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MLET
일   시 : 2011. 10 .20 ~ 2011. 12. 17
장   소 : 유니버설 아트센터
관극일 : 2011. 12. 16 (금) 20:00
음악 / 대본 : 야넥 레데츠키 , 원작자 : W.셰익스피어
연   출 : 로버트 요한슨, 음악감독 : 원미솔
캐스트 : 햄릿 - 박은태, 오필리어 - 윤공주, 레어티스 - 전동석, 거트루트 - 신영숙, 클로디어스 - 윤영석, 폴로니우스 - 김성기

- 막공 하루 앞두고 이러긴가.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진짜 이러면 어떻게 정을 떼라고, 막공 하루 앞두고 이런 레전드 공연을 보여주나.
어제 공연에서 은릿 목상태 별로라고 했더니만, 오늘은 멀쩡해진걸 넘어서 더 좋아져서 나타났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아니, 오늘 은릿은 뭐랄까 그분이 오신 듯한 분위기였다. 이제까지 내가 본 박은태라는 배우는 정말 대본에 충실한 배우, 연구하고 파고들어서 치밀하게 계산된 연기를 하는 배우라는 인상이었고, 난 감정에 휘둘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영리한 연기를 또 좋아하는 편이었는데, 오늘은 거기에서 뭔가 신들린 것 같다는 그런 느낌이 들더라. 내 부족한 어휘력으로 그 느낌을 표현하려니 적확한 단어가 안 떠오르는데, 가장 근접한 단어가 저거 같다. 신들렸다.
햄릿의 감성, 생각, 마음, 그 영혼까지 노래에 실어서 표현해주고, 지금 연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감정선, 그에 따라 흐름을 타고 이어지는 표정, 동작, 시선 처리 까지. 정말 뮤지컬 햄릿에서 박은태라는 배우가 보여주는 성장세가 참으로 눈부시다.
은릿 얘기만 잔뜩 늘어놨지만, 오늘 또 윤영석 클로디어스와 신영숙 거트루트 역시 레전드를 갱신해주셨고, 은릿과는 오늘이 막공이신 김성기 씨의 애드립이 제대로 흥했고, 동레어는 오빠 모드와 연인 모드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면서 오빠 모드이려고 많이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고, 윤필리어는 늘 그렇듯 매드씬만! 훌륭한 오필리어였지만, 무대 전체적으로 완성도가 높은 그런 공연이었다.

- 오늘 은릿이 보여준 햄릿은 참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게 너무나 치열했던 햄릿. 치열하게 슬퍼하고, 분노하고, 사랑하고, 갈등하고, 증오하고, 마지막까지 단 한시도 느슨해지지 않는 팽팽한 활 시위와도 같았다. 잠시라도 방심하는 순간 '나'를 지탱하던 것들이 와르르 무너져내릴 것 같아서 예민하기가 칼날같은데, 그 칼날이 밖이 아니라 안으로 향하고 있어, 움직일 때마다 그 영혼이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햄릿이었다.
그래서 오죽하면 붕 뜬다고 생각했던 무덤지기 씬이 오히려 절실하더라. 그 순간이 유일하게 햄릿이 만사를 잊고 웃을 수 있는 시간이니까.
그리고 오늘 은릿과는 막공이라고 김성기 씨가 이것저것 애드립을 참 깨알같이 넣어주시던데, 내가 집중을 못했다. 싫었다는 게 아니라, 내용이 뭐가 됐든 햄릿이 웃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멍하니 지켜보고 있어서;

- 선왕의 장례식, 아버지를 정말로 많이 사랑했기에, 그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슬픔마저도 그렇게 격렬할 수가 없다. '왜 가셨나요~한 마디 말없이, 이제 난 누구와 얘길 해야하죠. 할 말이 많은데'라는 그 절절한 노랫 소리가 마치 통곡하는 것 처럼 들린다. 뮤지컬은 노래가 대사라는 게 이렇게 가슴깊이 와 닿을 수가 없다.

