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MLET
일 시 : 2011. 10 .20 ~ 2011. 12. 17
장 소 : 유니버설 아트센터
관극일 : 2011. 11. 22 (화) 20:00
음악 / 대본 : 야넥 레데츠키 , 원작자 : W.셰익스피어
연 출 : 로버트 요한슨, 음악감독 : 원미솔
캐스트 : 햄릿 - 박은태, 오필리어 - 윤공주, 레어티스 - 전동석, 거트루트 - 신영숙, 클로디어스 - 서범석, 폴로니우스 - 김성기
연일 계속되는 공연 관람으로 극도의 수면부족 ㅠ.ㅠ 그래 아직 노담콘 후기도 미완이지만, 오늘 받은 감동이 식기전에 어떻게든 후기를 적으리라 무거운 눈꺼플을 참아가며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가, 결국엔 잠에 지고 말았다. OTL 전엔 밤새고 다음 날 출근도 거뜬했지만, 이젠 예전의 내가 아니라. 어흐흐흐흑, 노화는 이렇게 진행되는 것인가 ㅠ.ㅠ
- 서론이 길어졌는데, 한마디로 이날 공연을 보고난 첫 감상은 이거였다.
내가 박은태라는 배우를 참 과소평가했구나.
전날 노담콘 보면서 목상태가 안 좋은 게 너무 확연해서 내일 공연은 어쩌려나 그랬었다. 아니, 진성은 쥐어짜서라도 지를 수 있지만, 가성에서 목소리 탁해진 건 어쩔거냐며. 그래서 이날 공연을 보러가는 길에 좀 걱정을 하고 갔는데, 웬걸, 1막의 시작 장례식 씬에서 '아버지, 고백할 게 하나 있어요~' 하고 첫 일성을 내뱉는데, 여전히 맑고 투명한 시린 음색인 거다. 그리고 '왜 가↗셨나요~ 한 마디 말없이~'에서도 힘있게 쭉 올려주는데 이 때 벌써 그 감성이 참 아프고 서러운 음색이라, 오늘도 레전드 찍겠구나 예감할 수 있었다.
오늘자 인터뷰 기사에 보니 이제 자기 목에 대한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하더니만, 그래서 그렇게 마음놓고 갈성으로 마구 그르렁대는 건가. 듣는 사람은 그 미성이 탁해질까 걱정하고 있었더니만. 하여간 전날 노담콘에서 '달'을 듣고 걱정했던 게 무색하게 이날 은릿은 여전히 고음에서 맑고 투명한 음색이었고, 지붕 날릴 것 같은 성량은 덤이었다.
게다가 내가 매번 놀라지만, 화요일, 새로운 주차 시작이라 이거지. 그새 연기에 디테일이 더 추가되어서, 재관람자만의 폐해(?)겠지만, 달라진 연기 부분에서 너 이 자식~ 하고 육성 관크할 뻔했;;
- 똑같은 공연이 계속 반복되는데, 그럼에도 계속 그 공연장으로 향하게 하는 이유는, 무대위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이 항상 똑같이 연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는 일이라 그날 그날의 표정, 눈빛, 손짓, 노래에 실린 감성 같은 것이 틀에 찍어낸 것 처럼 똑같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배우가 반복되는 공연에 매너리즘에 빠진다면 그건 고스란히 관객에게도 전달된다. 재미있게도 무대와 객석은 소통을 하기에 그런 매너리즘은 첫 관람자라해도 느낄 수 있다는 거.)
하여간, 그렇게 같은 장면, 같은 대사라도 매 공연 똑같을 수는 없는데, 거기에 은태는 아직도 계속 연구하고 고민한 결과를 매 주차 첫 화요일 공연에 풀어놓는 것 같단 말이지. 아,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짐작이고 예상일 뿐이다. 왜냐면 매주 화요일마다 확확 달라져서 돌아오니까, 정말 이거 계산하고 있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 수 밖에.
