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벳 (Das Musical Elisabeth)

일   시 : 2012. 02. 08 ~ 2012. 05. 13
장   소 :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
관극일 : 2012. 03. 20 (화) 20:00
대   본 : 미하엘 쿤체, 작곡 : 실베스터 르베이
연   출 : 로버트 요한슨, 협력연출 : 박인선, 음악감독 : 김문정
캐스트 : 엘리자벳 - 김선영, 죽음 - 송창의, 루케니 - 박은태, 프란츠 요제프 - 윤영석, 소피 대공비 - 이태원, 청년 루돌프 - 전동석, 어린 루돌프 - 탕준상

- 오랜만에 느껴보는 화요일스러운 공연. 시작부터 5분 지연. 지휘는 부음감. 음향은 1막은 빵빵하게 키워놓고, 2막은 또 줄여놨고, 오케스트라는 결혼의 정거장들에서 관악기 음정 틀림. 그 외에는 캐스트 별로 다들 컨디션도 무난한 가운데, 태원 소피께서 제일 컨디션이 좋으셨는지, 아주 쩌렁쩌렁하셔서 잘하면 뮤지컬 소피가 될 뻔. (왜 될 뻔 했는지는 뒤에) 화요일스럽게 객석도 좀 수런수런, 배우들도 배역 몰입이 좀 더디게 진행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 주조연들을 더블에 트리플 다발로 캐스트를 해놓으니, 이게 캐스트 별로, 조합별로 극이 확확 달라지는 느낌이 재관람자들에게 신선한 재미를 던져주는데, 그 바람에 회전문은 쉬지않고 돌아간다는 통장 박살의 전설이. -_- 연기 노선에 별로 변경이 없는 분들은 쌓여가는 디테일 보는 재미가 있고, 아예 회차별로 노선이 달라지는 선영 엘리라던가 송토트는 그날 그날 배우가 잡은 노선에 따라 극 자체가 달라져서, 뭔가 새로운 극을 보는 것 같달지.

이날 공연은 그렇게 매 공연 노선이 달라지는 김선영 씨와 송창의 씨가 만났으니, 또 어떤 변화를 보여줄까 하는 기대가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난 이날 뮤지컬 엘리자벳이 아니라, 뮤지컬 토트를 보고 온 느낌. 선영 엘리는 연약 노선, 강성 노선 이것 저것 시험해보시다가 그걸 적절히 섞어서 보여주셨는데, 송토트는 죽음이 엘리자벳이라는 한 여인을 만나서 감정이라는 걸 배워나가고, 사랑이 애증으로, 집착에서 시작된 자괴감이 자기혐오로 이어지는 감정의 격렬한 변화를 보여주더라.

이날 프롤로그 첫 등장에서 송토트가 '이 오래된 노래는 무엇일까, 아직도 내 가슴을 아프게해.' 라고 부르는 노래가 하이네 하인리히의 시 '로렐라이' 의 첫 구절이라는 인식이 들면서, 토트에게 엘리자벳은 마치 로렐라이와 같은 여인이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빠져들어서는 안되는 존재라는 걸 알지만, 끌릴 수 밖에 없는 운명. 아름다운 여인에 이끌려 결국에 좌초해버린 '죽음'이었다.
송토트는 엘리자벳을 만나지 않았다면 자신이 차갑고, 냉혹한 존재라는 것 자체를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완전한 파괴만이 나의 의무' 인데, 한 여인을 만나서 깨닫지 않아도 좋을 감정까지 알게되었고, 지금 그 감정들을 일깨워준 여인은 곁에 없다. 그래서 사랑했지만, 동시에 증오스럽고 원망스러운 죽음.
그래서 '난 그녈 정말 사랑했어' 할 때 은케니의 조소가 굉장히 통렬하다. 초월적이고 절대자인 '죽음' 조차도 한갖 사랑에 빠져 저렇게 자기를 잃고 비통함에 빠져있냐는 듯한 비웃음을 흘리는데, 그게 죽음과의 엘리자벳 배틀에서 보여주는 빠직빠직한, 전기가 튀는 것 같은 그런 따끔따끔한 느낌까지 주더라.

