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벳 (Das Musical Elisabeth)
일 시 : 2012. 02. 08 ~ 2012. 05. 13
장 소 :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
관극일 : 2012. 03. 08 (목) 20:00
대 본 : 미하엘 쿤체, 작곡 : 실베스터 르베이
연 출 : 로버트 요한슨, 협력연출 : 박인선, 음악감독 : 김문정
캐스트 : 엘리자벳 - 김선영, 죽음 - 류정한, 루케니 - 박은태, 프란츠 요제프 - 민영기, 소피 대공비 - 이태원, 청년 루돌프 - 전동석, 어린 루돌프 - 탕준상
- 1차 티켓오픈 때는 단 한 번 밖에 없었던 김류은민동 조합이었으나, 그 조합이 인기가 좋은 걸 알았는지, 이후에는 이 조합이 꽤 많이 나와서, 내가 지금 이 조합으로만 몇 번째 관람이더라.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은케니 제외하고 선영 엘리, 류토트는 계속해서 연기 노선이 달라지고 있다는 거. 범생 은케니는 처음 잡은 컨셉에서 크게 바뀌는 거 없이 디테일을 다듬어가는 과정이라 캐릭터 자체가 달라지는 일은 없는데, 선영 엘리 같은 경우는 회차마다 아예 엘리 캐릭터가 연약 노선이냐 강성 노선이냐가 확확 바뀌는데, 그날 그날 자신의 컨디션에 따라 바꾸시는 건지, 아니면 상대 배우와의 조화를 고려해서 바꾸시는 건지, 이날 공연에서 선영 엘리는 내가 본 중에 가장 강성 노선이셨다. 어찌나 여제 포스가 물씬 풍기던지. 하여간 그러다보니 죽음을 사랑했다던가 하는 부분은 상대적으로 약해질 수 밖에 없더라.
그런데, 문제는 엘리가 죽음을 정말로 사랑하기는 한 건지 이런 의문이 드는 순간, 아무리 죽음이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카리스마를 내뿜어도 그 입지가 좁아진다고 할지. 이건 전적으로 한국판의 번안 문제 + 연출 상의 문제인데, 일단 가사에서 그렇게 죽음과 황후와의 로맨스를 강조해놓고, 루케니가 프롤로그에서 그러잖는가, 모든 건 '위대~한 사랑'이 동기였다고. 그런데 정작 극에서는 그 로맨스가 별로 보이지 않으니 죽음이 아무리 초월적인 존재로 그 기운을 뻗쳐봐야, 첫사랑 못잊어 스토킹하는 구남친으로 밖에 안보이지. 그리고 그 틈을 루케니가 비집고 들어가게 만들었다.
- 프롤로그에서 은케니가 내뱉는 첫 대사. "이런~ 젠장!!" 하면서 있는대로 짜증을 내는데, 아~ 저거 또 시작이야, 아주 지치지도 않아 이러면서 백년동안 똑같은 질문만 해대는 거에 스트레스 받아서 미쳐버렸구나 싶더라. 그래도 친철한 은케니는 니가 정 그렇게 진실을 알고싶어 한다면 내가 다시 재현해서 보여줄게 이러는 듯. 그래서 깨달았다. 왜 사람들이 자꾸 케니자벳이라고 하는지. 그거야 루케니(라기 보다는 은케니)에 의해 재구성된 엘리자벳과 죽음의 이야기니까. 이건 보고나면 여주인공 : 엘리자벳, 남주인공 : 죽음, 연출 : 루케니 이런 인상이 남는다. 이건 역시 은케니 한정인 걸까, 발연기 대신 손연기하는 은케니가 프롤로그에서 망자들을 불러낼 때 보여주는 손가락 움직임, 지휘하듯 타이밍 딱 맞춰서 왼쪽, 오른쪽 이끌어내는 손짓이 은케니야 말로 이 모든 사건의 배후조종자 처럼 보이게 한다. 죽음을 소환시키고, 다른 망자들이 쥐죽은 듯 엎드려 있을 때도 무대 한 켠에서 죽음의 노래를 들으며, '이것은 사랑~'이라는 가사에서 그것 보라지~라는 듯 실실 웃음을 흘리는 은케니를 보면, 이미 죽은 놈이라 더이상 죽음이 두렵지 않은 미친놈 그 자체다.
오늘 캐스팅 보드도 못보고 자리에 앉아서 어린 루돌프가 누군지 몰랐는데, 프롤로그에서 그 선명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아, 준상이구나 하고 단박에 알아챘다. 준상이 목청도 참 보통은 아닌 것 같다.
- 선영 엘리는 극 초반에는 그저 평범한 소녀를 연기하고 있었다. 남들보다 조금 더 감수성이 풍부하지만, 그렇다고 특별할 것 없는 그 나이 또래의 말괄량이 소녀. 그러다 황제를 만나서 결혼까지 하게 되었는데, 이 모든 건 그녀의 의지라기 보다는 어쩌다보니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게 된 것에 가깝다. 그러나 따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던 것도 아니고, 요제프가 마음에 안드는 것도 아니니, 씨씨가 굳이 그 흐름을 거스를 이유도 없었을 뿐.
