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벳 (Das Musical Elisabeth)

일   시 : 2012. 02. 08 ~ 2012. 05. 13
장   소 :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
관극일 : 2012. 04. 03 (화) 20:00
대   본 : 미하엘 쿤체, 작곡 : 실베스터 르베이
연   출 : 로버트 요한슨, 협력연출 : 박인선, 음악감독 : 김문정
캐스트 : 엘리자벳 - 김선영, 죽음 - 송창의, 루케니 - 박은태, 프란츠 요제프 - 민영기, 소피 대공비 - 이태원, 청년 루돌프 - 김승대, 어린 루돌프 - 김효준

- 먼저 음향팀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시작한다. 29일, 31일 공연 때, 마이크 지직거리는 음향 사고가 지속해서 발생했는데, 그게 과연 해결되었을까 했는데, 그 문제가 말끔히 해결된 데다가, 정말 얼마 만에 느껴보는 깨끗한 음향인지. (아니, 이게 사실 다른 공연에서는 일상이었지. 하다못해 동굴 음향이라던 유니버설도 이거보단 나았던 듯;) 이게 블루스퀘어 공연장 자체 문제인지, 하여간에 엘리자벳 공연 보면서 음향에 신경 안 쓰고 관극한 거 진짜 오랜만이어서, 부디, 앞으로도 이 상태를 계속 유지해주시길 간곡히 부탁하는 바이다.

- 그러나 음향 상태가 이렇게 좋았고, 이날 베스트 컨디션이었던 태원 소피 외에 다른 배우들도 다들 제 컨디션이었어서 목 상태에 대한 걱정 같은 것도 없이 참 쾌적한 관극 환경이었음에도 극 자체에 대한 만족도는 별로 높지 않았는데, 송토트가 목 상태가 안 좋거나 컨디션이 안 좋은 것도 아니었는데, 소리가 참 안 나와서. 마이크 볼륨 문제가 아니라, 소리에 힘이 없는 상태랄까. 목소리가 작은 것과는 다른, 뱃심이 들어가지 않은 소리처럼 들려서, 뭔가 김이 빠진 느낌이었다. 그게 그나마 회복된 건 2막의 '그림자는 길어지고 rep.'에서였는데, 송토트가 다른 넘버는 몰라도 이 곡만큼은 확실히 잡고 간다는 느낌인 게, 지난 공연에서도 베스트 송이 '그림자는 길어지고 rep.'이었거든. 송토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승돌프, 동돌프 가리지 않고 목소리의 합이 좋고, 자신이 우세를 점해야 하는 부분에서 확실하게 질러주니 그 임팩트도 상당하고, '이것이 운명~'할 때 보니까 호흡도 꽤 길게 유지하던데, 이렇게 할 줄 아는데 왜 다른 넘버에선....이라는 아쉬움이 좀 남았다.

이날 송토트는 선영 엘리를 손에 넣기 위해 하나씩 덫을 놓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큰딸 소피를 데려가면서 '넌 황제를 어둠 속에 빠뜨리고 있어'라고 반 협박했지만, 선영 엘리는 '아니야!'라고 부인하고 남편과 같이 떠났다. 아이의 양육권을 빼앗기고 모성을 박탈당한 선영 엘리가 지치고 힘들 때, 이리 오라고 유혹하지만, 역시 아직 생의 의지를 버리지 않은 엘리자벳에게 거절당하고, 그리고 결국 엘리자벳을 가장 많이 닮은 루돌프에게 손을 뻗치는데, 참 이때 표정이, 너한테까지 손대지 않았으면...너는 히든카드다 하는 게 보인다. 그래서 던진 수가 말라디 씬이랄까. 결혼한 여자라면 가장 당하고 싶지 않을 최악의 남편의 배신 - 바람 핀 것도 모자라 몹쓸 병까지 옮아온 - 이라면 엘리자벳이 자신의 품에 올 거라고 믿었는데, 이 강인한 여자는 그것마저 '내 자유의 시작'이라며 날아가 버렸다. 그래서 송토트는 비로소 히든카드로 밀어뒀던 루돌프에게 적극적으로 손을 뻗게 된 느낌이다. 내키지 않는 선택일지라도. 그런데 루돌프를 죽이고 나서 괴로워하는 연기가 좀 긴 호흡으로 가는 바람에, 이어지는 추도식과 꽤 오버랩 되는데, 그 부분은 조금 절제해주면 좋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내가 송토트에게 바라는 죽음의 모습은 서늘하고 우아한 죽음, 흥망성쇠를 반복하는 세상을 조용히 관조하며 자연의 섭리대로 세상을 이끄는 죽음이다. 그러다 한 여인을 만나서 변해가는 그런 죽음. 그런데 이 노선도 초월적인 절대자 노선만큼이나 균형 잡기가 참 미묘하고 어렵구나 하는 걸 이날 공연을 보고 깨달았다. 하여간 이 죽음이라는 캐릭터는 어떻게 노선을 잡든지 배우에게 요구하는 게 무척 까다롭구나 싶다.

