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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리(窮理)

일   시 : 2012. 04. 24 ~ 2012. 05. 13
장   소 : 백성희장민호 극장
관극일 : 2012. 05. 03 (목) 20:00
연출/대본 : 이윤택, 무대디자인 : 이태섭
캐스트 : 장영실 - 강학수, 세종 - 이원희, 황희 - 이종구, 이천 - 조정근, 당직사령 - 장재호, 조말생 - 전형재, 임효돈 - 김수보, 조순생 - 오동식, 최효남 - 유승락, 김종서/정갑손 - 심완준  
줄거리 :
“대호군 장영실이 안여(安輿: 임금이 타는 가마) 만드는 것을 감독하였는데, 튼튼하지 못하여 부러지고 허물어졌으므로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게 하였다.” ([세종실록] 1442년 3월 16일)

“주군이여 왜 내게 안여를 만들라고 하셨습니까?”
세종은 장영실에게 ‘안여’(수레)를 만들라고 명한다. 그러나 세종이 타고 가던 안여는 바퀴가 빠지며, 임금은 수레와 함께 땅 바닥에 처박히는 사고가 일어나고 만다. <궁리>는 여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안여가 부서지는 사건을 계기로 장영실은 주군 세종을 음해한다는 오해를 받는다. 작품은 안여 사건을 중심으로 세종과 장영실. 그리고 그들은 둘러싼 주변 권력의 관계를 보여준다. 세종의 이상을 현실로 만들어준 장영실은 앞서가는 지식이자, 조선의 새로운 인물상이었다. 그러나 그의 운명은 견고한 계급과 권력 앞에서 인생 최고의 친우이자, 이상을 같아 나누었던 세종과의 관계는 파괴를 가져오기 시작하는데....[출처 > 플레이DB]

- 어렸을 때, 집에 전집으로 갖춰진 위인전에서 내가 제일 자주 꺼내 읽었던 게 모차르트와 장영실 편이었다. 장영실을 한국의 에디슨쯤으로 소개했던 거 같은데, 내가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은 자동 물시계 자격루 부분이었다. 그림 없이 말로만 설명되어있는데, 어떻게 움직이는 건지, 거기에 나오는 인형들 크기는 얼마만 한 건지 상상이 잘 안 돼서,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고 또 읽으며 자격루를 머릿속에 그려보고는 했다. 그런데 이게 설계도나 이런 게 남아있지 않아서, 재현하기도 어렵다는데, 내 머릿속에는 서양식 자동인형 시계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 자격루가 동작하는 걸 무대에서 보여주더라. 감동~

- 극장에 들어가서 전공 학생 단관에 한 번 놀라고, 어쩐 일인지 엄마 손잡고 들어온 초등학생들이 많아서 또 한 번 놀랐다. 이게 4월 말까지도 있었던 표가 5월 들어서면서 모두 매진이 돼버려서, 나도 일찌감치 예매해놓지 않았더라면 못 봤을 연극이라서. 장영실 역이 더블 캐스팅이라 포스터에 나오는 곽은태 씨의 연기도 보고 싶었는데 (아, 강학수 씨의 연기도 소름이 돋을 만큼 훌륭했으므로 아쉬워서 하는 소리는 절대 아니다.) 뒤늦게 잡으려고 보니 표는 이미 동났더라. ㅠ.ㅠ 그런데 전공 학생들은 진짜 한번은 봐야 할 것 같았던 게, 이게 희곡뿐만 아니라, 연출, 조명, 무대 디자인이 모두 수작이라. 특히 무대 디자인이 특이했는데, 2층 구조물로 가운데 마루 부분은 경사면으로도 활용할 수 있게 설계되어있고, 양옆으로 경사로가 있는데, 무대 오른쪽은 단순 경사로와 객석 앞쪽까지 휘감아 내려오는 경사로 이렇게 2개를 만들어놔서 동선을 다양하게 짤 수 있게 했다. 이만한 극이라면 연강홀 정도의 중극장에서 공연해도 좋겠다 싶더라.

- 극은 시작부터 긴장감이 흘러넘치는 폭풍우 속 왕의 행차 장면인데, 백성을 임금의 수레로 표현한 게 인상적이었다. 크고 무거운 임금을 짊어지고 힘겨워하는 백성과 그 백성 위에서 떠받침 받는 세종의 구도는 얼핏 백성의 희생과 고통을 강조하는 것 같지만, 백성이 그렇게 힘겹게 떠받들고 있기에 어깨에 내려앉는 책임감도 태산같이 무거운 세종을 보여주는 듯했다. 임금이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고, 사치를 부릴 수 있는 것은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정자들이 그걸 항상 명심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만은.

- 대사 한 줄, 한 줄에서 힘이 느껴지는 극을 만난 건 참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종이 사대부들과 벌이는 설전은 뿌리 깊은 나무를 살짝 떠올리게 하는 부분도 있었지만, 억지로 사극체로 하지 않은 대사들은 참 마음에 들었다. 명나라가 망해도 조선은 계속된다는 게 상상도 가지 않았던 당시 사대부들의 나름합리주의를 보면서 시대가 흘러도 변하지 않는 건 왜 이리 질기고 뿌리도 깊은가 했다. 현실적이라는 말로 보기 좋게 포장되는 기득권의 논리는 그래서 힘을 얻는 건가 보다. 개혁과 혁신을 단행하는 군주는 이상주의자 = 몽상가일 뿐이고. 그의 수족이 되어 움직이는 누군가는 내쳐야 할 이단자. 그냥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힘이 없어서, 명분이 없어서 정치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군주 세종과 명나라가 망해도 영속하는 조선을 꿈꾸던 개혁 군주 세종과 장영실의 재능을 두려워하면서도 필요로 했으나 지켜주지는 못했던 세종. 어쩐지 나는 장영실보다는 세종의 처지를 이해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 감옥에서 장영실의 발명품들 - 측우기, 혼천의, 해시계, 자격루를 즉석에서 뚝딱 만들어 펼쳐놓는 장면은 이 아프고 서러운 연극에서 가장 밝고 빛나는 부분이었다. 바닥 조명을 이용해 별자리를 보여줄 때도 좋았지만, 압권은 극의 마지막 부분이다. 난 별자리 조명이 멋지다는 소리는 듣고 갔지만, 그런 식으로 연출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처음엔 경사로 부분을 보면서 황도 12궁을 펼치듯 경사로에 조명을 쏘는 건 아닐까 했는데, 그건 아니더라. 하여간 자신만의 별을 얻은 장영실과 그 곁으로 가고 싶어도 무거운 몸뚱이 - 명분, 실리, 정치, 거기에 병으로 고통스러운 육신을 포함한 - 때문에 비탈진 경사면에서 계속 미끄러지는 세종의 대비가 극명한 마지막 장면을 슬프도록 아름답게 장식한 별자리였다.

+ 공무가 아닌 사적인 시간이면 시도 때도 없이 영실아~ 장영실을 찾아대는 세종이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내시가 되어도 좋다는 장영실의 충의(?)를 보고 있자면, 조선 시대 주종 관계는 어쩌면 저렇게나 호모로운건지(;) 문학 시간에 사미인곡, 속미인곡 배우면서도 저건 남녀상열지사 뺨치는 로맨틱 연시다 그랬는데 그냥 그게 자연스러운 거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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