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MLET
일 시 : 2011. 12 .23 ~ 2011. 12. 25
장 소 : 고양 아람누리 아람극장
관극일 : 2011. 12. 25 (일) 19:00
음악 / 대본 : 야넥 레데츠키 , 원작자 : W.셰익스피어
연 출 : 로버트 요한슨, 음악감독 : 원미솔
캐스트 : 햄릿 - 박은태, 오필리어 - 윤공주, 레어티스 - 강태을, 거트루트 - 신영숙, 클로디어스 - 서범석, 폴로니우스 - 김성기
- 누가 나에게 뮤지컬 햄릿 레전드 공연을 물어보면 나는 크리스마스에 고양 아람누리에서 올린 총막공이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것 같다. 진짜, 난 막판까지 큰 기대 안했는데, 총막공에서 이런 레전드 공연이 탄생할 줄이야. 일단 음향이 썩 만족스럽지는 않더라도, 23일, 24일 공연에 비하면 훨씬 나아져있었다. 그래도 나름 피드백을 했던 건지, 아니면 배우분들이 애쓰신 건지는 잘 모르겠다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최고의 공연을 보여준 배우분들 모두 레전드였고, 그 중에서도 총막공에서 그야말로 햄릿에 빙의되어서 신들린 연기를 보여준 은릿은 오늘 제일 큰 박수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 극의 시작. 오른쪽 망루에서 장례식을 지켜보는 은릿의 표정에는 슬픔이 흘러넘치고, 목소리에는 물기가 가득. 벌써부터 저렇게 감정을 끌어올리면 이 뒤에 전개는 과연 어떤 모습을 보여주려고 저러나 기대감이 상승하면서, 사실상 이때 벌써 레전드를 예감했다.
아니나 달라, 결혼식 장면에 이어지는 Why me에서 감정의 격렬하기가 또 피크치를 달리는 거다. 화가 나서 옷자락을 털어내는 동작도 어찌나 격한지 코트 자락이 어깨를 덮을 정도였;; 이 썩어빠진 세상에 대한 한탄과 분노, 그리고 그걸 어떻게도 하지 못하는 무력한 자신에 대한 불만스러움을 다 토해내듯 그 답답한 음향을 뚫고 쩌렁쩌렁 질러대는데, 세상에 벌써부터 이러냐, 오늘이 총막공이라고 아주 작정을 했구나 싶었다.
아, 여기서 레어템으로, 벽에 장식된 장미꽃 리스를 집어던지는데 그게 벽에 맞고 튕겨나와서 그걸 기어이 발로 뻥 차버리는 걸 볼 수 있었다. ㅋㅋㅋㅋㅋㅋ
- Sister에서 태을 레어에게 거한 뒷통수를 맞아버렸고, 아니 왜 막판에 와서 연인 모드로 돌아서심; 이어지는 Let's rise above this world는 이번 시즌 들어 그래도 가장 햄릿을 사랑하는 것 같은 윤필리어를 만날 수 있어서, 조금이나마 화해했다. 그런데, 2막 극중극 장면에서 이경수 호레이쇼를 비롯해서 미경 헬레나, 윤필리어, 길던스턴, 로젠크렌츠까지 합동으로 빵 터져서 웃음기 누르느라 힘겨워하고, Sextet 들어가야하는 윤필리어마저 연기를 잊고 그냥 고개를 푹 숙이고 어떻게든 웃음기를 죽이려고 들썩들썩 하느라, 이 부분은 오늘 좀 의문. 뭐에 그렇게 웃음이 터졌는지, 이경수 호레이쇼가 마지막 트라이앵글을 좀 격하게 치느라 살짝 삑 비슷한 걸 내서 그랬을까나. 그래도 어떻게 Sextet에서 감정 잡고 제자리를 잡아들어가서 다행이었다.
- '피는 피로써'에서도 감정의 격하기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는데, 저 MR과 드럼과 베이스, 일렉기타 소리를 뚫고 목소리를 내려니, 이게 너무 과부하가 걸려서 조마조마 하더니만, '목이 말라 내게 제발!!!!!, 피를 줘─'하고 절규하는데, 저 제발!!!!!!!을 너무 강하게 지른거지. 결국 '피를 줘─'에서 소리가 살짝 뒤집혔는데, 그래도 은근슬쩍 자연스럽게 넘기는게 무대 경험이 쌓이면서 이런 스킬은 점점 더 노련해지는구나 싶더라. 그리고 이어지는 '어디든 가주오~'는 또 처절함을 넘어서 피를 토하듯 절절하게 뻐렁치게 불러줘서 감탄했다. 이걸로 어제의 그 불완전 연소는 완벽 해결.
