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벳 (Das Musical Elisabeth)

일   시 : 2012. 02. 08 ~ 2012. 05. 13
장   소 :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
관극일 : 2012. 04. 03 (화) 20:00
대   본 : 미하엘 쿤체, 작곡 : 실베스터 르베이
연   출 : 로버트 요한슨, 협력연출 : 박인선, 음악감독 : 김문정
캐스트 : 엘리자벳 - 김선영, 죽음 - 송창의, 루케니 - 박은태, 프란츠 요제프 - 민영기, 소피 대공비 - 이태원, 청년 루돌프 - 김승대, 어린 루돌프 - 김효준

- 먼저 음향팀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시작한다. 29일, 31일 공연 때, 마이크 지직거리는 음향 사고가 지속해서 발생했는데, 그게 과연 해결되었을까 했는데, 그 문제가 말끔히 해결된 데다가, 정말 얼마 만에 느껴보는 깨끗한 음향인지. (아니, 이게 사실 다른 공연에서는 일상이었지. 하다못해 동굴 음향이라던 유니버설도 이거보단 나았던 듯;) 이게 블루스퀘어 공연장 자체 문제인지, 하여간에 엘리자벳 공연 보면서 음향에 신경 안 쓰고 관극한 거 진짜 오랜만이어서, 부디, 앞으로도 이 상태를 계속 유지해주시길 간곡히 부탁하는 바이다.

- 그러나 음향 상태가 이렇게 좋았고, 이날 베스트 컨디션이었던 태원 소피 외에 다른 배우들도 다들 제 컨디션이었어서 목 상태에 대한 걱정 같은 것도 없이 참 쾌적한 관극 환경이었음에도 극 자체에 대한 만족도는 별로 높지 않았는데, 송토트가 목 상태가 안 좋거나 컨디션이 안 좋은 것도 아니었는데, 소리가 참 안 나와서. 마이크 볼륨 문제가 아니라, 소리에 힘이 없는 상태랄까. 목소리가 작은 것과는 다른, 뱃심이 들어가지 않은 소리처럼 들려서, 뭔가 김이 빠진 느낌이었다. 그게 그나마 회복된 건 2막의 '그림자는 길어지고 rep.'에서였는데, 송토트가 다른 넘버는 몰라도 이 곡만큼은 확실히 잡고 간다는 느낌인 게, 지난 공연에서도 베스트 송이 '그림자는 길어지고 rep.'이었거든. 송토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승돌프, 동돌프 가리지 않고 목소리의 합이 좋고, 자신이 우세를 점해야 하는 부분에서 확실하게 질러주니 그 임팩트도 상당하고, '이것이 운명~'할 때 보니까 호흡도 꽤 길게 유지하던데, 이렇게 할 줄 아는데 왜 다른 넘버에선....이라는 아쉬움이 좀 남았다.

이날 송토트는 선영 엘리를 손에 넣기 위해 하나씩 덫을 놓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큰딸 소피를 데려가면서 '넌 황제를 어둠 속에 빠뜨리고 있어'라고 반 협박했지만, 선영 엘리는 '아니야!'라고 부인하고 남편과 같이 떠났다. 아이의 양육권을 빼앗기고 모성을 박탈당한 선영 엘리가 지치고 힘들 때, 이리 오라고 유혹하지만, 역시 아직 생의 의지를 버리지 않은 엘리자벳에게 거절당하고, 그리고 결국 엘리자벳을 가장 많이 닮은 루돌프에게 손을 뻗치는데, 참 이때 표정이, 너한테까지 손대지 않았으면...너는 히든카드다 하는 게 보인다. 그래서 던진 수가 말라디 씬이랄까. 결혼한 여자라면 가장 당하고 싶지 않을 최악의 남편의 배신 - 바람 핀 것도 모자라 몹쓸 병까지 옮아온 - 이라면 엘리자벳이 자신의 품에 올 거라고 믿었는데, 이 강인한 여자는 그것마저 '내 자유의 시작'이라며 날아가 버렸다. 그래서 송토트는 비로소 히든카드로 밀어뒀던 루돌프에게 적극적으로 손을 뻗게 된 느낌이다. 내키지 않는 선택일지라도. 그런데 루돌프를 죽이고 나서 괴로워하는 연기가 좀 긴 호흡으로 가는 바람에, 이어지는 추도식과 꽤 오버랩 되는데, 그 부분은 조금 절제해주면 좋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내가 송토트에게 바라는 죽음의 모습은 서늘하고 우아한 죽음, 흥망성쇠를 반복하는 세상을 조용히 관조하며 자연의 섭리대로 세상을 이끄는 죽음이다. 그러다 한 여인을 만나서 변해가는 그런 죽음. 그런데 이 노선도 초월적인 절대자 노선만큼이나 균형 잡기가 참 미묘하고 어렵구나 하는 걸 이날 공연을 보고 깨달았다. 하여간 이 죽음이라는 캐릭터는 어떻게 노선을 잡든지 배우에게 요구하는 게 무척 까다롭구나 싶다.

- 이날 공연에서 베스트 컨디션을 자랑한 건 태원 소피였는데, 안 그래도 카리스마 넘치시는 분이 목 상태까지 쩌렁쩌렁하시니까 이건 뭐 체자레 보르지아의 여자 버전인가 싶었다. 윤제프와 태원 소피일 때, 윤제프는 비교적 고분고분한 아들에서 엘리자벳에 대한 사랑 때문에 어머니와 연을 끊는 것도 불사한다는 느낌이라면, 민제프는 그런 어머니의 카리스마에 눌려있지만, 그래도 내가 황제인데 라는 자의식이 계속 충돌하고 있는 느낌이다. 황제의 집무실에서 아들 구명하는 어머니의 탄원을 들을 때, 윤제프는 그게 어머니의 뜻에 거역하려는 것보다는 원래 동정심 많고, 인간미가 넘치는 성격이라 가슴 아파하는 쪽이고, 민제프는 내가 힘이 좀 더 강해서 내 뜻을 펼칠 수만 있다면 나는 성군이 될 수 있을 텐데 라는 쪽에 더 가까운 것 같다.