- 결혼식 장면. 파리한 안색으로 너무나 지친 모습으로 등장한 은릿. 어머니와 결혼했으니 삼촌을 아버지라 불러야할까, 삼촌과 결혼한 어머니를 작은 어머니라고 불러야할까. 정신적으로는 이미 고아나 마찬가지인 햄릿. 자신의 행복에 취해 아들이 어떤 마음일지 제대로 헤아려 보지도 않고서, 네 마음 다 안다고 하는 어머니에게 은릿은 뭐라고 하려고 했던 걸까.
이 결혼식 장면에서 윤클로와 범클로가 참 다른게, '너를 아들처럼 생각한단다'라는 가사가 범클로일 땐, 그게 형식적인 체면치레 거짓말인게 너무 티나는데, 윤클로는 평생 기다려온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해서 행복한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사랑하는 여자의 아들이 곧 내 아들이라고 진심으로 햄릿을 아들로 생각하는 것 같단말이지. 그런 면에서 윤클로는 범클로보다 더 치기어린 느낌, 다혈질에 기분파라 정말로 거트루트가 잘만 구슬리면, 햄릿이 왕이 될 때까지 후견인 노릇 해줬을 것 같다.

- 오늘 저렇게 치열한 은릿이다보니 Why me에서 또 얼마나 격렬하게 분노를 터트려주시던지. 이딴 게 사랑이면 개나 주나 그래! 라는 듯 연회장을 빠져나가서도 분이 가라앉지 않아서 퍼부어대는데, 여기서 호레이쇼의 대응이 요근래 참 아쉽다. 그래도 하나뿐인 절친인데, 그 친구가 가슴 속에 불을 안고 저렇게 화를 삭히지 못해 화병나게 생겼는데, 그걸 다독여준다거나, 진정시키는 게 아니라 실실 웃으면서 희롱하는 건지. 똑같은 가사라도 초반엔 좀 더 진중한 느낌이었는데, 갈수록 촐싹대는 캐릭터로 변질된 것 같아서 많이 아쉽다.

- 레어티스가 프랑스로 떠나는 장면에서 성기 폴로니우스와 두 남매간의 관계는 막무가내 꼰대 아버지와 늦게 얻어 둥기둥기 곱게 키워 버릇없는 아들, 딸을 보는 느낌이다. 그래서 두 자식을 사랑하지만, 그걸 전달하는 방식이 너무 일방적이라, 어린 두 남매는 아빠 또 저런다...는 식으로 무시하는 그런 느낌이 들어서, 우리의 전형적인 아버지의 모습처럼 보여 안타깝기도 하다. 이어지는 Sister에서 동레어가 오빠 모드와 연인 모드 아슬아슬 줄타기라고 했는데, 그게 햄릿과 헤어지라고 하는 충고에 어떻게 해도 "질투"의 감정이 섞여들어가 있어서. 태을 레어일 땐, 아무리 애절한 표정으로 헤어지라고해도 거기엔 "염려"가 담겨있는 것과 참 다르다.

- Let's rise above this world 넘버에서 내가 가장 많이 아쉬워 하는 건 은릿이 참 너무 간절하게 마음을 꾹꾹 눌러담아서 내뱉는 '사랑해─'에 대한 윤필리어의 반응이 그냥 울상 하나라는 거. 내가 매번 그 얼굴 보면서 안타까워 미치겠다. 저 사랑한다는 단어에 실린 감정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그런가. 그래도 그렇게 도살장 끌려가는 송아지 같은 오필리어라니. 나는 여기에서 아련하게 미소지어주는 은릿이 너무 가엽다. 도대체 저 아가씨 어디를 보고, 단 하나의 안식처라고 여기는 건지.

- '피는 피로써' 넘버는 그냥 오늘 만렙 찍은 것 같다. ㅠ.ㅠ 진짜 나는 뭐라고 더 어떻게 표현할 말을 찾지를 못하겠다. 매회 더 격렬해지고, 더 처절해지는데, 깊은 절망과 슬픔, 증오와 분노에 그 영혼이 갈기갈기 찢겨지는 걸 목격하는 기분이라 보는 이쪽도 고통스러울 지경이다. 

