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벳 (Das Musical Elisabeth)

일   시 : 2012. 02. 08 ~ 2012. 05. 13
장   소 :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
관극일 : 2012. 04. 14 (토) 14:00
대   본 : 미하엘 쿤체, 작곡 : 실베스터 르베이
연   출 : 로버트 요한슨, 협력연출 : 박인선, 음악감독 : 김문정
캐스트 : 엘리자벳 - 옥주현, 죽음 - 송창의, 루케니 - 박은태, 프란츠 요제프 - 윤영석, 소피 대공비 - 이정화, 청년 루돌프 - 전동석, 어린 루돌프 - 이준서

- 점점 게을러져서 큰일이다. 후기는 한번 밀리기 시작하면 정신이 없어서, 그때 그때 써둬야 기억도 좀 남아있고 한 것을; 7일 이후로 일주일만에 다시 만난 엘리자벳. 그동안 선영 엘리만 주구장창 만났다고, 이후 잡은 스케줄은 죄다 옥엘리인데, 이날이 그 시작일. 엘리 스케줄 짠 사람은 나랑 면담좀 -_-` 선영 엘리 - 은케니 조합이 25일 마티네를 끝으로 없다는 게 말이 돼~~~~~~~~~~~~~~~? (feat.은케니) 아니, 옥엘리가 싫다는 건 아닌데, 어떻게 저렇게 몰아서 스케줄을 짤 수 있는가 말이지. (뒤늦게 4월 7일이 선영 엘리 - 은케니 자체 막공이 되버렸다는 사실에 패닉 ㅠ.ㅠ)

- 참, 할 말 없는 스케줄 때문에 툴툴거리기는 했지만, 오랜만에 다시 만난 옥엘리는 여전히 건강하고, 아름답더라. 무엇보다 이날 왈가닥스러운 면모가 좀 줄어들고, 얌전한 공주님 분위기가 좀 더 살아서 그게 참 좋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옥엘리가 완전 고삐 풀린 망아지였어서 더 그렇게 느낀 걸 수도 있지만, 움직임이 차분해지니까 우아함이 살아나서 확실히 귀한 집안에서 곱게 자란 아가씨 같더라. 그러면서 연기에서도 기존 보다는 좀 더 폭이 넓어져서, 난 이날 옥엘리 연기에 완전히 만족해서, 이후로도 이만큼만 해준다면 딱히 불만은 없을 듯.

원래도 목소리가 참 곱고, 노래가 안정적이라 그런 면에서는 믿고 보는 옥엘리인데, 이날 '나는 나만의 것'에서 쳐연함이 확 늘어서 시작할 때 여리고 청아한 목소리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노래를 하는데, 얼마나 애처롭던지. 그저 죄가 있다면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몰랐던 게 죄지. 선영 엘리는 그래도 후반부로 가면서 이렇게 살지는 않겠다고 강단있게 일어서는 느낌인데, 옥엘리는 아직 어떻게 해야할지 답이 안 나온 상황처럼 보인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아야해? 어떻하지? 이렇게 사는 건 싫은데 ㅠ.ㅠ 라는 느낌. 그래서 더 가엽고, 그 처지가 불쌍해서 눈물이 나더라.

그리고 1막의 마지막 '나는 나만의 것 rep.'에서도 선영 엘리와 옥엘리는 참 많은 해석의 차이를 보여주는데, 선영 엘리가 여제로서 각성하고 그 누구도 다가오지 못할 위엄을 두르고 등장하는 것과 달리, 옥엘리는 여기서도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서 등장한다. 선영 엘리는 요제프의 목소리 따위 안들려 상태였던 것 같다면, 옥엘리는 몸 단장하면서도 요제프의 음성을 다 듣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옥엘리는 정말 눈부시게 아름다워서, 물론 선영 엘리도 아름답기는 하지만, 옥엘리가 유난히 이 장면에서 자체 발광 미모라, 이게 어깨를 드러내고 안 드러내고의 차이려나.

2막의 '내가 춤추고 싶을 때'에서 옥엘리의 치마질은 정말 전투적이라 물러설 때도, 휙휙 돌리는 치맛자락에 토트 후려치는 거 아닌가 싶고, 빙글빙글 턴도 잘 돌고, 게다가 표정과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패기가 정말 대단한데, 더 놀라웠던 건, 마지막에 자신을 끌어당기는 토트의 손을 뿌리치는 것도 아니고, 단호하게 잡아 떼어내는 동작을 보고 어떤 토트가 와도 옥엘리에겐 이기기 힘들겠구나 싶더라.

이날 옥엘리의 베스트 송은 '아무것도'였는데, 시작부터 눈물이 후두둑 떨어지는 걸 바로 정면에서 보는 바람에 더 깊이 감정이입해서 봤던 듯하다. 선영 엘리의 우울함은 타고난 것처럼 보이는데, 옥엘리의 경우는 발그레한 두 뺨이 사랑스러운 건강한 소녀가 팔자에도 없는 황실에 시집와서, 웃으면서 말속에 칼을 품은 귀족들에게 치이고, 무시당하고, 시어머니의 음흉한 계략에 휘말려 점점 비틀리고 굴절되는 과정이 보여서, 그런 점에서 더 안스러운 마음이 든다. 사실, 엘리자벳이라는 인물이 자신의 의무는 내팽개치고 자유롭게 떠돌면서, 뭐가 아쉽다고 저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는데, 이날 옥엘리를 보면서는 그래, 저런 환경이었으면 누구라도 차라리 미쳐버리길 소원하지 않았을까 하고 공감이 가더라.

