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MLET
일 시 : 2011. 10 .20 ~ 2011. 12. 17
장 소 : 유니버설 아트센터
음악 / 대본 : 야넥 레데츠키 , 원작자 : W.셰익스피어
연 출 : 로버트 요한슨, 음악감독 : 원미솔
관극일 : 2011. 12. 17 (토) 15:00 | 햄릿 - 박은태, 레어티스 - 전동석, 클로디어스 - 윤영석, 폴로니우스 - 김장섭
2011. 12. 17 (토) 19:00 | 햄릿 - 김수용, 레어티스 - 강태을, 클로디어스 - 서범석, 폴로니우스 - 김성기
오필리어 - 윤공주, 거트루트 - 신영숙, 호레이쇼 - 이경수, 헬레나 - 이미경, 길던스턴 - 이용진, 로젠크렌츠 - 홍현표, 유랑극단 단장 - 장대웅, 사제 - 구원모, 유랑극단 여왕대역 - 이고운, 이정화(오필리어 얼터), 김승환, 박수진, 김용남, 박유덕, 오미영, 윤정열, 김솔잎(스윙)
-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햄릿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도 누구나 떠올리는 그 유명한 독백으로 2막이 시작된다. 추악한 진실을 세상에 증명하기 위해, 복수할 명분을 얻기 위해 노심초사하다 연극이라는 힌트를 얻은 햄릿이 그 실행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고뇌하는 이 장면에, 저 독백을 사용한 것은 원작과는 다른 흐름이지만, 참으로 적절한 배치라고 생각한다.
1막의 마지막 '오늘 밤을 위해'에서 끌어올린 감정선을 인터미션을 거치고서도 끊어지지 않도록, 그 감정선을 연장시켜서 불러줘야하는 이 넘버는 그만큼 중요하고, 관객들에게 햄릿의 고뇌를 설득력있게 전달하지 않으면, 저 심오한 대사마저 중2의 허세쯤으로 들릴 위험이 있다. 전에도 말했지만, 음표를 소리로 나열하는 건 의미가 없다. 그 안에 담긴 생각과 마음이 중요하지.
복수를 하고 죽을 것인가, 거짓속에 퇴락하여 살 것인가. 얼마나 치열하게 고뇌하는지, 노래에 실린 목소리에서 절절하게 전해져와서 은태가 만들어낸 햄릿이라는 캐릭터가 생생하게 이해가 된다.
그런데 정말 은태가 모차르트!와 피맛골 연가를 거치면서 노래에 감정을 싣는 게 점점 더 섬세해지더니, 햄릿에 와서는 어떻게 목소리에 이렇게 다양한 감정을 표현해내는지 감탄스러울 정도로 실력이 일취월장. 내가 말하는 은태가 노래를 정말 잘 한다는 의미는 그러니까 바로 이런 거다. 타고난 재능도 중요하지만, 꾸준한 노력의 결과, 음정, 박자 정확하고, 진성이던 가성이던 발성도 안정적이고, 성량도 풍부해져서, 그에 따라 표현하고 싶은 대로 자유자재로 목소리에 감정과 연기를 실을 수 있다는 거. 표현자, 그 중에서도 뮤지컬 배우가 자기가 표현하고 싶은 대로 노래로 표현할 수 있다...이보다 더 막강한 무기가 있을까.
- 신영숙 씨의 거트루트는 초반에 불륜까지 저지른 여자치고 너무 우아하고, 위엄이 넘치고, 여왕님스러워서 캐릭터와 좀 안 맞다는 느낌이 들었던 걸 생각해보면, 뒤로 갈수록 사랑받고 싶었던 한 여자의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져서, 배우가 가진 능력과 별개로 극 안에서 이렇게 발전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참으로 뿌듯했더랬다. 노래로는 어디가서 최고 소리 못들을 분이 아니시지만, 그게 극 안에서 캐릭터와 어우러지느냐 하는 건 또 별개의 문제니까.
아들이 진실에 눈을 뜨라며 보여준 연극에서 거트루트가 클로디어스의 범죄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러나 사랑에 눈이 먼 여자의 마음은 쉽사리 그 사실을 믿으려하지 않는다. 나에겐 사랑만이 전부이고, 믿음도 진실도 의미가 없다며 거울 속의 허상을 향해 '이게 나야~'라며 자조하는 I'm untrue, 날이 갈수록 회환에 찬 절절한 절창이라 매번 감탄했지만, 막공에서 그 정점을 찍어주시더라.
