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MLET
일   시 : 2011. 10 .20 ~ 2011. 12. 17
장   소 : 유니버설 아트센터
음악 / 대본 : 야넥 레데츠키 , 원작자 : W.셰익스피어
연   출 : 로버트 요한슨, 음악감독 : 원미솔
관극일 : 2011. 12. 17 (토) 15:00 | 햄릿 - 박은태, 레어티스 - 전동석, 클로디어스 - 윤영석, 폴로니우스 - 김장섭
            2011. 12. 17 (토) 19:00 | 햄릿 - 김수용, 레어티스 - 강태을, 클로디어스 - 서범석, 폴로니우스 - 김성기
오필리어 - 윤공주, 거트루트 - 신영숙, 호레이쇼 - 이경수, 헬레나 - 이미경, 길던스턴 - 이용진, 로젠크렌츠 - 홍현표, 유랑극단 단장 - 장대웅, 사제 - 구원모, 유랑극단 여왕대역 - 이고운, 이정화(오필리어 얼터), 김승환, 박수진, 김용남, 박유덕, 오미영, 윤정열, 김솔잎(스윙)

-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햄릿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도 누구나 떠올리는 그 유명한 독백으로 2막이 시작된다. 추악한 진실을 세상에 증명하기 위해, 복수할 명분을 얻기 위해 노심초사하다 연극이라는 힌트를 얻은 햄릿이 그 실행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고뇌하는 이 장면에, 저 독백을 사용한 것은 원작과는 다른 흐름이지만, 참으로 적절한 배치라고 생각한다.
1막의 마지막 '오늘 밤을 위해'에서 끌어올린 감정선을 인터미션을 거치고서도 끊어지지 않도록, 그 감정선을 연장시켜서 불러줘야하는 이 넘버는 그만큼 중요하고, 관객들에게 햄릿의 고뇌를 설득력있게 전달하지 않으면, 저 심오한 대사마저 중2의 허세쯤으로 들릴 위험이 있다. 전에도 말했지만, 음표를 소리로 나열하는 건 의미가 없다. 그 안에 담긴 생각과 마음이 중요하지.
복수를 하고 죽을 것인가, 거짓속에 퇴락하여 살 것인가. 얼마나 치열하게 고뇌하는지, 노래에 실린 목소리에서 절절하게 전해져와서 은태가 만들어낸 햄릿이라는 캐릭터가 생생하게 이해가 된다.

그런데 정말 은태가 모차르트!와 피맛골 연가를 거치면서 노래에 감정을 싣는 게 점점 더 섬세해지더니, 햄릿에 와서는 어떻게 목소리에 이렇게 다양한 감정을 표현해내는지 감탄스러울 정도로 실력이 일취월장. 내가 말하는 은태가 노래를 정말 잘 한다는 의미는 그러니까 바로 이런 거다. 타고난 재능도 중요하지만, 꾸준한 노력의 결과, 음정, 박자 정확하고, 진성이던 가성이던 발성도 안정적이고, 성량도 풍부해져서, 그에 따라 표현하고 싶은 대로 자유자재로 목소리에 감정과 연기를 실을 수 있다는 거. 표현자, 그 중에서도 뮤지컬 배우가 자기가 표현하고 싶은 대로 노래로 표현할 수 있다...이보다 더 막강한 무기가 있을까.

- 신영숙 씨의 거트루트는 초반에 불륜까지 저지른 여자치고 너무 우아하고, 위엄이 넘치고, 여왕님스러워서 캐릭터와 좀 안 맞다는 느낌이 들었던 걸 생각해보면, 뒤로 갈수록 사랑받고 싶었던 한 여자의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져서, 배우가 가진 능력과 별개로 극 안에서 이렇게 발전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참으로 뿌듯했더랬다. 노래로는 어디가서 최고 소리 못들을 분이 아니시지만, 그게 극 안에서 캐릭터와 어우러지느냐 하는 건 또 별개의 문제니까.
아들이 진실에 눈을 뜨라며 보여준 연극에서 거트루트가 클로디어스의 범죄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러나 사랑에 눈이 먼 여자의 마음은 쉽사리 그 사실을 믿으려하지 않는다. 나에겐 사랑만이 전부이고, 믿음도 진실도 의미가 없다며 거울 속의 허상을 향해 '이게 나야~'라며 자조하는 I'm untrue, 날이 갈수록 회환에 찬 절절한 절창이라 매번 감탄했지만, 막공에서 그 정점을 찍어주시더라.

- 윤클로를 은릿 첫공에서 만났을 때, 첫공의 어수선함, 아직 배우들이 로딩 전이라는 걸 감안해도 클로디어스 넘버는 귓전을 맴돌뿐 제대로 들려오지 않았다. 팬텀까지 하셨던 분이라 노래 실력에 의심이 드는 건 아니었지만, 익숙하지 않은 장르의 음악이라 그랬는가, 넘버 소화가 전혀 되지 않았더랬다. 악보대로 부르기에 급급한 인상을 받았다면 너무 실례일까. 그러다보니 노래에 감정과 연기를 싣는 게 거의 이루어지지가 않아서, 클로디어스가 거트루트를 사랑하기는 했는지, 다만 왕관에 욕심이 났던 건지 캐릭터가 불분명했다. 게다가 Chapel에서 클로디어스의 복잡한 내면을 보여줘야하는데, 나한테는 처음부터 끝까지 찌질한 인상밖에 안남았;;
그랬는데, 역시 뒤로 갈수록 노래 실력에 걸맞는 모습을 보여주시면서, 나에게 이것이 윤영석이 만들어낸 클로디어스라는 걸 설득해 나가셨다.

낮공, 밤공 더블 캐스팅인 윤클로와 범클로를 한 자리에서 보다보니 은릿과 용릿만큼이나 서로 다르게 캐릭터를 구축했다는게 확연하더라.

먼저 결혼식 장면, 하객들의 축하를 받으며 기뻐하는 클로디어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묻는다. 이렇게 기쁜 날 햄릿은 어디 있느냐고. 그런데, 여기서 윤클로와 범클로의 대사가 미묘하게 다르다. 윤클로는 "사랑스런 햄릿"이라고 하고, 범클로는 "사랑하는 햄릿"이라고 한다. 그래서 윤클로는 어쩌면 햄릿이 어렸을 때 곧잘 놀아준 삼촌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을 하게 만들고, 반대로 범클로의 대사는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면서, 범클로 쪽이 햄릿을 더 경계한다고 할까.