하여튼, 이렇게 여군주에 가까운 태원 소피다 보니 자기 밑에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오만한 권력자의 향기가 느껴지면서, 며느리를 고르는 기준이 "엉덩이도 튼실하군" -> "네 이빨을 보여다오." 로 이어지는 며느리 소 취급하는 게 위화감 없이 이어질 따름이고. 그러니까 저 단어 선택도 황실 여인이 쓸 법한 말이 아니라, 황실 유일한 남자의 언어라는 느낌이다.
음모를 꾸밀 때도 그 쟁쟁한 대신들 다 손 위에 올려놓고 주무르시고, 가장 약해진 벨라리아에서 마저 자신에게 반항하는 황제에게 맞서 '갈라놓을 테다!!'라고 일갈하시는 목소리에 위압감이 가득한 여제이신데, 엘리자벳이 황제에게 끼친 영향력을 과소평가한 게 실수셨지. 그러나 태원 소피가 엘리자벳을 과소평가했기에 엘리가 살아남았지, 안 그랬으면 진작 자객을 보내든, 독살이든 하셨을 거 같기는 하다.

- 언제나 믿고 보는 선영 엘리. 소녀 시절의 사랑스러움이나, 나는 나만의 것에서 보여주는 한 편의 드라마 다 좋았고, 이날 제일 좋았던 건 '아무것도' 와 '당신처럼 rep.'이었는데, 이 두 넘버에서 엘리자벳의 심리적 황폐함이 드러나지 않으면, 그냥 분에 넘치는 자리와 어울리지 않는 이기적인 여자로 끝나니까. 특히 '아무것도'에서 반디쉬 부인을 보고 '내가 저 여자였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가사가 배부른 투정쯤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최악이고.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 엘리들은 선영 엘리도 옥엘리도 이 어려운 넘버를 각자의 방식으로 캐릭터에 녹여서 굉장히 잘 소화해내서, 머리로는 황후가 되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저 자리에 앉아서....라면서도 그 절벽 위에 서 있는 막막함, 절박함을 호소하는 엘리자벳을 보고 있으면 얼마나 절망적일지 이해가 된단 말이지.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도움을 청하는 루돌프를 거절하는 장면과 추도식에서의 오열이 설득력이 있게 되는 거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엘리자벳이 섬세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여린 영혼의 소유자라기보다는 상당히 터프하고 강인한 여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건 엘리자벳이 스스로 내린 선택에 대해 어떤 결과일지라도 끝까지 끌어안고 살아갔기 때문이다. 다만, 요제프에 대해서는 '억지로 황후가 됐'다며 끝내 안되는 건 영원히 안된다고 내쳤지만. (차라리 월계수가 될지언정 아폴론의 여인이 되지는 않겠다는 다프네답다.)

- 전반적인 극에 대한 만족도와 상관없이 이날 가장 좋았던 장면은 밀크였는데, 은케니 목 상태도 근래 들어 가장 좋았던 거 같고, 이 장면에서 새삼 루케니가 점하고 있는 높이와 민중들의 관계에 대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엘리자벳이라는 극에서 높이와 인물의 관계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죽음과 엘리자벳, 루돌프 그리고 루케니만이 다른 인물들과 다른 높이의 공간을 차지한다. 죽음의 다리, 계단 위 등등. 그중에서도 루케니에게만 허용된 높이의 공간은 인형극 씬에서의 인형술사로서의 위치와 밀크에서 탈것이다.

이 밀크에서 탈것의 높이가 참 절묘한 게, 탈것에 올라탄 루케니는 군중의 손에 닿지도 않을 만큼 저 위에 있는 것도 아니고, 손을 한껏 뻗으면 닿을 정도의 높이라는 것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다는 건 아래에 있는 사람들보다 좀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고, 멀리 내다볼 수 있는 통찰력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래에 있는 민중은 자기들이 볼 수 있는 만큼밖에 볼 수 없다. 그래서 이 장면에서는 동정하는 척하며 비웃고 선동하는 은케니와 함께, 은케니가 던지는 말 한마디에 우왕좌왕 부화뇌동하는 민중들에 대한 싸늘한 시선 같은 것도 느껴진다. 사실과 진실을 구분하지 못한 채 루케니의 의도대로 이리저리 휘둘리고, 그러니, 루머에서 비롯된 분노가 혁명으로 이어질 리가 없지. 엘리자벳이라는 극 전반에 흐르는 냉소가 이 장면에서도 이렇게 진하게 느껴지는구나 싶더라.

그리고 이건 은케니일 때 더 두드러지기는 하는데, 횡적인 움직임이 일반적인 무대에서 종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캐릭터가 루케니와 엘리자벳인데, 낙하와 상승이라는 일상적이지 않은 움직임이 인물에 위태로운 긴장감을 부여한다고 할까. 밀크에서 다른 케니들은 계단을 걸어 내려오지만, 은케니는 뛰어내리면서 그런 종적인 움직임에 역동성을 부여하고, 극의 마지막 공중에서 내려오는 밧줄이야말로 루케니 종적인 움직임의 화룡점정이다. (죽음이나 루돌프는 사선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이건 단계를 밟는다는 의미, 시간의 흐름과 연관성이 있어서 속도감이 필요한 종적인 움직임과는 거리가 있다.)

엘리자벳은 극 초반에 외줄 타기에서 추락하는 장면에서 인물의 위기를, 1막 '나는 나만의 것 rep.'에서 상승하는 움직임으로 인물의 자신감과 위세를 보여준다. 그리고 연출상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침몰하는 배 씬인데, 난 이 장면이 정말 연출이 잘 됐다고 생각하는 게, 요제프가 엘리자벳을 찾으면 엘리자벳이 떠오르고 쭉 정점을 찍고선 가라앉는데, 이게 마치 타이타닉에서 두 동강 난 배가 정점을 찍고 가라앉는 그림과 겹쳐지면서, 엘리자벳이라는 한 인물의 성장과 몰락에 합스부르크를 결합하여 그 흥망성쇠를 한큐에 보여주는 장면으로 썩 훌륭한 연출이라고 생각한다.

