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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0.05.29 비극의 본질 - 오이디푸스 왕(2002)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Anthony and Cleopatra)

일   시 : 2011. 11. 24 ~ 2011. 11. 27
장   소 : LG아트센터
관극일 : 2011. 11. 25 (금) 19:30
연   출 : 니나가와 유키오(蜷川幸雄), 원작 : W.셰익스피어
캐스트 :
안토니 - 요시다 코타로, 클레오파트라 - 아란 케이
옥타비우스 시저 - 이케우치 히로유키, 도미티어스 이노바버스 - 하시모토 준, 옥타비아 - 나카가와 안나, 샤미언 - 쿠마가이 마미, 이로스 - 니탄다 마사즈미, 레피더스 - 사카구치 요시사다, 폼피어스 - 요코타 에이지, 점쟁이 - 아오야마 타츠미, 미시너스 - 주쿠 잇큐, 알렉서스 - 데즈카 히데아키, 아이러스 - 이케타니 노부에, 미너스 - 오가와 히로키, 내시/천사/소년 - 시모츠카 쿄헤이

니나가와 유키오가 우리나라에 온다는 소식을 몇 달전에 들었을 때, 어머~ 이건 봐야해!! 라며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쩌다 내가 햄릿 회전문 도는 기간에 연극이 올라가서 날짜 잡기 참 힘들었다; 하여간 그래도 짧은 기간 중에 용케 스케줄 잡아서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니나가와 유키오의 작품을 본 건 다 노무라 만사이 상 덕분(;)이었는데, 고전을 원작에 충실하게 재현하면서, 볼거리에도 신경을 많이 쓰는 그의 연출 방식은 상당히 내 취향이기도 했다. 비록 DVD로 밖에 감상하지 못했지만. 그래서 이번에 생생한 무대로 그가 연출한 고전을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대가 됐다.

과학이라는 LG아트센터지만, 대극장이라 과연 배우들 목소리가 극장 구석구석 잘 퍼질까 살짝 걱정하고 보러갔는데, 이럴수가 OTL 이제 한국 공연 이틀째였는데, 주연 배우들 목소리가 벌써부터 상당히 상해있더라. 특히 대사량이 많은 셰익스피어 극에 주인공인 안토니 역의 요시다 코타로와 옥타비우스 역의 이케우치 히로유키는 극 후반으로 가면서 안스러울 정도로 목소리가 안습이었다. ㅠ.ㅠ 그 와중에 우리 여왕님, 클레오파트라의 아란 케이만이 끝까지 목소리가 제대로 나와주셔서, 오오~ 전 다카라즈카 성조(星組) 탑스타의 위엄! 

니나가와 유키오의 연출은 내가 보기엔 연출가의 개입이 극도로 절제된, 희곡에 가장 충실한 연출이지 않은가 싶다. 그러면서도 제한된 무대라는 장소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데 능하다. 오이디푸스 왕에서도 선보였던 드나드는 출입문의 활용이나, 객석까지 무대로 확장하는 기법을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에서도 적용해서, 통로석을 잡은 나를 쓰담쓰담했다.
니나가와 사단이라고 해도 무방할 배우들은 안정적인 연기를 선보였고, 목상태만 좀 더 좋았다면 참 좋았을 것을. ㅠ.ㅠ

요시다 코타로의 안토니는 그야말로 클레오파트라에 푹 빠져서 모든 걸 건 남자. 자신의 영광, 권위 그 모든 걸 그녀의 발 앞에 내던진 한 영웅의 모습을 잘 표현해줬다. 비록 사랑에 쩔어서 몰락해가지만, 그럼에도 영웅으로서의 고귀함만은 죽는 순간까지 간직하고 간, 그래서 결코 찌질함같은 건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던 늙은 사자와도 같았다.