햄릿이 클로디어스를 떠보기 위해 연극을 올렸을 때 반응도 차이가 난다. 물론 두 클로디어스가 다 동요하지만, 범클로가 경악하는 와중에도 그 동요를 눌러 감추는 쪽이라면, 윤클로는 그걸 전혀 감추지 못하고 죄책감과 두려움을 드러낸다.
이 두 클로디어스가 결정적으로 다르게 느껴지는 게 바로 Chapel 넘버다. 물론 가사는 똑같지만,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고, 실려있는 감정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른 캐릭터로 느껴지는데, 딱 한 군데 가사가 다른 부분이 있다. 기도하기 위해 제단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 '신이여, 내게 말해주소서.' 하고 이 뒤에 가사가 범클로는 '신이여, 어디로 가야하나요.'라고 하는데, 윤클로는 '신이여, 내 웃음은 어디에'라고 해서, 같은 클로디어스지만, 윤클로 쪽이 더 연하로 느껴진다.
윤클로는 저 가사에서도 어렴풋이 드러나지만, 형을 죽일만한 배짱도 없고, 그 왕관을 감당할 그릇도 못되는데, 어쩌다 보니 사랑을 위해 범행을 저지른 듯 하다. 그래서 죄책감도 훨씬 강하고. 그에 비해 범클로는 원래 형만큼 능력도 있고, 야심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반란을 일으킬만큼 행동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어쩌다 형수를 사랑하게되면서 구체적으로 일을 꾸민 것 같은 느낌. 윤클로가 우발적인 범행이었다면, 범클로는 계획범이라고 할까. 
이렇게 서로 다른 클로디어스라는 캐릭터를 만들어주셨지만, 둘 다 설득력이 있어서 어느 클로디어스도 다 나름 이유가 있는 악역으로 이해가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범클로 쪽이 좀 더 취향이라고 할 수 있지만, 윤클로도 나쁘지 않았으니까.

- 클로디어스를 죽이려다 기도하는 모습에 결국 돌아서서 그길로 어머니에게 달려들어온 햄릿. 살기를 다 추스리지 못하고 험악한 기세 그대로 뛰어들어온 아들을 맞이하는 어머니는 잠시 겁에 질려 칼에 시선을 두지만, 애써 공포를 억누르고 아들을 보듬어주려한다. 막공으로 다가갈수록 '사랑하는 내아들~'에서 영숙 거트루트가 정말 애절한 표정으로 햄릿을 안아주려하는데, 지금 자신이 누구를 죽이려고 했는지 안다면 어머니는 과연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줄 것인가 너무나 괴로운 은릿은 그래서 더 매정하게 그 손길을 뿌리친다.
어머니 당신이 삼촌과 결혼하지만 않았던들, 내가 이런 지옥을 헤매는 일도 없었을 거라는 원망과 미움, 그러나 그보다 더 어머니를 사랑했기에 마음속 갈등이 더 깊어져가는데, 그 속도 모르고 내가 어떻게 해야 네가 웃을 수 있냐고 하니, 애증의 감정이 끌어올라 진실을 외면하는 어머니를 향해 버럭버럭.
그런데, 여기서 참 거트루트의 대응이 너무 안타까운게, 아들이 저렇게 소리 좀 지른다고, 매정하게 몰아부친다고 '우리의 결혼은 불행했단다.' 라며 자신을 짓누르는 죄책감을 아들에게 들이밀고, 자기합리화에, 아들에게 이해해달라고만 하니, 너무 이기적인 엄마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상실감에 고통스러워하던 은릿이 아주 돌아버려서 커튼 뒤에 사람이 숨어있다는 걸 알자마자 단검을 빼들어 찌르는데, 완벽한 기회가 왔을 때조차 살인을 망설였던 햄릿이 상대가 누군지 확인도 안하고 망설임도 없이 칼을 찌른 건 다 거트루트 탓이라고 본다;

- 덴마크 왕실에 몰아닥친 비극의 끝. 언젠가 은태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햄릿은 죽을 때 그제서야 편안해집니다. ‘사는 게 뭐지.’ 이런 생각 하면서요. 이 편안한 죽음의 표현이 지금 제게 숙제입니다."
그 때는 아직 극을 보기 전이라 피상적으로만 느껴졌는데, 햄릿 회전문을 돌면서 저게 무슨 소린지 너무 절실하게 와닿더라. 너무나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는 은릿을 보고 있자면, 차라리 그에겐 죽음이 안식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드는데, 문제는 그래도 초반엔 죽어가면서 편안해지는 게 보였는데, 막공을 향해 갈수록 죽을 때 조차 이 왕자님은 편해지지를 않는 거다. 죽는 순간까지 고뇌를 다 털어버리지 못하고 너무 아프고 애처롭게 가서 마음이 아프다.

- 정말 뮤지컬에서 이렇게 제대로 된 비극을 만날 수 있을 줄 예상치 못했는데, 이 훌륭한 배우분들은 그 병맛 같은 연출도 극복하고 기어이 비극으로서의 뮤지컬 햄릿을 납득시키셨다. 첫공보고 살짝 뜨악했던 걸 생각해보면 진짜 인생은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다는 말은 진리다.

- 커튼콜은 세미막공 + YB막공이라 총막공처럼 무대인사는 없었지만, 소소한 이벤트가 있어 아쉬움을 달래줬다. 특히 앙상블들이 단체로 짜서 무덤지기에서 폴로니우스로 변신을 그냥 무대위에서 드러낸 채 하셔야 했던 장섭님, 큰 재미 주셨고, 나중에 퇴장하실 때도 은릿 볼에 뽀뽀 성공하신 거 축하드림요. ㅋㅋ
은릿은 그 어떤 공연 막공 때보다 더 감격에 겨워하는 게 눈에 보여서, 그동안 햄릿이라는 캐릭터를 자기화 하기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파고들었을까, 그리고 그 노력이 보상을 받아 이렇게 큰 사랑을 받게 되어 많이 뿌듯하겠구나 싶었다. 충분히 자랑스러워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마지막 앵콜의 순간. 환호를 부추기는 관객 조련 없이 그냥 엄지 척 올리고 바로 뛰어나와서 좀 더 크게, 오래 환호해주고 싶었던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조금 아쉽기도 했다.
총막공 커튼콜 때는 무대인사 하러 나오는데 눈가가 벌겋게 부어있어서, 울었구나 했다. 지난 두 달간 햄릿으로 살 수 있어서 행복했다고 인사하는데, 속으로 내 햄릿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라며 혼자 아우성; 고양에서 다시 봅시다.

+ 이걸 3일에 걸쳐 쓰다니, 숙제 하나 마친 기분 OTL



HAMLET
일   시 : 2011. 10 .20 ~ 2011. 12. 17
장   소 : 유니버설 아트센터
음악 / 대본 : 야넥 레데츠키 , 원작자 : W.셰익스피어
연   출 : 로버트 요한슨, 음악감독 : 원미솔
관극일 : 2011. 12. 17 (토) 15:00 | 햄릿 - 박은태, 레어티스 - 전동석, 클로디어스 - 윤영석, 폴로니우스 - 김장섭
            2011. 12. 17 (토) 19:00 | 햄릿 - 김수용, 레어티스 - 강태을, 클로디어스 - 서범석, 폴로니우스 - 김성기
오필리어 - 윤공주, 거트루트 - 신영숙, 호레이쇼 - 이경수, 헬레나 - 이미경, 길던스턴 - 이용진, 로젠크렌츠 - 홍현표, 유랑극단 단장 - 장대웅, 사제 - 구원모, 유랑극단 여왕대역 - 이고운, 이정화(오필리어 얼터), 김승환, 박수진, 김용남, 박유덕, 오미영, 윤정열, 김솔잎(스윙)

- 햄릿의 서울 공연 막공일, 정말 끝까지 총막공을 가야하나 고민을 많이 했더랬다. 전에도 썼지만, 난 버릇이 있는 배우의 연기에는 집중을 하기 힘든 데다가, 발성이나 창법도 그렇지만, 용릿이 잡은 햄릿의 해석이 나와는 맞지 않는다는 걸, 여실히 깨달았기 때문에 끝까지 고민하다가, 그래도 가자고 마음 먹었던 건, 내가 회전문 가열차게 달려온 애정 공연에 대한 예의가 아닌가 싶은 마음이 반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덕질에 의무감은 필요악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래도 그냥 '악'이 아니라, '필요'악이니까, 다음에도 이번과 비슷한 경우가 닥치면, 나는 또 고민 끝에 결국은 보고나서 후회하는 쪽을 선택하겠지. 하여간 총막 공연을 보고나서 너무 허탈한 마음에 '내 햄릿은 아직 남아있다. 아직 고양 공연이 남아있어.'라고 수없이 되뇌었다. 그러니 은릿은 아직 햄릿을 털어버리면 아니되오!!!

