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MLET
일   시 : 2011. 10 .20 ~ 2011. 12. 17
장   소 : 유니버설 아트센터
관극일 : 2011. 11. 29 (화) 20:00
음악 / 대본 : 야넥 레데츠키 , 원작자 : W.셰익스피어
연   출 : 로버트 요한슨, 음악감독 : 원미솔
캐스트 : 햄릿 - 박은태, 오필리어 - 윤공주, 레어티스 - 전동석, 거트루트 - 신영숙, 클로디어스 - 윤영석, 폴로니우스 - 김장섭

비도 부슬부슬 오는 날씨에 어수선하기가 화요일스러운 객석 분위기. 수런수런함이 잘 가라앉지 않아서, 그게 무대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 같았다. 배우들도 1막 초반에 역에 몰입하기 좀 어려워하는 듯 싶었고. 장면이 이어지면서 점점 배역에 몰입해 들어가는 것이 보이기는 했지만, 초반의 어수선함이 아, 화요일 공연이구나 싶었다. 그래도 장례식에서 은릿의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노래는 평소대로여서, 하여간 이 무쇠처럼 단단한 컨시스턴시~ 라며 감동. 그리고 지금까지 해온 공연이 얼마인가, 1막의 어수선함 따위 2막에서의 몰입과 배우들의 열연으로 다 커버되더라.

- 윤영석 클로디어스를 거의 열흘만에 다시 만났다. 범사마에 익숙해져 있다가 오랜만에 윤 클로디어스를 만나니 참 신선하더라. '내 평생 당신을 기다렸어' 넘버에서 영숙 거트루트가 아직 배역에 몰입을 못하고 밍숭맹숭 상태인데도 윤클로는 눈에서 하트빔을 발사할 기세. 진짜 거트루트를 너무 좋아한다. 범클로와 비교해서 윤클로는 훨씬 다혈질에 정열적이고, 로맨티스트에 어딘가 연하남 분위기다. 그래서 영숙 거트루트가 잘만 구슬리면, 진짜 햄릿이 왕이 될때까지 후견인 노릇도 해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런 면에서 범클로는 사랑보다는 야심이 더 커서, 어떻게든 햄릿을 처치하려 했을 것 같다.

Chapel 넘버에서 드디어 윤클로와 감격의 화해. 그동안 윤클로의 Chapel은 찌질함 하나만으로 인상이 남았는데, 오늘은 '형을 죽여야만해~' 하고 왕관을 툭 떨어뜨리고는 그 왕관을 향해 손을 뻗어 '모두 무릎 꿇고서 새로운 왕 맞이하라'라고 하는데, 형에 대한 열등감, 질투심 같은 게 눈에 잘 들어와서 좋더라. 범클로는 여기서도 어떤 위엄을 두르고 있어서, 형의 그늘에 가렸지만 영리하고 능력있는 둘째 같은 분위기인데, 윤클로는 그야말로 형에게 치이기만 하는 동생, 뭘 해도 형보다 못한 그런 동생이었을 거 같다. 그런 형의 그림자가 너무 짙어서, 형을 죽일 배짱 같은 것도 없었던 윤클로는 진짜로 사랑, 오직 사랑때문에 형을 살해했을 거 같더라.

윤영석 클로디어스는 다혈질에 찌질하고, 불안정하고, 비열한 악당 캐릭터다. 레어티스에게 '독'을 권하는 장면도, 그리고 마지막 죽음을 맞는 장면에서도 윤클로는 악당다운 모습을 보여줘서, 햄릿의 복수에 정당성을 부여해준다. 그래서 윤클로의 이런 해석도 나는 마음에 든다.

- 영숙 거트루트는 초반에 배역 몰입이 좀 더디게 진행됐지만, 오늘도 2막에서의 연기는 아주 훌륭하셨다. I'm untrue 넘버에서 보여주는 난 그저 사랑받고 싶었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 큰 욕심인 건가 절절하게 호소하는데, 여자로서의 행복을 바라는 그 마음이 이해가 가더라. 햄릿이 연극을 통해 자신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진실도, 사랑 앞에 다 버렸다면서 자조하는 거트루트. 그래도 끝내 모성만큼은 버리지 못한 '어머니'였기에 나는 거트루트라는 캐릭터가 좋았다. 만약, 그녀가 모성마저 져버렸다면 햄릿이 너무 가엽지 않은가. ㅠ.ㅠ
폴로니우스 살해 장면에서 햄릿을 보듬어주는 장면이나, 오필리어 장례식에서 위로해주려 다가갔다가 완벽하게 거절당하고 절망에 빠진 연기도 갈수록 그 감정선이 애절해져서 얼마나 가슴이 아프던지. ㅠ.ㅠ (아들놈 키워봤자 헛거;)