- 결혼식 장면에서 은릿이 확실하게 노선을 정리하면서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화려하게 피어난 어머니를 바라보며 착잡한 마음이 들지만, 그래도 어머니가 저렇게 행복해 하니 어쩔 수 없지않나...체념하며 참석한 결혼식에서 클로디어스에 대한 혐오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도 좀 더 세련되어졌다. 뿌리치는 동작은 오히려 절제되었는데, 표정이나 분위기는 훨씬 더 까칠해졌다. 아니, 사실 성문이 내려가면서 그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 저건 고슴도치다 싶더라. 아주 가시를 잔뜩 곤두세운 고슴도치. 나 건들지 마─ 백마디 말보다 그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움. 범클로께서 환영의 표시로 팔을 벌려 맞아주는데, 찬바람 쌩하니 외면하는 것도 오늘은 눈에 들어오더라. 그렇게 잔뜩 곤두세운 가시도 어머니가 '너도 이제 아이가 아니잖니.' 나를 좀 이해해다오 하니 누그러뜨렸다가도 '사랑 오직 사랑'을 외치며 너도 사랑에 빠져서 우리랑 한 패가 되어보자~ 하니, 또 잔뜩 가시를 세우고는 연회장을 떠나는데, 도입부에서 이렇게까지 캐릭터에 디테일이 쌓여가는구나 싶어서, 이게 막공 즈음이 되면 과연 어디까지 진화할까 기대감이 부풀어오른다. 그리고 이어지는 Why me 에서 전날 목상태 걱정했던 걸 말끔히 씻어주며 성량으로 압도하며 퇴장.
- 선왕의 유령이 꿈에 나타나고 부르는 '피는 피로써'에서 오늘은 참 이불을 예쁘게 잘도 둘러서 칭찬. 그리고 이 장면에서 상체 근육에 힘이 빡 들어가서 잔근육이 세세하게 다 떠오르는 걸 보고 있자면, 정말 온 몸으로 노래하고 절규하고 분노를 터트리는구나 싶어, 저 결벽하고 예민한 정신의 왕자님이 참 용케 거기서 뛰어내리지 않았구나 안도하는 한 편, 저 상황에서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으려면 그 마음이 참 천갈래 만갈래 겠구나 안스러운 마음이 든다.
- 미친 척이 아니라 사실상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던 햄릿에게 폴로니우스는 그게 왕자가 다 사랑에 빠져 그렇다면서 그를 사랑의 열병에 걸린 애송이 취급하고 조롱하는데, 이 장면에서 은릿이 또 연기가 바뀌었다. 대사톤이 완전 냉소적으로 바뀌면서 그래, 나는 돌았어. 니들 눈엔 내가 미친 걸로 보이지? 정말 돌아버리는 게 뭔지 보여줘? 뭐 이런 마음의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폴로니우스가 부르는 He's crazy에서 '예전에 그는 백성들의 존경받는 왕자님'이라고 하는데, 저거 '존경'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바꾸는 편이 낫지 않을까. 사심 좀 담아서 내가 보기엔 원작의 햄릿도 그렇고, 뮤지컬의 햄릿도 존경보다는 백성들의 이쁨을 받는, 아이돌스러운 인기많은 왕자님 분위기에 더 어울리는 것 같아서 말이지.
- 이어지는 '수녀원에 가', '증거가 필요해', '오늘 밤을 위해'에서 보여주는 낙차 큰 감정의 표변, 폭발적인 가창력은 뭐 이제 칭찬하는 것도 입 아플 지경이다. 특히 '오늘 밤을 위해'에서 이젠 탭댄스 출 때의 표정이 정말 근사해졌다. 어깨에 힘이 확실하게 빠지면서 살짝 그루브도 타기 시작했고, '사랑하는 내 모든 것, 시간이 지나면 연기처럼 사라져~' 부분에서 보여주는 그 절실한 표정과 유려한 손 동작도 참 마음에 든다. 제일 좋은 건 피날레 부분에서 단독으로 '산다는 게 연극 같아' 할때, '피가 끓고! 울고 웃기도 하겠지' 하면서 턴을 하는데, 턴 할 때 흩날리는 땀방울이 난 그렇게 좋더라.