- 극의 마지막으로 갈수록 은케니는 냉소적인 해설자의 모습에서 광기에 찬 루케니로 무게 중심이 기울어가는데, 침몰하는 배 씬에서부터 암살을 준비하는 장면에서 보여주는 불안정한 연기는 극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생생한 루케니의 모습으로 다가오는데, 그저 정보로서 저장된 '기억'이나 '사실', '이야기'가 아니라 직접 손에 피를 묻힌 '체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밧줄에 목을 거는 은케니는 자신이 이번에도 영원한 안식을 얻는 대신, 내일 밤이면 목소리에 의해 다시 일으켜질 시지프스의 운명임을 아는 듯 미소 짓는다. 하여간 그냥 오를레앙이나 살해했으면 이 고생 안 당했을 것을, 계획이란 소용없어~
엘리자벳 (Das Musical Elisabeth)

일   시 : 2012. 02. 08 ~ 2012. 05. 13
장   소 :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
관극일 : 2012. 03. 31 (토) 20:00
대   본 : 미하엘 쿤체, 작곡 : 실베스터 르베이
연   출 : 로버트 요한슨, 협력연출 : 박인선, 음악감독 : 김문정
캐스트 : 엘리자벳 - 김선영, 죽음 - 류정한, 루케니 - 박은태, 프란츠 요제프 - 윤영석, 소피 대공비 - 이태원, 청년 루돌프 - 전동석, 어린 루돌프 - 탕준상

- 5차 스케쥴 나오기 전까지는 마지막 김류은 조합이라 개인적으로 괜히 아련하기도 하고, 뭔가 기대도 있고 그랬는데, 이럴수가, 선영 엘리를 제외하고 나머지 캐스트들의 목상태는 썩 좋지 않은 편이였다. 게다가 만석으로 가득찬 객석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대감에 영향(?)을 받은 건지, 공연 초반에 다들 좀 들뜬 것 같달까. 합이 잘 맞지 않는 부분이 간혹 들리고, 은케니는 소피 대공비 소개하는 부분에서 타이밍이 어긋나서 '한번 보시죠.'는 생략한 채 넘어갔다.

게다가 지난 29일 공연에도 그러더니 '모든 질문은 던져졌다.'에서부터 좀 심하게 지직거리는 마이크 음향 사고가 나서 1막 거의 끝부분 '황후께선 외모를 가꾸신다.'까지 계속 이어져서, 보통 한 두 넘버에서 저러고 말면 모르겠는데, 이게 1막 내내 저러니까 가뜩이나 배우들 목상태 안 좋아, 음향 거슬려 극에 집중을 못하게 하더라.

그래서 사실 후기 쓰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쓰는 건 그 와중에도 근 열흘만에 다시 만난 은케니가 목상태 상관없이 이날도 Milk에서 레전드를 찍어줬고, 또 선영 엘리가 왜 원탑 여주인공인지 무대 위에서 증명해주셨고, 목상태 안 좋은 윤제프도 침몰하는 배 씬에서만큼은 쩌렁쩌렁 류토트를 눌러버릴 기세를 보여주시면서 2막에서 완성도가 올라가면서 공연 자체에 대한 만족도는 어느 정도 충족시켜줬기 때문에. 그리고 배우에 집중도가 떨어지니까 그 외적인 부분들이 눈에 들어오는데, 새삼 음악이 참 좋구나 라던가, 무대 연출 꽤 괜찮네 같은게 느껴져서.

엘리자벳이 무대가 지나치게 화려하고, 여백 없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는 느낌도 있지만, 이날 내가 처음 이런 것도 있었구나 했던 게, 바트이슐에서 황제가 오리 사냥할 때 무대 왼편에 조각상이 등장하는데, 이게 베르니니의 아폴론과 다프네 조각상이더라? 이 엄청 유명한 조각상을 그동안 어찌 몰라봤을까 그랬는데, 저렇게 엉망으로 본을 떠놨으니 알아볼 방법이 있나. 하여간 이 조각상을 보니 연출가는 나름 아폴론과 다프네를 요제프와 엘리자벳에 비유하며 '난 억지로 황후가 됐어요.'의 복선으로 설정해놓은 거 같기는 한데, 이게 바로 그 조각인지 객석에서 알아 볼 수 있겠느냔 말이지.

- 그리고 초월적인 절대자 죽음을 연기하는 건 베테랑 연기자에게도 상당히 어려운 과제겠구나 하는 걸 재차 깨달았다. 류토트가 29일과 같이 영원 불멸의 존재가 찰나를 사는 인간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게 된다...는 노선으로 가려면 이게 배우의 컨디션, 상대 배우와의 합 등등 미묘하고 가느다란 외줄 위에서 균형을 잡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줄타기 하는 건 시씨 뿐이 아니라능;) 게다가 이날 상대하는 배우들이 그날 컨디션이 가장 좋았던 선영 엘리, 죽음을 두려워하지않는 은케니, 언제나 싱싱한 젊은 피 동돌프, 엘리자벳에 대한 사랑 만큼은 그 누구한테도 지지않는 윤제프다보니, 그 모두와 힘겨루기를 해야하는 류토트 입장에서는 이게 참 보통이 아닌 에너지와 기력이 필요할 터. 저 중에 누구 하나라도 고분고분한 존재가 있었다면 좀 나았을까.
아, 그리고 류토트는 컨디션이 안 좋을 때 "ㅈ"발음이 "ㄷ"으로 발음되는 경향이 있는 듯 하다. 마지막 춤과 마디막 춤이 교차하는 후렴구를 듣다 내가 좀 당황스러워서;;

- 이날 선영 엘리는 정말 무대 위에서 가장 빛나는 주인공이었는데, 가장 압권은 '나는 나만의 것'이었다. 정말 몇 번을 반복해서 보는데도 어째 똑같은 감정선이었던 날이 없었던 곡. 왕족이지만, 비교적 자유로운 가풍에서 사랑받고 자란 공주님이 무방비 상태로 시집살이를 겪고, 믿었던 남편에게 외면당해 앞날이 막막하고, 서러운 감정을 아주 여리게 그저 흐느끼듯 부르는 초반부를 지나, 타고난 고고함을 되찾으며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고 내 인생의 주인은 나라고 당차게 다시 일어서는 모습이 참 기특하고, 대견하고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이 막 끓어오르더라. 

