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일   시 : 2011. 10. 14 ~ 2011. 11. 06
관극일 : 2011. 10. 16 (일) 18:30
장   소 : 이해랑 예술극장
연   출 : 오경택
캐스트 : 마크 로스코 - 강신일, 켄(조수) - 강필석
줄거리 :
`인생에서 내가 두려워 하는 것은 단 한 가지...어느 날 블랙이 레드를 집어삼키는 것이다.`
1958년-59년, 마크 로스코는 뉴욕에 자리한 그의 스튜디오에 있다. 그는 비싸고 배타적인 포시즌 레스토랑의 벽화를 작업 중이다. 그는 조수 켄에게 그저 물감을 섞고, 프레임을 만들고, 캔버스를 그리는 일을 주문했으나, 켄은 무모하게도 로스코의 예술 이론과 그런 상업적인 프로젝트의 작업에 응한 것에 대해 질문한다... [출처 > 플레이DB]

무대가 화가의 작업실이라는 걸 알려주는 테라빈유의 향기도 좋았고. 역시 베테랑 2인극의 힘이란. 좋은 연극이었다....라고 하면 로스코 씨가 다다다다 좋아?!! 그냥 다 좋지?! 좋고 나쁨을 구별하는 안목, 식견은 어디다 버리고 온거야? 라고 타박을 줄 것만 같다.


사실 마크 로스코라는 화가가 누군지도, 그의 작품이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그저 포스터의 배우 두분 바라보고 예매한 연극이었는데, 이거 사전지식이 좀 필요한 극이었다. 마티스, 피카소, 폴락까지는 어떻게 알겠는데, 난 마크 로스코라는 분은 몰랐어서; 그래서 극장 입구에 미리 공부 좀 하라고 판넬을 세워뒀더라. 그거라도 안 읽고 들어갔으면 극을 이해하는 데 좀 어려웠을 것 같다.

강신일 씨는 그동안 영화, 드라마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주셨어서 그만큼 기대도 컸고, 연극 무대에서도 그 기대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발성이 얼마나 좋으신지, 심지어 중국집 국수(미드에 자주 등장하는 종이 박스에 든 그거)를 드시면서도 대사가 뭉개지지 않는 경지를 보여주셨더랬다. 내 자리가 앞에서 두번째 줄이라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심지어 속삭이는 목소리도 또렷하게 들리더라. 마크 로스코라는 인물은 화가이면서 동시에 여러 학문에 박식한 인물이라 사용하는 용어 자체가 참 생소한 단어가 많이 쓰이는데, 거기다 강의하시는 것처럼 대사량도 엄청 많아서 저거 다 외우시느라 고생 좀 하셨겠다 싶었다.
연기 내공이 쌓일대로 쌓이신 분들이 보여주시는 카리스마란 이런 건가 싶게, 정말 이게 무대와 배우가 아니라 마치 그 캐릭터 자체인듯 자연스럽게 연기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극이 시작하자마자 바로 몰입할 수 있었다. 그건 뭐라고 해야하나 따로 어떤 장치나 분장이 없어도, 과장된 표정, 몸짓 없이도 그 인물이 될 수 있는 자연스러움. 이런 걸 보고싶었다고 진심으로 기뻤다. 극의 마지막 대가의 뒷모습 위로 빨간 조명이 비춰지는데, 그 뒷모습에 눈물이 차오르더라. 아, 이것이 늙은 사자의 포효, 타협하지 않는 대가의 뒷모습이구나 싶어서.

강필석 씨. 이 연극을 통해 처음 뵙는 배우인데, 강신일 씨에 밀리지 않고 버틴 것만으로도 칭찬해주고 싶다. 뮤지컬 배우이기도 하셔서 역시 발성은 뒤지지 않으시고, 어제는 붓질 하시다 붓을 날려버리는 열정을 보여주기도 하셨는데, 살짝 톤 다운된 연기로 강신일 씨를 받쳐주는 연기가 참 좋았다. 배역에 충실하게 목소리를 낮추고, 그러다 로스코와 갈등을 빚는 장면에서 팽팽하게 맞서는 씬에서의 연기도 너무 과하지 않게 절제하는 연기가 꽤 마음에 들었다.

주옥같은 대사가 정말 많아서, 다 기억을 못하겠는게 한이다. 나의 지적 허영심을 찔러대는 대사들, 속물 근성을 비웃으며 정작 자신이 그 속물이라는 걸 지적받으면 아픈 말들. 그래서 한 번 보려고 했던 거, 결국 프로그램 북이 아직 안 나왔으니, 그걸 사러간다는 명분으로 한 번 더 예매했다. 희곡이나 책이 있다면 꼭 구해보고싶은 작품이다.

- 이해랑 극장은 울림이 참 좋은 극장인데, 그게 객석에서 사소한 부스럭거림, 툭탁거리는 소리까지도 잘 울린다는게 좀 단점.
- 명색이 redlover인데, 마크 로스코라는 작가를 몰랐다는 거에 일말의 죄책감 같은걸 2g쯤 느끼고 돌아왔다. 극 내내 부르짖는 '레드'에 대한 정의, 열망 같은 것들을 2번째 보면 좀 더 잘 알 수 있으려나.
- 극중에 로스코가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 몇 번 나오는데, 진짜 담배가 아니라서 참 다행. 처음엔 진짜 담배인 줄 알고 식겁했는데 - 난 담배 냄새 맡으면 멀미를 해서 - 그냥 낙엽 태우는 냄새 비슷한 탄내가 나더라. 그리고 물감 섞는 중에 계란 노른자만 분리해서 넣는 거 보고, 유화에는 계란 노른자도 쓰이는 구나, 강신일 씨 손놀림에 살짝 감탄.
- 까탈스러운 로스코 씨의 열강을 들으며 켄의 머리 위로 이런 말풍선이 보이는 것 같았다. "Why so serio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