- 이날 공연에서 베스트 컨디션을 자랑한 건 태원 소피였는데, 안 그래도 카리스마 넘치시는 분이 목 상태까지 쩌렁쩌렁하시니까 이건 뭐 체자레 보르지아의 여자 버전인가 싶었다. 윤제프와 태원 소피일 때, 윤제프는 비교적 고분고분한 아들에서 엘리자벳에 대한 사랑 때문에 어머니와 연을 끊는 것도 불사한다는 느낌이라면, 민제프는 그런 어머니의 카리스마에 눌려있지만, 그래도 내가 황제인데 라는 자의식이 계속 충돌하고 있는 느낌이다. 황제의 집무실에서 아들 구명하는 어머니의 탄원을 들을 때, 윤제프는 그게 어머니의 뜻에 거역하려는 것보다는 원래 동정심 많고, 인간미가 넘치는 성격이라 가슴 아파하는 쪽이고, 민제프는 내가 힘이 좀 더 강해서 내 뜻을 펼칠 수만 있다면 나는 성군이 될 수 있을 텐데 라는 쪽에 더 가까운 것 같다.

하여튼, 이렇게 여군주에 가까운 태원 소피다 보니 자기 밑에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오만한 권력자의 향기가 느껴지면서, 며느리를 고르는 기준이 "엉덩이도 튼실하군" -> "네 이빨을 보여다오." 로 이어지는 며느리 소 취급하는 게 위화감 없이 이어질 따름이고. 그러니까 저 단어 선택도 황실 여인이 쓸 법한 말이 아니라, 황실 유일한 남자의 언어라는 느낌이다.
음모를 꾸밀 때도 그 쟁쟁한 대신들 다 손 위에 올려놓고 주무르시고, 가장 약해진 벨라리아에서 마저 자신에게 반항하는 황제에게 맞서 '갈라놓을 테다!!'라고 일갈하시는 목소리에 위압감이 가득한 여제이신데, 엘리자벳이 황제에게 끼친 영향력을 과소평가한 게 실수셨지. 그러나 태원 소피가 엘리자벳을 과소평가했기에 엘리가 살아남았지, 안 그랬으면 진작 자객을 보내든, 독살이든 하셨을 거 같기는 하다.

- 언제나 믿고 보는 선영 엘리. 소녀 시절의 사랑스러움이나, 나는 나만의 것에서 보여주는 한 편의 드라마 다 좋았고, 이날 제일 좋았던 건 '아무것도' 와 '당신처럼 rep.'이었는데, 이 두 넘버에서 엘리자벳의 심리적 황폐함이 드러나지 않으면, 그냥 분에 넘치는 자리와 어울리지 않는 이기적인 여자로 끝나니까. 특히 '아무것도'에서 반디쉬 부인을 보고 '내가 저 여자였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가사가 배부른 투정쯤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최악이고.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 엘리들은 선영 엘리도 옥엘리도 이 어려운 넘버를 각자의 방식으로 캐릭터에 녹여서 굉장히 잘 소화해내서, 머리로는 황후가 되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저 자리에 앉아서....라면서도 그 절벽 위에 서 있는 막막함, 절박함을 호소하는 엘리자벳을 보고 있으면 얼마나 절망적일지 이해가 된단 말이지.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도움을 청하는 루돌프를 거절하는 장면과 추도식에서의 오열이 설득력이 있게 되는 거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엘리자벳이 섬세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여린 영혼의 소유자라기보다는 상당히 터프하고 강인한 여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건 엘리자벳이 스스로 내린 선택에 대해 어떤 결과일지라도 끝까지 끌어안고 살아갔기 때문이다. 다만, 요제프에 대해서는 '억지로 황후가 됐'다며 끝내 안되는 건 영원히 안된다고 내쳤지만. (차라리 월계수가 될지언정 아폴론의 여인이 되지는 않겠다는 다프네답다.)