한 번은 다 놓고 포기하고 싶어졌지만, 다시 마음을 다잡는 최후 통첩 씬, 아름다운 외모가 곧 권력임을 깨닫고 자신을 가꾸는 장면에서 보여지는 의지 같은 것도 뭐랄까 강렬한 자기주장이 아니라, 이것 마저 없으면 끝장이라는 어떤 절박함 같은 게 절절하게 다가와서, 이후 황실을 떠나 자유를 찾아 떠도는 엘리자벳이 무작정 이기적인 여자로 비치지 않는 효과를 가져왔다. 저렇게 안했으면 진작 자살했을 거 같다는 위태로움, 병적인 우울같은게 느껴져서.

그게 가장 극대화 되어서 다가온 장면은 - 보통 다른 날은 '아무것도'였을 테지만 - 특이하게도 루돌프와 함께 부르는 거울송에서 였다. 요즘들어 동돌프가 어디 가서 연기 특훈이라도 받고 왔는지, 거울송에서 보여주는 무너져내리는 연기가 아주 일품인데, 선영 엘리가 또 여기서 너무나 아프고 시린 엄마를 연기해 주셔서. 차갑게 내치는 날도 있었고, 건조하게 바싹 마른 고목같은 날도 있었고, 나 하나 추스리지 못해 여유가 없는 날도 있었지만, 이날은 우울함의 극치랄까, '어쩔 수가 없구나' 하는 목소리가 같이 흐느끼고 있었다. 꼭 자기 눈물에 빠져 익사할 것 같은 그런 분위기.
그런데 이날 탕돌프가 감기에 걸렸는지 목소리에 비음도 좀 섞이고 원래도 연약하기론 세 애기 돌프 중 젤 섬약한 아이가, 아픈 아이 특유의 칭얼거림까지 보여준데다 동돌프는 살짝 힘만 줘도 산산조각 날 것 같은 금 간 유리 상태여서, 만약 선영 엘리가 저런 극한의 우울을 보여주지 못했다면 이후 절대로 엘리자벳의 감정선에 동조할 수 없었을 텐데, 참 귀신같은 선영님. 몇 번을 찬양해도 모자랄 연기력에 무대 감각 - 상대 배우와 합을 맞추는 - 이다.

- 목상태 안 좋아도 넘버는 클리어하는 은케니. 그럴 땐 또 거기에 대한 보상이랄지 깨알같은 연기로 치고들어오는데, 이날도 광기는 살짝 눌러 죽이고, 그 자리에 서늘한 이지와 냉소라는 말로 부족한 차가운 분노를 채워넣어왔다. 이게 제일 잘 드러난 넘버는 역시 루케니 메인 넘버인 Milk와 Kitsch인데, 우선 Milk부터.

은케니 Milk는 이제 목상태 상관없이 매 공연 꾸준하게 레전을 찍어주는지라, 사실 1막에서 집중하지 못하고 있을 때도, Milk에서 만큼은 집중도가 확 올라가는데, 이게 앙상블 배우들 기합도 또 장난이 아니라. 그러니까 루케니를 연기하는 배우 뿐 아니라, 앙상블 역시 이 넘버에서 보여주는 기백은 정말 보통이 아닌데, 앙상블이 뿜어대는 분노의 열기, 압박해오는 기세를 홀홀단신 혼자 맞서 그들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그 앙상블 소리를 뚫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게 루케니들에겐 정말 큰 부담일 것이다. 특히 이날 은케니한테 더 감탄했던 건 '민중의 자유, 민중의 해방~' 이후에 지르는 부분에서 가성을 사용하는데, 가성으로 지르다 소리가 턱 막힐 것 같으니까 중간에 진성으로 바꿔서 지르더라. 아마도 순간적인 판단으로 바꾼 인상이기는 한데, 목상태 메롱일 때도 이 정도는 거뜬히 뽑아주는구나 싶어서 새삼 놀랬다. 그리고 마지막에 '열!자~~~~~~아!!!!'쯤 오면 이건 뭐 내가 오늘 목이 나가는 한이 있어도 이건 올킬하고 간다는 근성이랄지. 어떻게 저 앙상블의 최대 출력의 소리를 뚫고 그 목소리로 확 잡아올리는지 매번 감동이다.

2막을 여는 Kitsch는 루케니 아이돌 만들어주는 곡이기는 한데, 이날 사관학교에서 단관을 와서 그랬는지, 보통 2막은 오프닝 사인이 따로 없기 때문에 박수로 시작하는 일이 드문데, 우렁찬 박수 소리와 함께 은케니가 등장해서 객석의 흥분이 남다른 날이었다. 그런데 그런 흥겨운 객석 분위기에도 은케니는 싸늘한 비웃음을 입가에 달고, 어딘가 날카로운 분위기를 두르고 있어서, 그 흥을 싹 가라앉히더라. 하여간 내가 본 중에는 삼케니 중에 은케니가 Kitsch에서 가장 신랄하다고 할지. 그 신랄함은 비단 엘리자벳과 황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당신들이 원하는 잘나가는 기념품, 허나 싸구려 대령이요~ 라고 웅변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날 정신병원 장면에서 애드립이 바뀌었는데, 애먼 음악 감독을 물고 늘어지느니 그렇게 바꾼 게 더 마음에 들었다. 미친 사람이 세상을 미치게 만들고, 또 그런 미친 세상이 정신 병자를 낳는 뫼비우스 시스템. 그런 통찰력을 보여주는 은케니라서 참 좋다. 이지와 광기라는 이중성을 어쩌면 저리 적절하게 표현해내는지.

- 윤제프와 태원 소피의 조합이 참 좋은 건, 이 둘이 엘리자벳을 만나기 전까지는 참 서로 잘 어울리는 콤비라는 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윤제프는 황제의 자리를 감당하기엔 사람이 너무 좋다고 할지. 냉혹한 권력의 속성을 견디기에 윤제프는 인간미 넘치는 따뜻한 성품이라, 그 걸 보완해주는 역할이 태원 소피였다는 생각이 든다. 냉정해~ 냉철해~를 외치는 태원 소피가 곁에 있었기에 오스트리아는 그나마 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어머니를 윤제프는 어려워하기 보다는 단단한 버팀목으로 의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민제프보다 더 마마보이로 보이게 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난 이런 따뜻한 성품의 윤제프가 좋다. 그리고 그런 윤제프가 사랑하는 엘리자벳을 위해 어머니와 연을 끊고, 죽음과 대등하게 맞서서 버럭대는 장면에서 보여주는 갭이 참 좋다.