- 'He's crazy' 에서 어제 박자 때문에 고생하신 김성기 씨가 오늘은 제대로 리듬을 맞춰주셔서 괜찮았나 싶었더니, 2막 폴로니우스 살해 장면에서 거트루트를 찾아와 커튼 뒤에 숨는 부분에서 또 박자를 어그러트리셔서, 이 분의 Free~ 한 박자감은 어디 안 가는구나 했다.
아 그리고, 이 장면에서 장섭 폴로니우스 일 땐, 왁! 하고 놀리더니만, 김성기 폴로니우스일 때 은릿은 '으응~?' 하는 김성기 씨 특유의 버릇을 흉내내며 놀리는 게 또 재미 중 하나.
- '수녀원에 가'는 넘버 시작부터 목소리가 슬픔으로 흔들리는데, 정말 장난 아니게 물기가 가득해서 심상치가 않았다. 차마 감정을 다 숨기지 못하고, 어떻게든 냉혹한 표정을 짓기는 하는데, 목소리에 담긴 애통한 감정은 또 너무 절절해서, 어떻게 저 속울음을 못 알아챌 수 있지 싶을 정도였다. 수녀원에 가라고 하고 뒤돌아서 가슴 무너지는 표정이다가 오필리어가 잡아 세울 때. 전에도 고개를 위로 향하고 있는 걸 보기는 했지만, 난 그게 오필리어를 향해 마음이 돌아선 사내의 냉정함을 보여주는 건 줄 알았다. 그런데, 총막공에 와서야 그게 오필리어의 얼굴을 보는 게 괴로워서 애써 시선을 피하려고 저랬다는 게 눈에 확 들어오더라. 왜냐면 저렇게 시선을 허공에 두다가 결국 오필리어를 바라봐야 할 때 큰 결심하고 시선을 내리는 게 오늘에서야 확연하게 보여서, 난 왜 이런 은릿을 총막공에서야 처음 만나는 것처럼 낯설어 해야하나 했다.
아니, 따지고 보면 오늘 총막에서 보여준 은릿의 연기 자체가 그랬다. 이미 속속들이 다 파악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들이 튀어나와서 나를 꽤 당황시켰는데, 그게 전혀 어색하지가 않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바람에 이건 그냥 햄릿에 빙의되었구나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연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단 한 순간도 들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무대 위에서 흘러넘치는 그런 느낌. 그런데다가 감정의 치열함이 이제껏 은태가 보여준 거에서 50%를 더한 그런 격렬함이 있어서, 진짜 무대 위에서 쓰러지려고 작정을 했구나 했다.
- '수녀원에가 가'에서 보여준 격렬한 감정의 폭발이 '증거가 필요해'로 이어지면서 신경이 바싹바싹 말라가는 신경쇠약 직전의 광기를 보여주더니, '오늘 밤을 위해'에서 보여주는 감정의 파고는 또 얼마나 진폭이 큰지, 진짜 저렇게 1막에서 모든 걸 불사를 듯이 에너지를 바닥까지 긁어서 끌어내면 어쩌나 싶을 정도였다.
이게 정신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상당히 배우를 갉아먹는 것 같았던 게, 이날 극장 내부도 상당히 서늘해서 외투 벗었다가 다시 걸친 사람들이 천지였는데도 은태가 정말 땀을 비오듯 흘려대는 거다. 전에는 탭을 춘다더가 하는 격한 동작에서 땀방울이 머리카락을 타고 흩날리는 정도였는데, 이게 가만히 서있는데도 볼을 타고 땀이 뚝뚝 떨어지는 걸 보면서, 진짜 몸 사리지 않고 모두 불살라버릴 작정이구나 하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다 '산다는 게 연극같아' 독무 추는 부분에서 어쩌면 그렇게 순간순간 표정이 달라지면서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객석에 전달하려고 무진 애를 쓰는지. 난 마지막에 그 고통스러운 표정을 보고 기어이 은릿이 통곡하는 줄 알았다. 복수에의 희열보다 이 상황에 대한 서글픔과 분노로 일그러진 '오늘 밤을 위해─'는 내가 들어 본 중에 가장 고통스러운 외침이었다.
