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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6.15 보라! 승리를 확인하러 우리가 왔다 2
내가 기억하는 월드컵은 86년 멕시코 월드컵이 처음이다. 다른 건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고 그저 새벽에 아빠 혼자 TV를 틀어놓고, 귀에는 리시버(당시엔 헤드셋 같은 게 없어서 보청기처럼 생긴 이놈을 끼고 봐야 했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어퍼컷을 질렀다 말았다 소리라도 지를까 들썩들썩하던 뒷모습만 기억난다.

그리고 내가 자발적으로 보게 된 첫 월드컵은 94년 미국 월드컵. 당시 조 편성이 독일, 스페인, 볼리비아였는데, 강팀인 스페인과 비기고 이번에야 말로 16강에 오르나 기대가 컸던 대회였다. 그러나 해볼 만 하다는 볼리비아에 비기고 마지막 독일과의 경기에서 3:2로 패해서 16강 진출은 좌절됐다. 독일과의 경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전반을 3:0으로 끝낸 상황에서도 후반에 포기하지 않고 독일 골문을 두드려 2점을 만들어냈다는 것과 풀백이었던 홍명보 선수의 호쾌한 장거리 슛이 독일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는 것 정도.

그리고 통한의 98년 프랑스 월드컵. 멕시코에게 선제골을 넣고도 1:3으로 분패한데다, 히딩크의 네덜란드에 0:5 패배라는 수모를 당하고, 대회가 끝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차범근 감독은 경질되고 말았다. 그리고 남은 마지막 경기는 벨기에 전. 이미 16강 탈락은 확정이었고, 다만 1승이라도 가져가겠다는 선수들의 의지는 가열찼다. 전반을 1:0으로 벨기에에 선취점을 준 선수들은 후반 들어 거의 목숨 걸고 달렸다. 붕대에 피가 배어 나와도 달리는 이임생 선수를 보면서 내내 눈물 반으로 경기를 봤었다. 결과는 1:1무승부. 벨기에는 우리나라에 그렇게 발목 잡혀서 16강 진출이 좌절됐다.

2002년은 안방에서 치렀으니 다들 잘 알 테니 패스.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숙원의 원정 첫 승을 이뤘다. 이건 진짜 감격이다. 아무리 7회 연속 월드컵에 진출한다 했어도 우리나라는 월드컵 원정에선 단 1승도 거두지 못하는 축구의 변방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그것도 선취점을 먹고도 역전승을 이뤄냈다. 토고전 MVP는 누가 뭐래도 박지성 선수다. 온 몸을 내던져 기회를 만들고 이천수 선수의 프리킥을 유도하고, 안정환 선수에게 어시스트 후 페인트 모션을 취해 수비를 몰고 간 것은 환상이었다. 정말 선수들이 장하고 고맙다.


우리가 언제부터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팀이 되었는가. 언제부터 프랑스를 상대로 승리를 논할 수 있는 팀이 되었는지. 그것만으로도 나는 막 가슴이 벅차다.

ps. 축구라는 스포츠는 가장 전투적이고 원시적인 경기다. 운동장에서 뛰는 선수들은 나라를 대표하는 전사들이다. 그렇기에 나라가 들썩이는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의 월드컵 열기는 지나치게 과열됐다. 거리 응원은 전에 없던 갖가지 병폐를 보여주며 환멸을 사고, 방송3사의 묻지마 월드컵 편성으로 전 국민은 강제로라도 축구만 봐야 하고. 기업들은 어떻게 해서든 월드컵 특수를 누려볼 궁리만 한다. (이게 다 SK 때문인가;;)
축구말고도 더 중요한 것들을 놓치지 않도록 한 쪽 눈과 귀는 열어놓자, 좀.


ps2. 그래도 축구는 참 좋다. 한창 때의 아름답고 싱싱한 남정네들이 떼거지로 나와서 펄펄 날아다닌다. 참으로 가슴 따뜻해지는 스포츠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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