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MLET
일   시 : 2011. 10 .20 ~ 2011. 12. 17
장   소 : 유니버설 아트센터
관극일 : 2011. 12. 15 (목) 20:00
음악 / 대본 : 야넥 레데츠키 , 원작자 : W.셰익스피어
연   출 : 로버트 요한슨, 음악감독 : 원미솔
캐스트 : 햄릿 - 박은태, 오필리어 - 윤공주, 레어티스 - 강태을, 거트루트 - 신영숙, 클로디어스 - 서범석, 폴로니우스 - 김장섭

- 농담처럼 아차산 지박령이네 뭐네 했는데, 참 다니다 정들은 유니버설 아트센터. 오늘 어딘가에서 단관을 잡았다는 공지를 보기는 했는데, 로비에 들어서자 깜짝 놀랄정도로 교복입은 학생들로 바글바글. 잠깐 긴장했지만, 어차피 내 자리와는 멀리 떨어져있을테니까 하면서 여유를 되찾았다.
그렇게 객석이 거의 만석으로 꽉 차서 그랬는가 오늘 배우들이 살짝 들뜬 느낌이라고 할지. 초반에 붕 뜬 느낌이 들었지만, 이미 막공 주간에 들어선 마당이라 이런 정도로 흔들릴 공연은 아니었다.
은릿은 드디어(;) 성대의 피로도가 느껴지는 목소리였지만, 또 질러줘야 하는 부분에서는 어떻게 아직 저런 목소리가 나오지 싶게 뻐렁치게 질러줘서 두 달 가까이 더블로 뛰는 공연에서 이 정도까지 성대 관리를 해온 게 대견하다. 더블이기는 해도 일주일 8회 공연 중 5회 공연을 해야하는 적도 많았고, 이번 주 막공 주간도 화,목금토 일정이라 내일 모레 계속 공연인데, 끝까지 긴장 늦추지 말고 유종의 미를 거두기를.

- 햄릿의 연애 편지를 읽는 윤필리어와 헬레나를 보며, 그냥 포기가 되더라. 윤필리어는 햄릿의 사랑을 믿지도 확신하지도 못하는 상태인데, 친구 헬레나의 부추김으로 이게 사랑인가..? 하고 넘어가는 형국이더라. 윤필리어는 뮤지컬 햄릿의 오필리어가 아니라, 원작의 오필리어 쪽으로 노선을 잡은 건지. 뒤에 매드씬도 '사랑하는 햄릿'이 아버지를 죽여서가 아니라, 그냥 '아버지가 살해당했다'는 사실에 슬퍼서 미쳤다고 보면 그 눈물이 이해 안 갈 것도 없지. 거기서 사랑해 라던가, 햄릿 타령만 안 한다면.

- 클로디어스와 거트루트의 사랑의 세레나데인 '내 평생 당신을 기다렸어' 넘버 들어갈 때. 평소에는 입가에 미소만 짓고 클로디어스를 바라보는 영숙 거트루트가 뭐 때문에 웃음이 터졌는지는 모르겠는데, 갑자기 빵 터지셔서 클로디어스를 보니 그리 좋으신겐가 싶어 같이 웃었다. 뭐 바로 감정잡고 노래를 부르기는 하셨는데, 그 웃음기가 영향을 미쳐서 평소보다 더 클로디어스를 좋아하고, 행복해하는 거트루트를 볼 수 있었다.

- 태을 레어의 목상태는 끝까지 말썽인 듯 싶지만, 최대한 갈라지는 소리를 안 내려고 본인이 노력하는게 보여서. 태을 레어는 늘 오빠 모드이기는 한데, 이게 목소리 상태에 따라 강하게 질러주지를 못하니까, 소리를 부드럽게 내느라 Sister 넘버에서 아주 조근조근 동생 타이르는 오빠임. 책망하는 것도 아니고 내 말 좀 들으라는 것도 아니고 너무너무 다정하고 상냥한 비현실적인 오라버니라니. 그런데도 신기하게 근친삘은 안난다는 게 태을 레어의 좋은 점.

- '피는 피로써' 넘버에서 보여주는 은릿의 감정의 폭발때문에 내가 미쳐버릴 것 같다. '이 분노는 내게 피를 달라하네.'라는 가사를 눈앞에서 그대로 시각화/청각화해서 보여주는 목소리와 연기에, 진짜 저 분노를 식히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피를 봐야 가라앉겠구나 싶다. 자기 목소리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를 뒤집어 쓴 것 같은 은릿. 난 그래서 항상 이 넘버에서 진한 피 비린내가 맡아진다.