그런데, 호숫가에서의 첫번째 데이트 장면에서 윤제프와 민제프는 참 다르다. 매너의 문제랄까. 민제프는 나는 황제!라는게 몸에 배여서 같이 데이트하는 여성을 먼저 챙겨줘야한다는 걸 꼭 뒤늦게 떠올린다. 배에 올라타고 먼저 자리에 앉았다가 밖에서 기다리는 선영 엘리를 보고 다시 일어난다던가, 배에서 내리고 멀뚱하게 앞만 보고 있다가, 이번에도 아직 배에서 내리지 않은 선영 엘리를 보고 손을 내민다던가. 윤제프가 그런 배려를 자연스럽게 보여준다면, 민제프는 익숙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둘 다 각자의 캐릭터에 꼭 맞는 맞춤형 디테일이라 그게 또 재밌다.
- 오늘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나는 나만의 것'이었는데, 결혼식, 시어머니 잔소리, 마마보이 남편의 실체를 겪으며 황실 생활이 어떻다는 것을 참으로 아프게 경험하고 부르는 이 넘버에서, 선영 엘리의 감정선이 지난 2일 공연과 완전히 달라져있었다. 이 장면에서 선영 엘리를 뭐라고 표현해야할까. 혹 건담 시드라는 애니를 본 사람이라면 이해할 것 같은데, 난 여기서 선영 엘리의 시드가 깨지는 것을 봤다. (요제프, 소피 당신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보라고!) 외부의 억압과 자극으로 인해 이제껏 내면에서 잠자고 있었던 선영 엘리의 여왕 본능이 깨어난 것이다. 아직 어린 소녀이지만, 분명히 그녀 안에는 여제가 살고 있었고, 완전한 각성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인지했다. 그래서 여왕과 같은 당당함으로 '나는 나만의 것'이라고 선언하고 다짐하는 노래여서, 이제까지 선영 엘리가 이 노래에서 보여준 처연함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노래가 되었다. 그러니까 이전에 이 넘버에서 보여준 선영 엘리가 "난 자유를 원해"에 촛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이날은 "내 인생의 주인은 나야"에 무게가 실리면서 넘버에 실린 감성 자체가 확 달라졌다.
- 결혼의 정거장들 연출은 정말 한국판 엘리 신의 한수라고 생각될 정도로 마음에 들었던 장면인데, 오늘 이 장면을 보면서, 한국판 엘리가 케니자벳 소리 듣는 두번째 이유가 이 장면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난 이 마리오네트 장면을 정말 사랑하는데, 여기서 루케니는 진짜 너무 큰 권능을 부여받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황실의 모든 인물을 손안에 쥐고 흔드는데, 그게 딱히 죽음의 사주처럼 느껴지지도 않아서, 프롤로그, 바트 이슐에서의 깨알같은 등장, 연출에 이어 이 모든 게 루케니의 각본에 의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더란 말이지. 여기서 루케니의 위치도 꼭지점의 정점에 서서 모두를 내려다 보는 위치이며, 왼편 리프트에서 죽음이 등장할 때도 대등한, 혹은 관조하는 입장에서 죽음을 바라보는 것 같더란 말이지. 나라면 여기에서 죽음의 손짓으로 루케니가 실 끊어진 인형처럼 바뀌는 연출을 집어넣을 것 같다. 인형을 조종하던 루케니도 사실은 죽음이 조종하는 인형처럼 보일테니까. 루케니가 실이 끊긴 여파로 차례로 엘리와 요제프가 그 실에서 벗어나 소피를 향해 달려가는 것도 그럴싸하지 않는가. 그러면서 이제까지 자신이 인형인 줄 도 모르고 살아왔던 루케니가 그 사실을 깨닫고 최후에 복수로 죽음의 몫인 엘리의 목숨(자연사라는 의미로)을 자신이 먼저 빼앗아서 오랫동안 기다려온 죽음을 허무하게 만든다는 이야기로~~~ㅋㅋ
- 전날 은태가 심야 라디오에 출연한다는 소리를 듣고, 다음날 공연있는데, 설마 그 한 밤중에 생방으로 출연하겠어? 했는데, 생방송이었다. 그것도 놀라운데, 독감에 걸렸다는 목소리가 쩍쩍 갈라져서 도대체 내일 공연은? 이라고 걱정했는가 하면,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자기도 믿는 구석이 있으니 나왔겠지, 박은태라는 배우가 주는 신뢰감이 어느새 이만큼 쌓여있어서 공연 전에도 크게 걱정은 안됐고, 공연 진행하면서도 평타는 치겠구나 했다. 그런 내 생각을 비웃듯이 이날 Milk는 진짜 어떻게 이 상황에서 저런 목소리가 나오지? 싶을만큼 대단했다. 전에 인터뷰에서 최선은 연습할 때 하는 거고, 무대에서는 최상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하더니만, 언행일치를 보여주는구나. 굿잡 ㅠ_ㅠ乃
- 1막의 피날레, 나만의 것 rep. 에서 선영 엘리는 드디어 여제로서 완전히 각성했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어찌나 위엄이 넘치시는지, 요제프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으면서 곁눈으로 다가오는 거 보고 손으로 딱 막아세우는데, 이대로 여황제로 등극하셔도 될 기세. 그러다보니 류토트가 아무리 '넌 결국 내꺼'라고 아무리 외쳐도 모조리 반사!