- 윤클로를 은릿 첫공에서 만났을 때, 첫공의 어수선함, 아직 배우들이 로딩 전이라는 걸 감안해도 클로디어스 넘버는 귓전을 맴돌뿐 제대로 들려오지 않았다. 팬텀까지 하셨던 분이라 노래 실력에 의심이 드는 건 아니었지만, 익숙하지 않은 장르의 음악이라 그랬는가, 넘버 소화가 전혀 되지 않았더랬다. 악보대로 부르기에 급급한 인상을 받았다면 너무 실례일까. 그러다보니 노래에 감정과 연기를 싣는 게 거의 이루어지지가 않아서, 클로디어스가 거트루트를 사랑하기는 했는지, 다만 왕관에 욕심이 났던 건지 캐릭터가 불분명했다. 게다가 Chapel에서 클로디어스의 복잡한 내면을 보여줘야하는데, 나한테는 처음부터 끝까지 찌질한 인상밖에 안남았;;
그랬는데, 역시 뒤로 갈수록 노래 실력에 걸맞는 모습을 보여주시면서, 나에게 이것이 윤영석이 만들어낸 클로디어스라는 걸 설득해 나가셨다.
낮공, 밤공 더블 캐스팅인 윤클로와 범클로를 한 자리에서 보다보니 은릿과 용릿만큼이나 서로 다르게 캐릭터를 구축했다는게 확연하더라.
먼저 결혼식 장면, 하객들의 축하를 받으며 기뻐하는 클로디어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묻는다. 이렇게 기쁜 날 햄릿은 어디 있느냐고. 그런데, 여기서 윤클로와 범클로의 대사가 미묘하게 다르다. 윤클로는 "사랑스런 햄릿"이라고 하고, 범클로는 "사랑하는 햄릿"이라고 한다. 그래서 윤클로는 어쩌면 햄릿이 어렸을 때 곧잘 놀아준 삼촌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을 하게 만들고, 반대로 범클로의 대사는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면서, 범클로 쪽이 햄릿을 더 경계한다고 할까.
햄릿이 클로디어스를 떠보기 위해 연극을 올렸을 때 반응도 차이가 난다. 물론 두 클로디어스가 다 동요하지만, 범클로가 경악하는 와중에도 그 동요를 눌러 감추는 쪽이라면, 윤클로는 그걸 전혀 감추지 못하고 죄책감과 두려움을 드러낸다.
이 두 클로디어스가 결정적으로 다르게 느껴지는 게 바로 Chapel 넘버다. 물론 가사는 똑같지만,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고, 실려있는 감정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른 캐릭터로 느껴지는데, 딱 한 군데 가사가 다른 부분이 있다. 기도하기 위해 제단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 '신이여, 내게 말해주소서.' 하고 이 뒤에 가사가 범클로는 '신이여, 어디로 가야하나요.'라고 하는데, 윤클로는 '신이여, 내 웃음은 어디에'라고 해서, 같은 클로디어스지만, 윤클로 쪽이 더 연하로 느껴진다.
윤클로는 저 가사에서도 어렴풋이 드러나지만, 형을 죽일만한 배짱도 없고, 그 왕관을 감당할 그릇도 못되는데, 어쩌다 보니 사랑을 위해 범행을 저지른 듯 하다. 그래서 죄책감도 훨씬 강하고. 그에 비해 범클로는 원래 형만큼 능력도 있고, 야심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반란을 일으킬만큼 행동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어쩌다 형수를 사랑하게되면서 구체적으로 일을 꾸민 것 같은 느낌. 윤클로가 우발적인 범행이었다면, 범클로는 계획범이라고 할까.
이렇게 서로 다른 클로디어스라는 캐릭터를 만들어주셨지만, 둘 다 설득력이 있어서 어느 클로디어스도 다 나름 이유가 있는 악역으로 이해가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범클로 쪽이 좀 더 취향이라고 할 수 있지만, 윤클로도 나쁘지 않았으니까.
- 클로디어스를 죽이려다 기도하는 모습에 결국 돌아서서 그길로 어머니에게 달려들어온 햄릿. 살기를 다 추스리지 못하고 험악한 기세 그대로 뛰어들어온 아들을 맞이하는 어머니는 잠시 겁에 질려 칼에 시선을 두지만, 애써 공포를 억누르고 아들을 보듬어주려한다. 막공으로 다가갈수록 '사랑하는 내아들~'에서 영숙 거트루트가 정말 애절한 표정으로 햄릿을 안아주려하는데, 지금 자신이 누구를 죽이려고 했는지 안다면 어머니는 과연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줄 것인가 너무나 괴로운 은릿은 그래서 더 매정하게 그 손길을 뿌리친다.
