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MLET
일   시 : 2011. 10 .20 ~ 2011. 12. 17
장   소 : 유니버설 아트센터
관극일 : 2011. 12. 04 (일) 14:00
음악 / 대본 : 야넥 레데츠키 , 원작자 : W.셰익스피어
연   출 : 로버트 요한슨, 음악감독 : 원미솔
캐스트 : 햄릿 - 박은태, 오필리어 - 윤공주, 레어티스 - 강태을, 거트루트 - 신영숙, 클로디어스 - 서범석, 폴로니우스 - 김성기

- 범사마가 더블 캐스팅임에도 연일 출연하시면서 목 상태에 무리가 왔는지, 간간히 쇳소리가 섞여서 저녁공이 걱정스럽네 했더니, 아~ 강태을 씨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요즘 모차르트 오페라 락 연습도 들어간 상태라고 알고있는데, 목관리 안 하시나. -_-` 내가 초반엔 렌트 때문인가 그랬는데, 중반을 지나가면서도 그다지 나아질 기미가 안보이더니, 다른 작품 연습까지 병행할 정도라면 지금 하고 있는 공연에 지장이 없도록 관리를 해야하지 않을까. 내 취향은 정석대로 악보대로 불러주는 걸 좋아하는 쪽이라, 음이 플랫되는 거, 박자 놓치는 거, 박자 늘이는 거는 뭐라고 해도 음이탈은 배우도 사람인데 라며 관대한 편이다. 그건 일종의 사고같은 거니까. 그런데 강태을 씨는 햄릿 레어티스 역을 하면서 음이탈 없는 공연이 손 꼽을 정도고, 음이탈만 없다 뿐이지, 고음에서 목소리 갈라지는 건 부지기수. 오늘 공연에선 Killer's name에서 아예 목소리가 쉬어서 안나오기도 했지. 혹시라도 지금 목 상태가 뭔가 정상이 아니라면, 부디 잘 관리해서 컨디션 조절을 해주시길. 그래도 강태을 씨가 잡은 레어티스라는 캐릭터가 내 취향에 부합하는 연기라 절반의 만족으로 보고는 있지만, 다음 공연에서도 오늘같은 상태라면 레어티스 부분은 다 스킵하든지, 레어티스 때문에 은릿을 놓을 순 없으니; (아, 파슨 인정 ㅠ.ㅠ)

- 오늘 은릿은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복수의 화신이었다. 처음부터 분노의 에너지가 흘러 넘쳐서 흡사 11월 8일 공연과 비슷하면서, 거기에서 좀 더 다크한 기운을 풍기는 버전이어서, 나는 오늘 공연 정말 은릿 하나만으로도 레전드라고 할 정도였는데, 거기에 범사마, 영숙님이 또 한 단계 연기가 업그레이드 되어서 얼마나 좋았는가 모르겠다.
11월 8일 공연에서 보여준 복수의 화신 버전은 에너지가 임계치까지 올라가서 제어에 애를 먹는 은릿이었다면, 오늘 은릿은 거기에서 좀 더 노련해져서 끓어오르는 에너지를 자기 통제하에 두고 터트려줘야할 때 120% 터트려주고, 갈무리 해야할 때는 속으로 끌어들여 안에서 연소시키는 듯한 인상.

- 그러다보니 전에 결혼식 장면에서 등장할 때 고슴도치 같다고 그랬는데, 오늘은 그냥 은릿 자체가 매섭게 잘 벼려진 날카로운 한 자루 검처럼 느껴지더라. 갑옷을 두른 기사가 아니라, 그냥 검 그자체. 그런데, 그런 반응이 그냥 나온 게 아니라, 결혼식 장면에서 영숙 거트루트가 참 너무 눈이 부신거라. 아니 항상 아름다우시지만, 오늘 특히 사랑받는 여자라는 데서 오는 자신감이 아주 하늘을 찌르는데, 그걸 지켜보는 은릿의 시선이 진짜 레이저 나올 기세. 그러더니 성문 내려가는 중요한 장면에서 오케 미스; 사소한 거니 넘어가고, 여기도 깨알같은 디테일이 붙은 게, 클로디어스가 '난 아내와 아들을 한 꺼번에 얻었지.'라며 다가올 때, 거트루트가 새 아버지와 잘 지내보라는 듯이 떠미는데, 이때 은릿이 어머니한테 매달리는 듯한 시선을 한 번 던진다. 조금은 원망스럽고, 그래도 매달릴 곳은 이제 엄마 밖에 없는데, 그 엄마가 자기를 삼촌에게로 밀어내니 어디에도 자신이 있을 곳이 없어 삼촌의 손길을 피해 이리저리 방황. 그러다 오필리어를 발견하고 굳은 어깨에서 힘이 풀리는가 했더니, 방해꾼 - 폴로니우스와 레어티스 - 이 나타나서 둘의 만남을 가로막고, 난데없이 평소엔 친하지도 않은 얼굴들이 너도 사랑에 빠져보라며 치근대니 애가 돌아버리지.