진짜 이 분위기 고대로 2막 갔으면 선영 엘리는 남편 들러리로 세우고 나라를 좌지우지 하다가, 성에 안차면 말 잘듣는 아들 내세워서 제2의 조피가 되어서 전횡을 휘두르셨을 것 같다. 나라를 잘 다스리셨을지는 별개로 하고;; 그러나 권력욕이 자기애를 뛰어넘지는 못해서, 요제프는 그점에 감사해야 할 듯.
- 완벽하게 여제로 다시 태어난 선영 엘리가 정치적으로도 성공하여 자신감을 잔뜩 얻었으니 '내가 춤추고 싶을 때'에서 또 얼마나 득의양양 온 몸에서 아주 광채를 뿜어내는데, 죽천들이 그 광휘에 눌려 감히 다가가지도 못하더라. 그러니 이 장면에서 한입거리도 안되는 죽천들은 좀 일찌감치 빠져주고 류토트와 선영 엘리 둘이 수장 싸움하도록 해주면 안될까. 둘이 좀 더 맞붙는 씬이 늘었으면 좋겠더라. 류토트가 죽천들까지 커버하느라고 제대로 전투를 못하잖아. ㅠ.ㅠ
음, 그리고 이 장면에서 치마질(?)이 참 중요한데, 옥엘리보다 선영 엘리가 더 가냘퍼서 그런가 오히려 선영 엘리가 치마에 휘둘리는 느낌이더라. 좀 더 자신감있게 패기있게 치맛자락을 날려주세요~
- 엘리들이 하나같이 강하다보니 죽음들이 제대로 접근전을 펼치지도 못하고 겉으론 무승부, 사실은 싸움에 진 죽음이 루돌프의 침상에 나타나면, 한 여자의 관심에서 벗어난 두 남자의 짠한 유대감이 형성된다. 이래서 죽음 - 루돌프 케미가 죽음 - 엘리 케미보다 훨씬 더 공감대를 얻는 거다.
이날 탕돌프는 목소리만큼은 맑고 또렷한데, 약하기가 정말 세 어린 루돌프 중에 제일 기가 약해보이는 루돌프. 어젠 고양일 쏘아 죽였죠 하는데, 거짓말! 쏘는 시늉만 하고 사실은 고양이는 도망갔지! 했다. 그만큼 애처롭고 안아주고 싶은 루돌프 였는데, 오스트리아 군사학교는 그래도 제 기능은 다 하고 있었는지, 씩씩하고 건장한 청년 루돌프를 만들어냈더라. 아마,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오스트리아를 지탱하고 있었던 건, 그 군사학교 덕분인가보다.
- 여제 엘리자벳의 낌새를 눈치챈 소피 대공비. 역시 여자의 감은 무서운 법. 대신들과 모의해서 황제에게 새 여자를 붙여주자고 하는데, 자신도 여자이면서 그런 계략을 짜는 것에 대해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모습을 보니 진짜 황궁 유일한 남자 느낌이더라.
이어지는 마담 볼프 살롱에서 은케니는 어쩜 그렇게 귀여운지. 진짜 볼프 살롱 버전 은케니 미니미 있으면 하루종일 질리지도 않고 쳐다볼 것 같다. 겉보기 모습은 안 그런데, 속이 소년이야. 누님들에 둘러쌓여서 재밌는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기대감에 눈이 반짝반짝 완전 개구쟁이 모드.
그런데, 여기서 그륀네 백작은 왜 하고많은 언니들을 냅두고, 저 마들레인 양을 선택했을까. 그녀가 성병에 걸려있다는 걸 루케니가 알려주는 걸 빼면, 특별히 그녀를 권한다거나 하는 액션은 없었는데, 굳이 그녀를 선택한 이유가 뭘까 했는데, 오늘에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그륀네 백작은 긴 머리 패치인 황제의 취향을 꿰뚫어본 것이다. 볼프 살롱의 매력적인 언니들 중에 유일하게 마들레인만이 길고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엉덩이까지 늘어뜨리고 있었다. 마치 여제가 되기 전의 씨씨처럼. 그륀네 백작이 생각없이 그녀를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엘리자벳만 일편단심으로 사랑한 요제프가 흔들렸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어우, 개운해.
- 선영 엘리가 이날 계속 강강 모드여서, 요제프에 의해서 성병에 감염됐다는 걸 알고나서도 무너져내리지는 않더라. 비록 화는 나지만, 그 무엇도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는 듯 저 단단한 방어벽. 여기서 선영 엘리가 '남편의 타락'을 '남편의 배신'으로 가사를 살짝 바꾸던데, 이렇게 하니까 정말 울고 싶은데 뺨맞은 격이라 이제 더이상 여기에 묶여있을 이유가 없다고 후련해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강한 노선이다보니 이후에 이어지는 정신병원 씬에서의 '아무것도'에서도 신경쇠약의 모습보다는 덫에서 벗어나려고 아직도 기운 넘치게 버둥대는 짐승을 보는 느낌. 그러나 결국 서서히 기운이 빠져서 죽어갈 것을 알기에 저게 최후의 발악이라는 게 보여서 안스러운 감정이 들더라.
