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벳 (Das Musical Elisabeth)
일 시 : 2012. 02. 08 ~ 2012. 05. 13
장 소 :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
관극일 : 2012. 04. 03 (화) 20:00
대 본 : 미하엘 쿤체, 작곡 : 실베스터 르베이
연 출 : 로버트 요한슨, 협력연출 : 박인선, 음악감독 : 김문정
캐스트 : 엘리자벳 - 김선영, 죽음 - 송창의, 루케니 - 박은태, 프란츠 요제프 - 민영기, 소피 대공비 - 이태원, 청년 루돌프 - 김승대, 어린 루돌프 - 김효준
- 먼저 음향팀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시작한다. 29일, 31일 공연 때, 마이크 지직거리는 음향 사고가 지속해서 발생했는데, 그게 과연 해결되었을까 했는데, 그 문제가 말끔히 해결된 데다가, 정말 얼마 만에 느껴보는 깨끗한 음향인지. (아니, 이게 사실 다른 공연에서는 일상이었지. 하다못해 동굴 음향이라던 유니버설도 이거보단 나았던 듯;) 이게 블루스퀘어 공연장 자체 문제인지, 하여간에 엘리자벳 공연 보면서 음향에 신경 안 쓰고 관극한 거 진짜 오랜만이어서, 부디, 앞으로도 이 상태를 계속 유지해주시길 간곡히 부탁하는 바이다.
- 그러나 음향 상태가 이렇게 좋았고, 이날 베스트 컨디션이었던 태원 소피 외에 다른 배우들도 다들 제 컨디션이었어서 목 상태에 대한 걱정 같은 것도 없이 참 쾌적한 관극 환경이었음에도 극 자체에 대한 만족도는 별로 높지 않았는데, 송토트가 목 상태가 안 좋거나 컨디션이 안 좋은 것도 아니었는데, 소리가 참 안 나와서. 마이크 볼륨 문제가 아니라, 소리에 힘이 없는 상태랄까. 목소리가 작은 것과는 다른, 뱃심이 들어가지 않은 소리처럼 들려서, 뭔가 김이 빠진 느낌이었다. 그게 그나마 회복된 건 2막의 '그림자는 길어지고 rep.'에서였는데, 송토트가 다른 넘버는 몰라도 이 곡만큼은 확실히 잡고 간다는 느낌인 게, 지난 공연에서도 베스트 송이 '그림자는 길어지고 rep.'이었거든. 송토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승돌프, 동돌프 가리지 않고 목소리의 합이 좋고, 자신이 우세를 점해야 하는 부분에서 확실하게 질러주니 그 임팩트도 상당하고, '이것이 운명~'할 때 보니까 호흡도 꽤 길게 유지하던데, 이렇게 할 줄 아는데 왜 다른 넘버에선....이라는 아쉬움이 좀 남았다.
이날 송토트는 선영 엘리를 손에 넣기 위해 하나씩 덫을 놓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큰딸 소피를 데려가면서 '넌 황제를 어둠 속에 빠뜨리고 있어'라고 반 협박했지만, 선영 엘리는 '아니야!'라고 부인하고 남편과 같이 떠났다. 아이의 양육권을 빼앗기고 모성을 박탈당한 선영 엘리가 지치고 힘들 때, 이리 오라고 유혹하지만, 역시 아직 생의 의지를 버리지 않은 엘리자벳에게 거절당하고, 그리고 결국 엘리자벳을 가장 많이 닮은 루돌프에게 손을 뻗치는데, 참 이때 표정이, 너한테까지 손대지 않았으면...너는 히든카드다 하는 게 보인다. 그래서 던진 수가 말라디 씬이랄까. 결혼한 여자라면 가장 당하고 싶지 않을 최악의 남편의 배신 - 바람 핀 것도 모자라 몹쓸 병까지 옮아온 - 이라면 엘리자벳이 자신의 품에 올 거라고 믿었는데, 이 강인한 여자는 그것마저 '내 자유의 시작'이라며 날아가 버렸다. 그래서 송토트는 비로소 히든카드로 밀어뒀던 루돌프에게 적극적으로 손을 뻗게 된 느낌이다. 내키지 않는 선택일지라도. 그런데 루돌프를 죽이고 나서 괴로워하는 연기가 좀 긴 호흡으로 가는 바람에, 이어지는 추도식과 꽤 오버랩 되는데, 그 부분은 조금 절제해주면 좋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내가 송토트에게 바라는 죽음의 모습은 서늘하고 우아한 죽음, 흥망성쇠를 반복하는 세상을 조용히 관조하며 자연의 섭리대로 세상을 이끄는 죽음이다. 그러다 한 여인을 만나서 변해가는 그런 죽음. 그런데 이 노선도 초월적인 절대자 노선만큼이나 균형 잡기가 참 미묘하고 어렵구나 하는 걸 이날 공연을 보고 깨달았다. 하여간 이 죽음이라는 캐릭터는 어떻게 노선을 잡든지 배우에게 요구하는 게 무척 까다롭구나 싶다.