어머니 당신이 삼촌과 결혼하지만 않았던들, 내가 이런 지옥을 헤매는 일도 없었을 거라는 원망과 미움, 그러나 그보다 더 어머니를 사랑했기에 마음속 갈등이 더 깊어져가는데, 그 속도 모르고 내가 어떻게 해야 네가 웃을 수 있냐고 하니, 애증의 감정이 끌어올라 진실을 외면하는 어머니를 향해 버럭버럭.
그런데, 여기서 참 거트루트의 대응이 너무 안타까운게, 아들이 저렇게 소리 좀 지른다고, 매정하게 몰아부친다고 '우리의 결혼은 불행했단다.' 라며 자신을 짓누르는 죄책감을 아들에게 들이밀고, 자기합리화에, 아들에게 이해해달라고만 하니, 너무 이기적인 엄마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상실감에 고통스러워하던 은릿이 아주 돌아버려서 커튼 뒤에 사람이 숨어있다는 걸 알자마자 단검을 빼들어 찌르는데, 완벽한 기회가 왔을 때조차 살인을 망설였던 햄릿이 상대가 누군지 확인도 안하고 망설임도 없이 칼을 찌른 건 다 거트루트 탓이라고 본다;
- 덴마크 왕실에 몰아닥친 비극의 끝. 언젠가 은태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햄릿은 죽을 때 그제서야 편안해집니다. ‘사는 게 뭐지.’ 이런 생각 하면서요. 이 편안한 죽음의 표현이 지금 제게 숙제입니다."
그 때는 아직 극을 보기 전이라 피상적으로만 느껴졌는데, 햄릿 회전문을 돌면서 저게 무슨 소린지 너무 절실하게 와닿더라. 너무나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는 은릿을 보고 있자면, 차라리 그에겐 죽음이 안식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드는데, 문제는 그래도 초반엔 죽어가면서 편안해지는 게 보였는데, 막공을 향해 갈수록 죽을 때 조차 이 왕자님은 편해지지를 않는 거다. 죽는 순간까지 고뇌를 다 털어버리지 못하고 너무 아프고 애처롭게 가서 마음이 아프다.
- 정말 뮤지컬에서 이렇게 제대로 된 비극을 만날 수 있을 줄 예상치 못했는데, 이 훌륭한 배우분들은 그 병맛 같은 연출도 극복하고 기어이 비극으로서의 뮤지컬 햄릿을 납득시키셨다. 첫공보고 살짝 뜨악했던 걸 생각해보면 진짜 인생은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다는 말은 진리다.
- 커튼콜은 세미막공 + YB막공이라 총막공처럼 무대인사는 없었지만, 소소한 이벤트가 있어 아쉬움을 달래줬다. 특히 앙상블들이 단체로 짜서 무덤지기에서 폴로니우스로 변신을 그냥 무대위에서 드러낸 채 하셔야 했던 장섭님, 큰 재미 주셨고, 나중에 퇴장하실 때도 은릿 볼에 뽀뽀 성공하신 거 축하드림요. ㅋㅋ
은릿은 그 어떤 공연 막공 때보다 더 감격에 겨워하는 게 눈에 보여서, 그동안 햄릿이라는 캐릭터를 자기화 하기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파고들었을까, 그리고 그 노력이 보상을 받아 이렇게 큰 사랑을 받게 되어 많이 뿌듯하겠구나 싶었다. 충분히 자랑스러워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마지막 앵콜의 순간. 환호를 부추기는 관객 조련 없이 그냥 엄지 척 올리고 바로 뛰어나와서 좀 더 크게, 오래 환호해주고 싶었던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조금 아쉽기도 했다.
총막공 커튼콜 때는 무대인사 하러 나오는데 눈가가 벌겋게 부어있어서, 울었구나 했다. 지난 두 달간 햄릿으로 살 수 있어서 행복했다고 인사하는데, 속으로 내 햄릿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라며 혼자 아우성; 고양에서 다시 봅시다.