- 이날 송토트는 그새 또 연기 노선이 바뀌었는데, 이렇게 매번 다른 노선을 들고 나오니, 참 보는 재미가 있는 배우다. 목 상태는 썩 좋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나름 티 안나게 조심스럽게 잘 부르다 1막 그림자 송에서 살짝 삑이 나서, 끝 부분을 올리지 않고 내려서 불렀는데, 색다른 느낌이더라.

무엇보다 이날 가장 놀랐던 건, '마지막 춤'에서 커튼콜에서 추던 춤을 춰서 깜짝 놀랐다. 사실 춤을 췄다기 보다는 살짝 리듬을 타면서 발 쿵쿵 구르는 동작 정도만 선보인 게 다인데, 그래도 극 중에는 안 추던걸 춰서 거기서 이미 헉! 해버렸달까. 이날 송토트는 근래에 꽤 자주 시도하고 있는 나쁜 남자 컨셉이었는데, 그 강도가 좀 더 세져서 이게 옥엘리와 페어라서 저런 노선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2막의 베일씬에서 어떤 감정을 보여주려나 또 흥미진진하게 기대하고 있었는데, 음, 베일 씬은 여전히 통곡할 기세의 죽음이라서, 이게 갑자기 어떻게 보였냐면, 마음은 순정인데, 내 뜻대로 안 되는 너를 차갑고 거칠게 대했지만, 그건 내 진심이 아니었고~ 뭐 이런 츤데레 죽음;

- 동돌프는 3월 말부터 매 공연 레전드 갱신하는 중이고. 거울송에서의 감정선이 진짜 말도 못하게 깊어졌는데, 근래들어 살도 좀 빠졌는지 얼굴선이 날카로워진 듯하고, 특히 이날은 퀭한 눈이 너무너무 인상 깊었는데, 저 애정결핍 기아에 허덕이는 덩치만 큰 아이를 왜 아무도 사랑해주지 않나요~ (feat.동차르트)
그런데, 이 장면에서 루돌프 등장해서 노래할 때 루돌프만 보느라 몰랐는데, 거울 뒤에서 옥엘리는 가만히 앉아있는 게 아니라, 깨알같이 연기하고 있더라. 머리를 짚었다가, 손가락을 깨물고 시녀가 괜찮냐고 물어보면 괜찮다고 머리나 빗으라고 하는데, 옆에서 루돌프가 아무리 절절하게 호소하고 있어도, 아무것도 안들리겠구나 싶었다. 옥엘리는 '당신처럼 rep.'에서부터 이미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서 루돌프의 음성은 그저 귓전을 맴돌다 흩어질 뿐, 자신의 아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신경 쓸 여유가 전혀 없다. 그러다 아들을 잃고나서야 명확한 생각을 찾(feat. 매든 박사)게 되었는데, 그 타이밍이 참으로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윤제프님은 언제나 달달한 목소리로 귀를 녹이시고, 정화 소피는 이날 억지로 꾸며낸 목소리가 아니라 훨씬 듣기 편했다. 부디 앞으로도 이렇게만 해주시길. 그렇게 하셔도 며느리 쥐잡듯이 볶아채는 시어머니 포스는 어디 안 갑니다. 그리고 벨라리아에서 태원 소피 만큼은 아니더라도, 아들에게 버럭 역정내시는 게 강해지셔서 좋았다. 사실 이 장면 볼 때마다 던져준 미끼 덥썩 문 게 누군데, 어디와서 화풀이냐 싶기도 하다.

- 그리고 이날 무엇보다 반가웠던 건 사라졌던 은케니의 디테일이 다시 돌아왔다는 것. 황제의 집무실에서 탄원자의 아들이 죽는 장면에서 죽천들과 함께 팔 들어올리는 동작 할 때 속으로 얼마나 반갑던지. '계획이란 소용없어' 에서 엘리자벳 손등을 볼에 가져다 대는 건 사라졌지만, 대신 엘리와 요제프에게 손 키스를 던지고 두 사람의 손을 맞잡아주는 걸로 바뀌었다. 그리고 극의 마지막 부분 판관의 질문에 오를레앙 공을 살해하려고 '몇 번을 말해!' 버럭 하는게 돌아와서, 이게 가장 좋더라. 다른 건 몰라도, 저 '몇 번을 말해!'는 프롤로그의 '정말로 원했다니까!'와 대칭을 이루는 수미쌍관의 구조라서, 이게 다시 살아나줘서 다행이다.
게다가 며칠 좀 쉬었다고 목 상태도 쩌렁쩌렁, 프롤로그에서부터 그 쨍한 날카로움이 묻어나오더라. 노래야 뭐 매 공연 기복없이 잘해주고 있는데, 그 와중에 마담 볼프 살롱에서 '오페라의 아리아를~' 부분을 확실하게 강조해서 불러주는 디테일 추가한 것도 참 좋더라.

하여간 이렇게 마무리 되어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배우가 연구하고 파고들어서 만들어낸 캐릭터가 전체적인 연출 노선과 어긋나는 거라면 모를까, 웹상의 평가 하나 보고 가위질 할 시간이 있거든, 괴상한 번안이나 비문 교정에나 신경 쓰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