- 그리고 사실 제일 걱정 많이하고, 그만큼 기대하고 있던 2막의 시작 '사느냐 죽느냐' 넘버. 가성을 써서 투명하고 맑은 음색으로 그 시린 감성을 표현해야 하기에 제대로 목소리가 나와주려나 했는데, 역시나 기우였고, 너무 너무 깨끗하고 선명한 음색이었다. 사는 거나 죽는 거나 나에겐 매한가지라는 저 우울한 왕자님을 어쩌면 좋냐. 복수가 이미 그를 갉아먹고, 그 마음은 녹슨 꿈을 찾아 헤매는데, 오히려 이성은 더더욱 차갑고 또렷해져서, 차마 눈뜨고 보기 힘겨운 현실을 뜨거운 감성으로 속일 수도, 외면할 수도 없게 된 저 가여운 왕자님.
연극을 통해 클로디어스의 악행이 드러난 순간 정말 그 분노의 오라가 이글이글 가시적으로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만큼 온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서 부들부들 떠는데, 진심으로 오싹했다.
- 저 클로디어스를 향한 분노의 감정선이 Chapel -> 거트루트의 침실 장면 -> 폴로니우스 살해 장면으로 이어지며 폴로니우스 살해 장면에서 그 분노의 감정이 일시에 와해되는데, 오늘 이 장면에서 새롭게 디테일이 바뀌면서 좀더 햄릿이라는 캐릭터를 박은태화 시켰다고할까. 아, 하여간 오늘 이 장면에서의 연기는 내게 깜짝 상자와도 같은 충격이었다.
클로디어스를 죽이려다 기도하는 모습에 포기하고 단검을 손에 든 채 살기 등등한 모습으로 어머니─를 세번이나 부르며 달려들어온 은릿. 아들 손에 들린 칼을 보고 겁을 먹지만, 그래도 너는 사랑하는 내 아들이라며 품어주려는 어머니를 차마 칼든 손으로 안길 수 없어 뿌리치고 뒤돌아 가려는 제스춰를 했었는데, 이날은 어머니의 저 회유하는 말에 괴로워하며 머리를 감싸쥐는 걸로 디테일이 바뀌었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하면 네가 다시 웃을 수 있겠니'라는 거트루트에 말에 홱 돌아서 바위에 칼을 꽂는데, 저렇게 바뀐 디테일이 더 햄릿의 감정을 확실하게 보여줘서 도대체 얼마나 연구하고 매달리는 건가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어머니를 향해 진실을 보라며 행패부리는 정도는 갈수록 업되어가고 있고, 그런 만큼 어머니가 자신을 이해해 달라며, 네 아버지와의 결혼 생활은 불행했다고 하는 장면에서 슬픔은 더 깊어졌다. 거트루트도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고, 저렇게 버럭대는 아들을 보며 답답한 마음에 속내를 털어놨겠지만, 난 사실 네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노라고 하면, 그 아이가 받을 충격은 어쩌라는 건가.
알고싶지 않았던 불편한 진실(;)까지 복수심에 끼얹어 진짜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태인 은릿이 선왕의 유령까지 보게되면서 결국 살인을 저지르는데, 여기서도 연기에 디테일이 붙어서 선왕의 유령이 외면하고나자 힘이 풀려서 휘청이다 손에 든 피묻은 칼을 보고 경악하는 그 과정이 하나 하나 확실하게 눈에 들어오게 바뀌었다.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혼란스럽고 겁이 나서 어쩔 줄 몰라하다 어머니가 끌어안아주니 간신히 진정을 하고 과연 내가 찌른 사람은 누군가 확인하는데, 그게 오필리어의 아버지, 폴로니우스라고 밝혀지자 이 왕자님 정신줄을 놓기 시작한다. 내가 진짜로 폴로니우스를 죽인 건가 믿고싶지 않아서 폴로니우스를 끌어안고 추는 시체춤. 정신차려, 춤 춰야지- 는 마치 어린애들이 '야 장난치지 말고 일어나' 라고 하는 것 같다. 믿고싶지 않지만 이게 현실이라는 걸 깨닫고 당황하고 놀라서 폴로니우스의 시체를 커튼에 싣고 유기하는 장면에서 전에도 참 실감나게 연기 잘 한다 싶었는데, 이 날은 시체를 끌고 가며 다리 힘 풀려 주저않을 것 같은 디테일도 추가해서 속으로 '이 자식~' 하고 감탄했다. 어디까지 계산한 거니 싶어서.