- 동레어가 Sister에서 근친삘이 좀 줄어들어서 오늘은 굉장히 오빠처럼 보여서 좋았고, 2막 Killer's name에서는 여지없이 폭주하더니, 실성한 오필리어를 보고는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동레어가 그렇게 통곡하는 건 처음 본 듯. 그러더니, 장례식 장면에서 슬픔에 복받쳐 목이 메었는지, 쇳소리가 섞인 삑사리가 나는 바람에 너무너무 슬픈 장면인데, 주변에 있던 장섭 무덤지기, 윤클로 표정 관리하느라 되게 힘들어하더라ㅋㅋㅋ
아, Killer's name 넘버에서 동레어가 목에 은색 스카프를 두르고 등장했는데, 음...난 왜 보이스카웃 생각이 나던지.ㅋㅋ

- 은릿은 평소대로 잘했다. 평타 레전드 끝~ 이라고 하면 간단하겠지만, 아주 얇게 파이층이 쌓이는 것처럼 계속 섬세하게 연기가 다듬어지고 있어서 기억 보존용으로 남겨두기. 

He's crazy 넘버에서 햄릿이 미쳤어~ 돌았어~ 하는 부분. 햄릿 원작을 배제하고 뮤지컬 햄릿만 놓고 보면, 사실 햄릿은 미친 척 같은 걸 한 적이 없다. '피는 피로써' 에서 보여준 광기는 햄릿의 피맺힌 진심이었지, 그게 연기는 아니었으니까. 실제로 폴로니우스가 햄릿이 사랑에 빠져서 미쳐버렸다고 모함했을 뿐이고, 거기에 햄릿은 '당신들 보기에 내가 미친 거 같지? 그렇지?' 하고 응수하는 거다. 그래서 '아름다운 밤입니다.'하고 광소(狂笑)하는 부분에서 니네가 원한다면 나는 미친 척해주마 하는 것 같다.

그리고 수녀원에 가 넘버에서 느껴지는 햄릿의 감정의 낙차가 더 커졌다. 오필리어를 보고 짓는 표정에서 조롱의 강도는 더 강해졌는데,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은 오히려 더 약해지고, 뒤돌아 짓는 아픈 표정은 또 너무 애절하고, 그 간극이 참 안타까워서, 저렇게 정나미 떨어지게 구는 행동도 그냥 딱하기만 하더라.

1막의 피날레에서 열에 들뜬 그 시선하며, '피가 끓고!' 하는 부분에서 오늘은 그저 턱을 살짝 들어올렸을 뿐인데, 왜이렇게 섹시한 거냐며;;

은릿이 관객을 극으로 끌어들이는 장면이 몇 군데 있는데, 오늘은 Sextet에서도 객석을 향해 시선을 던지면서, 확실하게 관객을 극속으로 끌어들이더라. 당신들도 이 추악한 진실을 이제는 알았겠지 라는 듯.
은릿이 관객을 덴마크 국민으로 가정하고 끌어들이는 장면은 Why me 넘버에서 첫번째 '덴마크여 알고있나~' 부분, 피는 피로써 넘버에서 성에 올라 '내게 제발 피를 줘~'부터 그 뒷부분, 그리고 연극을 올리면서 박수를 유도하는 부분, 맨 마지막에 클로디어스에게 복수하면서 다시 한 번 '덴마크여~'를 부르짖을 때. 그리고 이제 sextet까지 추가되었다.

오늘 은릿 연기 중에 가장 만족스러웠던 부분을 꼽으라고 하면 폴로니우스 살해 후 경악하고 겁이나서 부들부들 떨다가 시체춤 추는 장면을 꼽겠다. 더 세밀하게는 '그 춤실력 다 어디갔어' 하고 폴로니우스를 계단으로 밀어버리고 자기가 더 놀라서 소리지르고, 비틀비틀 내려가서 확인 사살하고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하는 그 표정하며, 이게 아닌데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처량한 흐느낌, 겁에 질려 굳어버린 팔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시체를 커튼에 싣고 가면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 앉을 뻔한 것 까지, 정말 겹겹이 쌓인 감정선이 다 들여다 보일 정도로 밀도가 높아서, 현미경으로 스캔하는 기분으로 이 장면을 본 것 같다.

극의 마지막,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생명력이 빠져나가는 은릿의 마지막 노래는 오늘도 잡을 수 없는 바람처럼 그렇게 공기중으로 흩어져 사그러들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커튼콜에 여운 하나 남기지 않고 산산히 부서져 버렸지.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