- 처음에 햄릿 스케줄 나왔을 때 용릿이 첫공이라서, 그래도 더블인데, 그럼 은릿이 막공이겠네...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다가, 총막공도 용릿이라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스케줄 나온 거 보니까 OB/YB 나누어서 OB에게 첫공, 막공 맡긴 듯.

OB : 김수용(`76) / 서범석(`70) / 강태을(`80) / 김성기(`65)
YB : 박은태(`81) / 윤영석(`71) / 전동석(`88) / 김장섭(`69)

그래도, 은릿 막공 조합이 내가 좋아하는 조합의 배우들이라 불만은 없다. 게다가 첫공에서 나한테 평이 안 좋았던 윤클로의 눈부신 발전, 그리고 내 최애 폴로니우스로 등극하신, 햄릿과도 케미가 만들어지는 섭폴로에, 섭폴로일때 케미가 제일 좋은 동레어 까지. 첫공 조합으로 막공을 볼 수 있다는 건 어떤 의미에선 극의 성장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좋았다.

- 낮공, 내가 정말 좋아하는 극의 시작, 엘시노어 성벽에 비춰지는, 덴마크 왕실에 닥칠 비극을 상징하는 먹구름 짙게 드리운 하늘을 보고있는데, 시작부터 영상/음향 미스 작렬. 이때부터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지만, 결국 오필리어 매드씬에서 오케스트라가 대박으로 미스를 내서 배우가 당황해서 타이밍 놓치고, 겨우 겨우 맞춰 들어가게 만들었지. 이 장면에서 배우의 몰입이 얼마나 중요한데, 그걸 오케가 산산히 부셔버리는지. 원미솔 음감은 참 끝까지 화해를 할 수 없게 만든다고 투덜댔으나, 뭐 이것도 오늘로 끝. 어차피 고양은 MR로 공연할테니 차라리 그게 더 안정감 있을 것 같다는 이 슬픈 현실. 생각해보면 레전드 공연일 땐 거의 부음감이었더랬지. -_-`

- 음, 쓰려다보니 결국은 은릿 막공 위주에, 총막공이 뒤섞인 후기가 될 것 같은데, 이날 용릿의 목상태가 재앙 수준이었다는 걸 배제하더라도, 내가 용릿은 총막공으로 2번째 관극이라는 걸 생각하면, 두 햄릿을 비교하며 후기를 쓰는 건 언페어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나와 이렇게까지 해석이 갈리는 건 윤필리어 이후에 용릿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아서 아마도 별로 좋은 소리는 안 나오지 싶다;

- 나는 극의 시작 부분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관객을 객석이라는 현실에서 극으로 몰입시키기 위한 기선제압이라고 할지, 캐릭터를 얼마나 빠른 시간 안에 이해시키는가에 따라 극에 대한 집중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뮤지컬 햄릿의 막이 없이 개방된 무대는 관객을 장례식에 초대하는 의미도 되지만, 막이 오른다거나, 암전과 같이 이제 시작이다 하는 느낌은 좀 덜한 감이 있다. 그러나 곧바로 이어지는 비장한 분위기의 장례식이 시선을 압도하고, 그 엄숙한 공기 위로 여리게 물기에 젖어 파르르 떨리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음성, 통곡하듯 힘있게 쭉 올려주는 선명한 고음, 은릿의 목소리가 불러일으키는 시리고 차가운 북구의 느낌이 나는 정말 좋다.

아버지를 떠나보낼 준비가 아직 되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벌써 새 왕을 맞아 그 발밑에 무릎을 꿇고 그를 떠받든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다 그들이 다 떠난 뒤에야 아버지의 무덤으로 향하는 은릿. 막공까지도 이 장면에서 디테일에 살짝 변화가 생겼는데, 전에는 떠나는 행렬 쪽에 시선을 준 적이 없었는데, 16일 공연에서도 그렇고 그들을 향해 흘깃 시선을 한 번 주고는 무덤으로 걸어간다. 마치 이것으로 당신들의 애도는 끝인가...라는 듯한 시선. 무덤을 향해 내딛는 발걸음이 무덤에 다가갈수록 느려지면서 슬픔의 무게도 더해져, 애도의 마음을 담아 꽃 한송이를 던지고 돌아서는 얼굴에는 비통함이 한 가득. 차마 소리내어 울지도 못하고, 눈물도 없이 속으로만 울고있는 은릿. 이 장면에서 오히려 용릿이 더 담담하게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듯해서 이것도 의외라면 의외.

- 결혼식 장면. '사랑 오직 사랑' 넘버가 흘러나올 때, 가만히 뒤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은릿과 달리 용릿은 훨씬 적극적으로 구경한다. 은릿이 꼿꼿하게 선 채 눈만 내리깔고 반쯤 체념을 품고, 반쯤 비난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 장면에서, 나는 은릿이 만들어낸 햄릿은 자존심이 높고 결벽하고 예민한, 그리고 왕자의 품격을 갖춘 그런 캐릭터라고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그 캐릭터가 일관성있게 유지되기도 하고. 
이 장면에서 용릿은 몸을 앞으로 쑥 내밀고 결혼 피로연 하객들을 품평하듯 적극적으로 찾아보고, 경멸을 표시하고 있었다. 아직 그걸로 어떤 햄릿이라고 파악하기엔 부족해서, 결혼식 이후에 이어지는 Why me를 보고서야 용릿이 잡은 햄릿이 파악이 되었다. 한마디로 "청년 14세"
전에 용릿 공연을 보고나서 용릿은 청년보다 소년의 인상이 강하다 했는데, 그 때 봤던 것보다 감정 표현이나, 고뇌의 깊이, 분노의 정도가 더 어려져서 갸우뚱하게 만들더니, 다소 산만한 고갯짓, 입술이 마르는지 자주 입술을 핥는 동작, 어딘지 모르게 흐느적거리는 듯한 몸짓에서 난 햄릿보다 '바스켓볼 다이어리'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강하게 연상됐다. 그런데, 정말 상체 탈의한 씬에서도 그렇고 놀라울 만큼 디카프리오와 싱크로율이 높아서 극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 내가 Why me 넘버를 개인적으로 좋아하기도 하고, 은릿과 이경수 호레이쇼가 워낙 절창으로 잘 불러주기도 해서 참 좋아하는데, 이게 초반에는 아직 배우의 해석이 다 녹아들어가지 못해서, 이 모든 짜증나는 상황이 왜 나한테 벌어진 거냐고 사춘기 중2병 왕자님이 찡얼찡얼대는 노래로 밖에 안들렸는데, 갈수록 배우의 해석이 들어가면서 이렇게 다르게 들리는구나 제대로 경험하게 해준 노래다.
은릿은 위대한 왕이신 아버지를 존경하고, 아름다운 어머니를 사랑하고, 그에 뒤지지 않게 스스로 소양을 키우며 (어쨌든, 깊이 사색하는 성격에 검술에도 어느 정도 실력이 있는 것으로 보아), 덴마크의 왕자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자부심이 아버지의 죽음, 어머니의 재혼으로 타격을 입고, 2막에서 거트루트의 고백 - 너의 아버지는 훌륭한 왕이었지만, 우리 결혼은 불행했단다 - 에 가서는 흔적도 없이 박살이 난거다.
그러나 은릿이 그 태생에 대한 자부심에 금이 갔다고 분노를 터트리는 거였다면, 이렇게까지 공감은 가지 않았을 것이다. 이 왕자님의 결벽한 자존심은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원래 세상은 다 그런 거라며 부정을 묵인하고 용인하는 덴마크를 허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덴마크는 썩어가고 있다고 열변을 토하며 분노하는 것이다.
그런 은릿을 보고 절친이라는 호레이쇼가 친구를 이해해주거나 다독이기는 커녕, 뒤로 갈수록 빙글빙글 웃으며 그를 희롱하기나 하다 외계지렁이 시선이나 받는게 안타깝다고 그랬는데, 저녁공을 보고 깨달았다. 이거 용릿에 맞춘 노선이구나.
용릿과 은릿은 그 분노의 크기, 깊이, 온도차가 상당하다. 피로연을 장식한 장미꽃 리스를 집어던지는 동작 하나에서도 은릿은 정말 화가 잔뜩나서 있는 힘껏 집어던진다면, 용릿은 매우 얌전하게 그저 장식을 떼어내 치워버린다는 수준이라, 은릿에 익숙한 내게 용릿은 너무 밋밋하고, 아마도 용릿에 익숙한 사람들은 은릿이 초반부터 폭주하는 걸로 비치겠다 싶더라. 그리고 호레이쇼의 리액션은 용릿과 만나니까 왜 저렇게 반응하는지 이해가 됐지만, 더블 캐스팅의 주인공들이 이렇게 완전히 다른 캐릭터로 연기를 하면, 원캐로 대응하는 배우는 양쪽에 맞게 연기를 해야하는 거 아닌가 싶은 아쉬움은 남았다. 이건 이경수 호레이쇼의 실력이 출중하고 잘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그 와중에 윤필리어는 참 일관되게 연기하더라;)