- 2막의 시작, 사느냐 죽느냐. 사실 나한테는 이 명제보다 더 와닿았던 게 잃어버린 녹슨 꿈을 찾으면 잊었던 나를 찾을 수 있을까...하는 부분이었다. 복수를 꿈꾸는 햄릿과 달리 나에겐 삶이니 죽음이니 하는 것보다 '자아'를 찾는 게 훨씬 중요해서. 내가 '나'로 있기 위해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그런 것들이 있는데, 햄릿은 그것을 하나씩 하나씩 잃어가면서 무너져내리는 게 더욱 가슴이 아픈 장면 중 하나다.
- 오늘 영숙 거트루트의 I'm untrue는 이번 시즌 통틀어 가장 아름답고 애절했다. 표정 연기에서 묻어나오는 그 회환에 가득찬 감정, 강약 조절된 목소리로 표현하는 거트루트의 욕망, 사랑받고 싶다는 게 그렇게 큰 욕심은 아닐텐데, 사람 마음 하나 움직이는 게 참 이리 어렵고 무겁다.
- 폴로니우스 살해 장면. 거트루트를 찾아와서 책망하는 은릿이 또 이날 따라 엄마를 비난하기보다 속상해서 그걸 어쩔 줄 몰라하는 것 같더라. 그러더니 커튼 뒤에 숨은 사람을 인식하고나서는 그야말로 눈이 뒤집어졌다고 할까, 광기에 휩싸여서 일을 저지르는데, 아버지 유령의 외면으로 일순 현실로 돌아오는 과정이 오늘 정말 너무 애처로와서.
뭐라고 해야할까, 나는 여기에서 은릿이 보여주는 상식적인(?) 반응이 참 좋다. 간단하게 표현하기가 좀 어려운데, 건전한 도덕관을 가진 일반인이 광기에 휩싸여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르고 보여줄 법한 반응이라고 해야하나. 손에 묻은 피를 보고 경악하고,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두려움 속에 자책하다가 회피를 선택하게 되는 일련의 그 과정이 섬세한 디테일과 함께 자연스럽게 표현되는 걸 지켜보는 게 좋다.
그런데 이날 은태가 햄릿에 빙의한 것 같다고 내가 자꾸 그러는게, 아무리 울컥해도 무대 위에서 눈물을 잘 보이지 않는 이 배우가 이 폴로니우스 살해 장면에서 실제로 반 울음 속에 연기를 하더라는 거. 피 묻은 손을 보며 부들부들 떨 때도 눈에 눈물이 한 가득이더니, 거트루트가 뒤에서 안아주니까 울며불며 그 팔에 매달리는데, 평소에는 그렇게 어머니를 의지하지 않았어서 더 안스러웠다.
거트루트가 폴로니우스의 팔을 보고 은릿을 뿌리치고 뒤로 물러나 '이제 가혹한 저주가 시작됐어.'라고 하자, 은릿이 커튼 뒤에 사람을 확인하려고 하는데, 여기서도 평소보다 힘이 없어서 비틀비틀 계단을 오르더니, 커튼 뒤의 사람이 폴로니우스라는 걸 확인하고 경악하고는 울다가 웃다가 아주 정신줄을 놓고, 슬쩍 소매로 코밑을 훔치는데, 코끝이 빨개져서 부르는 Who's crazy가 상황에 안 맞게 너무 가슴을 후벼파는 거다. 사실 제일 불쌍한 건 어이없이 죽은 폴로니우스인데, 저렇게 망가져버린 왕자가 너무 불쌍하고 가련해서 거기에 이입해버린다는 거지. 보는 사람이 깜짝 놀랄만큼 온몸으로 계단에서 구르는 모습도 한 몫하고. 진짜 공연 끝나고 은태는 무릎이나 팔 다리 성한 구석이 있을까 싶;;
- 무덤지기 씬이 참 이 비극의 한 가운데에서 붕 뜨는 씬이긴 한데, 앞 뒤로 이어지는 씬을 생각해보면 이렇게 한 숨 돌려가는 장면은 또 꼭 필요한 것 같고. 오늘 호레이쇼와 은릿이 등장할 때, 무슨 유치원 아이들이 친구 손 꼭 붙잡고 들어오는 것처럼 호레이쇼가 내켜하지 않는 은릿을 손 잡고 끌고 나와서 좀 웃었다. 그리고 김성기 씨는 '일산에 와서도 네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애드립으로 큰 웃음 주셨다.