- 그래서 전에는 Why me 넘버가 이 모든 짜증나는 상황이 왜 나한테 벌어진 거냐고 찡찡대는 것처럼 느껴졌다면, 뒤로갈수록 이 부조리한 상황에 분노하는 게 왜 나뿐이냐는 것처럼 들리는 거다. 갑자기 왕이 죽었는데, 충분한 애도의 기간도 없이 그 왕의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고, 사람들은 새로운 왕을, 어제의 왕 떠받들 듯이 추종하고있다. 이게 지금 정상이냐고, 이 모든 비정상을 나만 견딜 수 없는 거냐고, 새왕을 맞이했건만, 나에게 덴마크는 시체 썩는 냄새로 코를 들 수 없는 거대한 무덤이라고, 이 순수하고 결벽한 왕자님이 상처입고 절규하는 것 같았다. (뭐, 클로디어스는 아마도 햄릿이라는 병든 부위를 걷어내면 덴마크는 다시 건강해질 거라고 했겠지만서도.)

- 태을 레어티스의 Sister는 목상태와 별개로 진짜 오빠 모드라서 그거 하나 만으로 안정감있게 볼 수 있었는데, 오늘 태을 레어가 자기 목상태에 대해 자각하고 있었는지, 굉장히 조심조심 하면서 불러주다보니, 어라 이 오빠가 오늘 왜이리 아련아련한 거임. 태을 레어 부디 당신만은 오빠 모드를 지켜주세요~

- 윤공주 오필리어와 어찌되었든, 이 정도 선에서 타협을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정화 오필리어 회차 적다고 아무리 징징대봐야 현실이 바뀔리 없으니. 2막의 매드씬도 내 해석과 안 맞는다고 저렇게 눈물 범벅 불쌍불쌍한 오필리어를 언제까지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 피는 피로써 넘버 말인데, 은태야 이거 진짜 만렙 찍으려고 그러니. 왜 이렇게 매번 더 더 강해지고, 격렬해지는 건데. ㅠ.ㅠ 어우, 진짜 매번 어떻게 저번 공연보다 더 강도가 세질 수 있는 거지? '어디든 가! 주오~' 할 때 정말 온몸으로 피를 토하는 것 같다니까. 은릿, 이 무서운 아이;

- 광인처럼 구는 햄릿때문에 영숙 거트루트와 범클로디어스가 부부 싸움하는 장면에서 범클로가 대사를 바꿨다. '닥쳐라! 왕의 명령이다!' 에서 '닥쳐! 왕의 명령이야!'로 더 세졌다. 이런 면이 범클로가 거트루트를 별로 사랑하지 않았던 게 아니냐는 의혹을 불러일으키는 거다. 근데, 이게 상호 작용인게, 범클로일때 영숙 거트루트는 진짜로 "여왕님" 모드시거든. 그래서 둘이 아주 제대로 불꽃이 빠직빠직. 그런데, 상대가 윤클로가 되면 윤클로는 거트루트를 여신으로 떠받드는 게 보이면서, 영숙 거트루트도 여왕님 모드가 좀 덜하거든. 그러면서 윤클로는 '닥쳐라! 왕의 명령이야!'라고 소리 질러놓고, 자기가 더 당황하는 모습이 영락없이 연하남.