- 전반적인 극에 대한 만족도와 상관없이 이날 가장 좋았던 장면은 밀크였는데, 은케니 목 상태도 근래 들어 가장 좋았던 거 같고, 이 장면에서 새삼 루케니가 점하고 있는 높이와 민중들의 관계에 대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엘리자벳이라는 극에서 높이와 인물의 관계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죽음과 엘리자벳, 루돌프 그리고 루케니만이 다른 인물들과 다른 높이의 공간을 차지한다. 죽음의 다리, 계단 위 등등. 그중에서도 루케니에게만 허용된 높이의 공간은 인형극 씬에서의 인형술사로서의 위치와 밀크에서 탈것이다.

이 밀크에서 탈것의 높이가 참 절묘한 게, 탈것에 올라탄 루케니는 군중의 손에 닿지도 않을 만큼 저 위에 있는 것도 아니고, 손을 한껏 뻗으면 닿을 정도의 높이라는 것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다는 건 아래에 있는 사람들보다 좀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고, 멀리 내다볼 수 있는 통찰력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래에 있는 민중은 자기들이 볼 수 있는 만큼밖에 볼 수 없다. 그래서 이 장면에서는 동정하는 척하며 비웃고 선동하는 은케니와 함께, 은케니가 던지는 말 한마디에 우왕좌왕 부화뇌동하는 민중들에 대한 싸늘한 시선 같은 것도 느껴진다. 사실과 진실을 구분하지 못한 채 루케니의 의도대로 이리저리 휘둘리고, 그러니, 루머에서 비롯된 분노가 혁명으로 이어질 리가 없지. 엘리자벳이라는 극 전반에 흐르는 냉소가 이 장면에서도 이렇게 진하게 느껴지는구나 싶더라.

그리고 이건 은케니일 때 더 두드러지기는 하는데, 횡적인 움직임이 일반적인 무대에서 종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캐릭터가 루케니와 엘리자벳인데, 낙하와 상승이라는 일상적이지 않은 움직임이 인물에 위태로운 긴장감을 부여한다고 할까. 밀크에서 다른 케니들은 계단을 걸어 내려오지만, 은케니는 뛰어내리면서 그런 종적인 움직임에 역동성을 부여하고, 극의 마지막 공중에서 내려오는 밧줄이야말로 루케니 종적인 움직임의 화룡점정이다. (죽음이나 루돌프는 사선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이건 단계를 밟는다는 의미, 시간의 흐름과 연관성이 있어서 속도감이 필요한 종적인 움직임과는 거리가 있다.)

엘리자벳은 극 초반에 외줄 타기에서 추락하는 장면에서 인물의 위기를, 1막 '나는 나만의 것 rep.'에서 상승하는 움직임으로 인물의 자신감과 위세를 보여준다. 그리고 연출상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침몰하는 배 씬인데, 난 이 장면이 정말 연출이 잘 됐다고 생각하는 게, 요제프가 엘리자벳을 찾으면 엘리자벳이 떠오르고 쭉 정점을 찍고선 가라앉는데, 이게 마치 타이타닉에서 두 동강 난 배가 정점을 찍고 가라앉는 그림과 겹쳐지면서, 엘리자벳이라는 한 인물의 성장과 몰락에 합스부르크를 결합하여 그 흥망성쇠를 한큐에 보여주는 장면으로 썩 훌륭한 연출이라고 생각한다.