- 무덤지기와 한바탕 흥겹게 놀고 바로 이어지는 오필리어의 장례식 장면. 아, 지금까지 언급을 안했는데, 오늘 동석 레어티스는 폭주 기관차였다. 1막, 2막 할 거 없이 어찌나 감정과잉에 날뛰어주시는지; 특히 2막 Killer's name에서 자꾸 폭주하는 바람에 후음 길게 빼서 듀엣 맞춰줘야 하는 범클로를 엇박치게 만들었다.
하여간 동레어가 절절하게 오필리어를 무덤에 눕히고 절망속에 '너 없는 이세상 무슨 의미가 있을까'에서 그나마 살짝 힘을 빼줘서 참 좋았던 그 뒤로 은릿이 휘청거리며 등장, 또 너무 절절하게 오필리어에게 용서를 구하며, 그대로 무덤속에 따라 들어가 누울 기세. 동레어 눈이 뒤집혀서 네가 무슨 염치로 여기에 나타나, 가식 떨지 말라며 달려들자, 은릿도 거기에 맞받아쳐서 강하게 나오는데, 나는 이런 둘의 작용 - 반작용이 참 좋더라. 상대 배우에 따라 반응이 달라지는 게 어쩌면 당연한 건데, 그 당연한 걸 또 너무 적절하게 수위 조절해가며 대응해주니까 균형이 맞아서 어느 한 쪽이 밀고 밀리고 하지 않는 게 마음에 든다. 하여간 폭주하는 동레어에 맞게 같이 감정 터트리며, 나도 죽을만큼 힘들다고 온 몸으로 부딪혀오는 은릿을 볼 수 있어서, 내가 태을 레어를 좀 더 애정하지만, 동레어도 놓을 수가 없는 거지.
저렇게 둘이 활활 불타오르니, 이후 결투씬은 안봐도 비디오, 칼싸움이 참 이렇게 격렬한 거 처음 본 듯. 동레어 진짜 죽을둥 살둥 덤벼들어서 은릿은 간신히 간신히 막아내는 형국이다가 동레어에게 한 방 얻어맞고 호승심 끓어오르는 거 참 좋더라. 그래도 그 전엔 지가 지은 죄가 있으니 손속을 좀 두다가 저렇게 한 방 먹고 달려들려다가 거트루트가 갑자기 너희의 평화를 위해 이 잔을 들겠다고 하자, 잠시 소강상태에서 어머니의 축배(그게 독배인 줄 모르니까)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다가갔다가 레어티스의 불의의 일격을 맞게 되는데, 독에 대한 건 아무것도 모르는 햄릿은 그저 레어티스의 비겁한 일격에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서 덤벼들게 되고, 극은 비극적 몰살을 향해 달려간다.
- 모든 사건의 배후에 클로디어스가 있음을 알게된 후 지르는 '클라우디우스──'는 들을 때마다 전율이다. 그 목소리에 담긴 원망, 분노, 살의, 절망 그리고 허무. 내 심장도 같이 산산히 부서지는 것 같은 느낌. 혹은 산산히 깨진 유리 파편이 심장에 박히는 것 같은 느낌. 진짜 어떻게 저런 목소리를 내지.