오오~ 여왕님~ 아란 케이의 클레오파트라는 정말 너무나 아름답고, 아름답고 또 아름다우셨다. 무대에 등장하는 순간 그 아름다운 자태에 시선을 빼앗기고, 그러면서도 변덕스럽고, 위험한 팜므파탈의 정석을 제대로 보여주셨다. 목소리에 넘치는 위엄이나 그 당당한 자태에서 뿜어져나오는 카리스마. 그냥 그 앞에 무릎꿇고 엎드리고 싶게 만들어주는 여왕님이셨다. 마지막에 살짝 체력이 좀 딸리시는 티가 나기는 했지만, 뭐 3시간 30분이나 되는 극에서 안토니도 먼저 퇴장한 마당에 끝까지 무대를 지키고 계셔야 했으니까요. 게다가 허리가 한 줌 밖에 안되시던데, 그 가냘픈 몸매로 그런 기백을 내내 보여주신 것만으로도 저는 닥치고 경배를 올립니다.

그리고 오늘 나한테서 가장 많은 눈물을 뽑아내신 두 분. 이노바버스 역의 하시모토 준, 이로스 역의 니탄다 마사즈미.
이노바버스라는 캐릭터가 심복이었다 주인의 몰락을 보며 배신하는 역이었는데, 그럼에도 전혀 비열하거나 비겁한 캐릭터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안토니의 충복이었고 배신자로 죽어가는 자신에 절망하여 자살하는데 시종일관 유머가 넘치고, 능글맞고, 한편으로 시니컬하던 그 캐릭터가 마지막에 와서 그렇게 절절하게 내 눈물을 뽑아낼 줄은 몰랐지. 거기에 비해 이로스는 시작부터 끝까지 오로지 안토니만 바라보는 충복. 안토니의 추락에 신하들이 하나 둘 곁을 떠날 때도 끝까지 그 곁에 남은 충복. 그런 단심이 또 눈물샘을 자극해서.

옥타비우스와 옥타비아의 두 배우님은 참으로 이국적인 외모에 어찌나 선남 선녀이신지. 그런데, 이 두 남매에게 레어티스와 오필리어가 겹쳐보이는 건 정말 어쩔 수 없었다. 안토니와 옥타비우스의 정치적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옥타비아가 안토니와 정략 결혼을 하게되는데, 옥타비아가 안토니를 따라 알렉산드리아로 떠나는 장면에서 이건 뭐 남매가 아니라 거의 연인사이더라. 포옹도 어찌나 격하게 하시는지. 오필리어는 누이동생이었지만, 옥타비아는 누나라. 이 애틋한 남매들을 어쩌면 좋냐.ㅋㅋㅋ

뭐, 잘 알려진대로 클레오파트라는 독사를 이용해 자살하는데, 여기서도 참, 물론 뱀 인형을 쓸 수 밖에 없는 건 알겠지만, 그 심각한 장면이 희화화 되어서는 안되는데,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나오는 건 어쩔 수 없더라. 게다가 그 뱀인형이 클레오파트라를 죽이고 바닥에 떨어진 다음 어쩐일인지 슥슥 기어서 무대를 가로질러 퇴장하고 있는거다! 아 진짜 웃음 참느라 죽는 줄 알았다.ㅋㅋㅋ

각종 조형과 조명을 이용하여 로마와 이집트, 해적선, 전쟁터를 보여준 무대연출은 정신없는 등퇴장과 함께 무대를 어수선하게 했지만, 그래도 3시간 30분이라는 긴 시간을 지루해하지 않으며 극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번에 공연 성과가 좋으면 다음에도 니나가와 유키오 연출의 다른 작품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 니나가와 씨의 연출이 원작의 충실한 재현이라고 했는데, 거기에 일본색을 덧입히는 부분을 빼먹고 안 썼다. 극의 시작, 무대를 덮은 막은 가부키 막처럼 오방색 천인데, 그걸 가부키 개막할 때 처럼 딱딱거리는 소리에 맞춰 무대를 가로질러 막을 젖힌다. 그리고 이번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에서는 '무사'나 '장군'이라는 요소에 일본색을 덧입혀서, 그 주종관계라던가, 충복의 자살같은 건 상당히 일본적 정서가 느껴지더라.