- 이어지는 오필리어 장례식 장면. 은릿이 또 너무 처절하게 슬퍼하며 감정을 끌어올려서 태을 레어와의 부딛힘에서 아주 불꽃이 튀었는데, 첫번째 '형제여!'는 슬픔에 기력을 잃고 흐느끼며, 두번째 '형제여!!'는 너의 슬픔이 진심인만큼, 나도 죽고싶을 만큼 고통스럽다고 격렬함을 담고 있더랬다.
- 그리고 태을 레어가 오빠 모드를 버리고 연인 모드로 노선이 바뀐 것과 더해지면서 햄릿과의 결투씬에서 그 여파가 나타나더라. 전에는 독 묻은 칼로 바꾸기를 꽤 망설이다가 간신히 마음을 다잡는 거 같더니, 이 날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칼을 빼어드는데, 어우 막공 와서 이렇게 노선을 바꾸시긴가. 그리고 칼싸움의 격하기는 진짜 이 날이 최고. 검술의 달인이라는 태을 레어가 그동안 기백으로는 동레어에 밀리지 싶었는데, 이날은 그런 거 없이 태을 레어도 은릿 죽이려고 작정했지 싶게 격렬한 칼 싸움이었다. 칼날끼리 부딪히는 챙─ 하는 소리가 얼마나 날카롭게 울려퍼지던지.
- 참혹한 극의 마지막, 극장 전체에 울려퍼지는 '클라우디우스─!!!!!!!!!'는 새삼 전율이었고, 덴마크를 정화할 불꽃과도 같은 '덴마크여!'의 울림도 공간 전체를 가득 메우고 구석구석 파동을 전해줘서 참으로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그 불꽃이 사그러들듯 죽어가는 은릿은 또 전에 없이 눈물을 가득 매달고 나타나, 나는 진짜 이 장면에서 그냥 또르르 눈물을 흘린 적은 있었지만, 오늘만큼 펑펑 운 건 또 처음이었다. 죽어가는 그 순간까지 치열하게 고뇌하고 번민하다 가버리는 이 불쌍하고 가슴 먹먹한 왕자님.
어디든 가주오~ 나와 함께~ 라고 하면 어디든 따라갈테니, 부디 너무 멀지 않은 미래에 다시 만날 수 있기를‥.
- 이날 커튼콜은 참으로 총막공다운 커튼콜이라서, 앙상블부터 기립해서 마지막까지 레전드 공연을 선사한 배우분들에게 원없이 환호와 박수를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펑펑 운 얼굴 다 수습도 못했는데, 막판에 빵빵 터지는 이벤트 만들어주신 태을 레어, 성기 폴로니우스, 경수 호레이쇼, 그리고 커튼콜의 또 다른 주인공이었던 장대웅 아빠 유령님. 아놔, 난 진짜 언젠가 아빠 유령도 커튼콜에 나와주면 좋겠다 했는데, 이렇게 총막공에서 총막공다운 이벤트를 만들어주셔서 무한 감사. 그리고 아빠 유령을 상대로 찐한 키스를 선사하여 능욕(?)한 은릿한테도 브라보!!
+
이번 시즌 뮤지컬 햄릿을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은태가 과연 어떤 햄릿을 보여줄까 기대가 반, 우려가 반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멋지게 기대 이상으로 훌륭한 모습을 보여줘서, 결국 미친듯이 회전문을 돌게 만들었지. 아니, 그 때 왜 안 봤을까 미련을 남기느니, 통장을 희생시키는 게 낫다.
은태가 만들어낸 햄릿은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나 치열한 햄릿이었는데, 그게 나와 참 잘 맞았던 것도 있다. 배우는 자신의 개성을 캐릭터에 투영시킬 수 밖에 없는데, 은태가 가진 "성실함"이 햄릿에도 반영이 된 것 같다고 할까. 전에도 썼지만, 극이 진행되면서 은릿은 점점 더 치열해져갔다. 치열하게 슬퍼하고, 분노하고, 갈등하고, 고뇌하고, 사랑하고. 그 감정들은 다 격렬해서 뭘 해도 중간은 없는 거다. 그러니 절친인 호레이쇼가 '너는 너무 심각해.' 라고 이해받지 못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난 진지한 거 취향이라 이런 은릿의 해석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공연간 편차 없는 걸 뛰어넘어 극 안에서 폭풍 성장하는 모습까지 보여주니 정말 지켜보는 보람이 있었다. 이번 시즌 내 햄릿, 은릿을 만날 수 있어서 고마웠다. 찬바람이 불면 이제 햄릿이 아련하게 떠오르겠구나.