아, 오늘 정신병원 씬 전에 은케니가 김문정 음감한테 가서 오랫만이라며 너스레를 떨더니 거울을 차트 넘기듯 하면서 병세가 호전된 것 같지 않다며 꾸준히 약 드세요 해서, 혼자 머리 쥐어짜가며 애드립 궁리하는 거냐 싶어서 잠시 현실 입갤ㅋㅋㅋ 애드립도 성실하게 준비하는 은태ㅋㅋㅋㅋㅋ
- 어렸을 때 기가 약한 어린애의 흔적을 싹 다 지우고 건장한 청년으로 자라난 동돌프. 진짜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아버지 앞에서 한치도 안 밀리고 버럭대는 거 보면 동돌프는 지원군만 제대로 갖췄으면 역성혁명도 거뜬히 해치웠을 것만 같다. 그런데 그런건 다 귀찮아서 안해;; 엄마 닮았어. 엄마도 여황제 해도 되는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너무 귀찮아서 걍 너나 해, 난 그냥 나 살고싶은 대로 살겠어 이런 식이라.
그런데 이렇게 아버지 앞에서 바락바락 대들던 동돌프가 죽음 앞에서는 어찌나 고분고분한지. 외로웠을 때 곁에 와준 친구를 보는 반가움 + 어려서는 몰랐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뒤섞여서 나타나는 감정 표현이 좋더라. 그런데 둘이 너무 케미가 좋아서, 류토트가 손잡고 끌 때, 승돌프는 덜덜 떨면서 억지로 끌려가는 느낌인데, 동돌프는 둘이 손잡고 데이트라도 가는 거 같더라; 음색 비슷한 둘이 성량도 같이 쩌렁쩌렁하니까 이게 좋기도 하면서 강약조절이 좀 아쉽기도 하다. 좀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지면 좋을 것 같은데, 루돌프 쪽이 좀더 여리면 좋겠지만, 동돌프에게 기대하기엔 무리인 듯 싶고.
- 루돌프 장례식에서 선영 엘리는 한번도 제대로 사랑해주지 못한 아들의 죽음 앞에서 어쩔 줄을 몰라한다. 가슴 깊이 사랑해본 적이 없어서 죽을 듯 아픈 것도 아니고, 그때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만 한 가득이라, 그게 더 미안한 엄마. 한번 제대로 품어주지도 못했고, 사랑을 쏟아주지도 못했는데, 저리 허망하게 가버린 아들이라 제대로 슬퍼해 줄 수도 없어 가슴에 한이 쌓일 지경. 그런 감정이 밖으로 표출되지 못하고 안에서만 휘돌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 그냥 딱 죽고만 싶은 느낌. 그래서 죽음에게 손을 뻗지만, 아무리 엘리를 사랑한대도 자신이 그저 수단으로 사용되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죽음은 매몰차게 그 손을 뿌리친다. 여기서 자존심에 상처입은 류토트의 '가──!'라는 외침이 어찌나 서슬퍼런지.
- 어지간히 엘리를 싫어하는지, 아들의 죽음앞에 상심한 모습마저도 비웃으며 조롱하는 은케니. 이 장면에서도 은케니 연출가 느낌이 드는게, 막이 올라가는 타이밍에 맞춰서 기가막히게 손가락으로 띠리링~ 하는 듯한 동작을 하는데, 이게 참 시각적으로도 타이밍이 잘 맞아서 경쾌한 느낌까지 드는 장면이다.
- 극의 마지막, 엘리도 후딱 자살해버렸으면 편할 것을 계속 미적거리고, 죽음도 자존심에 상처 입은 뒤로는 엘리 앞에서코빼기도 안 보이고, 결국 루케니에게 사주해서 일을 벌리게 만드는데, 도구로 선택된 은케니가 어찌보면 제일 큰 희생자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봤다. 남 연애사에 괜히 끼어들어서 남좋은 일만 해주고, 자긴 감옥에나 갖히고.
죽음을 향해 달려가 안기는 선영 엘리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참 어지간히 강한 여제라. 죽음의 품에 안겨있는 마당에도 "내 주인은 나야"라고 죽음이 생명을 거둬가기 전에 자기가 먼저 죽음에게 키스하고 그렇게 죽어버렸다. 하여간에 끝까지 자기본위로 밖에는 살 수 없었던 여자. 류토트의 그 허망한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서서히 내려오는 밧줄에 목을 거는 은케니. 데리고 놀던 장난감도 망가져 버렸고, 이제 더이상 재밌는 일이 없을 것 같아서, 권태가 죽음보다도 싫다는 듯 그렇게 재미없는 세상따위 미련없다고 마지막에 체셔 고양이처럼 미소지으며 세상을 등지고 떠나가더라. 그러나 시지프스처럼 내일이면 또 되살아나서 백년동안 계속되는 이야기를 다시 늘어놓겠지. 가엾은 루케니. 당신은 그 이야기를 세상에 들려줄 의무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할 거야.