- 이날 공연에서 베스트 컨디션을 자랑한 건 태원 소피였는데, 안 그래도 카리스마 넘치시는 분이 목 상태까지 쩌렁쩌렁하시니까 이건 뭐 체자레 보르지아의 여자 버전인가 싶었다. 윤제프와 태원 소피일 때, 윤제프는 비교적 고분고분한 아들에서 엘리자벳에 대한 사랑 때문에 어머니와 연을 끊는 것도 불사한다는 느낌이라면, 민제프는 그런 어머니의 카리스마에 눌려있지만, 그래도 내가 황제인데 라는 자의식이 계속 충돌하고 있는 느낌이다. 황제의 집무실에서 아들 구명하는 어머니의 탄원을 들을 때, 윤제프는 그게 어머니의 뜻에 거역하려는 것보다는 원래 동정심 많고, 인간미가 넘치는 성격이라 가슴 아파하는 쪽이고, 민제프는 내가 힘이 좀 더 강해서 내 뜻을 펼칠 수만 있다면 나는 성군이 될 수 있을 텐데 라는 쪽에 더 가까운 것 같다.
하여튼, 이렇게 여군주에 가까운 태원 소피다 보니 자기 밑에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오만한 권력자의 향기가 느껴지면서, 며느리를 고르는 기준이 "엉덩이도 튼실하군" -> "네 이빨을 보여다오." 로 이어지는 며느리 소 취급하는 게 위화감 없이 이어질 따름이고. 그러니까 저 단어 선택도 황실 여인이 쓸 법한 말이 아니라, 황실 유일한 남자의 언어라는 느낌이다.
음모를 꾸밀 때도 그 쟁쟁한 대신들 다 손 위에 올려놓고 주무르시고, 가장 약해진 벨라리아에서 마저 자신에게 반항하는 황제에게 맞서 '갈라놓을 테다!!'라고 일갈하시는 목소리에 위압감이 가득한 여제이신데, 엘리자벳이 황제에게 끼친 영향력을 과소평가한 게 실수셨지. 그러나 태원 소피가 엘리자벳을 과소평가했기에 엘리가 살아남았지, 안 그랬으면 진작 자객을 보내든, 독살이든 하셨을 거 같기는 하다.
- 언제나 믿고 보는 선영 엘리. 소녀 시절의 사랑스러움이나, 나는 나만의 것에서 보여주는 한 편의 드라마 다 좋았고, 이날 제일 좋았던 건 '아무것도' 와 '당신처럼 rep.'이었는데, 이 두 넘버에서 엘리자벳의 심리적 황폐함이 드러나지 않으면, 그냥 분에 넘치는 자리와 어울리지 않는 이기적인 여자로 끝나니까. 특히 '아무것도'에서 반디쉬 부인을 보고 '내가 저 여자였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가사가 배부른 투정쯤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최악이고.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 엘리들은 선영 엘리도 옥엘리도 이 어려운 넘버를 각자의 방식으로 캐릭터에 녹여서 굉장히 잘 소화해내서, 머리로는 황후가 되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저 자리에 앉아서....라면서도 그 절벽 위에 서 있는 막막함, 절박함을 호소하는 엘리자벳을 보고 있으면 얼마나 절망적일지 이해가 된단 말이지.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도움을 청하는 루돌프를 거절하는 장면과 추도식에서의 오열이 설득력이 있게 되는 거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엘리자벳이 섬세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여린 영혼의 소유자라기보다는 상당히 터프하고 강인한 여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건 엘리자벳이 스스로 내린 선택에 대해 어떤 결과일지라도 끝까지 끌어안고 살아갔기 때문이다. 다만, 요제프에 대해서는 '억지로 황후가 됐'다며 끝내 안되는 건 영원히 안된다고 내쳤지만. (차라리 월계수가 될지언정 아폴론의 여인이 되지는 않겠다는 다프네답다.)