이왕 뮤지컬 토트가 된 김에 송토트 이야기를 더 해보자면, 이날 송토트가 잡은 죽음은 여성성이 강조된 토트였다. 남자가 여성스럽다는 그런 느낌이 아니다. 남성도 여성도 아닌 죽음이 마치 엘리자벳과 동화된 느낌이라고 할지. 노래하는 목소리도 굉장히 부드럽고 나긋하다가, 죽음 자신이 깨달은 감정을 내비칠 땐 순간적으로 거친 상남자의 모습이 튀어나오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엘리자벳 내면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설득하는 죽음이었다. 그래서 마지막 춤이나 내가 춤추고 싶을 때에서도 서로 대치하면서 팽팽하게 기싸움 하는 느낌은 거의 들지 않는다. 엘리자벳이 품고있는 불안, 혼란을 직접적으로 건드리면서 너도 사실은 다 알잖아? 그러니 내게 의지하라며 꼬시는 죽음이었다.
특히 내가 춤추고 싶을 때에서 참 특이한 경험을 했는데, 저 아래 가사에서 보면 '그래!'가 마치 엘리자벳이 하는 말을 긍정해주는 것 같은데, 송토트는 '그래?'라고 뒤에 물음표가 보이는 톤이었다.

토트: 이 세상의 흐름을 바꾸는 거야 네가 원하는대로
엘리: 이 세상이 아닌
토트: 나를 위해
엘리: 날 위해
토트: 그래!

승리했노라 의기양양해 하는 엘리를 바라보며 정말로 네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을 거 같아? 비아냥대고, 결국 넌 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적극적으로 설득하는 죽음이었다. 승리감에 도취된 엘리자벳에게 씨알도 안 먹힌다는 걸 깨달은 송토트는 이제 서서히 아들 루돌프에게 마수를 뻗힌다.

이날 어린 루돌프는 준상이. 프롤로그에서 목소리 쭉 뽑아내는 건 세 어린 돌프 중 최고인데, 여리디 여린 것도 세 어린 돌프 중 제일 여린 준상이. 태원 소피가 '얜 너무 약해 빠졌어.' 걱정하는게 진짜 이해가 되고도 남는 기가 약한 도련님이다. 그런 준상 돌프를 손에 쥐고 흔들려고 하니, 여기서 송토트는 정말 심하게 자책감을 느끼게 되고, 여유롭게 꼬신다던가 그러질 못하고 뒤돌아 서면서 보여주는 표정이 내가 이 짓까지 해야해? 라는 표정이라. 게다가 죽음이 떠나고나면 준상이가 죽음에게 뻗었던 팔을 가슴쪽으로 모으고서는 다시 엄마를 찾는데 얼마나 애처로운지. ㅠ.ㅠ

그렇게 첫만남 이후로 다시 루돌프를 만나서 부르는 그림자 송이 이날 송토트의 베스트 송이었는데, 난 초반에 하이음을 죽음이 부른다는 걸 알면서도 지금 이 목소린 동석인가? 했을만큼 풍부한 성량의 목소리가 흘러나와서 다시 한 번 귀를 쫑긋 세웠더랬다. 송토트가 목상태가 좋으면 이런 소리가 나오는구나 감탄하면서 그림자송을 들었는데, 더 깜짝 놀란 건 '세상의 종말 그 끝에 서있다' 하면서 동돌프와 거의 키스하려는 포즈까지 갔다가 동돌프가 '그래! 드디어 때가 왔어' 하면서 간신히 뿌리치고 달아나는데, 내가 관극한 중에는 처음 보는 디테일이라 매우 신선했다. 류동 그림자송에서 동돌프가 류토트를 유사 아버지로 보는 쪽이라 이런 식의 디테일이 들어갈 여지가 잘 없는데, 송토트가 여성성을 좀 더 강하게 가지고 가면서 이런 디테일이 먹혀들어가는 게, 이래서 전관해야한다는 결론? ㅠ.ㅠ 하여튼 송토트가 동돌프와 대등하게 성량에서도 밀리지 않고 그림자송을 불러주니 눈과 귀가 제대로 호강하는데다가, 계단 위라는 지상과 분리된 공간에서 인간은 절대 볼 수 없다는 광경을 죽음이 루돌프 앞에 펼쳐놓고, 그러니 네가 세상을 구원해보라며 부추기는 연출 방식이 참 마음에 든다.