+ 이걸 3일에 걸쳐 쓰다니, 숙제 하나 마친 기분 OTL
일 시 : 2011. 10 .20 ~ 2011. 12. 17
장 소 : 유니버설 아트센터
음악 / 대본 : 야넥 레데츠키 , 원작자 : W.셰익스피어
연 출 : 로버트 요한슨, 음악감독 : 원미솔
관극일 : 2011. 12. 17 (토) 15:00 | 햄릿 - 박은태, 레어티스 - 전동석, 클로디어스 - 윤영석, 폴로니우스 - 김장섭
2011. 12. 17 (토) 19:00 | 햄릿 - 김수용, 레어티스 - 강태을, 클로디어스 - 서범석, 폴로니우스 - 김성기
오필리어 - 윤공주, 거트루트 - 신영숙, 호레이쇼 - 이경수, 헬레나 - 이미경, 길던스턴 - 이용진, 로젠크렌츠 - 홍현표, 유랑극단 단장 - 장대웅, 사제 - 구원모, 유랑극단 여왕대역 - 이고운, 이정화(오필리어 얼터), 김승환, 박수진, 김용남, 박유덕, 오미영, 윤정열, 김솔잎(스윙)
-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햄릿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도 누구나 떠올리는 그 유명한 독백으로 2막이 시작된다. 추악한 진실을 세상에 증명하기 위해, 복수할 명분을 얻기 위해 노심초사하다 연극이라는 힌트를 얻은 햄릿이 그 실행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고뇌하는 이 장면에, 저 독백을 사용한 것은 원작과는 다른 흐름이지만, 참으로 적절한 배치라고 생각한다.
1막의 마지막 '오늘 밤을 위해'에서 끌어올린 감정선을 인터미션을 거치고서도 끊어지지 않도록, 그 감정선을 연장시켜서 불러줘야하는 이 넘버는 그만큼 중요하고, 관객들에게 햄릿의 고뇌를 설득력있게 전달하지 않으면, 저 심오한 대사마저 중2의 허세쯤으로 들릴 위험이 있다. 전에도 말했지만, 음표를 소리로 나열하는 건 의미가 없다. 그 안에 담긴 생각과 마음이 중요하지.
복수를 하고 죽을 것인가, 거짓속에 퇴락하여 살 것인가. 얼마나 치열하게 고뇌하는지, 노래에 실린 목소리에서 절절하게 전해져와서 은태가 만들어낸 햄릿이라는 캐릭터가 생생하게 이해가 된다.
그런데 정말 은태가 모차르트!와 피맛골 연가를 거치면서 노래에 감정을 싣는 게 점점 더 섬세해지더니, 햄릿에 와서는 어떻게 목소리에 이렇게 다양한 감정을 표현해내는지 감탄스러울 정도로 실력이 일취월장. 내가 말하는 은태가 노래를 정말 잘 한다는 의미는 그러니까 바로 이런 거다. 타고난 재능도 중요하지만, 꾸준한 노력의 결과, 음정, 박자 정확하고, 진성이던 가성이던 발성도 안정적이고, 성량도 풍부해져서, 그에 따라 표현하고 싶은 대로 자유자재로 목소리에 감정과 연기를 실을 수 있다는 거. 표현자, 그 중에서도 뮤지컬 배우가 자기가 표현하고 싶은 대로 노래로 표현할 수 있다...이보다 더 막강한 무기가 있을까.
- 신영숙 씨의 거트루트는 초반에 불륜까지 저지른 여자치고 너무 우아하고, 위엄이 넘치고, 여왕님스러워서 캐릭터와 좀 안 맞다는 느낌이 들었던 걸 생각해보면, 뒤로 갈수록 사랑받고 싶었던 한 여자의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져서, 배우가 가진 능력과 별개로 극 안에서 이렇게 발전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참으로 뿌듯했더랬다. 노래로는 어디가서 최고 소리 못들을 분이 아니시지만, 그게 극 안에서 캐릭터와 어우러지느냐 하는 건 또 별개의 문제니까.
아들이 진실에 눈을 뜨라며 보여준 연극에서 거트루트가 클로디어스의 범죄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러나 사랑에 눈이 먼 여자의 마음은 쉽사리 그 사실을 믿으려하지 않는다. 나에겐 사랑만이 전부이고, 믿음도 진실도 의미가 없다며 거울 속의 허상을 향해 '이게 나야~'라며 자조하는 I'm untrue, 날이 갈수록 회환에 찬 절절한 절창이라 매번 감탄했지만, 막공에서 그 정점을 찍어주시더라.