- 전반적인 극에 대한 만족도와 상관없이 이날 가장 좋았던 장면은 밀크였는데, 은케니 목 상태도 근래 들어 가장 좋았던 거 같고, 이 장면에서 새삼 루케니가 점하고 있는 높이와 민중들의 관계에 대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엘리자벳이라는 극에서 높이와 인물의 관계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죽음과 엘리자벳, 루돌프 그리고 루케니만이 다른 인물들과 다른 높이의 공간을 차지한다. 죽음의 다리, 계단 위 등등. 그중에서도 루케니에게만 허용된 높이의 공간은 인형극 씬에서의 인형술사로서의 위치와 밀크에서 탈것이다.
이 밀크에서 탈것의 높이가 참 절묘한 게, 탈것에 올라탄 루케니는 군중의 손에 닿지도 않을 만큼 저 위에 있는 것도 아니고, 손을 한껏 뻗으면 닿을 정도의 높이라는 것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다는 건 아래에 있는 사람들보다 좀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고, 멀리 내다볼 수 있는 통찰력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래에 있는 민중은 자기들이 볼 수 있는 만큼밖에 볼 수 없다. 그래서 이 장면에서는 동정하는 척하며 비웃고 선동하는 은케니와 함께, 은케니가 던지는 말 한마디에 우왕좌왕 부화뇌동하는 민중들에 대한 싸늘한 시선 같은 것도 느껴진다. 사실과 진실을 구분하지 못한 채 루케니의 의도대로 이리저리 휘둘리고, 그러니, 루머에서 비롯된 분노가 혁명으로 이어질 리가 없지. 엘리자벳이라는 극 전반에 흐르는 냉소가 이 장면에서도 이렇게 진하게 느껴지는구나 싶더라.
그리고 이건 은케니일 때 더 두드러지기는 하는데, 횡적인 움직임이 일반적인 무대에서 종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캐릭터가 루케니와 엘리자벳인데, 낙하와 상승이라는 일상적이지 않은 움직임이 인물에 위태로운 긴장감을 부여한다고 할까. 밀크에서 다른 케니들은 계단을 걸어 내려오지만, 은케니는 뛰어내리면서 그런 종적인 움직임에 역동성을 부여하고, 극의 마지막 공중에서 내려오는 밧줄이야말로 루케니 종적인 움직임의 화룡점정이다. (죽음이나 루돌프는 사선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이건 단계를 밟는다는 의미, 시간의 흐름과 연관성이 있어서 속도감이 필요한 종적인 움직임과는 거리가 있다.)
엘리자벳은 극 초반에 외줄 타기에서 추락하는 장면에서 인물의 위기를, 1막 '나는 나만의 것 rep.'에서 상승하는 움직임으로 인물의 자신감과 위세를 보여준다. 그리고 연출상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침몰하는 배 씬인데, 난 이 장면이 정말 연출이 잘 됐다고 생각하는 게, 요제프가 엘리자벳을 찾으면 엘리자벳이 떠오르고 쭉 정점을 찍고선 가라앉는데, 이게 마치 타이타닉에서 두 동강 난 배가 정점을 찍고 가라앉는 그림과 겹쳐지면서, 엘리자벳이라는 한 인물의 성장과 몰락에 합스부르크를 결합하여 그 흥망성쇠를 한큐에 보여주는 장면으로 썩 훌륭한 연출이라고 생각한다.
