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벳 (Das Musical Elisabeth)

일   시 : 2012. 02. 08 ~ 2012. 05. 13
장   소 :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
관극일 : 2012. 04. 28 (토) 14:00
대   본 : 미하엘 쿤체, 작곡 : 실베스터 르베이
연   출 : 로버트 요한슨, 협력연출 : 박인선, 음악감독 : 김문정
캐스트 : 엘리자벳 - 옥주현, 죽음 - 류정한, 루케니 - 박은태, 프란츠 요제프 - 민영기, 소피 대공비 - 이태원, 청년 루돌프 - 전동석, 어린 루돌프 - 탕준상

- 4월 19일 이후로 거의 열흘 만에 보는 엘리자벳인데, 그냥 내가 뮤지컬 엘리자벳에 정이 떨어진 건가 싶은 기분이 들었다. 프롤로그에서 청아하게 울리는 명창 탕슨생 목소리는 참 반가웠고, 오랜만에 만나는 은케니, 류토트가 쨍하니 부딪히는 엘리자벳 배틀도 꽤 마음에 들었지만, 그뿐. 이후 공연은 계속 삐걱삐걱. 배우들도 강철 성대 민제프를 제외하면 다들 목 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었던 듯하고. 이게 초반에 좋은 기억이 있는 공연이라, 뒤로 갈수록 더 나아지고 좋아지는 부분이 보여야 할 텐데, 그런 건 눈에 안 들어오고 자꾸 실수하는 거, 오케스트라와 배우가 합이 안 맞아서(아직도!!!) 박자 틀리는 거만 들어와서 내내 마음에 차지 않는 공연 보느라 심드렁한 상태였다. 그렇게 이날의 엘리자벳은 또 이렇게 버리는 건가 하던 차에 딱 하나 "베일은 떨어지고" 장면이 마음에 들어서 후기 남길 마음이 되었다.

- 옥엘리는 처음 한 번 보면 참 잘한다 싶은데, 이게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보다 보면, 왜 이리 아쉬운 부분이 자꾸 늘어가는지. 캐릭터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표현이 단순하고 거칠다. 예를 들어 우는 연기를 한다고 치면, 통곡하는 거, 아이처럼 엉엉 우는 거,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는 거, 속으로 울음을 삼키는 거 등등 다양하게 상황과 감정에 맞춰 연기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선택지가 다양하지 않아서 몇 개를 돌려가며 쓰는 것 같다. 그리고 곱고 예쁜 목소리로 노래는 참 잘하는데, 그 잘하는 노래에 감정을 실어서 절절하게 불러주면 좋겠는데, 이것 역시 얹어지는 감정의 종류가 단순해서 아쉽다. 앞으로 남은 공연은 한 번 빼고는 다 옥엘리라 심란하다. 더 우울한 건 이대로 나에겐 레전드 없이 엘리자벳이 끝날 거 같아서.

- 류토트와 은케니가 만나면 확실히 류토트가 은케니 잡아 누르는 게 보여서 좋다. 그래도 완전히 제압하지는 못해서, 조금만 방심해도 치고 오르는 은케니라 제어에 애를 먹기는 해도, 어쨌든 그래도 류토트가 우위라는 건 보이거든. 특히 엘리자벳 배틀에서 은케니가 '그 여자가 도대체 뭐라고?!!!' 라는 듯 버럭 대는 거 찌릿하고 노려보는 류토트 눈빛에서 '저 시키, 저거저거 말도 드럽게 안 들어 쳐먹는 시키, 저걸 어찌해야 하나.' 하는 고민까지도 보인다고 하면 오버일까.ㅋㅋㅋ

