음과 함께 시간의 흐름을 비껴가있던 루케니의 시간이 제자리를 찾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 루케니에 의해 죽임을 당한 엘리자벳이 이승의 옷을 벗고 죽음을 향해 달려가 매달리는 장면. 11일에 다리의 와이어에서 손을 못 떼던 류정한 씨가 이 날은 드디어 와이어에서 손을 뗐다. 고소공포증이라 들었는데, 본능적인 공포를 눌러죽인 프로 정신에 박수를ㅋㅋㅋ
그렇게 영원한 안식을 찾아 엘리자벳은 죽음을 맞이하고, 앙상블의 합창속에 무대 뒤에서부터 걸어나온 루케니 앞으로 로프가 내려온다. 여기서 또 은케니의 깨알같은 연기가 참 좋은데, 소위 목 씻고 기다려라..라는 것 처럼 목을 앞으로 빼서 가다듬고 줄에 목을 끼울 때의 눈빛하며~ 아 근데, 막이 너무 빨리 닫혔다. ㅠ.ㅠ 11일 날 딱 타이밍 좋게 목 꺽은 다음 막이 닫혔는데, 그날 그 로프 올리는 타이밍 안맞아서 안전 사고 날 뻔 했다더니만, 그래서 그랬나 목 꺽기 전에 막이 닫히는 바람에 너무 아쉬웠다. 아웅, 이거 나중에 타이밍 맞추는 연습 좀 하고 해서 다시 살려주면 안될까나.

+ 커튼콜에서 루케니와 죽음만 앵콜송을 부르는데, 덩실덩실 은케니 역시 관중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역할인 것 같고, 류토트의 마지막 춤 아이돌 댄스는 뭐 거의 콘서트장을 방불케 하더라. 그리고 여주인공 원톱으로 극을 끌어간 김선영 씨. 1막 피날레에 입었던 하얀 드레스 입고 딱 등장하시는데, 그저 아름다우십니다. 아무리 죽음과 루케니가 매력적인 캐릭터라도 이 극은 '엘리자벳'이 끌어가는 극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연해 준 배우들 모두 브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