- 프랑스로 유학가는 레어티스를 배웅하며 장섭 폴로니우스의 잔소리가 이어지는 장면. 섭폴로, 동레어도 같이 막공이었는데, 이날 특히 장섭 폴로님께서 제대로 막공 삘을 타셔서, 사실 첫 등장 할 때 입가에 점을 보고 구느님처럼 점 하나 찍고 딴사람이 되시려고 그랬나 싶어 혼자 키득댔다. 원래도 참 자식 사랑 절절한 다정한 아버님이셨지만, 이날 따라 어찌나 물고 빨고 하시는 분위기인지. 그런데다 아버지 잔소리하다 손등에 침 좀 튀었다고 그걸 아빠 손등에 닦아내는 동레어나, 그걸 또 아들 볼에다 쓱 문지르시는 섭폴로님이나 아주 이리 다정한 부자지간이 또 있을까 싶게 훈훈한 분위기. 그런데 이날 앙상블들이 짰는지 원래 퇴장할 때 섭폴로님 떠메들고 나가야하는데, 그냥 내려놓고 자기들끼리 퇴장해버려서 당황하신 장섭님이 "얘들아~" 이러고 쫒아가셨더랬다. 그리고 장섭님의 수난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ㅋㅋㅋ

- 이날 동레어가 Sister 넘버에서 평소보다 힘을 많이 빼줘서 어딘지 처연한 레어티스를 보여줘서 참 좋았다. 내가 오빠 모드를 부르짖기는 했지만, 동석인 아직 어리니까효. 이만큼이라도 오빠 모드를 연기하려고 노력해준 것만으로도 대견하다. 동레어의 완급 조절이 매번 참 아쉽다 그랬는데, 그래도 막공에 와서는 어떻게 힘을 빼야하는지 조금은 터득하게 된 것 같더라. 2막 killer's name이야 아빠가 섭폴로님이면 충분이 납득이 가는 폭주라 논외로 치고. 이날 오필리어 매드씬에서 오케스트라 미스가 뼈아팠지만, 미쳐버린 오필리어를 보고 모든 기력을 잃고 슬픔에 빠져서 Sister rep.을 부르는데, 난 이렇게 처량하고 불쌍한 동레어는 처음이었다. 동생이 저리 된 것에 대한 슬픔과 자책이 너무 커서 햄릿에 대한 증오를 불태우는 것 조차 버거운 레어티스라니. 그리고 그 슬픔의 감정을 모조리 쏟아부어 햄릿과 결투하는 씬은 항상 그렇듯 저러다 은릿 죽일 기세라, 그걸 받아내는 은릿이 용하다 싶을 정도였다. 
전에도 썼지만, 태을 레어가 독 묻은 칼을 잡기를 주저하는 연기도 그렇고, 태을 레어는 내 검실력으로 널 죽여주겠다는 쪽이라 죽기살기로 덤벼들지는 않는데, 동레어는 내가 치명상을 입든 말든 무조건 너 하나는 죽이고 말겠다라는 기세라서 방어는 없이 공격만 해대는 그런 인상. 그래서 은릿 - 동레어 결투씬은 뒤로 갈수록 그 박진감이 장난이 아니었는데, 막공이라고 봐주는 거 없이 또 엄청 격하더라. 거기에 비해 저녁공의 용릿 - 태을 레어의 결투씬은 어떻게 봐도 태을 레어가 살살해주는 게 보여서; 그리고 은릿 - 동레어/태을레어 일땐 비슷한 또래의 젊은 남자들의 대결같이 보이는데, 용릿은 '청년 14세'라, 안그래도 어른스러운 태을 레어랑 붙으니 이건 어른이 아이를 상대로 싸우는 것 같;

- 순서가 뒤죽 박죽이 되버렸지만, 내가 매 공연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는 '피는 피로써' 넘버. 사실 Let's rise above this world에서부터 목상태가 별로 안 좋구나 싶기는 했다. 가성이 뻑뻑하게 나오는 거 같아서. 그러더니, 피는 피로써 넘버에서 진짜 목 안 좋은 티가 났는데, 그럼에도 마지막 절규는 또 더 처절하게 질러줘서, 기백으로 극복하는구나 싶더라.
안그래도 16일 공연에서 그분이 오신 듯 뒤돌아볼 것 없이 터트려주더니, 사실 내가 본 중에 이날 은태 목 상태가 제일 안 좋았다. 그래도 공연 중에는 음이탈 없이 넘버를 모두 소화해냈고 (커튼콜에서의 삑사리는 애교로 봐주자;), 목상태가 안 좋을 땐 그걸 커버하기 위해 다른 부분에서 더 역량을 쥐어짜서 그 간극을 메우기 때문에 이날 공연도 완성도 면에서는 참으로 만족스러웠다. 무엇보다 공연 타이틀 롤로서 68회 공연 중 38회를 달려오면서 이 정도 목상태를 유지하며 막공을 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높은 성과라고 생각한다.