- 이날 은케니는 뭐랄까 상당히 삐쭉빼쭉한 상태. (겉모습도; 공연하면서 이발 안 하는 게 무슨 징크스인가? 싶은 생각마저 들더라. 머리가 상당히 많이 자라서 이젠 어깨에 닿을 지경인데다가 복슬복슬하기까지 해서 아주 정신 사납더라.) 자기 멋대로 휘젓고 다니고 싶은데, 똘끼로도 넘을 수 없는 '죽음'이라는 존재가 위에서 떡하고 버티고 있으니 짜증스럽지만, 일단 죽음이 시키는 대로 하기는 한다만, 누르는 힘이 조금만 약해져도 퉁겨나갈 것만 같은 느낌이더라. 인형극 씬에서도 그렇고, 카페 씬에서도 어떤 느낌이냐면, '이 내가 너(죽음)를 위해 움직여주고 있는데, 맡겼으면 참견하지 말고 지켜보기나 해!' 라는 것 같다. 전권을 위임받아 아낌없이 권력남용~ 그래서 이런 은케니가 딱 내 취향이다. 그리고 그럴 능력이 충분하잖아? Milk에서 민중을 선동하는 거 봐라. 내가 상사였으면 특별 보너스 엄청나게 챙겨줬을 거다. 이날도 다른 곡보다 Milk에서 만족도가 최고였던 것도 있고. 어우, 진짜 그 기세 좋은 앙상블 뚫고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매번 전율이다.

- 그리고 이날 처음 본 디테일인데, Kitsch에서 Eljen으로 넘어가는 장면에서 뒤에 정지 화면처럼 멈춰있던 인물들이 윤정열 배우가 '헝가리의 자유를 준~'하면서 움직일 때, 은케니가 큐사인을 주는 거 보면서 오~ 이것 봐라? 싶더라.
프롤로그에서 보이지 않는 실로 좀비들을 쥐락펴락하는 것, 엘리자벳의 결혼 생활 4년을 짤막한 인형 단막극으로 보여주는 것, 정지된 카페 씬을 얼음 땡 하는 것처럼 커피 한 잔으로 깨우는 것에 이어서 Eljen까지. 루케니가 엘리자벳에서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캐릭터라는 점을 잘 파악하고 연출하는 점이 흥미롭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은케니 기세가 꺾인 4월 초의 사건이 아쉽다. 햄릿 때 매주 디테일이 확확 달라지는 거 보면서, 은케니도 그런 발전 방향이 보였는데, 한 번 굴절되었다가 다시 돌아온 거라, 만약 그런 사건이 없었다면 어떤 은케니를 보여줬을지 뭐 그런 아쉬움. 사실 지금도 충분히 잘 해주고는 있지만.

- 그동안 은태 스케줄에 맞추다 보니 승돌프보다 동돌프를 압도적으로 많이 보게 되었는데, 엘리자벳에서 동돌프의 변천사를 보면 동석이가 어떻게 무대에서 힘을 빼는 법을 배워가는가...의 과정을 지켜보는 것 같달까. 사실 무대에서 힘을 주는 것보다 힘을 빼는 게 더 어려운 과제이긴 하다. 무슨 일이든 안 그렇겠는가만은 적정선을 찾는 것. 균형을 잡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류동 그림자 송은 서로의 상성이 가장 잘 맞기도 해서 듣기 좋은데, 이날은 앙상블의 웅장한 합창이 더 귀에 들어오더라. 동돌프 거울송은 요즘 보면 거의 유서 같은 느낌. 애초에 엄마의 도움 같은 거 기대하지 않는 게 보여서 엘리의 거절이 당연하게 생각될 정도. 승돌프는 그래도 찌질하기는 해도 매달리는 느낌인데, 동돌프는 처음부터 포기한 것 같아서 그냥 마지막으로 엄마 목소리나 들으러 왔니 싶어 짠하다.

- 하여간 내도록 옥엘리에 시큰둥하다 보니, 그 짝이라고 할 죽음에게마저 별 감흥이 일지 않아서, 아무리 루케니, 루돌프가 잘해도 오늘 엘리는 버렸구나 할 때, 정말 극적인 일이 벌어졌다. 극의 마지막 베일 씬에서 죽음의 마중을 맞이하며 힘겹게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옥엘리가 닭똥 같은 눈물을 후두둑 떨구는 게 바로 코앞에서 보이는 거다. 그리고 옥엘리와 만나면 유독 차가운 절대자가 되는 류토트가 옥엘리를 안아주면서 "세상을 스치며 나를 지키려 했어~" 노래하는 옥엘리의 눈물을 닦아주는데, 순간 울컥하더라. 그 짧은 단 한 순간의 장면으로 나는 그날 공연을 버린 셈 치려던 걸 다시 주워 올렸다. 그 장면이야말로 죽음만이 엘리자벳의 유일한 위로이며 위안이라는 걸 보여줬기 때문에. 그러나 명이 다한 엘리를 끌어안은 류토트의 표정엔 애잔함이라고는 손톱만큼도 남아있지 않아서 이것도 재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