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연없는 월요일이라 심심하기도 하고, 햄릿으로 도배될 최근 작성글 리스트가 좀 보기에도 그래서;

- 햄릿 정극을 두어번 봤더랬는데, 예전에 난 하다못해 그날의 캐스트조차 챙겨보지도 않는 상머글이었을 뿐이고; 그냥 기억에 남는 게 두가지 버전의 햄릿에서 거트루트에 대한 해석이 참으로 대조적이었던 게 기억이 난다.
하나는 여왕의 자리에 집착하여 시동생과 결혼을 선택한 버전이고 다른 하나는 무력한 여자라 시대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자신의 뜻이 아닌, 타인의 뜻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는 버전이었다.

전자는 그야말로 여왕님이셨고, 햄릿을 대하는 태도 역시 어머니로서가 아니라, 여왕님으로서 왕자위에 군림하는 태도여서, 어머니 앞에서 주늑들었던 햄릿이 침실에서 그녀의 권위와 자존심을 짓밟으며 행패를 부리는 걸 볼 수 있었다. 뭐 곧바로 선왕의 유령이 나타나서 상황 정리되었지만.

후자는 캐릭터로서 별 매력이 없을 것 같은 데, 이게 또 의외로 참 괜찮았더랬다.
희미한 존재감이 딱 그만큼 사람 마음을 흔들어놓는 거트루트여서, 연약하고, 소심하고, 이쪽 저쪽 눈치보기에 여념이 없는 참으로 딱한 왕비님. 오필리어가 왕비가 되면 저렇게 되려나 싶은. 누구도 상처받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씨 고운 왕비님. 그저 평화롭게 지냈으면 좋겠는데, 자기가 중간에서 얼마나 마음 고생을 하는지, 새 남편도 아들도 알아주지 않아서 야속하지만, 겉으로 표현도 못하고, 그저 눈치만 보는 가녀린 여인이라, 햄릿도 클로디어스도 개객끼 소리가 절로 나왔더랬지.
거트루트의 침실에서 햄릿이 광증으로 미쳐 날뛸 때, 선왕의 유령이 나타나 말리는 걸 보면서, 그래도 선왕은 거트루트를 진심으로 사랑했었나보다, 다행이다...했더랬다. 사실 이 극에서는 거트루트의 분량이 정말 적었는데도, 이렇게 기억에 남는 걸 보면 배우분의 연기가 정말 좋았던 모양인데, 그분을 내가 몰라;
아, 쓰면서 생각났다. 이 거트루트는 어딘가 수하이바토르의 엄마를 닮았구나. 아들이 새아버지 눈밖에 날까 노심초사하는 모습이 그래서 눈에 밟혔나보다.

- 5막으로 구성된 원작에서 햄릿은 1막에서 이미 선왕의 유령을 만나 아버지의 죽음의 진실을 듣게된다. 그러나 똑똑한 햄릿(;)은 유령의 말을 그냥 믿는 게 아니라,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증명하려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피의 복수를, 거짓이라면 그저 악마의 장난으로. 그래서 미치광이 연기를 시작하고, 유랑 극단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나름 주도면밀한 매우 이성적인 왕자님이다. 좀 우울한 캐릭터에 생각이 좀 많기는 해도.

그런데, 뮤지컬 햄릿의 햄릿은 그저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고, 장례식이 끝나자 결혼식을 올리는 어머니에 환멸하고, 자신의 것이어야 하는 왕위를 가져간 삼촌을 증오한다. 그저 이 상황이 다 마음에 차지 않아 덴마크는 썩어가고 있다고 부르짖는 중2병 환자. 그렇게 혼자 비극을 짊어지고 고뇌하는 상처받은 영혼을 오필리어에게 위로 받는다. 어쩌면 이 순간이 햄릿에게 가장 평화로운 순간이었을지도 모르는데, 그걸 죽은 아버지의 망령이 나타나서 홀랑 깨버린다. 그래 자긴 억울하게 죽었는데, 마누라는 원수와 한 이불을 쓰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놈도 연인의 품안에서 안식을 찾는게 고까웠을지도 모르겠지만, 참 죽이는 타이밍이다.
안그래도 심란한 햄릿은 아버지의 유령이 전하는 진실에 세상이 무너지고, 발밑이 뒤집히는 충격을 받아서, 이 뒤에 보여주는 그의 광기는 미친 척하는 연기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 오필리어에게 수녀원에 가시오! 라는 햄릿도 보면 원작의 햄릿은 오필리어를 상처주려고 그런다기 보다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느끼는 환멸의 감정, 순수한 사랑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고 오필리어에게 비아냥대는 쪽에 가깝다. 그리고 이때 햄릿은 폴로니우스와 클로디어스가 숨어서 지켜본다는 걸 알지 못했다. 하긴 원작의 오필리어는 아버지 말씀에 순종하여 그 자리에 나왔기도 하고.
뮤지컬 햄릿에서 햄릿은 자기가 오필리어에게 쓴 연애편지(;)가 들킨 것에 대해 부끄럽고, 짜증이 난 상태에, 그걸로 조롱당한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그리고 그걸 오필리어에게 쏟아부으며 수녀원에나 가라고 버럭질. 이건 명백하게 오필리어를 상처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러니 넌 개객끼! 그래놓고 뒤돌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 고뇌마저 오필리어를 상처줘서 괴로워하는 게 아니라, 자기 문제로 괴로워하는 거다. 자기가 상처받았다고 남을 상처주는 상 찌찔이 같으니라고.

- 원작을 읽으면서도 좀 그랬던게. 햄릿은 폴로니우스를 살해했다. 그런데, 일국의 왕자라고 무슨 처벌도 안 받고 국외로 빼돌려진다는 것. 물론 클로디어스는 영국왕에게 햄릿을 죽여달라는 편지를 동승시켰지만, 그건 폴로니우스 살해에 대한 벌이 아니라, 눈엣가시인 햄릿을 제거하여 왕좌를 굳건하게 하기위한 대비책이었다. 일국의 재상이 죽었는데, 그게 왕자라고 이렇게 처리가 되다니!!
물론 햄릿은 영국에 가지도 않았고, 중간에 돌아왔지만, 하여간 실성한 오필리어를 방치한 책임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뭐 도망간 건 도망간 거지만, 이 경우는 추방에 가까우니까. 그렇기에 돌아와서 무덤지기를 만나 유쾌한 만담을 나눠도 뭐 그러려니가 되는데, 뮤지컬 햄릿에선 이 부분이 싹 빠져있으니, 실성한 오필리어가 자살한 씬 뒤에 무덤지기와 희희낙락거리는 걸 보면, 저놈은 대체 뭐 하는 놈이야 싶어지는 거다. 그러더니만 오필리어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너는 몰라라니, 에라이!!

- 햄릿이 작게는 한 가족의 잔혹사, 크게는 한 나라의 왕조의 몰락을 다루고 있는데, 생각해보니, 요즘 유행하는 막장 드라마 패턴이잖아. 그래서 이렇게 재미지나?

산다는 게 연극같아
온통 거짓말로 모두 가려져있어
피가 끓고 울고 웃기도 하겠지
지금 이 순간을 후회없이 즐겨
오늘 밤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