++ 그러고보니 요 근래 본 극은 다 주인공들이 죽어버리는군. 햄릿에 오이디푸스,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까지. 감상 후기는 밀리기 시작하면 정말 감당이 안된다. ㅠ.ㅠ 나머지도 어떻게든 마무리를...
오이디푸스왕(2002, オイディプス王)

원작 : 소포클레스
연출 : 니나가와 유키오 (蜷川幸雄)
음악 : 토기 히데키 (東儀秀樹)
상연 : 2002년 6월 7일 ~ 30일 / 시부야 분카무라 시어터 코쿤
         DVD 수록은 6월 15일

출연
오이디푸스 : 노무라 만사이 (野村萬齋)
이오카스테 : 아사미 레이 (麻実れい)
크레온 : 요시다 코타로 (吉田鋼太郎)
테레시아스 : 칸노 나오유키 (菅野菜保之)
코린토스의 사자 : 카와베 큐조 (川辺久造)
양치기 : 야마야 하츠오 (山谷初男)
보고자 : 스고 타카유키 (菅生隆之)


서글픈 피아노 선율에 스산한 바람 소리가 들려오며 어슴프레 조명이 켜지면, 라마승과도 같은 붉은 복장의 코러스가 절규에 휩싸인 오체투지를 시작한다. 몸을 내던질 만큼의 고통과 탄식, 오체투지의 박력에 일순 테베의 비참한 상황이 눈앞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비로소 무대에 시선이 가는데, 벽면은 녹슬고 균열이 간 거울, 무대엔 마치 솟대를 연상시키는 기둥이 군데군데 세워져 있다. 그 기둥엔 룽따(風馬, 바람의 말이라는 뜻의 티벳, 네팔 등지의 오색 기도천)같은 것이 장식되어 있어 코러스와 함께 어딘지 티벳을 떠올리게 한다.
역병으로 황폐해진 테베의 슬픔을 쏟아내는 코러스의 절규에 드디어 정면의 문이 열리며 오이디푸스왕이 등장한다. 극적인 효과를 노린 핀 라이트에 하얀 의상이 콘트라스트되며, 어둡고 절망스러운 분위기가 일순 화사하게 피어난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 테베를 구한 젊고 현명한 자랑스러운 왕. 첫 등장에서부터 어찌나 오만하고 위엄에 넘치는 왕님이시던지.

만사이 상, 36세에 연기하신 이 오이디푸스 왕은 초반 감정의 기복이 널뛰듯 한 불안정한 "청년왕"의 모습을 보여주신다. 테베에 내린 재앙의 원인이 선왕 라이오스를 죽인 살인자 때문이라고 신탁이 내리자, 세상에 자기만큼 정당한 자는 없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살인자를 향해 저주를 퍼붓는다. 그 살인자를 찾는데 전력을 다하겠다, 자신은 정의롭다고 과시하며, 예언자 테레시아스를 청해 사건의 진실을 듣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이 가식이었음이 드러나는 것은 순식간. 테레시아스가 전하는 불편한 진실에 대해, 오히려 이것이 크레온과 테레시아스의 정치적 음모가 아닌가 억측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왕에게 들을 귀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테레시아스는 "지금은 올바로 보는 그 눈도 그 때가 되면 어둠밖에 비추지 않을 것이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떠나간다.