- 'He's crazy'에서 은릿이 오도방정이라고 했던 거, 저녁공의 용릿 보고나니 저건 그래도 점잖은 축에 속하는 거였구나 싶었다. 솔직히 저렇게 경박한 햄릿은 내 햄릿이 아니야 싶어서 눈물이 ㅠ.ㅠ

- '수녀원에 가'도 은릿과 용릿은 해석이 전혀 다르더라. 은릿이 일부러 더 잔인하게 굴어서 오필리어를 떼어놓으려고 한다는 걸 보여준다면, 용릿은 오필리어를 사랑하기에, 진심으로 오필리어가 수녀원에 가기를 바라는 것 같다고 할까. 그래서 굳이 잔인하게 굴지 않고, 진심을 담아 수녀원에 가라고 호소하는 느낌이다. 은릿이 일부러 상처주고, 그러면서 자신도 더 깊이 상처받는 그런 느낌이라 낙차 폭이 큰 그 표정 연기 보는 맛이 있었는데, 용릿은 그런 표변하는 감정선이 아니었다. (넘버 마지막 클라이막스 부분 수녀원↗에나 가~ 하는 부분을 용릿은 플랫하게 불러줘서 잠시 짜식;) 그리고, 그렇게 서로 다른 노선을 잡은 이유는 이 뒤에 드러나는데, 휘장막을 떼어낼 때, 은릿은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보이고, 용릿은 그 뒤에 폴로니우스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배신감을 느끼고 당혹해하는 쪽이었다. 은릿은 장막 뒤에 그들이 있다는 걸 알고 일부러 더 잔인하게 굴었다는 설정이고, 용릿은 그들이 있다는 걸 몰랐지만, 오필리어가 자신의 곁을 떠나 수녀원에서 보호받기를 바라는 마음인 듯 했다.

- 그렇게 두 햄릿의 '수녀원에 가'에서의 해석이 갈리니까 이후에 이어지는 '증거가 필요해'에서 괴로워하는 포인트도 달라진다. 용릿이 배신감에 고통스러워하는 쪽이라면, 은릿은 복수를 위해서 사랑하는 연인마저 상처입히는 내가 나인가, 나라는 사람이 복수를 위해서는 이렇게 잔인해질 수 있는가, 복수심에 사로잡혀 점점 변해가는 자신이 무섭고, 자신이 과연 어디까지 변해갈 것인지 생각하면 두렵고 혼란스럽기만 하다.
단 하나의 연인도 복수를 위해 버렸고, 세상에 혼자 남은 먹먹함을 위로해줄 유일한 친구 호레이쇼. 용릿과 호레이쇼는 그래도 어느 정도 얘기가 통하는 친구라는 느낌인데 반해서, 은릿은 호레이쇼에게 마저도 속내를 털어놓지 않는다는 느낌이다. (Why me에서의 대응을 생각해보면, 은릿이 저러는 게 이해가 되지만;) 이날 은릿 막공에서 그저 친구가 힘들어 하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하는 호레이쇼가 결국에 폭발해서 '내게 말해봐!' 라고 호소하는 대사를 '내게 말을 해!' 버럭으로 바뀐 게 납득이 될 정도였으니.

- '오늘 밤을 위해'는 넘버 자체가 플라멩코 풍에 춤까지 곁들여서 신나고 흥겨운 분위기인데, 가사 내용은 굉장히 철학적이다. '산다는 게 연극같아'라는 가사에 담긴 함축적인 의미도 그렇지만, '사랑하는 내 모든 것 / 시간이 지나면 먼지 처럼 사라져 / 언젠가는 우리도 사라지겠지 / 그러니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에 담긴 인생무상에 대한 내용도 그렇고.
이렇게 강렬하게 대비되는 묵직한 가사와 흥겨운 멜로디의 이중성이 바로 뮤지컬 햄릿의 매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극을 다루고 있지만, 가볍게, 너무 무겁지 않게. 

+ 쓰고 또 써도 후기가 끝나지를 않아. ㅠ.ㅠ 2막은 TBD
HAMLET
일   시 : 2011. 10 .20 ~ 2011. 12. 17
장   소 : 유니버설 아트센터
관극일 : 2011. 12. 16 (금) 20:00
음악 / 대본 : 야넥 레데츠키 , 원작자 : W.셰익스피어
연   출 : 로버트 요한슨, 음악감독 : 원미솔
캐스트 : 햄릿 - 박은태, 오필리어 - 윤공주, 레어티스 - 전동석, 거트루트 - 신영숙, 클로디어스 - 윤영석, 폴로니우스 - 김성기

- 막공 하루 앞두고 이러긴가.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진짜 이러면 어떻게 정을 떼라고, 막공 하루 앞두고 이런 레전드 공연을 보여주나.
어제 공연에서 은릿 목상태 별로라고 했더니만, 오늘은 멀쩡해진걸 넘어서 더 좋아져서 나타났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아니, 오늘 은릿은 뭐랄까 그분이 오신 듯한 분위기였다. 이제까지 내가 본 박은태라는 배우는 정말 대본에 충실한 배우, 연구하고 파고들어서 치밀하게 계산된 연기를 하는 배우라는 인상이었고, 난 감정에 휘둘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영리한 연기를 또 좋아하는 편이었는데, 오늘은 거기에서 뭔가 신들린 것 같다는 그런 느낌이 들더라. 내 부족한 어휘력으로 그 느낌을 표현하려니 적확한 단어가 안 떠오르는데, 가장 근접한 단어가 저거 같다. 신들렸다.
햄릿의 감성, 생각, 마음, 그 영혼까지 노래에 실어서 표현해주고, 지금 연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감정선, 그에 따라 흐름을 타고 이어지는 표정, 동작, 시선 처리 까지. 정말 뮤지컬 햄릿에서 박은태라는 배우가 보여주는 성장세가 참으로 눈부시다.
은릿 얘기만 잔뜩 늘어놨지만, 오늘 또 윤영석 클로디어스와 신영숙 거트루트 역시 레전드를 갱신해주셨고, 은릿과는 오늘이 막공이신 김성기 씨의 애드립이 제대로 흥했고, 동레어는 오빠 모드와 연인 모드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면서 오빠 모드이려고 많이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고, 윤필리어는 늘 그렇듯 매드씬만! 훌륭한 오필리어였지만, 무대 전체적으로 완성도가 높은 그런 공연이었다.

- 오늘 은릿이 보여준 햄릿은 참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게 너무나 치열했던 햄릿. 치열하게 슬퍼하고, 분노하고, 사랑하고, 갈등하고, 증오하고, 마지막까지 단 한시도 느슨해지지 않는 팽팽한 활 시위와도 같았다. 잠시라도 방심하는 순간 '나'를 지탱하던 것들이 와르르 무너져내릴 것 같아서 예민하기가 칼날같은데, 그 칼날이 밖이 아니라 안으로 향하고 있어, 움직일 때마다 그 영혼이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햄릿이었다.
그래서 오죽하면 붕 뜬다고 생각했던 무덤지기 씬이 오히려 절실하더라. 그 순간이 유일하게 햄릿이 만사를 잊고 웃을 수 있는 시간이니까.
그리고 오늘 은릿과는 막공이라고 김성기 씨가 이것저것 애드립을 참 깨알같이 넣어주시던데, 내가 집중을 못했다. 싫었다는 게 아니라, 내용이 뭐가 됐든 햄릿이 웃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멍하니 지켜보고 있어서;

- 선왕의 장례식, 아버지를 정말로 많이 사랑했기에, 그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슬픔마저도 그렇게 격렬할 수가 없다. '왜 가셨나요~한 마디 말없이, 이제 난 누구와 얘길 해야하죠. 할 말이 많은데'라는 그 절절한 노랫 소리가 마치 통곡하는 것 처럼 들린다. 뮤지컬은 노래가 대사라는 게 이렇게 가슴깊이 와 닿을 수가 없다.