- 극의 마지막, 비로소 안식을 찾아 떠나버린 엘리자벳과 백년 동안 매일 밤 그랬던 것처럼 밧줄에 목을 거는 루케니를 바라보며, 이 극이야 말로 루케니에게 있어 뫼비우스의 끈, 네버 엔딩 스토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엘리자벳 (Das Musical Elisabeth)

일   시 : 2012. 02. 08 ~ 2012. 05. 13
장   소 :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
관극일 : 2012. 03. 29 (목) 20:00
대   본 : 미하엘 쿤체, 작곡 : 실베스터 르베이
연   출 : 로버트 요한슨, 협력연출 : 박인선, 음악감독 : 김문정
캐스트 : 엘리자벳 - 김선영, 죽음 - 류정한, 루케니 - 최민철, 프란츠 요제프 - 민영기, 소피 대공비 - 이정화, 청년 루돌프 - 전동석, 어린 루돌프 - 김효준

- 갑작스런 스케쥴 변경으로 4월달에 김류은 조합이 한 번도 없다는데 일단 패닉. 그래서 최민철 루케니를 보고 싶어서 이 날 공연을 예매하길 정말 잘했다고 스스로를 칭찬. 이날 공연은 최민철 루케니를 만나는 게 가장 큰 목적이었는데, 더불어(?) 김류 페어를 한 번이라도 더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ㅠ.ㅠ
아, 하여튼 이날 공연에선 마이크 지직거리는 음향 사고도 있었고, 앙상블 마이크 볼륨에도 좀 문제가 있어서 라우셔 추기경은 몇 장면 생목으로 치시고, 민제프 침몰씬에서 마이크가 안나온 건지 엘리자벳 날리고 그랬지만, 공연 자체로는 참으로 만족스러웠고, 그 만족감을 채워준 데는 최케니가 한 몫 단단히 했다.

- 맨 처음 루케니 프로필 사진 떴을 때, 애정도와 상관없이 내가 제일 싱크로 최강이라고 생각했던 배우는 최민철 씨였다. 진짜 이탈리아 태생의 건달. 거칠고 과격한 상남자. 그런데 내가 최민철 씨를 화선 김홍도로 만난 것 외에 다른 작품은 본 적이 없어서 어떤 캐릭터일지 감이 잡히지 않았는데, 그 사진 이미지만으로 내가 상상했던, 바로 그 루케니를 연기하고 있더라.

최케니는 일단 삼케니 중에 체격이 가장 건장하다. 그렇다고 근육질의 울끈불끈 뭐 이런 건 아닌데도 나는 최케니에게 거친 뱃사람의 느낌을 받았다. 그것도 뽀빠이 쪽이 아니라 부르투스 쪽으로. (연식 나오네;) 아주 거친 바닥에서 굴러먹은 밑바닥 인생이라고 할까. 험한 일도 많이 해봤을 것 같은 싸움꾼, 건달의 이미지. 그래서 나는 다른 평에서 보이는 것처럼 최케니가 친근하지도 구수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무척 마초스럽고, 질낮은 농담을 던지고, 과격하고 폭력적인 캐릭터로 다가오더라. 그래서 마지막 암살 장면도 최케니다운 장면으로 납득이 갔고.

재미있었던 건 죽음과의 관계였는데, 용케니는 죽음을 어느 정도 두려워하고, 은케니는 죽음과 맞짱 뜰 기세고, 최케니는 죽음의 하수인같다는 거였다. 프롤로그에서 죽음이 등장할 때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카페씬에서 둘이 마주칠 때도 은케니는 챙하고 맞부딪치는 느낌인데, 최케니는 '아, 오셨어요~' 이런 느낌. 그래서 이게 폭력단으로 비유하자면, 최케니는 행동 대장의 이미지가 강하고, 은케니는 모사꾼 쪽의 이미지가 강한데, 그게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게 밀크였다. 은케니가 민중의 자유나 해방에 관심도 없으면서 그저 여기저기 쑤석여서 세상을 뒤집어 버리라고 선동하는 쪽이라면, 최케니는 민중의 편에 서서 같이 진지하게 분노하고 동조하는 쪽이더라. 그래서 은케니의 '말이 돼?'는 보여주기 위한 과장스런 쇼 - 당신들이 생각해도 말이 안되지? - 라는 쪽이라면, 최케니는 자기가 말해놓고 스스로도 이게 말이 되냐며 분노하는 쪽이다.
그런데 최케니 디스는 아니고, 좀 단순 무식(;)한 이미지라서 Kitsch에서 냉소와 조롱의 느낌은 많이 퇴색하고 그저 같이 흥겹게 한 판 놀아보자, 남 뒷담화가 제일 재밌잖아? 이런 분위기가 형성되더라. 그리고 이어지는 일옌 - 내가 춤추고 싶을 때가 이어지는 부분에서 죽음을 향해 다시 한 번 예를 표하고 퇴장해서 죽음과 관계를 한층 더 명확하게 보여준다.

최케니의 음색 면에서도 난 꽤 만족했는데, 일단 고음 소화가 안되는 건 음역대 안맞아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 그래도 그 부분을 자신이 낼 수 있는 한 최고음을 지른다는 느낌이었고, 몇 군데는 자기 음역대에 맞춰서 음을 낮춰불렀는데, 별로 어색하지 않았다. (덕분에 '위태로운 그곳 헝가리에~'를 세가지 버전으로 다 들어봤다. 세 루케니가 다 다르게 불러ㅋㅋ) 그리고 그런 거 다 떠나서 최케니 자신에게 맞는 음역대에서 내는 소리가 진짜 울림이 풍부해서 얼마나 듣기 좋았는지. 저음역대도 강하지만, 중음역대에서의 그 깊은 울림이라니. 소리결이 부드럽고, 풍성한데다, 성량도 좋아서 고음에서 소리가 가늘어지는 거 정도야 몇 군데 안되니까. 뭐 하늘 뚫을 것처럼 치고 올라가는 맛은 없어도 단단하고 묵직하게 받쳐주는 소리도 난 좋았다.