일 시 : 2012. 02. 08 ~ 2012. 05. 13
장 소 :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
관극일 : 2012. 03. 08 (목) 20:00
대 본 : 미하엘 쿤체, 작곡 : 실베스터 르베이
연 출 : 로버트 요한슨, 협력연출 : 박인선, 음악감독 : 김문정
캐스트 : 엘리자벳 - 김선영, 죽음 - 류정한, 루케니 - 박은태, 프란츠 요제프 - 민영기, 소피 대공비 - 이태원, 청년 루돌프 - 전동석, 어린 루돌프 - 탕준상
- 1차 티켓오픈 때는 단 한 번 밖에 없었던 김류은민동 조합이었으나, 그 조합이 인기가 좋은 걸 알았는지, 이후에는 이 조합이 꽤 많이 나와서, 내가 지금 이 조합으로만 몇 번째 관람이더라.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은케니 제외하고 선영 엘리, 류토트는 계속해서 연기 노선이 달라지고 있다는 거. 범생 은케니는 처음 잡은 컨셉에서 크게 바뀌는 거 없이 디테일을 다듬어가는 과정이라 캐릭터 자체가 달라지는 일은 없는데, 선영 엘리 같은 경우는 회차마다 아예 엘리 캐릭터가 연약 노선이냐 강성 노선이냐가 확확 바뀌는데, 그날 그날 자신의 컨디션에 따라 바꾸시는 건지, 아니면 상대 배우와의 조화를 고려해서 바꾸시는 건지, 이날 공연에서 선영 엘리는 내가 본 중에 가장 강성 노선이셨다. 어찌나 여제 포스가 물씬 풍기던지. 하여간 그러다보니 죽음을 사랑했다던가 하는 부분은 상대적으로 약해질 수 밖에 없더라.
그런데, 문제는 엘리가 죽음을 정말로 사랑하기는 한 건지 이런 의문이 드는 순간, 아무리 죽음이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카리스마를 내뿜어도 그 입지가 좁아진다고 할지. 이건 전적으로 한국판의 번안 문제 + 연출 상의 문제인데, 일단 가사에서 그렇게 죽음과 황후와의 로맨스를 강조해놓고, 루케니가 프롤로그에서 그러잖는가, 모든 건 '위대~한 사랑'이 동기였다고. 그런데 정작 극에서는 그 로맨스가 별로 보이지 않으니 죽음이 아무리 초월적인 존재로 그 기운을 뻗쳐봐야, 첫사랑 못잊어 스토킹하는 구남친으로 밖에 안보이지. 그리고 그 틈을 루케니가 비집고 들어가게 만들었다.
- 프롤로그에서 은케니가 내뱉는 첫 대사. "이런~ 젠장!!" 하면서 있는대로 짜증을 내는데, 아~ 저거 또 시작이야, 아주 지치지도 않아 이러면서 백년동안 똑같은 질문만 해대는 거에 스트레스 받아서 미쳐버렸구나 싶더라. 그래도 친철한 은케니는 니가 정 그렇게 진실을 알고싶어 한다면 내가 다시 재현해서 보여줄게 이러는 듯. 그래서 깨달았다. 왜 사람들이 자꾸 케니자벳이라고 하는지. 그거야 루케니(라기 보다는 은케니)에 의해 재구성된 엘리자벳과 죽음의 이야기니까. 이건 보고나면 여주인공 : 엘리자벳, 남주인공 : 죽음, 연출 : 루케니 이런 인상이 남는다. 이건 역시 은케니 한정인 걸까, 발연기 대신 손연기하는 은케니가 프롤로그에서 망자들을 불러낼 때 보여주는 손가락 움직임, 지휘하듯 타이밍 딱 맞춰서 왼쪽, 오른쪽 이끌어내는 손짓이 은케니야 말로 이 모든 사건의 배후조종자 처럼 보이게 한다. 죽음을 소환시키고, 다른 망자들이 쥐죽은 듯 엎드려 있을 때도 무대 한 켠에서 죽음의 노래를 들으며, '이것은 사랑~'이라는 가사에서 그것 보라지~라는 듯 실실 웃음을 흘리는 은케니를 보면, 이미 죽은 놈이라 더이상 죽음이 두렵지 않은 미친놈 그 자체다.
오늘 캐스팅 보드도 못보고 자리에 앉아서 어린 루돌프가 누군지 몰랐는데, 프롤로그에서 그 선명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아, 준상이구나 하고 단박에 알아챘다. 준상이 목청도 참 보통은 아닌 것 같다.
- 선영 엘리는 극 초반에는 그저 평범한 소녀를 연기하고 있었다. 남들보다 조금 더 감수성이 풍부하지만, 그렇다고 특별할 것 없는 그 나이 또래의 말괄량이 소녀. 그러다 황제를 만나서 결혼까지 하게 되었는데, 이 모든 건 그녀의 의지라기 보다는 어쩌다보니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게 된 것에 가깝다. 그러나 따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던 것도 아니고, 요제프가 마음에 안드는 것도 아니니, 씨씨가 굳이 그 흐름을 거스를 이유도 없었을 뿐.