- 수녀원에 가 넘버에서 오늘 은릿은 거의 울 것 같더라. 표정도 그렇고 노래하는 목소리도, 가장 마지막 퍼붓는 '수녀원에나 가'에서는 거의 흐느끼는 삘이었다. 오필리어에게 상처주는 만큼, 그보다 더 많이 상처입는 은릿이라 더이상 햄릿 개객끼 소리는 못하겠다. (정화 오필리어일 때는 예외 -_-;)

- '오늘밤을 위해'에서 어제의 씐나 모드 대신 다크한 블랙 은릿으로 돌아와줘서 좋았다. 웃을 때도 복수에의 희열로 들뜬 그런 웃음. '잘하면 더 줄 수 있어' 할 때의 표정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온통 거짓말로 모두 가려져있어.'할 때 손동작으로 마임하는 것도 좋고, 춤사위가 점점 물이 올라서, 이젠 은근 슬쩍 섹시하기까지 하더라. (초반에 힘이 잔뜩 들어가서 뻣뻣하던거 생각하면 이것도 일취월장)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온 몸에 힘을 주어 발을 구르고, '피가 끓고' 할 때는 목소리도 같이 끓어오르는데, 안에 잠재된 에너지를 폭발시키듯 질러주는 '오늘 밤을 위해~'는 참으로 절창이었다.
이러고서 2막 시작할 때 '산다는 것이~'하고 기타 선율과 함께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얼마나 여리고 청아한지, 거짓말 같다니까. 저게 1막에서 뻐렁치게 질러대던 사람과 동일 인물인가 싶게 너무 고운 소리가 울려퍼지니.

- 영숙님 I'm untrue에서 나날이 연기가 더 깊어져가시고, 노래는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뮤지컬 거트루트라는 평까지 들으시는 분인데. 폴로니우스 살해 장면에서 보여주는 눈물겨운 모정이나, 오필리어 장례식에서의 연기도 정말 얼마나 훌륭하신지. 거기에 범사마님. ㅠ.ㅠ Chapel 넘버에서 보여주는 그 치열한 갈등, 죄책감, 두려움, 통한의 감정. 그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걸 보고 있으면 그냥 빨려들어가는 것 같다. 베테랑이 괜히 베테랑이 아닌게지.

- 폴로니우스 살해 장면에서 은릿의 연기도 갈수록 디테일이 쌓여가면서 그 감정선이 세세하게 관객들에게 납득이 가도록 자연스러워졌다. 선왕의 유령을 향해 칼을 내보이며 당신 뜻대로 복수 했는데, 왜 나를 외면하시냐며, 비틀거리는데, 버림받은 아이같은 저 처량함을 어쩔거냐며. 사는 거나 죽는 거나 나에겐 같은 거라고, 차라리 죽어서 편해지고 싶어하는 건 아닐까 싶었던 햄릿이 폴로니우스를 죽이고 나서야 죽음에 대한 공포심이 생겨나다니, 참 비싼 수업료라고 해야할지.

- 장면 장면 핥는 후기는 이제 더 안 쓰려고 했는데, 오늘도 길어지는구만; 뭐 이왕 시작한 거니까. 중간 건너뛰고 (태을 레어 목상태에 대한 얘기 밖에 안 나올듯 해서) 극의 마지막 결투 장면. 태을 레어가 검술은 더 좋을 지 몰라도, 역시 기합의 문제였는지 긴장감은 좀 덜한 칼싸움. 기세만으로 죽일둥 살둥 달려드는 동레어가 더 긴박한 느낌이 들었으니.

- 거트루트가 독배를 마시고 죽은 뒤, 햄릿은 스스로 거대한 화염으로 타올라 덴마크를 불태워 버릴 듯이 열폭풍이 되어 몰아쳤다. 덴마크를 등에 짊어지고 고귀한 삶을 살았을 수도 있었던 왕자가 기구한 운명에 휘둘려, 그러나 그 마지막은 썩어가는 덴마크를 정화하는 불꽃이었으니, 덴마크의 왕자다운 죽음이었다.

+ 잊어버리기 전에 쓰기. 클로디어스의 상복이 어깨부분이 검은 깃털 장식인데, 이 옷을 입고 딱 등장하는 범사마를 보면 나는 까마귀 대왕 로트바르트가 떠오르더라. 그러면서 본격 백조의 호수 버전 햄릿 망상; 그럼 오필리어가 오데트인가? 레어티스가 오딜 하면 재밌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