그런데, 여기서도 송토트는 내적으로 끊임없이 갈등하고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자책에 휩싸여서 보는 사람이 불안할 정도로 혼란스러워한다. 그래도 결국 비장한 표정으로 루돌프를 지켜보고, 루돌프가 배신자의 낙인이 찍히는 장면에서는 기어이 저질러버렸다고 고통속에 자책한다. 아, 저 자책감은 루돌프에 대한 연민이나 미안함이 아니라, 내가 이런 짓까지 하다니!! 라는 쪽의 자책감이다. 류토트가 모든 건 계획대로~ 라는 죽음이라면 송토트는 엘리자벳이라는 여자 하나 때문에 인간사에 깊숙이 관여하게 된 자신을 참을 수 없어하는 느낌이다.

그런 송토트가 결정적으로 엘리자벳에게 사랑, 질투, 집착을 넘어 애증이라는 감정까지 품게되는 계기는 루돌프의 죽음. 여기서 송토트가 내보이는 자괴감이란, 땅을 파다파다 지구 반대편에 도달할 것만 같은 그런 격렬한 자기혐오.
그래서 죽음에게 데려가 달라 애원하는 엘리자벳을 바라보는 표정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면서, 모든 인간을 두려움에 떨게하는 절대자인 이 내가 너 때문에 이렇게까지 했어!!!! 라는 마음의 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더라.  날 이렇게 만든 널 괴로움 속에 몸부림치도록 내버려둘 거야 라며, 그러나 그 자신도 고통 속에 흐느끼는 느낌으로 '가~!'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장면에서 송토트와 선영 엘리는 정말 거울 보듯 서로 똑같이 고통스럽고 서글픈 서로의 반쪽같더라.

이렇게 자아 정체성을 잃고, 자기혐오와 엘리자벳에 대한 사랑과 증오의 감정을 동시에 품은 토트는 이미 한계용량에 다달아 버렸다. 그래서 침몰하는 배 씬에서 송토트는 진짜 자기 자신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고통과 혼란 속에 지쳐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할 정도. 난 이 장면에서 죽음이 이렇게 무너지는 걸 처음봐서 참 생소하면서도 흥미로웠다. 이제까지 내가 본 류토트, 송토트 모두 침몰하는 배 씬에서만큼은 요제프와 팽팽한 대치 상황이었는데, 이날의 송토트는 굉장히 괴로워하고 쓰러질 것 같은데 간신히 악만 남아 버티는 그런 느낌. 그러다 루케니에게 칼을 던질 때도 거의 주저않을 듯 자세가 무너지면서 될대로 되라는 식의 자포자기의 심정까지 느껴지더라. 이 감정선은 이후에 칼맞은 선영 엘리를 맞이하러 나올 때까지 죽 이어져서 칼 맞은 엘리자벳보다 그걸 지켜보는 죽음이 먼저 죽을 기세 (응?) 엘리자벳은 죽음을 통해 비로소 자유를 얻었지만, 죽음은 사랑하는 여인을 손에 넣었으나, 그것은 곧 그 여인과의 영원한 이별을 뜻하는 것이라. 그래서 이 장면은 내려오는 줄에 목을 거는 루케니와 함께 이야기를 다시 프롤로그로 되돌리는 장면이 된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이 시작이 되는 이야기. 그래서 회전문은 멈추지 않는 모양이다.