- 극의 마지막으로 갈수록 은케니는 냉소적인 해설자의 모습에서 광기에 찬 루케니로 무게 중심이 기울어가는데, 침몰하는 배 씬에서부터 암살을 준비하는 장면에서 보여주는 불안정한 연기는 극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생생한 루케니의 모습으로 다가오는데, 그저 정보로서 저장된 '기억'이나 '사실', '이야기'가 아니라 직접 손에 피를 묻힌 '체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밧줄에 목을 거는 은케니는 자신이 이번에도 영원한 안식을 얻는 대신, 내일 밤이면 목소리에 의해 다시 일으켜질 시지프스의 운명임을 아는 듯 미소 짓는다. 하여간 그냥 오를레앙이나 살해했으면 이 고생 안 당했을 것을, 계획이란 소용없어~
일 시 : 2012. 02. 08 ~ 2012. 05. 13
장 소 :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
관극일 : 2012. 04. 03 (화) 20:00
대 본 : 미하엘 쿤체, 작곡 : 실베스터 르베이
연 출 : 로버트 요한슨, 협력연출 : 박인선, 음악감독 : 김문정
캐스트 : 엘리자벳 - 김선영, 죽음 - 송창의, 루케니 - 박은태, 프란츠 요제프 - 민영기, 소피 대공비 - 이태원, 청년 루돌프 - 김승대, 어린 루돌프 - 김효준
- 먼저 음향팀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시작한다. 29일, 31일 공연 때, 마이크 지직거리는 음향 사고가 지속해서 발생했는데, 그게 과연 해결되었을까 했는데, 그 문제가 말끔히 해결된 데다가, 정말 얼마 만에 느껴보는 깨끗한 음향인지. (아니, 이게 사실 다른 공연에서는 일상이었지. 하다못해 동굴 음향이라던 유니버설도 이거보단 나았던 듯;) 이게 블루스퀘어 공연장 자체 문제인지, 하여간에 엘리자벳 공연 보면서 음향에 신경 안 쓰고 관극한 거 진짜 오랜만이어서, 부디, 앞으로도 이 상태를 계속 유지해주시길 간곡히 부탁하는 바이다.
- 그러나 음향 상태가 이렇게 좋았고, 이날 베스트 컨디션이었던 태원 소피 외에 다른 배우들도 다들 제 컨디션이었어서 목 상태에 대한 걱정 같은 것도 없이 참 쾌적한 관극 환경이었음에도 극 자체에 대한 만족도는 별로 높지 않았는데, 송토트가 목 상태가 안 좋거나 컨디션이 안 좋은 것도 아니었는데, 소리가 참 안 나와서. 마이크 볼륨 문제가 아니라, 소리에 힘이 없는 상태랄까. 목소리가 작은 것과는 다른, 뱃심이 들어가지 않은 소리처럼 들려서, 뭔가 김이 빠진 느낌이었다. 그게 그나마 회복된 건 2막의 '그림자는 길어지고 rep.'에서였는데, 송토트가 다른 넘버는 몰라도 이 곡만큼은 확실히 잡고 간다는 느낌인 게, 지난 공연에서도 베스트 송이 '그림자는 길어지고 rep.'이었거든. 송토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승돌프, 동돌프 가리지 않고 목소리의 합이 좋고, 자신이 우세를 점해야 하는 부분에서 확실하게 질러주니 그 임팩트도 상당하고, '이것이 운명~'할 때 보니까 호흡도 꽤 길게 유지하던데, 이렇게 할 줄 아는데 왜 다른 넘버에선....이라는 아쉬움이 좀 남았다.
이날 송토트는 선영 엘리를 손에 넣기 위해 하나씩 덫을 놓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큰딸 소피를 데려가면서 '넌 황제를 어둠 속에 빠뜨리고 있어'라고 반 협박했지만, 선영 엘리는 '아니야!'라고 부인하고 남편과 같이 떠났다. 아이의 양육권을 빼앗기고 모성을 박탈당한 선영 엘리가 지치고 힘들 때, 이리 오라고 유혹하지만, 역시 아직 생의 의지를 버리지 않은 엘리자벳에게 거절당하고, 그리고 결국 엘리자벳을 가장 많이 닮은 루돌프에게 손을 뻗치는데, 참 이때 표정이, 너한테까지 손대지 않았으면...너는 히든카드다 하는 게 보인다. 그래서 던진 수가 말라디 씬이랄까. 결혼한 여자라면 가장 당하고 싶지 않을 최악의 남편의 배신 - 바람 핀 것도 모자라 몹쓸 병까지 옮아온 - 이라면 엘리자벳이 자신의 품에 올 거라고 믿었는데, 이 강인한 여자는 그것마저 '내 자유의 시작'이라며 날아가 버렸다. 그래서 송토트는 비로소 히든카드로 밀어뒀던 루돌프에게 적극적으로 손을 뻗게 된 느낌이다. 내키지 않는 선택일지라도. 그런데 루돌프를 죽이고 나서 괴로워하는 연기가 좀 긴 호흡으로 가는 바람에, 이어지는 추도식과 꽤 오버랩 되는데, 그 부분은 조금 절제해주면 좋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내가 송토트에게 바라는 죽음의 모습은 서늘하고 우아한 죽음, 흥망성쇠를 반복하는 세상을 조용히 관조하며 자연의 섭리대로 세상을 이끄는 죽음이다. 그러다 한 여인을 만나서 변해가는 그런 죽음. 그런데 이 노선도 초월적인 절대자 노선만큼이나 균형 잡기가 참 미묘하고 어렵구나 하는 걸 이날 공연을 보고 깨달았다. 하여간 이 죽음이라는 캐릭터는 어떻게 노선을 잡든지 배우에게 요구하는 게 무척 까다롭구나 싶다.