- 극의 마지막으로 갈수록 은케니는 냉소적인 해설자의 모습에서 광기에 찬 루케니로 무게 중심이 기울어가는데, 침몰하는 배 씬에서부터 암살을 준비하는 장면에서 보여주는 불안정한 연기는 극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생생한 루케니의 모습으로 다가오는데, 그저 정보로서 저장된 '기억'이나 '사실', '이야기'가 아니라 직접 손에 피를 묻힌 '체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밧줄에 목을 거는 은케니는 자신이 이번에도 영원한 안식을 얻는 대신, 내일 밤이면 목소리에 의해 다시 일으켜질 시지프스의 운명임을 아는 듯 미소 짓는다. 하여간 그냥 오를레앙이나 살해했으면 이 고생 안 당했을 것을, 계획이란 소용없어~
엘리자벳 (Das Musical Elisabeth)

일   시 : 2012. 02. 08 ~ 2012. 05. 13
장   소 :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
관극일 : 2012. 03. 31 (토) 20:00
대   본 : 미하엘 쿤체, 작곡 : 실베스터 르베이
연   출 : 로버트 요한슨, 협력연출 : 박인선, 음악감독 : 김문정
캐스트 : 엘리자벳 - 김선영, 죽음 - 류정한, 루케니 - 박은태, 프란츠 요제프 - 윤영석, 소피 대공비 - 이태원, 청년 루돌프 - 전동석, 어린 루돌프 - 탕준상

- 5차 스케쥴 나오기 전까지는 마지막 김류은 조합이라 개인적으로 괜히 아련하기도 하고, 뭔가 기대도 있고 그랬는데, 이럴수가, 선영 엘리를 제외하고 나머지 캐스트들의 목상태는 썩 좋지 않은 편이였다. 게다가 만석으로 가득찬 객석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대감에 영향(?)을 받은 건지, 공연 초반에 다들 좀 들뜬 것 같달까. 합이 잘 맞지 않는 부분이 간혹 들리고, 은케니는 소피 대공비 소개하는 부분에서 타이밍이 어긋나서 '한번 보시죠.'는 생략한 채 넘어갔다.

게다가 지난 29일 공연에도 그러더니 '모든 질문은 던져졌다.'에서부터 좀 심하게 지직거리는 마이크 음향 사고가 나서 1막 거의 끝부분 '황후께선 외모를 가꾸신다.'까지 계속 이어져서, 보통 한 두 넘버에서 저러고 말면 모르겠는데, 이게 1막 내내 저러니까 가뜩이나 배우들 목상태 안 좋아, 음향 거슬려 극에 집중을 못하게 하더라.

그래서 사실 후기 쓰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쓰는 건 그 와중에도 근 열흘만에 다시 만난 은케니가 목상태 상관없이 이날도 Milk에서 레전드를 찍어줬고, 또 선영 엘리가 왜 원탑 여주인공인지 무대 위에서 증명해주셨고, 목상태 안 좋은 윤제프도 침몰하는 배 씬에서만큼은 쩌렁쩌렁 류토트를 눌러버릴 기세를 보여주시면서 2막에서 완성도가 올라가면서 공연 자체에 대한 만족도는 어느 정도 충족시켜줬기 때문에. 그리고 배우에 집중도가 떨어지니까 그 외적인 부분들이 눈에 들어오는데, 새삼 음악이 참 좋구나 라던가, 무대 연출 꽤 괜찮네 같은게 느껴져서.

엘리자벳이 무대가 지나치게 화려하고, 여백 없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는 느낌도 있지만, 이날 내가 처음 이런 것도 있었구나 했던 게, 바트이슐에서 황제가 오리 사냥할 때 무대 왼편에 조각상이 등장하는데, 이게 베르니니의 아폴론과 다프네 조각상이더라? 이 엄청 유명한 조각상을 그동안 어찌 몰라봤을까 그랬는데, 저렇게 엉망으로 본을 떠놨으니 알아볼 방법이 있나. 하여간 이 조각상을 보니 연출가는 나름 아폴론과 다프네를 요제프와 엘리자벳에 비유하며 '난 억지로 황후가 됐어요.'의 복선으로 설정해놓은 거 같기는 한데, 이게 바로 그 조각인지 객석에서 알아 볼 수 있겠느냔 말이지.