- 윤클로를 은릿 첫공에서 만났을 때, 첫공의 어수선함, 아직 배우들이 로딩 전이라는 걸 감안해도 클로디어스 넘버는 귓전을 맴돌뿐 제대로 들려오지 않았다. 팬텀까지 하셨던 분이라 노래 실력에 의심이 드는 건 아니었지만, 익숙하지 않은 장르의 음악이라 그랬는가, 넘버 소화가 전혀 되지 않았더랬다. 악보대로 부르기에 급급한 인상을 받았다면 너무 실례일까. 그러다보니 노래에 감정과 연기를 싣는 게 거의 이루어지지가 않아서, 클로디어스가 거트루트를 사랑하기는 했는지, 다만 왕관에 욕심이 났던 건지 캐릭터가 불분명했다. 게다가 Chapel에서 클로디어스의 복잡한 내면을 보여줘야하는데, 나한테는 처음부터 끝까지 찌질한 인상밖에 안남았;;
그랬는데, 역시 뒤로 갈수록 노래 실력에 걸맞는 모습을 보여주시면서, 나에게 이것이 윤영석이 만들어낸 클로디어스라는 걸 설득해 나가셨다.
낮공, 밤공 더블 캐스팅인 윤클로와 범클로를 한 자리에서 보다보니 은릿과 용릿만큼이나 서로 다르게 캐릭터를 구축했다는게 확연하더라.
먼저 결혼식 장면, 하객들의 축하를 받으며 기뻐하는 클로디어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묻는다. 이렇게 기쁜 날 햄릿은 어디 있느냐고. 그런데, 여기서 윤클로와 범클로의 대사가 미묘하게 다르다. 윤클로는 "사랑스런 햄릿"이라고 하고, 범클로는 "사랑하는 햄릿"이라고 한다. 그래서 윤클로는 어쩌면 햄릿이 어렸을 때 곧잘 놀아준 삼촌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을 하게 만들고, 반대로 범클로의 대사는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면서, 범클로 쪽이 햄릿을 더 경계한다고 할까.
햄릿이 클로디어스를 떠보기 위해 연극을 올렸을 때 반응도 차이가 난다. 물론 두 클로디어스가 다 동요하지만, 범클로가 경악하는 와중에도 그 동요를 눌러 감추는 쪽이라면, 윤클로는 그걸 전혀 감추지 못하고 죄책감과 두려움을 드러낸다.
이 두 클로디어스가 결정적으로 다르게 느껴지는 게 바로 Chapel 넘버다. 물론 가사는 똑같지만,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고, 실려있는 감정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른 캐릭터로 느껴지는데, 딱 한 군데 가사가 다른 부분이 있다. 기도하기 위해 제단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 '신이여, 내게 말해주소서.' 하고 이 뒤에 가사가 범클로는 '신이여, 어디로 가야하나요.'라고 하는데, 윤클로는 '신이여, 내 웃음은 어디에'라고 해서, 같은 클로디어스지만, 윤클로 쪽이 더 연하로 느껴진다.
윤클로는 저 가사에서도 어렴풋이 드러나지만, 형을 죽일만한 배짱도 없고, 그 왕관을 감당할 그릇도 못되는데, 어쩌다 보니 사랑을 위해 범행을 저지른 듯 하다. 그래서 죄책감도 훨씬 강하고. 그에 비해 범클로는 원래 형만큼 능력도 있고, 야심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반란을 일으킬만큼 행동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어쩌다 형수를 사랑하게되면서 구체적으로 일을 꾸민 것 같은 느낌. 윤클로가 우발적인 범행이었다면, 범클로는 계획범이라고 할까.
이렇게 서로 다른 클로디어스라는 캐릭터를 만들어주셨지만, 둘 다 설득력이 있어서 어느 클로디어스도 다 나름 이유가 있는 악역으로 이해가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범클로 쪽이 좀 더 취향이라고 할 수 있지만, 윤클로도 나쁘지 않았으니까.
- 클로디어스를 죽이려다 기도하는 모습에 결국 돌아서서 그길로 어머니에게 달려들어온 햄릿. 살기를 다 추스리지 못하고 험악한 기세 그대로 뛰어들어온 아들을 맞이하는 어머니는 잠시 겁에 질려 칼에 시선을 두지만, 애써 공포를 억누르고 아들을 보듬어주려한다. 막공으로 다가갈수록 '사랑하는 내아들~'에서 영숙 거트루트가 정말 애절한 표정으로 햄릿을 안아주려하는데, 지금 자신이 누구를 죽이려고 했는지 안다면 어머니는 과연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줄 것인가 너무나 괴로운 은릿은 그래서 더 매정하게 그 손길을 뿌리친다.
