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MLET
일   시 : 2011. 10 .20 ~ 2011. 12. 17
장   소 : 유니버설 아트센터
관극일 : 2011. 11. 30 (수) 20:00
음악 / 대본 : 야넥 레데츠키 , 원작자 : W.셰익스피어
연   출 : 로버트 요한슨, 음악감독 : 원미솔
캐스트 : 햄릿 - 박은태, 오필리어 - 윤공주, 레어티스 - 강태을, 거트루트 - 신영숙, 클로디어스 - 서범석, 폴로니우스 - 김성기

11월 24일 공연이 레전드 오브 레전드였다면, 오늘은 은릿이 거기에서 또 한 발짝 더 나아갔다.
오늘 공연, 다른 사람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피 비린내가 진동하는 처절한 비극이었다. 귀신같은 은릿 ㅠ.ㅠ 
전에도 '피는 피로써'에서 은릿이 한 마리 상처입은 짐승 같이 느껴졌다고 그랬는데, 오늘은 쩍 벌어진 상처에서 더운 피가 울컥울컥 쏟아지는 것 같더라. 그러더니 마지막 '클라우디우스─!!!!!!!!' 하고 절규하는 목소리가 공기 중으로 피보라를 일으키는 것처럼 느껴져서 쇳내까지 맡아지는 듯 했다. 소리가 시각으로 보이는 듯한 감각은 미키 상 이후로 참 오랜만에 느껴보는 것 같은데, 이젠 거기에 후각까지. 정말 공감각을 불러일으키는 목소리다.

- 극의 시작. 왜 벌써 가셨냐고, 나는 누구와 얘기를 해야하냐고 서럽게 흐느끼는 목소리가 갈수록 물기가 잔뜩 묻어나는데다가 눈망울은 또 왜그리 촉촉하던지. 햄릿 공연 초기에는 긴장감 때문이었을까, 상당히 건조하고 메마른 눈매였는데, 갈수록 눈가가 촉촉해지는 듯하다.
그리고 엄숙한 장례식의 분위기를 뒤집어 엎듯이 화사한 결혼식 장면이 이어지는데, 사실 이 결혼식 장면도 마냥 화사하고 신나는 분위라고 하기엔 원색인 의상의 색감과 조명때문에 어딘가 컬트적인 분위기가 난다. (난 이 알록달록한 앙상블들의 드레스를 보고있자면 팀 버튼의 비틀쥬스가 떠오른다.) 사랑 오직 사랑을 외치는 사람들을 가만히 내려다보는 은릿의 시선은 언제봐도 참 냉정하고, 행복해하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시선이 분노에서 체념으로 바뀌는 게 명확하게 보이더라. 그래서 성문이 내려가며 등장할 때는 이미 심리적으로 상당히 지쳐버린 모습이었지. 어머니를 위해 참석은 했지만, 나 좀 내버려두라고 온 몸으로 호소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가만두지를 않으니 짜증 게이지가 점점 상승.
이어지는 Why me에서 어라, 오늘은 평소보다 에너지가 좀 줄어든 것 같네, 드디어 목소리를 아끼기 시작한 건가 했더니, 그냥 강도를 조절한 것 뿐이었는지, 마지막에 지르는 왜 나야─는 평소대로 쩌렁쩌렁. 이젠 목상태에 대해 왈가왈부 안 하련다. 스스로 평타 레전드래놓고, 왜이리 믿음이 부족해;