그런데, 호숫가에서의 첫번째 데이트 장면에서 윤제프와 민제프는 참 다르다. 매너의 문제랄까. 민제프는 나는 황제!라는게 몸에 배여서 같이 데이트하는 여성을 먼저 챙겨줘야한다는 걸 꼭 뒤늦게 떠올린다. 배에 올라타고 먼저 자리에 앉았다가 밖에서 기다리는 선영 엘리를 보고 다시 일어난다던가, 배에서 내리고 멀뚱하게 앞만 보고 있다가, 이번에도 아직 배에서 내리지 않은 선영 엘리를 보고 손을 내민다던가. 윤제프가 그런 배려를 자연스럽게 보여준다면, 민제프는 익숙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둘 다 각자의 캐릭터에 꼭 맞는 맞춤형 디테일이라 그게 또 재밌다.
- 오늘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나는 나만의 것'이었는데, 결혼식, 시어머니 잔소리, 마마보이 남편의 실체를 겪으며 황실 생활이 어떻다는 것을 참으로 아프게 경험하고 부르는 이 넘버에서, 선영 엘리의 감정선이 지난 2일 공연과 완전히 달라져있었다. 이 장면에서 선영 엘리를 뭐라고 표현해야할까. 혹 건담 시드라는 애니를 본 사람이라면 이해할 것 같은데, 난 여기서 선영 엘리의 시드가 깨지는 것을 봤다. (요제프, 소피 당신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보라고!) 외부의 억압과 자극으로 인해 이제껏 내면에서 잠자고 있었던 선영 엘리의 여왕 본능이 깨어난 것이다. 아직 어린 소녀이지만, 분명히 그녀 안에는 여제가 살고 있었고, 완전한 각성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인지했다. 그래서 여왕과 같은 당당함으로 '나는 나만의 것'이라고 선언하고 다짐하는 노래여서, 이제까지 선영 엘리가 이 노래에서 보여준 처연함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노래가 되었다. 그러니까 이전에 이 넘버에서 보여준 선영 엘리가 "난 자유를 원해"에 촛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이날은 "내 인생의 주인은 나야"에 무게가 실리면서 넘버에 실린 감성 자체가 확 달라졌다.
- 결혼의 정거장들 연출은 정말 한국판 엘리 신의 한수라고 생각될 정도로 마음에 들었던 장면인데, 오늘 이 장면을 보면서, 한국판 엘리가 케니자벳 소리 듣는 두번째 이유가 이 장면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난 이 마리오네트 장면을 정말 사랑하는데, 여기서 루케니는 진짜 너무 큰 권능을 부여받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황실의 모든 인물을 손안에 쥐고 흔드는데, 그게 딱히 죽음의 사주처럼 느껴지지도 않아서, 프롤로그, 바트 이슐에서의 깨알같은 등장, 연출에 이어 이 모든 게 루케니의 각본에 의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더란 말이지. 여기서 루케니의 위치도 꼭지점의 정점에 서서 모두를 내려다 보는 위치이며, 왼편 리프트에서 죽음이 등장할 때도 대등한, 혹은 관조하는 입장에서 죽음을 바라보는 것 같더란 말이지. 나라면 여기에서 죽음의 손짓으로 루케니가 실 끊어진 인형처럼 바뀌는 연출을 집어넣을 것 같다. 인형을 조종하던 루케니도 사실은 죽음이 조종하는 인형처럼 보일테니까. 루케니가 실이 끊긴 여파로 차례로 엘리와 요제프가 그 실에서 벗어나 소피를 향해 달려가는 것도 그럴싸하지 않는가. 그러면서 이제까지 자신이 인형인 줄 도 모르고 살아왔던 루케니가 그 사실을 깨닫고 최후에 복수로 죽음의 몫인 엘리의 목숨(자연사라는 의미로)을 자신이 먼저 빼앗아서 오랫동안 기다려온 죽음을 허무하게 만든다는 이야기로~~~ㅋㅋ
- 전날 은태가 심야 라디오에 출연한다는 소리를 듣고, 다음날 공연있는데, 설마 그 한 밤중에 생방으로 출연하겠어? 했는데, 생방송이었다. 그것도 놀라운데, 독감에 걸렸다는 목소리가 쩍쩍 갈라져서 도대체 내일 공연은? 이라고 걱정했는가 하면,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자기도 믿는 구석이 있으니 나왔겠지, 박은태라는 배우가 주는 신뢰감이 어느새 이만큼 쌓여있어서 공연 전에도 크게 걱정은 안됐고, 공연 진행하면서도 평타는 치겠구나 했다. 그런 내 생각을 비웃듯이 이날 Milk는 진짜 어떻게 이 상황에서 저런 목소리가 나오지? 싶을만큼 대단했다. 전에 인터뷰에서 최선은 연습할 때 하는 거고, 무대에서는 최상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하더니만, 언행일치를 보여주는구나. 굿잡 ㅠ_ㅠ乃
- 1막의 피날레, 나만의 것 rep. 에서 선영 엘리는 드디어 여제로서 완전히 각성했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어찌나 위엄이 넘치시는지, 요제프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으면서 곁눈으로 다가오는 거 보고 손으로 딱 막아세우는데, 이대로 여황제로 등극하셔도 될 기세. 그러다보니 류토트가 아무리 '넌 결국 내꺼'라고 아무리 외쳐도 모조리 반사!