- 선영 엘리는 이날 굉장히 고고한 공주님 노선이었다. 다른 귀족 영애들 처럼 신부 수업 착실히 받는 얌전한 아가씨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천방지축 말괄량이라고 하기엔 그저 취미가 조금 별난 공주님. 날 때부터 공주로 키워졌고, 그만큼 자존심도 높고, 도도한 새침데기. 그래서 요제프가 청혼을 했을 땐 황실에 시집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사랑하는지는 제쳐두고라도 저리 훤칠한 황제의 청혼을 받는다는 게 꽤 괜찮은 기분이기도 하고, 설사 마음에 안든다 한들 황제의 청혼을 거절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도 아는 아가씨.
그래서 정화 소피가 늦잠을 깨울 땐 자신의 나태함을 지적받는 것 같아 조금 부끄러워 한다. 그리고 이를 보이라는 둥 할 때는 명색이 나도 공주에 이제 황후인데, 이런 취급 받을 이유가 없는데, 자신을 핍박하는 소피에 질려서 요제프에게 매달려보지만, 눈치 드럽게 없는 요제프는 그 구조 신호가 얼마나 절박한 건지 알아채지도 못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나는 나만의 것에서 처음 시작은 난생 처음 받아보는 박대에 쇼크를 받아 부서질 듯 연약하고 가녀린 씨씨에서 타고난 고고함을 되찾으며 용기를 북돋는 씨씨로 변모해간다.

하여간 이렇게 고고한 성격이라 이게 이후에도 큰딸 소피가 죽었을 때, 딸아이의 죽음을 슬퍼하기 전에 자신의 행동을 자책하는 감정이 더 크다. 내가 이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아이를 죽게 만들었구나 하는. 그리고 그 감정이 그대로 2막 루돌프의 추도식에 이어진다. 아이에 대한 생각보다 자기 고집을 우선해서 소피를 잃고, '고작 자유 따위를 찾겠다고' 다시 루돌프를 잃었다. 그래서 루돌프의 관을 끌어안고 '아가~'라고 부르짖는 엘리자벳을 보며 1막에서 제대로 불러주지 못한 소피까지 떠올리게 되더라. 게다가 이날 동돌프 연기가 정말 물이 올랐는데, 그 전까지는 그래도 청년 루돌프로 보였는데, 이날은 엄마 앞에서 완전 어린 아이로 퇴행해버렸다. 그러다보니, 엘리자벳이 도와주지 않겠다고 하자 처량하게 일어서서 짓는 표정이, 엄마가 세상의 전부였는데 그 엄마한테 버림받아 이 세상에 기댈곳 하나 없는 어린 아이의 서러운 얼굴이라 울컥했다. 난 동석이가 이렇게 어린 표정을 짓는 걸 이날 처음 봤는데 진짜 가슴이 뻐근할정도로 애처롭더라.

쓰다보니 순서상 뒤로 밀린 '아무것도' 넘버. 선영 엘리가 시종일관 도도한 공주님 노선이라, 이 넘버에서 어떤 감정선을 보여줄까 했는데, 역시 선영님은 선영님. 엘리자벳이 좀 덜 지적이었거나, 자존심, 자존감이 좀 덜 단단했더라면 사는게 좀 덜 고달팠을 지도 모르겠다. 그냥 미쳐버리기에 선영 엘리는 너무 똑똑했고, 성품 또한 고고해서, 자신이 미쳤다면 저런 모습이었을까 싶은 반디쉬 부인을 바라보며 난 결코 저렇게 될 수 없을 거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당신처럼 rep.'에서 비록 바싹 말라서 껍질만 남은 고목이 되더라도 남의 동정을 사는 게 죽기보다 싫은 꼿꼿한 성격이라는 게 시녀장님과의 씬에서 보인다.

이렇게 살아도 사는 게 아닌 엘리자벳이 마침내 죽음의 품에 안겼을 때, 마치 어린 아이가 안심할 수 있는 누군가의 품에 안겨 울음을 터트리는 것 같은 그런 장면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위로하듯 토닥이는 류토트의 손길에 비로소 평안을 찾아 세상을 떠나는 선영 엘리. 그런 선영 엘리를 아련하게 바라보는 류토트의 시선에서 오랜만에 사랑, 연애, 로맨스가 아닌 초월적인 죽음을 느낄 수 있었다.

- 그동안 류토트 회차를 그래도 꽤 여러번 봤는데도 사실 난 류토트의 캐릭터 파악이 참 힘들었다. 분명 로맨스 노선은 아니고 초월적인 존재로서 죽음이기는 한데 그게 가끔은 스토커스런 구남친 삘이라 뭔가 이가 맞지 않는 느낌이라. 그렇다고 내가 류토트랑 안 맞는 건 아닌데 뭐가 문젠가 했는데, 그걸 이날 공연에서 깨달았다.
류토트의 연기와 가사 간의 간극이 문제였던 거. 프롤로그에서 '난 그녈 사랑했어'라고 하는데, 암만 들어봐도, 표정을 봐도 저건 엘리자벳을 사랑한 거 같지가 않더란 말이지. 진짜 이 장면에서 류토트에게 가장 맞는 대사는 원작의 가사 쪽이다. - 난 이게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지만, 인간들이 떠들기를 이런 게 사랑이라더라. 그렇다면 사랑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수명은 짧고 죽음은 영원 불멸의 존재. 짧게 스쳐지나가는 인간들 중에 아직도 기억에 남아 가슴을 아프게 하는 존재가 있는데 그것이 엘리자벳이라는 인상. (특별한 너 엘리자벳~ㅋㅋ) 그렇기에 류토트가 엘리자벳을 사랑했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그것도 일종의 사랑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송토트가 로맨스 노선이라 한 눈에 들어오는 사랑이라면 류토트는 존재하는 시간의 단위가 너무나 다른 두 존재간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 참 루케니 의상 중에, '계획이란 소용없어'에서 차 시중들 때, 은케니만 의상을 갈아입는다는걸 처음 알았다. 최케니, 용케니는 바트이슐 당도한 의상 그대로 차시중들고 뱃사공까지 하더라. 은케니는 뱃사공 할 때도 평소 복장에 조끼하나 걸쳐서 이 장면에서 의상 3번 체인지인데 다른 두 루케니는 한 복장으로 죽 가는게 뭔가 의상 담당이 은케니 편애했나?
엘리자벳 (Das Musical Elisabeth)