일 시 : 2011. 12 .23 ~ 2011. 12. 25
장 소 : 고양 아람누리 아람극장
관극일 : 2011. 12. 25 (일) 19:00
음악 / 대본 : 야넥 레데츠키 , 원작자 : W.셰익스피어
연 출 : 로버트 요한슨, 음악감독 : 원미솔
캐스트 : 햄릿 - 박은태, 오필리어 - 윤공주, 레어티스 - 강태을, 거트루트 - 신영숙, 클로디어스 - 서범석, 폴로니우스 - 김성기
- 누가 나에게 뮤지컬 햄릿 레전드 공연을 물어보면 나는 크리스마스에 고양 아람누리에서 올린 총막공이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것 같다. 진짜, 난 막판까지 큰 기대 안했는데, 총막공에서 이런 레전드 공연이 탄생할 줄이야. 일단 음향이 썩 만족스럽지는 않더라도, 23일, 24일 공연에 비하면 훨씬 나아져있었다. 그래도 나름 피드백을 했던 건지, 아니면 배우분들이 애쓰신 건지는 잘 모르겠다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최고의 공연을 보여준 배우분들 모두 레전드였고, 그 중에서도 총막공에서 그야말로 햄릿에 빙의되어서 신들린 연기를 보여준 은릿은 오늘 제일 큰 박수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 극의 시작. 오른쪽 망루에서 장례식을 지켜보는 은릿의 표정에는 슬픔이 흘러넘치고, 목소리에는 물기가 가득. 벌써부터 저렇게 감정을 끌어올리면 이 뒤에 전개는 과연 어떤 모습을 보여주려고 저러나 기대감이 상승하면서, 사실상 이때 벌써 레전드를 예감했다.
아니나 달라, 결혼식 장면에 이어지는 Why me에서 감정의 격렬하기가 또 피크치를 달리는 거다. 화가 나서 옷자락을 털어내는 동작도 어찌나 격한지 코트 자락이 어깨를 덮을 정도였;; 이 썩어빠진 세상에 대한 한탄과 분노, 그리고 그걸 어떻게도 하지 못하는 무력한 자신에 대한 불만스러움을 다 토해내듯 그 답답한 음향을 뚫고 쩌렁쩌렁 질러대는데, 세상에 벌써부터 이러냐, 오늘이 총막공이라고 아주 작정을 했구나 싶었다.
아, 여기서 레어템으로, 벽에 장식된 장미꽃 리스를 집어던지는데 그게 벽에 맞고 튕겨나와서 그걸 기어이 발로 뻥 차버리는 걸 볼 수 있었다. ㅋㅋㅋㅋㅋㅋ
- Sister에서 태을 레어에게 거한 뒷통수를 맞아버렸고, 아니 왜 막판에 와서 연인 모드로 돌아서심; 이어지는 Let's rise above this world는 이번 시즌 들어 그래도 가장 햄릿을 사랑하는 것 같은 윤필리어를 만날 수 있어서, 조금이나마 화해했다. 그런데, 2막 극중극 장면에서 이경수 호레이쇼를 비롯해서 미경 헬레나, 윤필리어, 길던스턴, 로젠크렌츠까지 합동으로 빵 터져서 웃음기 누르느라 힘겨워하고, Sextet 들어가야하는 윤필리어마저 연기를 잊고 그냥 고개를 푹 숙이고 어떻게든 웃음기를 죽이려고 들썩들썩 하느라, 이 부분은 오늘 좀 의문. 뭐에 그렇게 웃음이 터졌는지, 이경수 호레이쇼가 마지막 트라이앵글을 좀 격하게 치느라 살짝 삑 비슷한 걸 내서 그랬을까나. 그래도 어떻게 Sextet에서 감정 잡고 제자리를 잡아들어가서 다행이었다.
- '피는 피로써'에서도 감정의 격하기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는데, 저 MR과 드럼과 베이스, 일렉기타 소리를 뚫고 목소리를 내려니, 이게 너무 과부하가 걸려서 조마조마 하더니만, '목이 말라 내게 제발!!!!!, 피를 줘─'하고 절규하는데, 저 제발!!!!!!!을 너무 강하게 지른거지. 결국 '피를 줘─'에서 소리가 살짝 뒤집혔는데, 그래도 은근슬쩍 자연스럽게 넘기는게 무대 경험이 쌓이면서 이런 스킬은 점점 더 노련해지는구나 싶더라. 그리고 이어지는 '어디든 가주오~'는 또 처절함을 넘어서 피를 토하듯 절절하게 뻐렁치게 불러줘서 감탄했다. 이걸로 어제의 그 불완전 연소는 완벽 해결.