- 결혼식 장면. 파리한 안색으로 너무나 지친 모습으로 등장한 은릿. 어머니와 결혼했으니 삼촌을 아버지라 불러야할까, 삼촌과 결혼한 어머니를 작은 어머니라고 불러야할까. 정신적으로는 이미 고아나 마찬가지인 햄릿. 자신의 행복에 취해 아들이 어떤 마음일지 제대로 헤아려 보지도 않고서, 네 마음 다 안다고 하는 어머니에게 은릿은 뭐라고 하려고 했던 걸까.
이 결혼식 장면에서 윤클로와 범클로가 참 다른게, '너를 아들처럼 생각한단다'라는 가사가 범클로일 땐, 그게 형식적인 체면치레 거짓말인게 너무 티나는데, 윤클로는 평생 기다려온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해서 행복한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사랑하는 여자의 아들이 곧 내 아들이라고 진심으로 햄릿을 아들로 생각하는 것 같단말이지. 그런 면에서 윤클로는 범클로보다 더 치기어린 느낌, 다혈질에 기분파라 정말로 거트루트가 잘만 구슬리면, 햄릿이 왕이 될 때까지 후견인 노릇 해줬을 것 같다.

- 오늘 저렇게 치열한 은릿이다보니 Why me에서 또 얼마나 격렬하게 분노를 터트려주시던지. 이딴 게 사랑이면 개나 주나 그래! 라는 듯 연회장을 빠져나가서도 분이 가라앉지 않아서 퍼부어대는데, 여기서 호레이쇼의 대응이 요근래 참 아쉽다. 그래도 하나뿐인 절친인데, 그 친구가 가슴 속에 불을 안고 저렇게 화를 삭히지 못해 화병나게 생겼는데, 그걸 다독여준다거나, 진정시키는 게 아니라 실실 웃으면서 희롱하는 건지. 똑같은 가사라도 초반엔 좀 더 진중한 느낌이었는데, 갈수록 촐싹대는 캐릭터로 변질된 것 같아서 많이 아쉽다.

- 레어티스가 프랑스로 떠나는 장면에서 성기 폴로니우스와 두 남매간의 관계는 막무가내 꼰대 아버지와 늦게 얻어 둥기둥기 곱게 키워 버릇없는 아들, 딸을 보는 느낌이다. 그래서 두 자식을 사랑하지만, 그걸 전달하는 방식이 너무 일방적이라, 어린 두 남매는 아빠 또 저런다...는 식으로 무시하는 그런 느낌이 들어서, 우리의 전형적인 아버지의 모습처럼 보여 안타깝기도 하다. 이어지는 Sister에서 동레어가 오빠 모드와 연인 모드 아슬아슬 줄타기라고 했는데, 그게 햄릿과 헤어지라고 하는 충고에 어떻게 해도 "질투"의 감정이 섞여들어가 있어서. 태을 레어일 땐, 아무리 애절한 표정으로 헤어지라고해도 거기엔 "염려"가 담겨있는 것과 참 다르다.

- Let's rise above this world 넘버에서 내가 가장 많이 아쉬워 하는 건 은릿이 참 너무 간절하게 마음을 꾹꾹 눌러담아서 내뱉는 '사랑해─'에 대한 윤필리어의 반응이 그냥 울상 하나라는 거. 내가 매번 그 얼굴 보면서 안타까워 미치겠다. 저 사랑한다는 단어에 실린 감정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그런가. 그래도 그렇게 도살장 끌려가는 송아지 같은 오필리어라니. 나는 여기에서 아련하게 미소지어주는 은릿이 너무 가엽다. 도대체 저 아가씨 어디를 보고, 단 하나의 안식처라고 여기는 건지.

- '피는 피로써' 넘버는 그냥 오늘 만렙 찍은 것 같다. ㅠ.ㅠ 진짜 나는 뭐라고 더 어떻게 표현할 말을 찾지를 못하겠다. 매회 더 격렬해지고, 더 처절해지는데, 깊은 절망과 슬픔, 증오와 분노에 그 영혼이 갈기갈기 찢겨지는 걸 목격하는 기분이라 보는 이쪽도 고통스러울 지경이다. 

- He's crazy 넘버. 전에도 쓴 적 있지만, 원작과 달리 뮤지컬 햄릿에서 햄릿은 자발적으로 미친 척을 한 적이 없다. 햄릿이 선왕 살해의 꿈을 꾸고 광기를 내보인 걸, 폴로니우스가 사랑의 열병으로 미쳐버린 거라고 모함했을 뿐. He's crazy 넘버에서 오른쪽 성루에서 폴로니우스를 바라보던 은릿은 폴로니우스가 '미쳤어~ 돌았어~'라고 하면 객석을 향해 피식 냉소를 띄우다 우르르 몰려나와 햄릿의 험담을 해대는 사람들을 보고 몸을 돌려 성루를 내려간다. 아마도 여기까지가 대본의 내용이겠지. 그리고 그걸 배우가 자신의 개성을 입히고, 해석을 더해서 연기를 하는 건데, 오늘 은릿은 폴로니우스의 저 모함에서 오히려 힌트를 얻은 것 같다고 할까. 아, 내가 복수를 하려면 미친 척을 해야겠구나..하고. 
앙상블 뒤에 어느새 섞여들어와서 '맞아, 나는 미쳤어, 돌았지.'라고 내뱉는 대사가 그 말과 반대로 너무 멀쩡한데, 거트루트에게서 편지를 뺏어들고 폴로니우스를 놀리고 도도도 달려나갈때는 너무너무 즐겁다는 듯이 미쳤어~ 돌았어~ 오도방정을 떨어대서 정말 미친 건가..? 혼란을 주고, 뚝 멈추고 '아름다운 밤입니다.' 할때 그 정색한 표정에 또 아닌가..? 하는데, 거기서 앙바 동작으로 폴짝 뛰어오르고는 광소하며 뛰쳐나가서 끝내 사람들이 정말로 미친 건지, 아닌 건지 헷갈리게 한다.

- 오늘 뭘 하든 치열한 은릿이라고 했는데, 치열하게 사랑하는 햄릿을 보여주는 장면 중 하나가 '수녀원에 가'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오필리어 장례식 장면이다. '수녀원에 가' 넘버에서 오필리어가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매 순간마다 너무 가슴아프게, 진짜 이대로 무너져내릴듯이 아파하는데, 오늘은 오필리어를 바라보고 '수녀원에 가'라고 할 때조차 저게 인상을 써서 울 것 같은 표정을 감추려는 것처럼 보여서 너무 안타까웠다. 그러더니 뒤돌아 혼자 괴로워할 때도 치열하게 괴로워하는 은릿. '거친 파도 그 위에서 표류하는 배처럼 ~' 정말 그 가사 내용을 고스란히 표현해내는 목소리와 연기를 통해 눈앞에 재현해주는지 감탄스럽다.