일   시 : 2012. 02. 08 ~ 2012. 05. 13
장   소 :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
관극일 : 2012. 03. 22 (목) 20:00
대   본 : 미하엘 쿤체, 작곡 : 실베스터 르베이
연   출 : 로버트 요한슨, 협력연출 : 박인선, 음악감독 : 김문정
캐스트 : 엘리자벳 - 옥주현, 죽음 - 류정한, 루케니 - 김수용, 프란츠 요제프 - 윤영석, 소피 대공비 - 이태원, 청년 루돌프 - 김승대, 어린 루돌프 - 이준서

- 김류/옥송/김송 까지 보고나서 옥류가 궁금해지는 건 당연한 수순. 그러나 옥류은은 4월이나 되야 만날 수 있는 조합이고, 마침 삼성카드에서 이벤트까지 한다해서 어차피 삼케니 다 볼 거니까, 이참에 옥류용을 클리어하자~ 는 기분으로 티켓팅. 결과적으로 이날 공연은 옥엘리 덕분에 진~짜 유쾌하게 관극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바람에 옥류 케미스트리 따위는 그냥 휘발휘발ㅋㅋㅋ

- 내가 3월 4일 공연 이후로 계속 선영 엘리만 봐오다 오랜만에 옥엘리를 다시 만났는데, 그 사이 루도비카 여사는 헬레네 황후 수업에만 신경쓰시고 차녀는 그냥 방목하셨나봄. 세상에 천둥벌거숭이? 말괄량이? 저건 그냥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 망아지임. 아놔, 어찌나 생기발랄 천진난만하고 건강미가 흘러넘치던지. 진짜 알프스 소녀 하이디 돋는 씨씨였다. 내면이 너무 순수해서 사랑에 빠지기도 쉬운 시골 처녀(그래도 공주님인데.ㅋㅋ) 보는 느낌이더라.

죽음과의 첫 만남에서, 아무리 취향의 멋진 남자가 눈앞에 나타나도 보통의 아가씨라면 내숭 정도는 떨어주고, 튕길줄도 알아야 하거늘, 이날의 옥씨씨는 너무 순진하고 순수해서 그냥 멋진 남자가 나타나서 자기를 구해주니까 (사실과 다름;) 거기에 혹해서 매달리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류토트 얼굴에 '이거 지금 유혹하는 거야?' 하는 표정이 스쳐지나가더라. 그리고 이날 류토트는 나쁜 남자 모드여서, 이 아가씨야 사람 봐가면서 건드려야지, 잘못 건드렸네 싶더라. 그게 가장 극대화 된 게 마지막 춤이었는데, 지금 먼저 꼬셔놓고 니가 배신을 해? 날 띄엄띄엄 본 모양인데, 부셔버리겠어!!! 스러웠달까ㅋㅋㅋㅋㅋ (이러다, 오늘 후기 계속 ㅋㅋㅋ로 일관할지도;)

하여간 반하기도 쉽게 반하는 이 아가씨가 윤제프를 만나서 또 첫 눈에 사랑에 빠져버렸어ㅋㅋㅋ 오리 사냥하는 모습을 멋있다고 생각했을까. 엄마가 방목(방치?)해서 키워서 자연친화적이라 총 맞고 떨어진 오리 쯤은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주워서 전해주고 그러는게 너무 자연스러울 뿐이고.ㅋㅋ 윤제프도 늘 도도하고 새침한 틀에 박힌 아가씨들만 보다가 꾸미지 않은 순수하고 건강한 매력이 흘러넘쳐서 반짝반짝하는 엘리자벳에게 이끌리는 게 설득력이 있어서, 그렇게 둘이 눈 맞아서 결혼까지 하게 된 게 그냥 다 이해가 되더라. 그러니 마치 야생에서 자란 거 같은 저 거칠고 활기에 넘치는 엘리자벳을 바라보는 태원 소피의 못마땅함까지 아주 절절히 다 이해가 되서 관극하는 내내 얼마나 재미지던지.

- 진짜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애가 보통의 혼사도 아니고, 황실에 시집을 가게 됐으니 그 앞날이야 통속극대로 흘러갈 수 밖에. 그러나, 난 태원 소피를 좋아하니까, 그분의 답답한 심정 충분히 이해한다. 도대체 저 철딱서니를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엄두도 안 날듯. 침실에서 뛰어 나가다 시녀들과 부딪힐 뻔 하고, 무슨 동작을 하던 거침이 없고, 큼직큼직해서 안그래도 긴 머리카락이 정신없이 사방으로 날리고ㅋㅋㅋ 이 다듬어지지 않은 망나니를 과연 태원 소피가 길들일 수 있을 것인가. 태원 소피의 고생길이 훤히 보이더라. 본격 야생마 길들이기ㅋㅋ

저렇게 선머슴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씨씨라서 '나는 나만의 것'이 과연 어떨까 궁금했는데, 와우, 이게 또 의외로 감정선이 이어지더란 거. 비유하자면 시골에서 막 자란 아가씨가 지체 높은 가문에 시집가서 격식이나 예절에 익숙치 않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주늑도 들었지만, 원래부터 야생 망아지, 타고난 강인함으로 극복하며 난 나야! 난 꺽이지 않는다고 결의를 불태우는 그런 노래가 되더라.