- 'He's crazy' 에서 어제 박자 때문에 고생하신 김성기 씨가 오늘은 제대로 리듬을 맞춰주셔서 괜찮았나 싶었더니, 2막 폴로니우스 살해 장면에서 거트루트를 찾아와 커튼 뒤에 숨는 부분에서 또 박자를 어그러트리셔서, 이 분의 Free~ 한 박자감은 어디 안 가는구나 했다.
아 그리고, 이 장면에서 장섭 폴로니우스 일 땐, 왁! 하고 놀리더니만, 김성기 폴로니우스일 때 은릿은 '으응~?' 하는 김성기 씨 특유의 버릇을 흉내내며 놀리는 게 또 재미 중 하나.
- '수녀원에 가'는 넘버 시작부터 목소리가 슬픔으로 흔들리는데, 정말 장난 아니게 물기가 가득해서 심상치가 않았다. 차마 감정을 다 숨기지 못하고, 어떻게든 냉혹한 표정을 짓기는 하는데, 목소리에 담긴 애통한 감정은 또 너무 절절해서, 어떻게 저 속울음을 못 알아챌 수 있지 싶을 정도였다. 수녀원에 가라고 하고 뒤돌아서 가슴 무너지는 표정이다가 오필리어가 잡아 세울 때. 전에도 고개를 위로 향하고 있는 걸 보기는 했지만, 난 그게 오필리어를 향해 마음이 돌아선 사내의 냉정함을 보여주는 건 줄 알았다. 그런데, 총막공에 와서야 그게 오필리어의 얼굴을 보는 게 괴로워서 애써 시선을 피하려고 저랬다는 게 눈에 확 들어오더라. 왜냐면 저렇게 시선을 허공에 두다가 결국 오필리어를 바라봐야 할 때 큰 결심하고 시선을 내리는 게 오늘에서야 확연하게 보여서, 난 왜 이런 은릿을 총막공에서야 처음 만나는 것처럼 낯설어 해야하나 했다.
아니, 따지고 보면 오늘 총막에서 보여준 은릿의 연기 자체가 그랬다. 이미 속속들이 다 파악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들이 튀어나와서 나를 꽤 당황시켰는데, 그게 전혀 어색하지가 않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바람에 이건 그냥 햄릿에 빙의되었구나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연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단 한 순간도 들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무대 위에서 흘러넘치는 그런 느낌. 그런데다가 감정의 치열함이 이제껏 은태가 보여준 거에서 50%를 더한 그런 격렬함이 있어서, 진짜 무대 위에서 쓰러지려고 작정을 했구나 했다.
- '수녀원에가 가'에서 보여준 격렬한 감정의 폭발이 '증거가 필요해'로 이어지면서 신경이 바싹바싹 말라가는 신경쇠약 직전의 광기를 보여주더니, '오늘 밤을 위해'에서 보여주는 감정의 파고는 또 얼마나 진폭이 큰지, 진짜 저렇게 1막에서 모든 걸 불사를 듯이 에너지를 바닥까지 긁어서 끌어내면 어쩌나 싶을 정도였다.
이게 정신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상당히 배우를 갉아먹는 것 같았던 게, 이날 극장 내부도 상당히 서늘해서 외투 벗었다가 다시 걸친 사람들이 천지였는데도 은태가 정말 땀을 비오듯 흘려대는 거다. 전에는 탭을 춘다더가 하는 격한 동작에서 땀방울이 머리카락을 타고 흩날리는 정도였는데, 이게 가만히 서있는데도 볼을 타고 땀이 뚝뚝 떨어지는 걸 보면서, 진짜 몸 사리지 않고 모두 불살라버릴 작정이구나 하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다 '산다는 게 연극같아' 독무 추는 부분에서 어쩌면 그렇게 순간순간 표정이 달라지면서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객석에 전달하려고 무진 애를 쓰는지. 난 마지막에 그 고통스러운 표정을 보고 기어이 은릿이 통곡하는 줄 알았다. 복수에의 희열보다 이 상황에 대한 서글픔과 분노로 일그러진 '오늘 밤을 위해─'는 내가 들어 본 중에 가장 고통스러운 외침이었다.