- 오필리어와 유일하게 사랑을 노래하는 Let's rise above this world에서 '어디든 가주오~ 나와 함께 / 마음속 아픔도, 가슴속 슬픔도'라는 가사를 부를 때 은릿이 얼마나 아프고 절실한 표정인지. 그 전까지 겁먹은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곤두세워 자신을 보호하고 있던 이 왕자님이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 자신의 유약함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 나의 고통을 어루만져 주기를 바라는 이 장면은, 그래서 러브씬인데도 그렇게 비장한 분위기인가 보다.
사실 전에는 이 장면에서 참 너무 뜬금없이 베드인;이라 오필리어가 적극적으로 나서니 얼씨구나 편승한 건지, 정말 오필리어를 사랑하기는 한 건지 잘 와닿지 않았는데, 침실로 오필리어를 이끌면서 살짝 지어주는 슬픈 미소를 보고, 아 햄릿이 오필리어한테 미안해하는구나 하는 게 느껴지더라. 어쩌면 이미 오필리어가 바라는 사랑을 자기는 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이 왕자님은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어지는 피는 피로써. 이불 감기 스킬이 나날이 향상되어가고 있다. 은근슬쩍 허벅지를 드러내는 거 하며, 허리와 골반 사이의 경계에 둘러진 이불이 이제는 아슬아슬한 선이 어디쯤인지 파악했는가보다. 이 장면에서 제일 좋은(;) 건, 선왕 살해의 진실을 알게 된 뒤 '어떻게 이럴 수가!'라며 바닥을 칠 때, 온 몸에 힘이 팍 들어가면서 잔근육이 세세하게 떠오르는 순간이다. 전신에서 풍겨져 나오는 분노의 오라와 함께 상처입은 심장에서 울컥울컥 피를 쏟아내는 것 같은 그 모습이 저대로 두면 망가지고 말 것 같아 걱정이 되지만, 차마 손을 뻗을 수도 거둬들일 수도 없게 만든다. 이 불쌍한 왕자님은 그렇게 모두로부터 자신을 자꾸만 고립시켜버리니 ㅠ.ㅠ

- He's crazy 넘버만 놓고보면 김성기 폴로니우스도 괜찮다. 일단 안무에 상당히 신경을 쓰시고, 스윙 재즈의 흥겨운 분위기, 즉흥성을 잘 살려주니까. 하지만, 김성기 씨는 폴로니우스일 때나 무덤지기일 때나 별 차별성이 없다는 게 에러; 폴로니우스라는 캐릭터가 입이 방정인 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일국의 재상이고 자식 사랑이 지극한 아버지인데, 그런 면이 김성기 폴로니우스는 잘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제일 민망한 건 오필리어와의 스킨쉽. 제발 다 큰 딸래미의 엉덩이를 때린다거나 하는 건 그만둬줬으면 좋겠다. 그건 어떻게 봐도 성희롱;;

- 수녀원에 가에서 은릿의 목소리는 날이갈수록 애절함이 늘어서 표정 안 보고 목소리만 들으면 저게 지금 떠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헷갈릴 정도로 비통함이 가득차있다. 그리고 가사 내용과 대조적으로 '이게 누구신가~'할 때 목소리 너무 곱고 예쁜 거 아니냐며; 꾀꼬리도 울고 갈 목소리다.

- 오필리어를 야멸차게 내치고 미친 듯이 웃어대는 은릿의 웃음 소리는 또 다른 통곡 소리. 거기서 울 수는 없으니 웃어버리는 것 같아서 또 마음이 짠해진다. 혼자가 되어서야 가슴을 쥐어 뜯으며 고통스러워하는데 어찌나 안스러운지.
사랑하는 아버지가 꿈속에까지 나타나 피의 복수를 명령했으니, 어떻게든 복수를 해야겠는데, 그걸 혼자 감당하기에 햄릿의 자아는 너무나 여리고 섬세한 것이지. 기나긴 불면의 밤을 보냈을 것 같은 은릿, 신경이 바늘처럼 곤두서고, 자기 자신을 절벽 끝가지 몰아가서 너무나 위태로워 보이는 은릿. 그런 친구의 모습을 보다못해 작정하고 나서는 호레이쇼의 심정도 이해가 된다.
그때 시의적절하게 등장한 유랑 극단은 햄릿의 복수에 날개를 달아줄 천군만마. 드디어 혼자가 아니라 '편'을 만들게 된 이 왕자님이 환희에 차서 펼치는 한바탕 춤사위는 그래서 다크한 기운을 뿜어내면서도 힘이 넘치는 거다. 시종일관 강렬한 눈빛으로 정면을 주시하며 온몸으로 복수 의지를 불태우는데, 이 장면도 갈수록 물이 올라서 참 눈과 귀가 황홀하다.