진짜 이 분위기 고대로 2막 갔으면 선영 엘리는 남편 들러리로 세우고 나라를 좌지우지 하다가, 성에 안차면 말 잘듣는 아들 내세워서 제2의 조피가 되어서 전횡을 휘두르셨을 것 같다. 나라를 잘 다스리셨을지는 별개로 하고;; 그러나 권력욕이 자기애를 뛰어넘지는 못해서, 요제프는 그점에 감사해야 할 듯.
- 완벽하게 여제로 다시 태어난 선영 엘리가 정치적으로도 성공하여 자신감을 잔뜩 얻었으니 '내가 춤추고 싶을 때'에서 또 얼마나 득의양양 온 몸에서 아주 광채를 뿜어내는데, 죽천들이 그 광휘에 눌려 감히 다가가지도 못하더라. 그러니 이 장면에서 한입거리도 안되는 죽천들은 좀 일찌감치 빠져주고 류토트와 선영 엘리 둘이 수장 싸움하도록 해주면 안될까. 둘이 좀 더 맞붙는 씬이 늘었으면 좋겠더라. 류토트가 죽천들까지 커버하느라고 제대로 전투를 못하잖아. ㅠ.ㅠ
음, 그리고 이 장면에서 치마질(?)이 참 중요한데, 옥엘리보다 선영 엘리가 더 가냘퍼서 그런가 오히려 선영 엘리가 치마에 휘둘리는 느낌이더라. 좀 더 자신감있게 패기있게 치맛자락을 날려주세요~
- 엘리들이 하나같이 강하다보니 죽음들이 제대로 접근전을 펼치지도 못하고 겉으론 무승부, 사실은 싸움에 진 죽음이 루돌프의 침상에 나타나면, 한 여자의 관심에서 벗어난 두 남자의 짠한 유대감이 형성된다. 이래서 죽음 - 루돌프 케미가 죽음 - 엘리 케미보다 훨씬 더 공감대를 얻는 거다.
이날 탕돌프는 목소리만큼은 맑고 또렷한데, 약하기가 정말 세 어린 루돌프 중에 제일 기가 약해보이는 루돌프. 어젠 고양일 쏘아 죽였죠 하는데, 거짓말! 쏘는 시늉만 하고 사실은 고양이는 도망갔지! 했다. 그만큼 애처롭고 안아주고 싶은 루돌프 였는데, 오스트리아 군사학교는 그래도 제 기능은 다 하고 있었는지, 씩씩하고 건장한 청년 루돌프를 만들어냈더라. 아마,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오스트리아를 지탱하고 있었던 건, 그 군사학교 덕분인가보다.
- 여제 엘리자벳의 낌새를 눈치챈 소피 대공비. 역시 여자의 감은 무서운 법. 대신들과 모의해서 황제에게 새 여자를 붙여주자고 하는데, 자신도 여자이면서 그런 계략을 짜는 것에 대해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모습을 보니 진짜 황궁 유일한 남자 느낌이더라.
이어지는 마담 볼프 살롱에서 은케니는 어쩜 그렇게 귀여운지. 진짜 볼프 살롱 버전 은케니 미니미 있으면 하루종일 질리지도 않고 쳐다볼 것 같다. 겉보기 모습은 안 그런데, 속이 소년이야. 누님들에 둘러쌓여서 재밌는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기대감에 눈이 반짝반짝 완전 개구쟁이 모드.
그런데, 여기서 그륀네 백작은 왜 하고많은 언니들을 냅두고, 저 마들레인 양을 선택했을까. 그녀가 성병에 걸려있다는 걸 루케니가 알려주는 걸 빼면, 특별히 그녀를 권한다거나 하는 액션은 없었는데, 굳이 그녀를 선택한 이유가 뭘까 했는데, 오늘에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그륀네 백작은 긴 머리 패치인 황제의 취향을 꿰뚫어본 것이다. 볼프 살롱의 매력적인 언니들 중에 유일하게 마들레인만이 길고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엉덩이까지 늘어뜨리고 있었다. 마치 여제가 되기 전의 씨씨처럼. 그륀네 백작이 생각없이 그녀를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엘리자벳만 일편단심으로 사랑한 요제프가 흔들렸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어우, 개운해.
- 선영 엘리가 이날 계속 강강 모드여서, 요제프에 의해서 성병에 감염됐다는 걸 알고나서도 무너져내리지는 않더라. 비록 화는 나지만, 그 무엇도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는 듯 저 단단한 방어벽. 여기서 선영 엘리가 '남편의 타락'을 '남편의 배신'으로 가사를 살짝 바꾸던데, 이렇게 하니까 정말 울고 싶은데 뺨맞은 격이라 이제 더이상 여기에 묶여있을 이유가 없다고 후련해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강한 노선이다보니 이후에 이어지는 정신병원 씬에서의 '아무것도'에서도 신경쇠약의 모습보다는 덫에서 벗어나려고 아직도 기운 넘치게 버둥대는 짐승을 보는 느낌. 그러나 결국 서서히 기운이 빠져서 죽어갈 것을 알기에 저게 최후의 발악이라는 게 보여서 안스러운 감정이 들더라.