- 2막의 시작, 사느냐 죽느냐. 사실 나한테는 이 명제보다 더 와닿았던 게 잃어버린 녹슨 꿈을 찾으면 잊었던 나를 찾을 수 있을까...하는 부분이었다. 복수를 꿈꾸는 햄릿과 달리 나에겐 삶이니 죽음이니 하는 것보다 '자아'를 찾는 게 훨씬 중요해서. 내가 '나'로 있기 위해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그런 것들이 있는데, 햄릿은 그것을 하나씩 하나씩 잃어가면서 무너져내리는 게 더욱 가슴이 아픈 장면 중 하나다.
- 오늘 영숙 거트루트의 I'm untrue는 이번 시즌 통틀어 가장 아름답고 애절했다. 표정 연기에서 묻어나오는 그 회환에 가득찬 감정, 강약 조절된 목소리로 표현하는 거트루트의 욕망, 사랑받고 싶다는 게 그렇게 큰 욕심은 아닐텐데, 사람 마음 하나 움직이는 게 참 이리 어렵고 무겁다.
- 폴로니우스 살해 장면. 거트루트를 찾아와서 책망하는 은릿이 또 이날 따라 엄마를 비난하기보다 속상해서 그걸 어쩔 줄 몰라하는 것 같더라. 그러더니 커튼 뒤에 숨은 사람을 인식하고나서는 그야말로 눈이 뒤집어졌다고 할까, 광기에 휩싸여서 일을 저지르는데, 아버지 유령의 외면으로 일순 현실로 돌아오는 과정이 오늘 정말 너무 애처로와서.
뭐라고 해야할까, 나는 여기에서 은릿이 보여주는 상식적인(?) 반응이 참 좋다. 간단하게 표현하기가 좀 어려운데, 건전한 도덕관을 가진 일반인이 광기에 휩싸여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르고 보여줄 법한 반응이라고 해야하나. 손에 묻은 피를 보고 경악하고,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두려움 속에 자책하다가 회피를 선택하게 되는 일련의 그 과정이 섬세한 디테일과 함께 자연스럽게 표현되는 걸 지켜보는 게 좋다.
그런데 이날 은태가 햄릿에 빙의한 것 같다고 내가 자꾸 그러는게, 아무리 울컥해도 무대 위에서 눈물을 잘 보이지 않는 이 배우가 이 폴로니우스 살해 장면에서 실제로 반 울음 속에 연기를 하더라는 거. 피 묻은 손을 보며 부들부들 떨 때도 눈에 눈물이 한 가득이더니, 거트루트가 뒤에서 안아주니까 울며불며 그 팔에 매달리는데, 평소에는 그렇게 어머니를 의지하지 않았어서 더 안스러웠다.
거트루트가 폴로니우스의 팔을 보고 은릿을 뿌리치고 뒤로 물러나 '이제 가혹한 저주가 시작됐어.'라고 하자, 은릿이 커튼 뒤에 사람을 확인하려고 하는데, 여기서도 평소보다 힘이 없어서 비틀비틀 계단을 오르더니, 커튼 뒤의 사람이 폴로니우스라는 걸 확인하고 경악하고는 울다가 웃다가 아주 정신줄을 놓고, 슬쩍 소매로 코밑을 훔치는데, 코끝이 빨개져서 부르는 Who's crazy가 상황에 안 맞게 너무 가슴을 후벼파는 거다. 사실 제일 불쌍한 건 어이없이 죽은 폴로니우스인데, 저렇게 망가져버린 왕자가 너무 불쌍하고 가련해서 거기에 이입해버린다는 거지. 보는 사람이 깜짝 놀랄만큼 온몸으로 계단에서 구르는 모습도 한 몫하고. 진짜 공연 끝나고 은태는 무릎이나 팔 다리 성한 구석이 있을까 싶;;
- 무덤지기 씬이 참 이 비극의 한 가운데에서 붕 뜨는 씬이긴 한데, 앞 뒤로 이어지는 씬을 생각해보면 이렇게 한 숨 돌려가는 장면은 또 꼭 필요한 것 같고. 오늘 호레이쇼와 은릿이 등장할 때, 무슨 유치원 아이들이 친구 손 꼭 붙잡고 들어오는 것처럼 호레이쇼가 내켜하지 않는 은릿을 손 잡고 끌고 나와서 좀 웃었다. 그리고 김성기 씨는 '일산에 와서도 네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애드립으로 큰 웃음 주셨다.