- 이날 공연에서 베스트 컨디션을 자랑한 건 태원 소피였는데, 안 그래도 카리스마 넘치시는 분이 목 상태까지 쩌렁쩌렁하시니까 이건 뭐 체자레 보르지아의 여자 버전인가 싶었다. 윤제프와 태원 소피일 때, 윤제프는 비교적 고분고분한 아들에서 엘리자벳에 대한 사랑 때문에 어머니와 연을 끊는 것도 불사한다는 느낌이라면, 민제프는 그런 어머니의 카리스마에 눌려있지만, 그래도 내가 황제인데 라는 자의식이 계속 충돌하고 있는 느낌이다. 황제의 집무실에서 아들 구명하는 어머니의 탄원을 들을 때, 윤제프는 그게 어머니의 뜻에 거역하려는 것보다는 원래 동정심 많고, 인간미가 넘치는 성격이라 가슴 아파하는 쪽이고, 민제프는 내가 힘이 좀 더 강해서 내 뜻을 펼칠 수만 있다면 나는 성군이 될 수 있을 텐데 라는 쪽에 더 가까운 것 같다.
하여튼, 이렇게 여군주에 가까운 태원 소피다 보니 자기 밑에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오만한 권력자의 향기가 느껴지면서, 며느리를 고르는 기준이 "엉덩이도 튼실하군" -> "네 이빨을 보여다오." 로 이어지는 며느리 소 취급하는 게 위화감 없이 이어질 따름이고. 그러니까 저 단어 선택도 황실 여인이 쓸 법한 말이 아니라, 황실 유일한 남자의 언어라는 느낌이다.
음모를 꾸밀 때도 그 쟁쟁한 대신들 다 손 위에 올려놓고 주무르시고, 가장 약해진 벨라리아에서 마저 자신에게 반항하는 황제에게 맞서 '갈라놓을 테다!!'라고 일갈하시는 목소리에 위압감이 가득한 여제이신데, 엘리자벳이 황제에게 끼친 영향력을 과소평가한 게 실수셨지. 그러나 태원 소피가 엘리자벳을 과소평가했기에 엘리가 살아남았지, 안 그랬으면 진작 자객을 보내든, 독살이든 하셨을 거 같기는 하다.
- 언제나 믿고 보는 선영 엘리. 소녀 시절의 사랑스러움이나, 나는 나만의 것에서 보여주는 한 편의 드라마 다 좋았고, 이날 제일 좋았던 건 '아무것도' 와 '당신처럼 rep.'이었는데, 이 두 넘버에서 엘리자벳의 심리적 황폐함이 드러나지 않으면, 그냥 분에 넘치는 자리와 어울리지 않는 이기적인 여자로 끝나니까. 특히 '아무것도'에서 반디쉬 부인을 보고 '내가 저 여자였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가사가 배부른 투정쯤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최악이고.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 엘리들은 선영 엘리도 옥엘리도 이 어려운 넘버를 각자의 방식으로 캐릭터에 녹여서 굉장히 잘 소화해내서, 머리로는 황후가 되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저 자리에 앉아서....라면서도 그 절벽 위에 서 있는 막막함, 절박함을 호소하는 엘리자벳을 보고 있으면 얼마나 절망적일지 이해가 된단 말이지.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도움을 청하는 루돌프를 거절하는 장면과 추도식에서의 오열이 설득력이 있게 되는 거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엘리자벳이 섬세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여린 영혼의 소유자라기보다는 상당히 터프하고 강인한 여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건 엘리자벳이 스스로 내린 선택에 대해 어떤 결과일지라도 끝까지 끌어안고 살아갔기 때문이다. 다만, 요제프에 대해서는 '억지로 황후가 됐'다며 끝내 안되는 건 영원히 안된다고 내쳤지만. (차라리 월계수가 될지언정 아폴론의 여인이 되지는 않겠다는 다프네답다.)
