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디푸스왕(2002, オイディプス王)

원작 : 소포클레스
연출 : 니나가와 유키오 (蜷川幸雄)
음악 : 토기 히데키 (東儀秀樹)
상연 : 2002년 6월 7일 ~ 30일 / 시부야 분카무라 시어터 코쿤
         DVD 수록은 6월 15일

출연
오이디푸스 : 노무라 만사이 (野村萬齋)
이오카스테 : 아사미 레이 (麻実れい)
크레온 : 요시다 코타로 (吉田鋼太郎)
테레시아스 : 칸노 나오유키 (菅野菜保之)
코린토스의 사자 : 카와베 큐조 (川辺久造)
양치기 : 야마야 하츠오 (山谷初男)
보고자 : 스고 타카유키 (菅生隆之)


서글픈 피아노 선율에 스산한 바람 소리가 들려오며 어슴프레 조명이 켜지면, 라마승과도 같은 붉은 복장의 코러스가 절규에 휩싸인 오체투지를 시작한다. 몸을 내던질 만큼의 고통과 탄식, 오체투지의 박력에 일순 테베의 비참한 상황이 눈앞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비로소 무대에 시선이 가는데, 벽면은 녹슬고 균열이 간 거울, 무대엔 마치 솟대를 연상시키는 기둥이 군데군데 세워져 있다. 그 기둥엔 룽따(風馬, 바람의 말이라는 뜻의 티벳, 네팔 등지의 오색 기도천)같은 것이 장식되어 있어 코러스와 함께 어딘지 티벳을 떠올리게 한다.
역병으로 황폐해진 테베의 슬픔을 쏟아내는 코러스의 절규에 드디어 정면의 문이 열리며 오이디푸스왕이 등장한다. 극적인 효과를 노린 핀 라이트에 하얀 의상이 콘트라스트되며, 어둡고 절망스러운 분위기가 일순 화사하게 피어난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 테베를 구한 젊고 현명한 자랑스러운 왕. 첫 등장에서부터 어찌나 오만하고 위엄에 넘치는 왕님이시던지.

만사이 상, 36세에 연기하신 이 오이디푸스 왕은 초반 감정의 기복이 널뛰듯 한 불안정한 "청년왕"의 모습을 보여주신다. 테베에 내린 재앙의 원인이 선왕 라이오스를 죽인 살인자 때문이라고 신탁이 내리자, 세상에 자기만큼 정당한 자는 없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살인자를 향해 저주를 퍼붓는다. 그 살인자를 찾는데 전력을 다하겠다, 자신은 정의롭다고 과시하며, 예언자 테레시아스를 청해 사건의 진실을 듣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이 가식이었음이 드러나는 것은 순식간. 테레시아스가 전하는 불편한 진실에 대해, 오히려 이것이 크레온과 테레시아스의 정치적 음모가 아닌가 억측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왕에게 들을 귀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테레시아스는 "지금은 올바로 보는 그 눈도 그 때가 되면 어둠밖에 비추지 않을 것이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떠나간다.

한편 왕위 찬탈을 노린다는 억울한 누명을 쓴 크레온과의 험악한 분위기는 이오카스테의 등장으로 수습이 된다. 남자들만 득실대는 무대위에 단 한송이 백합처럼 우아하고 늠름하고 위엄이 넘치는 왕비님이다. 과연 전 다카라즈카 설조의 남자역 탑스타였던 아사미 레이 상, 독특한 매력이 있는 배우다. 단 한명의 여배우로서 전혀 밀리는 느낌이 없고, 오히려 모두가 의지하는 어머니의 이미지가 강했다. 50년생인 아사미 상은 만사이 상과 띠동갑을 넘어서는 나이차가 있지만, 두 사람이 같이 서있을 때는 어느 장면이든 그림이 되고, 하여간 이분도 나이를 잊으신 듯. 가끔은 부부라기보다 어머니와 아들처럼 보인 장면이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그건 의도된 연출이 아니었나 싶고.

퍼즐 조각이 하나씩 채워져 가며 진실이 드러나는 장면에서의 긴장감은, 마치 차례차례 더 강한 상대가 나타나는 대전 게임과 같다. 조금 더 큰 조각을 가지고 있는 코린토스의 사자, 라이오스의 양치기가 차례차례 등장하며 마침내 모든 사건의 진실이 명확해진다. 마지막 패를 미리 알아버린 이오카스테는 절망하여 오이디푸스를 말리지만, 오이디푸스는 끝까지 알아내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는다. "이 얼마나 가여운 사람인가." 이오카스테는 절망하여 자살하고,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두 눈을 스스로 찔러버린다.

피갑칠하고 나타난 만사이 상의 오이디푸스에는 진짜 깜짝 놀랐다. 선혈 뚝뚝 떨어지는 두 손을 하늘을 향해 절규하는 앞에 코로스는 무대에 룽따를 펼치기 시작한다. 일순 무대는 날카로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산 정상과도 같이 보인다. 그리고 송곳처럼 박혀오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진심으로 후회하고, 저지른 죄의 무거움을 짊어지고 점점 작아져가는 왕. 그가 아비를 죽이고 어미와 결혼하리라는 예언을 벗어나고자 버둥거린 결과가 결국 운명을 거스를 수 없는 숙명이라는 것만 증명한 꼴이 되었으나,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예언의 희생자가 아니라, 자기 의지로 선택한 결과라고 인정한다. 진리를 찾고자 열심이고, 결벽한 자존심을 가진 그가 나락에 떨어진 그제야 비로소 전에 없던 신성함을 두르기 시작한다.
사태 수습을 위해 돌아온 크레온은 오이디푸스를 동정하여 그의 두 딸을 데려다준다. 여기에서 보여준 두 딸 - 이면서 동생이기도 한 - 에 대한 절절한 애정은 살짝 만사이상의 아버지로서의 모습과도 겹쳐지는 부분이 있었다.
끝까지 왕으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은 채, 스스로 추방당하는 오이디푸스의 모습을 뒤로 코러스의 '인간 죽기 직전까지 교만하지 말것'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연출부터 배우들의 연기, 무엇하나 부족함 없는 성찬을 맛본 것 같은 연극 한 편이었다.
거울과 조명을 이용해서 객석을 무대로 끌어들인 연출과 적절하게 어우러진 음악, 특히 의상 담당하신 분은 찬양하고 싶어진다. 이 처절하게 슬픈 극을 굉장히 아름답게 만들어줬다.

커튼콜마저 연극의 연속인 듯 아름답고 우아한 인사가 이어졌다. 특히 만사이 상이 인터뷰에서 '커튼콜에서는 아사미 상에게 이길 수 없다.'라고 했다는 아사미 레이 상의 인사하는 모습은 한 떨기 백합처럼 고상하고 우아한 품위가 있었다. 그리고 피갑칠을 싹 지우고, 하얀 의상으로 몸을 감싸고 등장한 만사이 상은 커튼콜에서조차 오이디푸스 왕을 연기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인사하고 숙였던 몸을 들어올리고 객석을 바라보는 그 눈빛이라니.
새삼스럽지만, 하얀옷이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
 
개인적인 별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