- 그리고 초월적인 절대자 죽음을 연기하는 건 베테랑 연기자에게도 상당히 어려운 과제겠구나 하는 걸 재차 깨달았다. 류토트가 29일과 같이 영원 불멸의 존재가 찰나를 사는 인간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게 된다...는 노선으로 가려면 이게 배우의 컨디션, 상대 배우와의 합 등등 미묘하고 가느다란 외줄 위에서 균형을 잡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줄타기 하는 건 시씨 뿐이 아니라능;) 게다가 이날 상대하는 배우들이 그날 컨디션이 가장 좋았던 선영 엘리, 죽음을 두려워하지않는 은케니, 언제나 싱싱한 젊은 피 동돌프, 엘리자벳에 대한 사랑 만큼은 그 누구한테도 지지않는 윤제프다보니, 그 모두와 힘겨루기를 해야하는 류토트 입장에서는 이게 참 보통이 아닌 에너지와 기력이 필요할 터. 저 중에 누구 하나라도 고분고분한 존재가 있었다면 좀 나았을까.
아, 그리고 류토트는 컨디션이 안 좋을 때 "ㅈ"발음이 "ㄷ"으로 발음되는 경향이 있는 듯 하다. 마지막 춤과 마디막 춤이 교차하는 후렴구를 듣다 내가 좀 당황스러워서;;

- 이날 선영 엘리는 정말 무대 위에서 가장 빛나는 주인공이었는데, 가장 압권은 '나는 나만의 것'이었다. 정말 몇 번을 반복해서 보는데도 어째 똑같은 감정선이었던 날이 없었던 곡. 왕족이지만, 비교적 자유로운 가풍에서 사랑받고 자란 공주님이 무방비 상태로 시집살이를 겪고, 믿었던 남편에게 외면당해 앞날이 막막하고, 서러운 감정을 아주 여리게 그저 흐느끼듯 부르는 초반부를 지나, 타고난 고고함을 되찾으며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고 내 인생의 주인은 나라고 당차게 다시 일어서는 모습이 참 기특하고, 대견하고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이 막 끓어오르더라. 

한 번은 다 놓고 포기하고 싶어졌지만, 다시 마음을 다잡는 최후 통첩 씬, 아름다운 외모가 곧 권력임을 깨닫고 자신을 가꾸는 장면에서 보여지는 의지 같은 것도 뭐랄까 강렬한 자기주장이 아니라, 이것 마저 없으면 끝장이라는 어떤 절박함 같은 게 절절하게 다가와서, 이후 황실을 떠나 자유를 찾아 떠도는 엘리자벳이 무작정 이기적인 여자로 비치지 않는 효과를 가져왔다. 저렇게 안했으면 진작 자살했을 거 같다는 위태로움, 병적인 우울같은게 느껴져서.

그게 가장 극대화 되어서 다가온 장면은 - 보통 다른 날은 '아무것도'였을 테지만 - 특이하게도 루돌프와 함께 부르는 거울송에서 였다. 요즘들어 동돌프가 어디 가서 연기 특훈이라도 받고 왔는지, 거울송에서 보여주는 무너져내리는 연기가 아주 일품인데, 선영 엘리가 또 여기서 너무나 아프고 시린 엄마를 연기해 주셔서. 차갑게 내치는 날도 있었고, 건조하게 바싹 마른 고목같은 날도 있었고, 나 하나 추스리지 못해 여유가 없는 날도 있었지만, 이날은 우울함의 극치랄까, '어쩔 수가 없구나' 하는 목소리가 같이 흐느끼고 있었다. 꼭 자기 눈물에 빠져 익사할 것 같은 그런 분위기.
그런데 이날 탕돌프가 감기에 걸렸는지 목소리에 비음도 좀 섞이고 원래도 연약하기론 세 애기 돌프 중 젤 섬약한 아이가, 아픈 아이 특유의 칭얼거림까지 보여준데다 동돌프는 살짝 힘만 줘도 산산조각 날 것 같은 금 간 유리 상태여서, 만약 선영 엘리가 저런 극한의 우울을 보여주지 못했다면 이후 절대로 엘리자벳의 감정선에 동조할 수 없었을 텐데, 참 귀신같은 선영님. 몇 번을 찬양해도 모자랄 연기력에 무대 감각 - 상대 배우와 합을 맞추는 - 이다.

- 목상태 안 좋아도 넘버는 클리어하는 은케니. 그럴 땐 또 거기에 대한 보상이랄지 깨알같은 연기로 치고들어오는데, 이날도 광기는 살짝 눌러 죽이고, 그 자리에 서늘한 이지와 냉소라는 말로 부족한 차가운 분노를 채워넣어왔다. 이게 제일 잘 드러난 넘버는 역시 루케니 메인 넘버인 Milk와 Kitsch인데, 우선 Milk부터.