- 전반적인 극에 대한 만족도와 상관없이 이날 가장 좋았던 장면은 밀크였는데, 은케니 목 상태도 근래 들어 가장 좋았던 거 같고, 이 장면에서 새삼 루케니가 점하고 있는 높이와 민중들의 관계에 대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엘리자벳이라는 극에서 높이와 인물의 관계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죽음과 엘리자벳, 루돌프 그리고 루케니만이 다른 인물들과 다른 높이의 공간을 차지한다. 죽음의 다리, 계단 위 등등. 그중에서도 루케니에게만 허용된 높이의 공간은 인형극 씬에서의 인형술사로서의 위치와 밀크에서 탈것이다.
이 밀크에서 탈것의 높이가 참 절묘한 게, 탈것에 올라탄 루케니는 군중의 손에 닿지도 않을 만큼 저 위에 있는 것도 아니고, 손을 한껏 뻗으면 닿을 정도의 높이라는 것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다는 건 아래에 있는 사람들보다 좀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고, 멀리 내다볼 수 있는 통찰력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래에 있는 민중은 자기들이 볼 수 있는 만큼밖에 볼 수 없다. 그래서 이 장면에서는 동정하는 척하며 비웃고 선동하는 은케니와 함께, 은케니가 던지는 말 한마디에 우왕좌왕 부화뇌동하는 민중들에 대한 싸늘한 시선 같은 것도 느껴진다. 사실과 진실을 구분하지 못한 채 루케니의 의도대로 이리저리 휘둘리고, 그러니, 루머에서 비롯된 분노가 혁명으로 이어질 리가 없지. 엘리자벳이라는 극 전반에 흐르는 냉소가 이 장면에서도 이렇게 진하게 느껴지는구나 싶더라.
그리고 이건 은케니일 때 더 두드러지기는 하는데, 횡적인 움직임이 일반적인 무대에서 종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캐릭터가 루케니와 엘리자벳인데, 낙하와 상승이라는 일상적이지 않은 움직임이 인물에 위태로운 긴장감을 부여한다고 할까. 밀크에서 다른 케니들은 계단을 걸어 내려오지만, 은케니는 뛰어내리면서 그런 종적인 움직임에 역동성을 부여하고, 극의 마지막 공중에서 내려오는 밧줄이야말로 루케니 종적인 움직임의 화룡점정이다. (죽음이나 루돌프는 사선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이건 단계를 밟는다는 의미, 시간의 흐름과 연관성이 있어서 속도감이 필요한 종적인 움직임과는 거리가 있다.)
엘리자벳은 극 초반에 외줄 타기에서 추락하는 장면에서 인물의 위기를, 1막 '나는 나만의 것 rep.'에서 상승하는 움직임으로 인물의 자신감과 위세를 보여준다. 그리고 연출상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침몰하는 배 씬인데, 난 이 장면이 정말 연출이 잘 됐다고 생각하는 게, 요제프가 엘리자벳을 찾으면 엘리자벳이 떠오르고 쭉 정점을 찍고선 가라앉는데, 이게 마치 타이타닉에서 두 동강 난 배가 정점을 찍고 가라앉는 그림과 겹쳐지면서, 엘리자벳이라는 한 인물의 성장과 몰락에 합스부르크를 결합하여 그 흥망성쇠를 한큐에 보여주는 장면으로 썩 훌륭한 연출이라고 생각한다.
- 극의 마지막으로 갈수록 은케니는 냉소적인 해설자의 모습에서 광기에 찬 루케니로 무게 중심이 기울어가는데, 침몰하는 배 씬에서부터 암살을 준비하는 장면에서 보여주는 불안정한 연기는 극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생생한 루케니의 모습으로 다가오는데, 그저 정보로서 저장된 '기억'이나 '사실', '이야기'가 아니라 직접 손에 피를 묻힌 '체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밧줄에 목을 거는 은케니는 자신이 이번에도 영원한 안식을 얻는 대신, 내일 밤이면 목소리에 의해 다시 일으켜질 시지프스의 운명임을 아는 듯 미소 짓는다. 하여간 그냥 오를레앙이나 살해했으면 이 고생 안 당했을 것을, 계획이란 소용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