- 범클로디어스의 Chapel 넘버는 그냥 닥치고 찬양.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저주받은 나에게 뭐라고 대답을 해줘~'라고 절규하면 뻗은 손을 잡아주고 싶어진다. 게다가 서범석 씨는 눈동자가 밝은 갈색이라 그 눈매가 어딘가 신비롭단 말이지. 그리고 라이온 킹의 '스카'를 참 많이 닮았다. 거트루트를 사랑한다는 설정만 빼면.

- 영숙 거트루트는 I'm untrue에서 절창으로 불러주는 부분도 좋지만, 내가 가장 마음에 들어하는 연기는 폴로니우스 살해 장면과 오필리어 장례식 장면에서의 연기다. 자신의 욕심 때문에 사랑하는 아들이 불행해져가는 걸 막을수도 멈출 수도 없는 무력한 모성.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기에 더 절망하고 허탈해하다 종국에는 마치 자살하듯 죽어가면서도, 아들이 자신을 아버지의 배신자가 아닌, 어머니로 기억해주길 바라는 이 여인이 이해가 되었다.

- 태을 레어티스의  안정감이 나는 참 좋다. 노래가 조금 부족한 듯 싶을 때가 있지만, 그래도 나는 태을 레어가 보여주는 믿음직한 오빠, 자랑스런 아들, 그리고 어른스러움이 좋다. 햄릿이 아직 미성숙한 질풍노도의 청년(청소년이 아님)이라면, 태을 레어는 어딘가 어른 남자의 향기가 난다. 그래서 '레어티스, 너도 제법 남자가 되었구나.'라는 클로디어스의 대사가 개그로 들리지 않는다. 같은 대사라도 동레어 때는 풉~하고 뿜게 되지만서도;
이렇게 태을 레어가 좀 더 어른이다보니, 분노할 때도 차갑고 냉정하다. 클로디어스가 같이 복수하자며 꼬드길 때도, 동레어는 분노에 넋이 나가서 귀에 아무 소리도 안 들어오는 것 같은데, 태을 레어는 지금 클로디어스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왜 이런 제안을 하는지 재보고 판단 하는게 눈에 보인다.
하여간 동레어가 어디로 튈 지 몰라 불안하다면, 태을 레어는 그냥 안심하고 볼 수 있어 좋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이게 목상태가 문제인지, 음역대가 안 맞아서 그런 건지 모르겠는데, 고음에서는 여지없이 목소리가 갈라지고, 음이탈이 간간히 생긴다는 거. 이게 2막에서는 그래도 레어티스의 감정선과 맞물려 크게 거슬리지는 않는데, 1막의 Sister에서는 듣다가 불안불안. 그런데 또 태을 레어는 Sister에서 근친 삘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산뜻한 오빠님이라 포기할 수 없고. 노래는 확실히 동레어가 듣기 좋지만, 이쪽은 너무 끈적거려서 ㅠ.ㅠ 암튼, 이 두 레어티스가 반반 섞이면 딱 좋겠다.