- 오늘 He's crazy 넘버에서 은릿이 평소 안 하던 짓을 했다. ㅋㅋㅋ 거트루트의 손에서 편지를 빼앗고 폴로니우스에게 다가가더니 보통은 여기서 '왁!'하고 놀래켜주고 도도도 달려가는데, 오늘은 어째 더 가까이 다가가더니 킁킁킁 냄새를 맡는 거처럼 굴다가 '왁!'하고는 달아나는데, 이건 커튼콜에서 당황시킨 장섭님에 대한 복수냐며ㅋㅋㅋ 그런데, 이 장면에서 더 웃긴건 장섭 폴로니우스가 끊임없이 꿍얼꿍얼 은릿에게 변명하고, 뭔가 그게 아니라요~ 라며 해명하려고 애쓴다는 거. 그래서 은릿이 '아름다운 밤입니다.' 하고는 달려나가면 막 쫒아가면서 애처롭게 '왕자님~, 왕자님~~'을 부르짖으시고.
하여간 이 장면에서 난데없이 햄릿 - 폴로니우스 간에 케미가 폭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러면서 갑자기 지나간 결혼식 장면도 떠오르는 거다. 결혼식에서 햄릿이 오필리어 발견하고 다가가려는데, 뒤에서 폴로니우스가 오필리어를 제지시키는데, 햄릿이 뒤돌아보면 안그랬다는 듯이 딴청을 피우고, 대신에 레어티스가 햄릿을 경계하며 멤버 체인지. 하여간 이 집안 남자들은 극 안에서는 햄릿과 대치되는 상황을 연출하면서, 커튼콜에서는 햄릿을 너무 좋아해ㅋㅋㅋ

- '증거가 필요해'에서 '오늘 밤을 위해'까지 이어지는 복수에 완전히 잠식 당한 은릿은 참 볼때마다 어쩌면 저렇게 눈빛 하나만으로 사람이 저렇게까지 달라 보이나 싶다. 한 배우가 계속 연기하는 건데, 그 배우가 갑자기 피골이 상접하게 변하는 게 아닌데, 이 장면에서 보여지는 은릿은 복수에 정신도 육체도 파먹혀서 뼈만 앙상하게 남아 눈만 묘하게 생생하게 빛나는 그런 기아에 허덕이는 아이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 그렇게 너무 많은 것을 놓아버린 햄릿의 고뇌가 드러나는 '사느냐 죽느냐' 넘버. 2막 시작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곧바로 1막의 감정선을 연장해서 일관되게 이어가야하는 이 2막의 첫 넘버는 배우에게 참 큰 숙제였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나'로 있을 수 있게 하는 많은 것을 놓아야했고, 잃어버려야 했던 햄릿. 복수를 위해 연극을 꾸미고, 자기도 연기를 하면서, 연기하는 나와 진짜 나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저 자존감이 다락같은 왕자님이 자아를 유지하지 못하고 무너져내리는 걸 지켜보는 건 참 뭐라 할 수 없이 서글프고 씁쓸하다.

- 오늘 영숙 거트루트의 I'm untrue는 지금까지 본 중에 가장 좋았다. 사랑받고 싶은 여자로서의 회환에 가득한 절창이었고, 거기에 대응되는 범클로의 Chapel에서의 감정선이 또 얼마나 절절한 통한의 절창이었는지. 하여간 이 두분이 이렇게 딱 균형을 맞춰서 레전드를 찍어주시니, 그저 감읍할 따름.

- 폴로니우스 살해 장면에서 은릿이 보여주는 연기가 원작의 햄릿과 가장 많이 다른 부분이라고 생각이된다. 원작의 햄릿은 어이가 없지만, 폴로니우스를 죽인 것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정당한 것이라도 되는냥 구는데, 뮤지컬 햄릿에서 은릿은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에 대한 경악과 두려움으로 제정신이 아니다. 그래서 정신적으로 너무 많이 무너져내리는데, 복수에 대한 일념으로 마치 터질 것처럼 부풀었던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는 전환점이 되어줬다고 할까. 폴로니우스의 희생은 너무나 안타까운 사건이지만 ㅠ.ㅠ

- 태을 레어는 오늘도 폴로니우스 살해 소식을 듣고 슬픔에 휘청거리며 배에서 내려서 참 좋았는데, Killer's name은 아무래도 질러야하는 넘버라서 참 아슬아슬 삑과 아닌 부분이 교차하더라. 어차피 목소리는 막공까지 어떻게 해결이 안될 것 같으니 이정도 선에서 타협을 해야겠지.

- 첫공 1막을 보고 1n번 잡아놓은 표를 살짝 걱정했던 게 무색하게, 회가 거듭될 수록 빈 공간을 배우 역량으로 메꾸고 채워주는 바람에 더더욱 불타올라서 회전문을 돌고돌고. 참 무서운 배우빨. 오늘 커튼콜에서 장섭 님이 너 또 왔구나라는 시선으로 한참 쳐다보셔서 살짝 민망했;
그리고 퇴장하는 오필리어 끌어당겨 포옹하는 은릿 뒤로 태을 레어 등장. 지레 찔린 은릿이 알아서 포옹을 풀고 벽에 붙었는데, 태을 레어가 또 계속하라는 제스춰. 어정쩡한 상황에서 태을 레어가 악수를 청하자, 은릿이 주춤주춤 악수하고 둘이 화해의 포옹. 오필리어는 삐져서 먼저 들어가는 바람에 사상 초유의 햄릿, 레어티스 동반 퇴장이라는 진귀한 광경을 구경했다.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