극의 마지막, 사는 게 죽는 것과 다를 게 없다는 저 아프고 힘겨운 왕자님이 그저 평안한 안식을 얻기를 바라며, 나도 호레이쇼와 같은 마음이 된다. 그리고 이렇게 아름다운 비극을 선사해준 배우분들에게 박수를~
+ 자잘한 사건 하나. 범클로께서 햄릿의 연극 때문에 분노하는 장면에서 폴로니우스의 충언에 열받아서 '듣기 싫다! 당장 꺼져─!' 하시는데, 저 꺼져~할때 갑자기 목소리가 뒤집히시는 바람에 웃음이 터지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어제 노담콘이 남긴 영향이라고 믿겠습니다ㅋㅋㅋㅋㅋㅋㅋ
++ 이날 뮤지컬 배우 정성화 씨가 햄릿을 보러오셨다. 티켓 찾는 줄에서 정성화 씨를 보고 긴가민가 하고 있었는데, '박은태 지인..'이라고 하셔서, 맞구나 했다. 소심한 나는 사인 요청도 못하고 그냥 보내드렸;
일 시 : 2011. 10 .20 ~ 2011. 12. 17
장 소 : 유니버설 아트센터
관극일 : 2011. 11. 22 (화) 20:00
음악 / 대본 : 야넥 레데츠키 , 원작자 : W.셰익스피어
연 출 : 로버트 요한슨, 음악감독 : 원미솔
캐스트 : 햄릿 - 박은태, 오필리어 - 윤공주, 레어티스 - 전동석, 거트루트 - 신영숙, 클로디어스 - 서범석, 폴로니우스 - 김성기
연일 계속되는 공연 관람으로 극도의 수면부족 ㅠ.ㅠ 그래 아직 노담콘 후기도 미완이지만, 오늘 받은 감동이 식기전에 어떻게든 후기를 적으리라 무거운 눈꺼플을 참아가며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가, 결국엔 잠에 지고 말았다. OTL 전엔 밤새고 다음 날 출근도 거뜬했지만, 이젠 예전의 내가 아니라. 어흐흐흐흑, 노화는 이렇게 진행되는 것인가 ㅠ.ㅠ
- 서론이 길어졌는데, 한마디로 이날 공연을 보고난 첫 감상은 이거였다.
내가 박은태라는 배우를 참 과소평가했구나.
전날 노담콘 보면서 목상태가 안 좋은 게 너무 확연해서 내일 공연은 어쩌려나 그랬었다. 아니, 진성은 쥐어짜서라도 지를 수 있지만, 가성에서 목소리 탁해진 건 어쩔거냐며. 그래서 이날 공연을 보러가는 길에 좀 걱정을 하고 갔는데, 웬걸, 1막의 시작 장례식 씬에서 '아버지, 고백할 게 하나 있어요~' 하고 첫 일성을 내뱉는데, 여전히 맑고 투명한 시린 음색인 거다. 그리고 '왜 가↗셨나요~ 한 마디 말없이~'에서도 힘있게 쭉 올려주는데 이 때 벌써 그 감성이 참 아프고 서러운 음색이라, 오늘도 레전드 찍겠구나 예감할 수 있었다.
오늘자 인터뷰 기사에 보니 이제 자기 목에 대한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하더니만, 그래서 그렇게 마음놓고 갈성으로 마구 그르렁대는 건가. 듣는 사람은 그 미성이 탁해질까 걱정하고 있었더니만. 하여간 전날 노담콘에서 '달'을 듣고 걱정했던 게 무색하게 이날 은릿은 여전히 고음에서 맑고 투명한 음색이었고, 지붕 날릴 것 같은 성량은 덤이었다.
게다가 내가 매번 놀라지만, 화요일, 새로운 주차 시작이라 이거지. 그새 연기에 디테일이 더 추가되어서, 재관람자만의 폐해(?)겠지만, 달라진 연기 부분에서 너 이 자식~ 하고 육성 관크할 뻔했;;
- 똑같은 공연이 계속 반복되는데, 그럼에도 계속 그 공연장으로 향하게 하는 이유는, 무대위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이 항상 똑같이 연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는 일이라 그날 그날의 표정, 눈빛, 손짓, 노래에 실린 감성 같은 것이 틀에 찍어낸 것 처럼 똑같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배우가 반복되는 공연에 매너리즘에 빠진다면 그건 고스란히 관객에게도 전달된다. 재미있게도 무대와 객석은 소통을 하기에 그런 매너리즘은 첫 관람자라해도 느낄 수 있다는 거.)