- 이어지는 오필리어 장례식 장면. 은릿이 또 너무 처절하게 슬퍼하며 감정을 끌어올려서 태을 레어와의 부딛힘에서 아주 불꽃이 튀었는데, 첫번째 '형제여!'는 슬픔에 기력을 잃고 흐느끼며, 두번째 '형제여!!'는 너의 슬픔이 진심인만큼, 나도 죽고싶을 만큼 고통스럽다고 격렬함을 담고 있더랬다.
- 그리고 태을 레어가 오빠 모드를 버리고 연인 모드로 노선이 바뀐 것과 더해지면서 햄릿과의 결투씬에서 그 여파가 나타나더라. 전에는 독 묻은 칼로 바꾸기를 꽤 망설이다가 간신히 마음을 다잡는 거 같더니, 이 날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칼을 빼어드는데, 어우 막공 와서 이렇게 노선을 바꾸시긴가. 그리고 칼싸움의 격하기는 진짜 이 날이 최고. 검술의 달인이라는 태을 레어가 그동안 기백으로는 동레어에 밀리지 싶었는데, 이날은 그런 거 없이 태을 레어도 은릿 죽이려고 작정했지 싶게 격렬한 칼 싸움이었다. 칼날끼리 부딪히는 챙─ 하는 소리가 얼마나 날카롭게 울려퍼지던지.
- 참혹한 극의 마지막, 극장 전체에 울려퍼지는 '클라우디우스─!!!!!!!!!'는 새삼 전율이었고, 덴마크를 정화할 불꽃과도 같은 '덴마크여!'의 울림도 공간 전체를 가득 메우고 구석구석 파동을 전해줘서 참으로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그 불꽃이 사그러들듯 죽어가는 은릿은 또 전에 없이 눈물을 가득 매달고 나타나, 나는 진짜 이 장면에서 그냥 또르르 눈물을 흘린 적은 있었지만, 오늘만큼 펑펑 운 건 또 처음이었다. 죽어가는 그 순간까지 치열하게 고뇌하고 번민하다 가버리는 이 불쌍하고 가슴 먹먹한 왕자님.
어디든 가주오~ 나와 함께~ 라고 하면 어디든 따라갈테니, 부디 너무 멀지 않은 미래에 다시 만날 수 있기를‥.
- 이날 커튼콜은 참으로 총막공다운 커튼콜이라서, 앙상블부터 기립해서 마지막까지 레전드 공연을 선사한 배우분들에게 원없이 환호와 박수를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펑펑 운 얼굴 다 수습도 못했는데, 막판에 빵빵 터지는 이벤트 만들어주신 태을 레어, 성기 폴로니우스, 경수 호레이쇼, 그리고 커튼콜의 또 다른 주인공이었던 장대웅 아빠 유령님. 아놔, 난 진짜 언젠가 아빠 유령도 커튼콜에 나와주면 좋겠다 했는데, 이렇게 총막공에서 총막공다운 이벤트를 만들어주셔서 무한 감사. 그리고 아빠 유령을 상대로 찐한 키스를 선사하여 능욕(?)한 은릿한테도 브라보!!
+
이번 시즌 뮤지컬 햄릿을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은태가 과연 어떤 햄릿을 보여줄까 기대가 반, 우려가 반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멋지게 기대 이상으로 훌륭한 모습을 보여줘서, 결국 미친듯이 회전문을 돌게 만들었지. 아니, 그 때 왜 안 봤을까 미련을 남기느니, 통장을 희생시키는 게 낫다.
은태가 만들어낸 햄릿은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나 치열한 햄릿이었는데, 그게 나와 참 잘 맞았던 것도 있다. 배우는 자신의 개성을 캐릭터에 투영시킬 수 밖에 없는데, 은태가 가진 "성실함"이 햄릿에도 반영이 된 것 같다고 할까. 전에도 썼지만, 극이 진행되면서 은릿은 점점 더 치열해져갔다. 치열하게 슬퍼하고, 분노하고, 갈등하고, 고뇌하고, 사랑하고. 그 감정들은 다 격렬해서 뭘 해도 중간은 없는 거다. 그러니 절친인 호레이쇼가 '너는 너무 심각해.' 라고 이해받지 못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난 진지한 거 취향이라 이런 은릿의 해석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공연간 편차 없는 걸 뛰어넘어 극 안에서 폭풍 성장하는 모습까지 보여주니 정말 지켜보는 보람이 있었다. 이번 시즌 내 햄릿, 은릿을 만날 수 있어서 고마웠다. 찬바람이 불면 이제 햄릿이 아련하게 떠오르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