이랬던 야생 망아지 옥씨씨가 황후다운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첫 장면은 1막의 피날레인 일명 초상화씬에서다. 그 전까지는 정말 황후다운 기품, 우아함을 전혀 보여주지 않았는데, 여기에서 완전 환골탈태. 선머슴 같은 모습이 싹 사라지고, 여성스럽고 우아하고 위엄있는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정말 몇 번을 봐도 이 장면에서 옥엘리는 참 아름답다. 그리고 이날 여기서 옥엘리가 보여주는 연기가 또 참 마음에 들었던 게, 저렇게 아름답게 꾸미고 나왔지만, 아직까지 자신감이 좀 부족하달지, 정말로 자신의 힘(아름다운 외모)으로 자유를 찾을 수 있을지 아직 확신을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 요제프에게 나를 이해하고 존중해달라고 호소하고 있더라. 그리고 옆에 류토트가 나타나자 똑같은 가사를 던지는데 그쪽은 호소가 아니라 달래는 톤. ㅋㅋㅋ 그리고 마지막에 아름답게 초상화 포즈를 취해주는데 어우 그렇게 빨리 막을 닫아버리면 어쩌자는건지. 제발 그 몇 초 안되는 순간, 그 아름다운 자태를 좀만 더 보게 해주시오!!

- 진정한 황후로 거듭나 시즌2를 연 옥엘리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본성을 완전히 걷어낸 건 아니라서, 2막 내가 춤추고 싶을 때에서 그 생기 넘치는 전투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선영 엘리와 달리 옥엘리는 치마질(?)의 달인급이라 얼마나 펄럭펄럭 치마를 휘두르는지 진짜 저건 휘날리는 깃발이구나 싶었다. 빙글빙글 턴할 때마다 펼쳐지는 풍성한 치맛자락이 그대로 옥엘리 카운트로 쌓이는 느낌. 사실 내가 옥송을 보고 이 쪽은 전투가 성립이 안되니, 옥류는 어떨까 정말 궁금했는데, 이 페어는 제대로 사랑과 전쟁이더라. 그러나 승자는 아무리 봐도 옥엘리. 이건 뭐 죽음이 압박해서 뒤로 밀릴 때도 그게 반격을 노리는 맹수같은 느낌이 드니, 죽음을 밀어낼 땐 그야말로 옥장군님. 이렇게 되면 역시 태원 소피 정도는 되어야 승부가 되려나 (응?)

하여간에 2막에서 옥엘리는 야생마에 고삐가 채워지고, 안장이 얹어지면서 이대로 길들여지나 싶었지만, 여전히 굴레를 벗어나고 싶어서 몸부림치는 걸로 보였다. 황실에 시집와서 자의는 아니지만, 자꾸 모난 돌에 정을 대듯 자신을 쪼아대니 어쩔 수 없이 고삐도, 안장도 받아들였지만, 아직도 여차하면 다 뿌리치고 넓은 벌판으로 달려나가고 싶어하는 엘리자벳. 그러나 차츰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여가는 체념의 과정이 보여지는 '아무것도'와 '당신처럼 rep.'이 참 좋았다. 사실 2막에서 저렇게 기운이 넘치는 엘리자벳이라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일관성이 있었고, 그게 나름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오늘 내 후기는 왜이리 동물의 왕국이지;;)

- 준서 루돌프의 애잔함에 싱크로율 120%인 승돌프가 만나서 참 오늘의 루돌프들은 얼마나 짠하고 애처로웠는지. 승돌프는 마이어링 왈츠에서 정말 무대 바닥으로 패대기쳐질때마다 내가 다 깜짝깜짝 놀라는데, 뭐 배우분들이 더 잘 알고 잘 하시겠지만, 부상당하지 않게 조심해주세요.

- 윤제프~ 아 애정하는 윤제프님. 어쩜 그렇게 목소리가 달콤하신지. ㅠ.ㅠ 진짜 엘리자벳 부를 때의 그 솜사탕같은 느낌 너무 좋고, 태원 소피와 대립각을 이루는 장면에서마저 잔정이 많은 아들이라 말로는 끝이라고 하지만, 표정에서 속상한 게 보여서 좋고, 침몰하는 씬에서 보여주시는 그 깊은 절망감도 참 좋다. 여기서 윤제프 연기 디테일을 오늘 처음으로 좀 자세히 봤는데, 죽음이 줄칼을 들어보이며 이걸로 엘리자벳을 빼앗아가겠다고 할 때, 진짜 가위 눌린 것처럼 몸이 말을 안듣는 듯한 움직임을 보여주셔셔 감탄했다. 이건 너의 악몽~ 에 딱 어울리는 연기!! 와우~

- 극의 마지막까지 옥엘리는 힘이 넘쳐서, 결국 죽음도 내 선택이라는 것 같았는데, 참, 옥엘리가 이렇게 노선을 잡으니 죽음은 끝내 스토커돋는 구남친st를 강하게 뿜을 수 밖에 없어서ㅋㅋㅋ

- 음, 전에도 썼지만, 난 음이탈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그건 사고와 같은 거라고 생각하니까. 그보다 음정 플랫되는 거나 박자 안맞는 쪽이 더 신경쓰여서; 그래서 난 이날 류토트의 노래에 크게 불만 없었고, 다만 목상태는 별로구나 하고 넘겼다. 저음역도 가성으로 나긋하게 부르는 바람에 간간히 소리가 작아지는 부분은 있었지만, 고음에선 성량 빵빵하게 잘 질러주셨고. 딱히 이날 나한테 베스트 송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말아먹었다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뭐, 그런 아쉬움도 옥엘리가 다 날려주셔서 난 굉장히 유쾌하게 웃으며 극장을 나왔지만. 아~ 옥엘리 스릉흔드~

- 이날 내가 옥류 페어 자체 첫공에 용케니 자체 첫공이었는데, 사실 보러가기 전까지는 고민을 좀 했다. 내가 햄릿에서 수용 씨와 별로 좋은 기억이 없어서; 그래도 이번엔 아나키스트 루케니에 가장 잘 어울린다는 평도 있고 해서 보러갔는데, 일단 다른 건 제쳐두고 난 김수용 씨의 창법과는 참 맞지를 않다는 걸 재확인. 음절을 툭툭 내던지는 듯한 창법에다가 박자감이 좀 독특하시더라. 예를 들어 리듬이 따~라라~라~ 이렇게 이어지는 부분을 수용씨는 따 따 따 따 이렇게 부른달까. 그냥 말로 설명하기 좀 어려운데, 수용 씨가 부르는 Kitsch 앞부분을 들어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게 노래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대사를 할 때도 적용이 되는 부분이라 좀 밋밋한 설명조로 들리는데, 내가 은케니에 너무 길들여져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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