한편 왕위 찬탈을 노린다는 억울한 누명을 쓴 크레온과의 험악한 분위기는 이오카스테의 등장으로 수습이 된다. 남자들만 득실대는 무대위에 단 한송이 백합처럼 우아하고 늠름하고 위엄이 넘치는 왕비님이다. 과연 전 다카라즈카 설조의 남자역 탑스타였던 아사미 레이 상, 독특한 매력이 있는 배우다. 단 한명의 여배우로서 전혀 밀리는 느낌이 없고, 오히려 모두가 의지하는 어머니의 이미지가 강했다. 50년생인 아사미 상은 만사이 상과 띠동갑을 넘어서는 나이차가 있지만, 두 사람이 같이 서있을 때는 어느 장면이든 그림이 되고, 하여간 이분도 나이를 잊으신 듯. 가끔은 부부라기보다 어머니와 아들처럼 보인 장면이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그건 의도된 연출이 아니었나 싶고.

퍼즐 조각이 하나씩 채워져 가며 진실이 드러나는 장면에서의 긴장감은, 마치 차례차례 더 강한 상대가 나타나는 대전 게임과 같다. 조금 더 큰 조각을 가지고 있는 코린토스의 사자, 라이오스의 양치기가 차례차례 등장하며 마침내 모든 사건의 진실이 명확해진다. 마지막 패를 미리 알아버린 이오카스테는 절망하여 오이디푸스를 말리지만, 오이디푸스는 끝까지 알아내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는다. "이 얼마나 가여운 사람인가." 이오카스테는 절망하여 자살하고,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두 눈을 스스로 찔러버린다.

피갑칠하고 나타난 만사이 상의 오이디푸스에는 진짜 깜짝 놀랐다. 선혈 뚝뚝 떨어지는 두 손을 하늘을 향해 절규하는 앞에 코로스는 무대에 룽따를 펼치기 시작한다. 일순 무대는 날카로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산 정상과도 같이 보인다. 그리고 송곳처럼 박혀오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진심으로 후회하고, 저지른 죄의 무거움을 짊어지고 점점 작아져가는 왕. 그가 아비를 죽이고 어미와 결혼하리라는 예언을 벗어나고자 버둥거린 결과가 결국 운명을 거스를 수 없는 숙명이라는 것만 증명한 꼴이 되었으나,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예언의 희생자가 아니라, 자기 의지로 선택한 결과라고 인정한다. 진리를 찾고자 열심이고, 결벽한 자존심을 가진 그가 나락에 떨어진 그제야 비로소 전에 없던 신성함을 두르기 시작한다.
사태 수습을 위해 돌아온 크레온은 오이디푸스를 동정하여 그의 두 딸을 데려다준다. 여기에서 보여준 두 딸 - 이면서 동생이기도 한 - 에 대한 절절한 애정은 살짝 만사이상의 아버지로서의 모습과도 겹쳐지는 부분이 있었다.
끝까지 왕으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은 채, 스스로 추방당하는 오이디푸스의 모습을 뒤로 코러스의 '인간 죽기 직전까지 교만하지 말것'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연출부터 배우들의 연기, 무엇하나 부족함 없는 성찬을 맛본 것 같은 연극 한 편이었다.
거울과 조명을 이용해서 객석을 무대로 끌어들인 연출과 적절하게 어우러진 음악, 특히 의상 담당하신 분은 찬양하고 싶어진다. 이 처절하게 슬픈 극을 굉장히 아름답게 만들어줬다.

커튼콜마저 연극의 연속인 듯 아름답고 우아한 인사가 이어졌다. 특히 만사이 상이 인터뷰에서 '커튼콜에서는 아사미 상에게 이길 수 없다.'라고 했다는 아사미 레이 상의 인사하는 모습은 한 떨기 백합처럼 고상하고 우아한 품위가 있었다. 그리고 피갑칠을 싹 지우고, 하얀 의상으로 몸을 감싸고 등장한 만사이 상은 커튼콜에서조차 오이디푸스 왕을 연기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인사하고 숙였던 몸을 들어올리고 객석을 바라보는 그 눈빛이라니.
새삼스럽지만, 하얀옷이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
 
개인적인 별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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