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엘리자벳을 몇 번씩이나 보면서도 사실 "죽음"이라는 캐릭터에 100% 만족하고 돌아온 적은 별로 없었다. 이건 배우의 역량과는 무관한 드라마 엘리자벳에서의 "죽음"이라는 캐릭터의 설정같은 게 명확하지 않다고 해야하나. 캐릭터를 잡는데 정답은 없는 법이고, 연출의 노선이라는 건 하나의 큰 줄기를 정해주는 것 뿐이고, 세세한 디테일이나 배우간에 호흡, 상성은 배우 역량으로 메꿔가고 뭐 그러는게 EMK식 뮤지컬이기는 한데, 죽음과 사랑(혹은 연애;)이 결합되면서 가끔은 이 캐릭터를 "죽음"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싶은 순간들도 있었고.

그래 곰곰히 생각해봤더니, 나한테는 이거야 말로 "죽음"이 인간으로 육화해서 나타난 것 같다는 전율을 선사한 존재가 너무나 생생했기에 그랬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2009 세계선수권 SP - 죽음의 무도 | Score - 76.12


- 빙판 위에서 시작 포즈를 잡는 순간부터 피아노 건반에 맞춰 고개를 확 꺽는 오프닝 동작, 강렬한 시선으로 좌중을 압도한다. 그 짧은 순간 굉장한 집중력으로 몰입, 자신 뿐만 아니라, 청중들 모두를 순식간에 음산하고 기괴한 무덤가로 초대한다.
시작부터 자신의 지배력을 과시하는 듯한 거대한 스케일의 3F-3T을 뛰는데, 난 정말 남녀 통틀어 이렇게 시원스럽고, 넓은 아이스 커버리지를 보여주면서 이대로 날아가버릴 듯한 3F-3T를 본 적이 없다. (이런 훌륭한 점프에 장난질한 심판들, 그래서 지금 피겨판에 저런 점프 뛰는 여자 선수 한 명이라도 있던가? 흥, 자업자득일세.) 이어지는 3Lz의 근사함이야 뭐 이미 최고라고 말하기도 입 아플 지경이고. (끈질기지만, 현 여싱 중에 3Lz 저만큼 뛰는 선수 있음 나와보라 그래. 하여간에 ISU든 심판들이든 앞으로 나아가도 모자랄 판에 뒤로 뒤로 후퇴만 하고 있으니.) 연아의 프로그램이 정말 독보적인건 점프, 스핀, 스텝, 스파이럴이 각기 하나의 기술 요소로 필요하니까 들어간 게 아니라, 이 기술 요소들이 전체 안무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의미없이 뛰어야 되니까 뛰는 점프, 의미없이 들어간 스핀 같은 건 하나도 없다. 게다가 저 완벽한 균형미와 우아함, 모자라지도 과하지도 않은 표정 연기, 기술과 예술의 완벽한 조화란 연아를 두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 처음 음악으로 생상의 죽음의 무도를 들었을 땐 죽음이 을 춘다는 느낌이 강했는데, 연아의 죽음의 무도는 그야말로 죽음이 춤을 춘다는 느낌이다. 때로는 요사스러울만큼 유혹적이고, 때로는 고통속에 몸부림치는 이에게 자비로운 안식을 선사하고, 그리고 무자비하게 폭풍처럼 몰아치며 전쟁과 질병으로 인간을 학살하는 절대자. 그런 모습을 단 2분 30여초에 모두 담아서 선보이는 이 작품은 피겨 역사에도 길이 남을 마스터 피스다.

음악 선곡에 어울리는 의상과 안무. 그리고 그걸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걸 뛰어넘어 몸 동작에 맞춰 선율이 흘러나오는 것 같은 섬세한 음악성. 다른 선수들의 경기를 볼 때 종종 배경음악 틀어놓고 나는 나 할 것 하겠소 하는 경기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저 음악을 잘 타기만 해도 음악성있다 소리 듣는 세계인데, 연아는 진짜 몸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 같다. 여기선 이런 표정을 지어야지! 이런 부자연스러움도 없다. 그저 이 모든 상황에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몸을 맡기고 자연스럽게 표정이 드러나고 감정이 실린다. 내가 곧 이 세계를 지배하는 죽음이라고 엔딩 포즈에서 '쾅' 폭발하는데, 그저 엎드려 경배하고 싶을 뿐이고.
참고로 위 영상에서는 그 장면이 안 잡혀서 좀 아쉬운데, 화질은 좀 떨어지지만 이 영상 - http://youtu.be/zFDQpt92ygE 에서는 엔딩에서 호랑이처럼 포효하는 연아를 볼 수 있다.

+ 이 포스트를 작성하면서 내가 '완벽'이라는 단어를 몇 번이나 썼더라. 하여간 나에게 연아는 진짜 '완벽'이 사람이 되어 나타난 것 같은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