- He's crazy 넘버. 전에도 쓴 적 있지만, 원작과 달리 뮤지컬 햄릿에서 햄릿은 자발적으로 미친 척을 한 적이 없다. 햄릿이 선왕 살해의 꿈을 꾸고 광기를 내보인 걸, 폴로니우스가 사랑의 열병으로 미쳐버린 거라고 모함했을 뿐. He's crazy 넘버에서 오른쪽 성루에서 폴로니우스를 바라보던 은릿은 폴로니우스가 '미쳤어~ 돌았어~'라고 하면 객석을 향해 피식 냉소를 띄우다 우르르 몰려나와 햄릿의 험담을 해대는 사람들을 보고 몸을 돌려 성루를 내려간다. 아마도 여기까지가 대본의 내용이겠지. 그리고 그걸 배우가 자신의 개성을 입히고, 해석을 더해서 연기를 하는 건데, 오늘 은릿은 폴로니우스의 저 모함에서 오히려 힌트를 얻은 것 같다고 할까. 아, 내가 복수를 하려면 미친 척을 해야겠구나..하고. 
앙상블 뒤에 어느새 섞여들어와서 '맞아, 나는 미쳤어, 돌았지.'라고 내뱉는 대사가 그 말과 반대로 너무 멀쩡한데, 거트루트에게서 편지를 뺏어들고 폴로니우스를 놀리고 도도도 달려나갈때는 너무너무 즐겁다는 듯이 미쳤어~ 돌았어~ 오도방정을 떨어대서 정말 미친 건가..? 혼란을 주고, 뚝 멈추고 '아름다운 밤입니다.' 할때 그 정색한 표정에 또 아닌가..? 하는데, 거기서 앙바 동작으로 폴짝 뛰어오르고는 광소하며 뛰쳐나가서 끝내 사람들이 정말로 미친 건지, 아닌 건지 헷갈리게 한다.

- 오늘 뭘 하든 치열한 은릿이라고 했는데, 치열하게 사랑하는 햄릿을 보여주는 장면 중 하나가 '수녀원에 가'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오필리어 장례식 장면이다. '수녀원에 가' 넘버에서 오필리어가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매 순간마다 너무 가슴아프게, 진짜 이대로 무너져내릴듯이 아파하는데, 오늘은 오필리어를 바라보고 '수녀원에 가'라고 할 때조차 저게 인상을 써서 울 것 같은 표정을 감추려는 것처럼 보여서 너무 안타까웠다. 그러더니 뒤돌아 혼자 괴로워할 때도 치열하게 괴로워하는 은릿. '거친 파도 그 위에서 표류하는 배처럼 ~' 정말 그 가사 내용을 고스란히 표현해내는 목소리와 연기를 통해 눈앞에 재현해주는지 감탄스럽다.

- 그리고 이어지는 '오늘 밤을 위해'는 정말 이제까지 본 중에 최고로 멋졌다. 정말 춤사위부터 그 표정하며, 무대위에 서있는 은릿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그 오라가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시선을 빨아들이는 것 같더라. 특히 오늘 독무는 진짜 최고최고. '산~다는 게! 연극 같아!' 한 음절 한 음절 힘주어 내뱉는 음성에 서리서리 배여있는 분노와 증오의 감정들에 압도되는 느낌.

- 이어지는 2막에서 '사느냐 죽느냐' 이 독백은 정말 햄릿의 가장 중요한 독백인데, 이걸 또 은릿이 너무 잘 살려주는거지. 문자를 소리로, 음표를 선율로 전달하는 건 의미가 없다. (아, 정확하게 제다로 전달하는 건 중요하지만) 중요한 건 그안에 담긴 마음, 생각, 감성. 그런데, 은태가 정말 가사 내용을 그에 맞는 음성과 표정으로 전달하는 능력이 정말 탁월해서, 그 고뇌가 절절하게 전달되어 온다. 근데 여기서도 좀 한소리 하자면, 호레이쇼의 표정이 시종일관 온화한 미소를 띄우고 있어서. ㅠ.ㅠ 이게 그런 평온한 마음으로 들을 내용은 아닌 것 같은데, 그것도 제일 친하다는 친구가.