아, 오늘 정신병원 씬 전에 은케니가 김문정 음감한테 가서 오랫만이라며 너스레를 떨더니 거울을 차트 넘기듯 하면서 병세가 호전된 것 같지 않다며 꾸준히 약 드세요 해서, 혼자 머리 쥐어짜가며 애드립 궁리하는 거냐 싶어서 잠시 현실 입갤ㅋㅋㅋ 애드립도 성실하게 준비하는 은태ㅋㅋㅋㅋㅋ
- 어렸을 때 기가 약한 어린애의 흔적을 싹 다 지우고 건장한 청년으로 자라난 동돌프. 진짜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아버지 앞에서 한치도 안 밀리고 버럭대는 거 보면 동돌프는 지원군만 제대로 갖췄으면 역성혁명도 거뜬히 해치웠을 것만 같다. 그런데 그런건 다 귀찮아서 안해;; 엄마 닮았어. 엄마도 여황제 해도 되는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너무 귀찮아서 걍 너나 해, 난 그냥 나 살고싶은 대로 살겠어 이런 식이라.
그런데 이렇게 아버지 앞에서 바락바락 대들던 동돌프가 죽음 앞에서는 어찌나 고분고분한지. 외로웠을 때 곁에 와준 친구를 보는 반가움 + 어려서는 몰랐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뒤섞여서 나타나는 감정 표현이 좋더라. 그런데 둘이 너무 케미가 좋아서, 류토트가 손잡고 끌 때, 승돌프는 덜덜 떨면서 억지로 끌려가는 느낌인데, 동돌프는 둘이 손잡고 데이트라도 가는 거 같더라; 음색 비슷한 둘이 성량도 같이 쩌렁쩌렁하니까 이게 좋기도 하면서 강약조절이 좀 아쉽기도 하다. 좀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지면 좋을 것 같은데, 루돌프 쪽이 좀더 여리면 좋겠지만, 동돌프에게 기대하기엔 무리인 듯 싶고.
- 루돌프 장례식에서 선영 엘리는 한번도 제대로 사랑해주지 못한 아들의 죽음 앞에서 어쩔 줄을 몰라한다. 가슴 깊이 사랑해본 적이 없어서 죽을 듯 아픈 것도 아니고, 그때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만 한 가득이라, 그게 더 미안한 엄마. 한번 제대로 품어주지도 못했고, 사랑을 쏟아주지도 못했는데, 저리 허망하게 가버린 아들이라 제대로 슬퍼해 줄 수도 없어 가슴에 한이 쌓일 지경. 그런 감정이 밖으로 표출되지 못하고 안에서만 휘돌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 그냥 딱 죽고만 싶은 느낌. 그래서 죽음에게 손을 뻗지만, 아무리 엘리를 사랑한대도 자신이 그저 수단으로 사용되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죽음은 매몰차게 그 손을 뿌리친다. 여기서 자존심에 상처입은 류토트의 '가──!'라는 외침이 어찌나 서슬퍼런지.
- 어지간히 엘리를 싫어하는지, 아들의 죽음앞에 상심한 모습마저도 비웃으며 조롱하는 은케니. 이 장면에서도 은케니 연출가 느낌이 드는게, 막이 올라가는 타이밍에 맞춰서 기가막히게 손가락으로 띠리링~ 하는 듯한 동작을 하는데, 이게 참 시각적으로도 타이밍이 잘 맞아서 경쾌한 느낌까지 드는 장면이다.
- 극의 마지막, 엘리도 후딱 자살해버렸으면 편할 것을 계속 미적거리고, 죽음도 자존심에 상처 입은 뒤로는 엘리 앞에서코빼기도 안 보이고, 결국 루케니에게 사주해서 일을 벌리게 만드는데, 도구로 선택된 은케니가 어찌보면 제일 큰 희생자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봤다. 남 연애사에 괜히 끼어들어서 남좋은 일만 해주고, 자긴 감옥에나 갖히고.
죽음을 향해 달려가 안기는 선영 엘리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참 어지간히 강한 여제라. 죽음의 품에 안겨있는 마당에도 "내 주인은 나야"라고 죽음이 생명을 거둬가기 전에 자기가 먼저 죽음에게 키스하고 그렇게 죽어버렸다. 하여간에 끝까지 자기본위로 밖에는 살 수 없었던 여자. 류토트의 그 허망한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서서히 내려오는 밧줄에 목을 거는 은케니. 데리고 놀던 장난감도 망가져 버렸고, 이제 더이상 재밌는 일이 없을 것 같아서, 권태가 죽음보다도 싫다는 듯 그렇게 재미없는 세상따위 미련없다고 마지막에 체셔 고양이처럼 미소지으며 세상을 등지고 떠나가더라. 그러나 시지프스처럼 내일이면 또 되살아나서 백년동안 계속되는 이야기를 다시 늘어놓겠지. 가엾은 루케니. 당신은 그 이야기를 세상에 들려줄 의무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