- 송토트가 워낙 신선한 해석을 들고나와서 송토트 위주로 쓰게 되었는데, 이날 다른 캐스트 분들도 다들 굉장히 좋았다.
특히 태원 소피가 어찌나 강렬한 카리스마를 휘두르시는지, 1막 황실 장면에서 헝가리 정세를 그륀네 백작에게 묻는 장면이, 정화 소피는 그륀네 백작이 자기 사람이라 그의 의견을 들어보자는 쪽이라면, 태원 소피는 그륀네 백작에게 전에 내가 일러준대로 하라는 느낌이다. 진실이 어쨌든, 겉으로는 수렴청정이니, 직접 정치적인 발언을 하는 대신 막후 조작(?)이랄까. '하, 전쟁은 다른 나라나 하라고 하세요.' 라는 대사톤에서도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는 톤이다. 2막 벨라리아에서도 정화 소피는 늙고 병들어 지쳐가는 불쌍한 소피인데, 태원 소피는 아직도 성깔이 카랑카랑한 만만찮은 노쇄한 권력가의 포스를 보여주신다. 아들에게 사랑타령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하는 대사도 며느리에 대한 견제만이 아닌, 진심으로 국정을 우려하는 모습이라 아, 이분이 가시고 나면 오스트리아는 앞날을 장담할 수 없겠구나 싶더라.

선영 엘리, 윤제프 케미스트리야 말해 뭐하겠는가.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는 참 보기좋은 한쌍이었으나, 결혼은 현실이고, 거기에 저렇게 카리스마 넘치는 시어머니를 과연 누가 이길 수 있나. 아무도 못 이김. 그래서 뮤지컬 소피가 될 뻔했; 선영 엘리는 나는 나만의 것 한 곡만으로도 엘리자벳이라는 드라마 한 편을 보여주는데, 이날도 참 여리고 청순하게 시작해서, 내 삶의 주인은 나라고 강인하게 외치는 홀로 서는 모습까지 참으로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시더라.
윤제프는 순정 넘치는 마마보이에서 좀더 강단있는 마마보이로(;) 변신하셔서, 벨라리아에서는 거의 민제프 맞먹을 정도로 패기를 보여주셨다. 전에는 어머니를 뿌리치면서도 이제껏 두 모자간에 쌓아온 정이 있어서 좀 덜 야멸차다할까 그랬는데, 이날 공연에선 진짜로 우리 사이는 끝이에요! 하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태생이 모질지 못한 윤제프라 아마도 뒤돌아서는 마음 아파하지 않았을까 하는 여운을 남겨주는 그런 요제프였다.
선영 엘리와 윤제프의 가장 멋진 하모니는 2막의 조각배 씬인데, 떨어져 지낸 세월이 그리 길어도 여전히 절절한 사랑을 전하는 요제프와 마치 매미의 허물처럼 텅 비어버려 그대로 투명하게 사라질 것 같은 엘리자벳의 듀엣은 진짜 가슴이 아파서 울컥하게 되더라.

동돌프는 회차가 거듭될수록 무대에서 힘을 빼는 법을 배워나가는 것 같아서 그게 참 좋더라. 배우가 쓸데없이 힘이 들어가 있으면, 움직임이 뻣뻣해서 보는 사람도 경직되는데, 그렇다고 늘어져버리면 연기 자체가 안되고, 무대 위에서 적당히 긴장감을 가지는 감각, 그건 아무래도 경험에서 배우는 수 밖에 없는 거라, 앞으로 점점 더 좋아질 걸 기대하고 있다. 노래야 뭐 저렇게 잘하는 데 더 해줄 말이 없고. 

아, 이날 이용진 씨 대신에 심현준 씨가 올라왔는데, 아무래도 용진 씨 특유의 개그 연기같은 건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라 좀 심심하긴 하더라. 새삼, 엘리자벳이라는 작품이 얼마나 캐스트에 공을 들였으면 앙상블 한 사람 한 사람 다들 이리도 훌륭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결론은?
이런~젠장! 통장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어요! 그걸 통장 주인만 몰라!! (feat. 은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