- 그리고 이어지는 '오늘 밤을 위해'는 정말 이제까지 본 중에 최고로 멋졌다. 정말 춤사위부터 그 표정하며, 무대위에 서있는 은릿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그 오라가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시선을 빨아들이는 것 같더라. 특히 오늘 독무는 진짜 최고최고. '산~다는 게! 연극 같아!' 한 음절 한 음절 힘주어 내뱉는 음성에 서리서리 배여있는 분노와 증오의 감정들에 압도되는 느낌.

- 이어지는 2막에서 '사느냐 죽느냐' 이 독백은 정말 햄릿의 가장 중요한 독백인데, 이걸 또 은릿이 너무 잘 살려주는거지. 문자를 소리로, 음표를 선율로 전달하는 건 의미가 없다. (아, 정확하게 제다로 전달하는 건 중요하지만) 중요한 건 그안에 담긴 마음, 생각, 감성. 그런데, 은태가 정말 가사 내용을 그에 맞는 음성과 표정으로 전달하는 능력이 정말 탁월해서, 그 고뇌가 절절하게 전달되어 온다. 근데 여기서도 좀 한소리 하자면, 호레이쇼의 표정이 시종일관 온화한 미소를 띄우고 있어서. ㅠ.ㅠ 이게 그런 평온한 마음으로 들을 내용은 아닌 것 같은데, 그것도 제일 친하다는 친구가.

- Sextet에서 윤클로는 정말 시시각각 다른 표정 연기를 선보이는 게 범클로와 큰 차이점이다. 범클로는 연극 내용에 충격을 받지만 그 감정을 애써 숨기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런데, 윤클로는 심정적으로 동요하고 있다는게 너무나 확연하게 보이는 거지. 이리저리 방황하는 시선, 햄릿이 어떻게 알았을까 경악하고, 마음 깊숙이 감춰뒀던 죄책감이 표면으로 떠오르는 게 보여서 분명히 악역이지만, 동정심이 생긴다. 그리고 파장으로 끝난 연극 끝에 클로디어스를 향해 가면처럼 웃는 은릿의 표정은 진짜 소름이 끼치더라.

- 영숙 거트루트야 I'm untrue에서 매번 레전드를 갱신하시며 기립을 부르는 연기와 노래를 보여주시는 와중에 폴로니우스 살해 장면에서 은릿과 불꽃튀는 갈등 장면과 폴로니우스를 찌른 뒤 두려움에 벌벌 떠는 은릿을 안아주며 보여준 모성애가 또 절절. 그러나 오늘 제일 좋았던 건 오필리어 장례식 장면에서의 연기였다. 자신이 여자의 행복을 찾아 믿음도 진실도 외면하는 동안, 사랑하는 아들이 어떤 지옥을 겪고 있는지 그제야 생생하게 눈앞에서 보게된 어머니로서 자책의 마음으로 신께 비는 그 장면이 제일 인상깊었다.

- 커튼 뒤에 숨은 사람이 클로디어스라고 확신하고 단검을 찌를 때도 햄릿은 '삼촌'이라고 했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지만, 이때까지는 아직 친족의 테리토리 안에 포함을 시키고 있었다는 거. 비열한 '삼촌'이지만, 어머니와 결혼한 사실은 바뀔 수 없는 현실이니. 그런데 어머니 거트루트가 독살 당하자 햄릿은 '클라우디우스'라고 그 이름을 부르는데, 이 부분이 용릿과 은릿의 가장 차이나는 대사가 아닐까 싶다. 용릿은 복수를 결심했어도 어머니를 사랑하듯 삼촌에 대한 정이 남아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끝내 삼촌이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라는 감정이라면, 은릿은 어머니가 독살된 그 순간 모든 인간적인 감정을 끊어버리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클라우디우스를 살해한다.

- 극의 마지막, 스산하게 공기중으로 흩어지는 여리고 아픈 은릿의 흐느낌에 새삼 울컥울컥. 막공으로 갈수록 이 왕자님은 죽음까지도 편하지를 못하고, 너무 아프게 가버린다. ㅠ.ㅠ 전에는 그래도 죽음은 영원한 잠이라고, 그렇게 깊은 꿈을 꾸듯 가는 거 같더니, 요즘은 죽을 때마저도 편해지지를 못하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프다.

- 오늘은 어느 기업에서 단관을 왔는지 객석에 머글 비율이 높았는데, 그걸 확실하게 느낀게, 1막의 '오늘 밤을 위해'에서 유랑극단 단원들 퇴장하고 무대에 은릿 혼자 남았을 때 박수가 나오더라. 그리고  오필리어 절벽에서 떨어지는 장면에서 헉소리가 아주 전방위에서 들려와서 신선했다.
그리고 인터미션 시간에 객석에 앉아계신 수녀님 발견; 아니 은릿이 서슬 퍼렇게 '수녀원에 가!'라고 하는 걸 어떻게 들으셨을지 조금 궁금;; 죄송합니다. 이런 속물이라서 ㅠ.ㅠ
HAMLET
일   시 : 2011. 10 .20 ~ 2011. 12. 17
장   소 : 유니버설 아트센터
관극일 : 2011. 12. 15 (목) 20:00
음악 / 대본 : 야넥 레데츠키 , 원작자 : W.셰익스피어
연   출 : 로버트 요한슨, 음악감독 : 원미솔
캐스트 : 햄릿 - 박은태, 오필리어 - 윤공주, 레어티스 - 강태을, 거트루트 - 신영숙, 클로디어스 - 서범석, 폴로니우스 - 김장섭

- 농담처럼 아차산 지박령이네 뭐네 했는데, 참 다니다 정들은 유니버설 아트센터. 오늘 어딘가에서 단관을 잡았다는 공지를 보기는 했는데, 로비에 들어서자 깜짝 놀랄정도로 교복입은 학생들로 바글바글. 잠깐 긴장했지만, 어차피 내 자리와는 멀리 떨어져있을테니까 하면서 여유를 되찾았다.
그렇게 객석이 거의 만석으로 꽉 차서 그랬는가 오늘 배우들이 살짝 들뜬 느낌이라고 할지. 초반에 붕 뜬 느낌이 들었지만, 이미 막공 주간에 들어선 마당이라 이런 정도로 흔들릴 공연은 아니었다.
은릿은 드디어(;) 성대의 피로도가 느껴지는 목소리였지만, 또 질러줘야 하는 부분에서는 어떻게 아직 저런 목소리가 나오지 싶게 뻐렁치게 질러줘서 두 달 가까이 더블로 뛰는 공연에서 이 정도까지 성대 관리를 해온 게 대견하다. 더블이기는 해도 일주일 8회 공연 중 5회 공연을 해야하는 적도 많았고, 이번 주 막공 주간도 화,목금토 일정이라 내일 모레 계속 공연인데, 끝까지 긴장 늦추지 말고 유종의 미를 거두기를.

- 햄릿의 연애 편지를 읽는 윤필리어와 헬레나를 보며, 그냥 포기가 되더라. 윤필리어는 햄릿의 사랑을 믿지도 확신하지도 못하는 상태인데, 친구 헬레나의 부추김으로 이게 사랑인가..? 하고 넘어가는 형국이더라. 윤필리어는 뮤지컬 햄릿의 오필리어가 아니라, 원작의 오필리어 쪽으로 노선을 잡은 건지. 뒤에 매드씬도 '사랑하는 햄릿'이 아버지를 죽여서가 아니라, 그냥 '아버지가 살해당했다'는 사실에 슬퍼서 미쳤다고 보면 그 눈물이 이해 안 갈 것도 없지. 거기서 사랑해 라던가, 햄릿 타령만 안 한다면.