- Sextet에서 윤클로는 정말 시시각각 다른 표정 연기를 선보이는 게 범클로와 큰 차이점이다. 범클로는 연극 내용에 충격을 받지만 그 감정을 애써 숨기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런데, 윤클로는 심정적으로 동요하고 있다는게 너무나 확연하게 보이는 거지. 이리저리 방황하는 시선, 햄릿이 어떻게 알았을까 경악하고, 마음 깊숙이 감춰뒀던 죄책감이 표면으로 떠오르는 게 보여서 분명히 악역이지만, 동정심이 생긴다. 그리고 파장으로 끝난 연극 끝에 클로디어스를 향해 가면처럼 웃는 은릿의 표정은 진짜 소름이 끼치더라.

- 영숙 거트루트야 I'm untrue에서 매번 레전드를 갱신하시며 기립을 부르는 연기와 노래를 보여주시는 와중에 폴로니우스 살해 장면에서 은릿과 불꽃튀는 갈등 장면과 폴로니우스를 찌른 뒤 두려움에 벌벌 떠는 은릿을 안아주며 보여준 모성애가 또 절절. 그러나 오늘 제일 좋았던 건 오필리어 장례식 장면에서의 연기였다. 자신이 여자의 행복을 찾아 믿음도 진실도 외면하는 동안, 사랑하는 아들이 어떤 지옥을 겪고 있는지 그제야 생생하게 눈앞에서 보게된 어머니로서 자책의 마음으로 신께 비는 그 장면이 제일 인상깊었다.

- 커튼 뒤에 숨은 사람이 클로디어스라고 확신하고 단검을 찌를 때도 햄릿은 '삼촌'이라고 했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지만, 이때까지는 아직 친족의 테리토리 안에 포함을 시키고 있었다는 거. 비열한 '삼촌'이지만, 어머니와 결혼한 사실은 바뀔 수 없는 현실이니. 그런데 어머니 거트루트가 독살 당하자 햄릿은 '클라우디우스'라고 그 이름을 부르는데, 이 부분이 용릿과 은릿의 가장 차이나는 대사가 아닐까 싶다. 용릿은 복수를 결심했어도 어머니를 사랑하듯 삼촌에 대한 정이 남아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끝내 삼촌이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라는 감정이라면, 은릿은 어머니가 독살된 그 순간 모든 인간적인 감정을 끊어버리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클라우디우스를 살해한다.

- 극의 마지막, 스산하게 공기중으로 흩어지는 여리고 아픈 은릿의 흐느낌에 새삼 울컥울컥. 막공으로 갈수록 이 왕자님은 죽음까지도 편하지를 못하고, 너무 아프게 가버린다. ㅠ.ㅠ 전에는 그래도 죽음은 영원한 잠이라고, 그렇게 깊은 꿈을 꾸듯 가는 거 같더니, 요즘은 죽을 때마저도 편해지지를 못하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프다.

- 오늘은 어느 기업에서 단관을 왔는지 객석에 머글 비율이 높았는데, 그걸 확실하게 느낀게, 1막의 '오늘 밤을 위해'에서 유랑극단 단원들 퇴장하고 무대에 은릿 혼자 남았을 때 박수가 나오더라. 그리고  오필리어 절벽에서 떨어지는 장면에서 헉소리가 아주 전방위에서 들려와서 신선했다.
그리고 인터미션 시간에 객석에 앉아계신 수녀님 발견; 아니 은릿이 서슬 퍼렇게 '수녀원에 가!'라고 하는 걸 어떻게 들으셨을지 조금 궁금;; 죄송합니다. 이런 속물이라서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