- 오필리어의 장례식 장면에서 은릿은 또 슬픔의 강도가 더 업그레이드 되어서 돌아왔고, 태을 레어가 햄릿을 한 껏 비웃으며 '가식떨지마, 너 같은 건 남자도 아니야.' 라고 하니 거기 맞받아치는 은릿의 강도가 동레어 때와 맞먹을 정도까지 감정선이 올라갔고, '형제여!'에서는 그걸 또 뛰어넘어 격해졌더라. 그런 격렬함을 끌어안고 시작된 결투이니 얼마나 긴박감이 넘치던지. 
거트루트의 독살에서부터 급격히 긴장도가 올라가면서 불꽃이 터지듯 눈이 부신 '덴마크여─!' 그리고 그 불꽃이 사그러드는 것처럼 마지막 반짝임을 남기고 사라져버린 덴마크의 왕자님. 부디 그 영혼에 평안한 안식을.

ps. 
오필리어와 레어티스를 남매 근친으로 몰아가는 Sister라는 넘버의 저 가사를 좀 어떻게 하기 전에는 죽었다 깨나도 햄릿은 레어티스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아래 2008 월드 버전과 2011 버전의 Sister 가사를 비교해서 올려놨는데,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돌아갈 순 없겠지 행복한 그 시절로 / 함께한 추억은 영원히 기억할게" 이게 남매 간에 부를만한 가사냐고. 그 외에도 2008 버전은 직접적으로 햄릿을 언급하지 않는데, 2011 버전은 아예 햄릿 때문에 우리가 불행해질 거라고 대놓고 햄릿을 죽음의 사자 취급해버린다. (그런 멋진 재능이 있는데, 레어티스는 프랑스로 유학가지 말고 차라리 점집을 차리는 편이..;)
그리고 "신이여 축복하소서 우리 둘" 이 가사는 정말 뭥미? 만약 이게 "신이여 축복하소서 우리들(or 우리를)"이었다면 그렇게까지 거부감은 들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레어티스, 오필리어, 듀엣

2008 월드버전 Sister

미래를 보았어
더러운 땅에 누워서 날카롭고 피묻은 칼을 보았지
그 칼에는 이름이 새겨져있어 내가 아는 이름들
그리곤 하나둘씩 죽었어

오필리어 검은 구름 보이네
오필리어 철없는 사랑 의미없어
오필리어 내 목숨 보다 귀한 너
알아 그가 널 사랑한다 해도
시간이 흐르면 열정도 증발하지
오빠 그는 나를 진정 사랑해
그래 그것이 비록 고통이 되도
후회는 없겠지 진실한 마음이라면
하늘은 알거야 진실이 무엇인가

오필리어 그와 헤어지면 안되겠니
오빠 나 그 없이는 살수없어
신이여 두려워하는 모든 것
신이여 다 거짓이라 말해줘요
캄캄한 어둠 속 진실 찾아 헤메이네
한치 앞도 못보는 우리를 살피소서
오빠 꼭 가야만 하는 거야
오필리어 내가 한 말 이해해줘
누구도 내 마음 바꿀 순 없어
신이여 제발 진실만을 밝히소서
캄캄한 어둠 속 진실 찾아 헤메이네
한치 앞도 못보는 우리를 살피소서
2011 버전 Sister

미래를 봤어
차가운 무덤 속에서 피 묻은 칼 손에 들고 그가 있었지
그 칼에는 우리의 이름 새겨져 붉은 피가 떨어져
무덤 위를 적셨지

오필리어 검은 구름 보이네
오필리어 철없는 사랑 의미없어
오필리어 내 목숨 보다 귀한 너
알아 너희 두 사람 사랑을
시간이 흐르면 열정도 증발하지
오빠 그는 나를 진정 사랑해
아냐 그것은 단지 착각일 뿐이야
돌아갈 순 없겠지 행복한 그 시절로
함께한 추억은 영원히 기억할게

오필리어 그와 헤어지면 안되겠니
오빠 나 그 없이는 살 수 없어
신이여 마음 속 슬픔 잊도록
신이여 축복하소서 우리 둘
캄캄한 어둠 속 진실 찾아 헤매이네
한치 앞도 못보는 우리를 살피소서
오빠 제발 나를 이해해줘
오필리어 내가 한 말을 용서해줘
누구도 내 사랑 바꿀 순 없어
신이여 축복하소서 우리 둘
캄캄한 어둠 속 진실 찾아 헤매이네
한치 앞도 못보는 우리를 살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