- 클로디어스와 거트루트의 사랑의 세레나데인 '내 평생 당신을 기다렸어' 넘버 들어갈 때. 평소에는 입가에 미소만 짓고 클로디어스를 바라보는 영숙 거트루트가 뭐 때문에 웃음이 터졌는지는 모르겠는데, 갑자기 빵 터지셔서 클로디어스를 보니 그리 좋으신겐가 싶어 같이 웃었다. 뭐 바로 감정잡고 노래를 부르기는 하셨는데, 그 웃음기가 영향을 미쳐서 평소보다 더 클로디어스를 좋아하고, 행복해하는 거트루트를 볼 수 있었다.

- 태을 레어의 목상태는 끝까지 말썽인 듯 싶지만, 최대한 갈라지는 소리를 안 내려고 본인이 노력하는게 보여서. 태을 레어는 늘 오빠 모드이기는 한데, 이게 목소리 상태에 따라 강하게 질러주지를 못하니까, 소리를 부드럽게 내느라 Sister 넘버에서 아주 조근조근 동생 타이르는 오빠임. 책망하는 것도 아니고 내 말 좀 들으라는 것도 아니고 너무너무 다정하고 상냥한 비현실적인 오라버니라니. 그런데도 신기하게 근친삘은 안난다는 게 태을 레어의 좋은 점.

- '피는 피로써' 넘버에서 보여주는 은릿의 감정의 폭발때문에 내가 미쳐버릴 것 같다. '이 분노는 내게 피를 달라하네.'라는 가사를 눈앞에서 그대로 시각화/청각화해서 보여주는 목소리와 연기에, 진짜 저 분노를 식히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피를 봐야 가라앉겠구나 싶다. 자기 목소리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를 뒤집어 쓴 것 같은 은릿. 난 그래서 항상 이 넘버에서 진한 피 비린내가 맡아진다.

- 오늘 He's crazy 넘버에서 은릿이 평소 안 하던 짓을 했다. ㅋㅋㅋ 거트루트의 손에서 편지를 빼앗고 폴로니우스에게 다가가더니 보통은 여기서 '왁!'하고 놀래켜주고 도도도 달려가는데, 오늘은 어째 더 가까이 다가가더니 킁킁킁 냄새를 맡는 거처럼 굴다가 '왁!'하고는 달아나는데, 이건 커튼콜에서 당황시킨 장섭님에 대한 복수냐며ㅋㅋㅋ 그런데, 이 장면에서 더 웃긴건 장섭 폴로니우스가 끊임없이 꿍얼꿍얼 은릿에게 변명하고, 뭔가 그게 아니라요~ 라며 해명하려고 애쓴다는 거. 그래서 은릿이 '아름다운 밤입니다.' 하고는 달려나가면 막 쫒아가면서 애처롭게 '왕자님~, 왕자님~~'을 부르짖으시고.
하여간 이 장면에서 난데없이 햄릿 - 폴로니우스 간에 케미가 폭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러면서 갑자기 지나간 결혼식 장면도 떠오르는 거다. 결혼식에서 햄릿이 오필리어 발견하고 다가가려는데, 뒤에서 폴로니우스가 오필리어를 제지시키는데, 햄릿이 뒤돌아보면 안그랬다는 듯이 딴청을 피우고, 대신에 레어티스가 햄릿을 경계하며 멤버 체인지. 하여간 이 집안 남자들은 극 안에서는 햄릿과 대치되는 상황을 연출하면서, 커튼콜에서는 햄릿을 너무 좋아해ㅋㅋㅋ

- '증거가 필요해'에서 '오늘 밤을 위해'까지 이어지는 복수에 완전히 잠식 당한 은릿은 참 볼때마다 어쩌면 저렇게 눈빛 하나만으로 사람이 저렇게까지 달라 보이나 싶다. 한 배우가 계속 연기하는 건데, 그 배우가 갑자기 피골이 상접하게 변하는 게 아닌데, 이 장면에서 보여지는 은릿은 복수에 정신도 육체도 파먹혀서 뼈만 앙상하게 남아 눈만 묘하게 생생하게 빛나는 그런 기아에 허덕이는 아이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 그렇게 너무 많은 것을 놓아버린 햄릿의 고뇌가 드러나는 '사느냐 죽느냐' 넘버. 2막 시작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곧바로 1막의 감정선을 연장해서 일관되게 이어가야하는 이 2막의 첫 넘버는 배우에게 참 큰 숙제였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나'로 있을 수 있게 하는 많은 것을 놓아야했고, 잃어버려야 했던 햄릿. 복수를 위해 연극을 꾸미고, 자기도 연기를 하면서, 연기하는 나와 진짜 나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저 자존감이 다락같은 왕자님이 자아를 유지하지 못하고 무너져내리는 걸 지켜보는 건 참 뭐라 할 수 없이 서글프고 씁쓸하다.

- 오늘 영숙 거트루트의 I'm untrue는 지금까지 본 중에 가장 좋았다. 사랑받고 싶은 여자로서의 회환에 가득한 절창이었고, 거기에 대응되는 범클로의 Chapel에서의 감정선이 또 얼마나 절절한 통한의 절창이었는지. 하여간 이 두분이 이렇게 딱 균형을 맞춰서 레전드를 찍어주시니, 그저 감읍할 따름.

- 폴로니우스 살해 장면에서 은릿이 보여주는 연기가 원작의 햄릿과 가장 많이 다른 부분이라고 생각이된다. 원작의 햄릿은 어이가 없지만, 폴로니우스를 죽인 것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정당한 것이라도 되는냥 구는데, 뮤지컬 햄릿에서 은릿은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에 대한 경악과 두려움으로 제정신이 아니다. 그래서 정신적으로 너무 많이 무너져내리는데, 복수에 대한 일념으로 마치 터질 것처럼 부풀었던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는 전환점이 되어줬다고 할까. 폴로니우스의 희생은 너무나 안타까운 사건이지만 ㅠ.ㅠ

- 태을 레어는 오늘도 폴로니우스 살해 소식을 듣고 슬픔에 휘청거리며 배에서 내려서 참 좋았는데, Killer's name은 아무래도 질러야하는 넘버라서 참 아슬아슬 삑과 아닌 부분이 교차하더라. 어차피 목소리는 막공까지 어떻게 해결이 안될 것 같으니 이정도 선에서 타협을 해야겠지.

- 첫공 1막을 보고 1n번 잡아놓은 표를 살짝 걱정했던 게 무색하게, 회가 거듭될 수록 빈 공간을 배우 역량으로 메꾸고 채워주는 바람에 더더욱 불타올라서 회전문을 돌고돌고. 참 무서운 배우빨. 오늘 커튼콜에서 장섭 님이 너 또 왔구나라는 시선으로 한참 쳐다보셔서 살짝 민망했;
그리고 퇴장하는 오필리어 끌어당겨 포옹하는 은릿 뒤로 태을 레어 등장. 지레 찔린 은릿이 알아서 포옹을 풀고 벽에 붙었는데, 태을 레어가 또 계속하라는 제스춰. 어정쩡한 상황에서 태을 레어가 악수를 청하자, 은릿이 주춤주춤 악수하고 둘이 화해의 포옹. 오필리어는 삐져서 먼저 들어가는 바람에 사상 초유의 햄릿, 레어티스 동반 퇴장이라는 진귀한 광경을 구경했다.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