어머니 당신이 삼촌과 결혼하지만 않았던들, 내가 이런 지옥을 헤매는 일도 없었을 거라는 원망과 미움, 그러나 그보다 더 어머니를 사랑했기에 마음속 갈등이 더 깊어져가는데, 그 속도 모르고 내가 어떻게 해야 네가 웃을 수 있냐고 하니, 애증의 감정이 끌어올라 진실을 외면하는 어머니를 향해 버럭버럭.
그런데, 여기서 참 거트루트의 대응이 너무 안타까운게, 아들이 저렇게 소리 좀 지른다고, 매정하게 몰아부친다고 '우리의 결혼은 불행했단다.' 라며 자신을 짓누르는 죄책감을 아들에게 들이밀고, 자기합리화에, 아들에게 이해해달라고만 하니, 너무 이기적인 엄마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상실감에 고통스러워하던 은릿이 아주 돌아버려서 커튼 뒤에 사람이 숨어있다는 걸 알자마자 단검을 빼들어 찌르는데, 완벽한 기회가 왔을 때조차 살인을 망설였던 햄릿이 상대가 누군지 확인도 안하고 망설임도 없이 칼을 찌른 건 다 거트루트 탓이라고 본다;
- 덴마크 왕실에 몰아닥친 비극의 끝. 언젠가 은태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햄릿은 죽을 때 그제서야 편안해집니다. ‘사는 게 뭐지.’ 이런 생각 하면서요. 이 편안한 죽음의 표현이 지금 제게 숙제입니다."
그 때는 아직 극을 보기 전이라 피상적으로만 느껴졌는데, 햄릿 회전문을 돌면서 저게 무슨 소린지 너무 절실하게 와닿더라. 너무나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는 은릿을 보고 있자면, 차라리 그에겐 죽음이 안식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드는데, 문제는 그래도 초반엔 죽어가면서 편안해지는 게 보였는데, 막공을 향해 갈수록 죽을 때 조차 이 왕자님은 편해지지를 않는 거다. 죽는 순간까지 고뇌를 다 털어버리지 못하고 너무 아프고 애처롭게 가서 마음이 아프다.
- 정말 뮤지컬에서 이렇게 제대로 된 비극을 만날 수 있을 줄 예상치 못했는데, 이 훌륭한 배우분들은 그 병맛 같은 연출도 극복하고 기어이 비극으로서의 뮤지컬 햄릿을 납득시키셨다. 첫공보고 살짝 뜨악했던 걸 생각해보면 진짜 인생은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다는 말은 진리다.
- 커튼콜은 세미막공 + YB막공이라 총막공처럼 무대인사는 없었지만, 소소한 이벤트가 있어 아쉬움을 달래줬다. 특히 앙상블들이 단체로 짜서 무덤지기에서 폴로니우스로 변신을 그냥 무대위에서 드러낸 채 하셔야 했던 장섭님, 큰 재미 주셨고, 나중에 퇴장하실 때도 은릿 볼에 뽀뽀 성공하신 거 축하드림요. ㅋㅋ
은릿은 그 어떤 공연 막공 때보다 더 감격에 겨워하는 게 눈에 보여서, 그동안 햄릿이라는 캐릭터를 자기화 하기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파고들었을까, 그리고 그 노력이 보상을 받아 이렇게 큰 사랑을 받게 되어 많이 뿌듯하겠구나 싶었다. 충분히 자랑스러워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마지막 앵콜의 순간. 환호를 부추기는 관객 조련 없이 그냥 엄지 척 올리고 바로 뛰어나와서 좀 더 크게, 오래 환호해주고 싶었던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조금 아쉽기도 했다.
총막공 커튼콜 때는 무대인사 하러 나오는데 눈가가 벌겋게 부어있어서, 울었구나 했다. 지난 두 달간 햄릿으로 살 수 있어서 행복했다고 인사하는데, 속으로 내 햄릿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라며 혼자 아우성; 고양에서 다시 봅시다.
+ 이걸 3일에 걸쳐 쓰다니, 숙제 하나 마친 기분 OT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