은케니 Milk는 이제 목상태 상관없이 매 공연 꾸준하게 레전을 찍어주는지라, 사실 1막에서 집중하지 못하고 있을 때도, Milk에서 만큼은 집중도가 확 올라가는데, 이게 앙상블 배우들 기합도 또 장난이 아니라. 그러니까 루케니를 연기하는 배우 뿐 아니라, 앙상블 역시 이 넘버에서 보여주는 기백은 정말 보통이 아닌데, 앙상블이 뿜어대는 분노의 열기, 압박해오는 기세를 홀홀단신 혼자 맞서 그들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그 앙상블 소리를 뚫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게 루케니들에겐 정말 큰 부담일 것이다. 특히 이날 은케니한테 더 감탄했던 건 '민중의 자유, 민중의 해방~' 이후에 지르는 부분에서 가성을 사용하는데, 가성으로 지르다 소리가 턱 막힐 것 같으니까 중간에 진성으로 바꿔서 지르더라. 아마도 순간적인 판단으로 바꾼 인상이기는 한데, 목상태 메롱일 때도 이 정도는 거뜬히 뽑아주는구나 싶어서 새삼 놀랬다. 그리고 마지막에 '열!자~~~~~~아!!!!'쯤 오면 이건 뭐 내가 오늘 목이 나가는 한이 있어도 이건 올킬하고 간다는 근성이랄지. 어떻게 저 앙상블의 최대 출력의 소리를 뚫고 그 목소리로 확 잡아올리는지 매번 감동이다.

2막을 여는 Kitsch는 루케니 아이돌 만들어주는 곡이기는 한데, 이날 사관학교에서 단관을 와서 그랬는지, 보통 2막은 오프닝 사인이 따로 없기 때문에 박수로 시작하는 일이 드문데, 우렁찬 박수 소리와 함께 은케니가 등장해서 객석의 흥분이 남다른 날이었다. 그런데 그런 흥겨운 객석 분위기에도 은케니는 싸늘한 비웃음을 입가에 달고, 어딘가 날카로운 분위기를 두르고 있어서, 그 흥을 싹 가라앉히더라. 하여간 내가 본 중에는 삼케니 중에 은케니가 Kitsch에서 가장 신랄하다고 할지. 그 신랄함은 비단 엘리자벳과 황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당신들이 원하는 잘나가는 기념품, 허나 싸구려 대령이요~ 라고 웅변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날 정신병원 장면에서 애드립이 바뀌었는데, 애먼 음악 감독을 물고 늘어지느니 그렇게 바꾼 게 더 마음에 들었다. 미친 사람이 세상을 미치게 만들고, 또 그런 미친 세상이 정신 병자를 낳는 뫼비우스 시스템. 그런 통찰력을 보여주는 은케니라서 참 좋다. 이지와 광기라는 이중성을 어쩌면 저리 적절하게 표현해내는지.

- 윤제프와 태원 소피의 조합이 참 좋은 건, 이 둘이 엘리자벳을 만나기 전까지는 참 서로 잘 어울리는 콤비라는 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윤제프는 황제의 자리를 감당하기엔 사람이 너무 좋다고 할지. 냉혹한 권력의 속성을 견디기에 윤제프는 인간미 넘치는 따뜻한 성품이라, 그 걸 보완해주는 역할이 태원 소피였다는 생각이 든다. 냉정해~ 냉철해~를 외치는 태원 소피가 곁에 있었기에 오스트리아는 그나마 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어머니를 윤제프는 어려워하기 보다는 단단한 버팀목으로 의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민제프보다 더 마마보이로 보이게 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난 이런 따뜻한 성품의 윤제프가 좋다. 그리고 그런 윤제프가 사랑하는 엘리자벳을 위해 어머니와 연을 끊고, 죽음과 대등하게 맞서서 버럭대는 장면에서 보여주는 갭이 참 좋다.

- 극의 마지막, 비로소 안식을 찾아 떠나버린 엘리자벳과 백년 동안 매일 밤 그랬던 것처럼 밧줄에 목을 거는 루케니를 바라보며, 이 극이야 말로 루케니에게 있어 뫼비우스의 끈, 네버 엔딩 스토리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