하여간, 그렇게 같은 장면, 같은 대사라도 매 공연 똑같을 수는 없는데, 거기에 은태는 아직도 계속 연구하고 고민한 결과를 매 주차 첫 화요일 공연에 풀어놓는 것 같단 말이지. 아,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짐작이고 예상일 뿐이다. 왜냐면 매주 화요일마다 확확 달라져서 돌아오니까, 정말 이거 계산하고 있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 수 밖에.
- 결혼식 장면에서 은릿이 확실하게 노선을 정리하면서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화려하게 피어난 어머니를 바라보며 착잡한 마음이 들지만, 그래도 어머니가 저렇게 행복해 하니 어쩔 수 없지않나...체념하며 참석한 결혼식에서 클로디어스에 대한 혐오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도 좀 더 세련되어졌다. 뿌리치는 동작은 오히려 절제되었는데, 표정이나 분위기는 훨씬 더 까칠해졌다. 아니, 사실 성문이 내려가면서 그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 저건 고슴도치다 싶더라. 아주 가시를 잔뜩 곤두세운 고슴도치. 나 건들지 마─ 백마디 말보다 그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움. 범클로께서 환영의 표시로 팔을 벌려 맞아주는데, 찬바람 쌩하니 외면하는 것도 오늘은 눈에 들어오더라. 그렇게 잔뜩 곤두세운 가시도 어머니가 '너도 이제 아이가 아니잖니.' 나를 좀 이해해다오 하니 누그러뜨렸다가도 '사랑 오직 사랑'을 외치며 너도 사랑에 빠져서 우리랑 한 패가 되어보자~ 하니, 또 잔뜩 가시를 세우고는 연회장을 떠나는데, 도입부에서 이렇게까지 캐릭터에 디테일이 쌓여가는구나 싶어서, 이게 막공 즈음이 되면 과연 어디까지 진화할까 기대감이 부풀어오른다. 그리고 이어지는 Why me 에서 전날 목상태 걱정했던 걸 말끔히 씻어주며 성량으로 압도하며 퇴장.
- 선왕의 유령이 꿈에 나타나고 부르는 '피는 피로써'에서 오늘은 참 이불을 예쁘게 잘도 둘러서 칭찬. 그리고 이 장면에서 상체 근육에 힘이 빡 들어가서 잔근육이 세세하게 다 떠오르는 걸 보고 있자면, 정말 온 몸으로 노래하고 절규하고 분노를 터트리는구나 싶어, 저 결벽하고 예민한 정신의 왕자님이 참 용케 거기서 뛰어내리지 않았구나 안도하는 한 편, 저 상황에서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으려면 그 마음이 참 천갈래 만갈래 겠구나 안스러운 마음이 든다.
- 미친 척이 아니라 사실상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던 햄릿에게 폴로니우스는 그게 왕자가 다 사랑에 빠져 그렇다면서 그를 사랑의 열병에 걸린 애송이 취급하고 조롱하는데, 이 장면에서 은릿이 또 연기가 바뀌었다. 대사톤이 완전 냉소적으로 바뀌면서 그래, 나는 돌았어. 니들 눈엔 내가 미친 걸로 보이지? 정말 돌아버리는 게 뭔지 보여줘? 뭐 이런 마음의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폴로니우스가 부르는 He's crazy에서 '예전에 그는 백성들의 존경받는 왕자님'이라고 하는데, 저거 '존경'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바꾸는 편이 낫지 않을까. 사심 좀 담아서 내가 보기엔 원작의 햄릿도 그렇고, 뮤지컬의 햄릿도 존경보다는 백성들의 이쁨을 받는, 아이돌스러운 인기많은 왕자님 분위기에 더 어울리는 것 같아서 말이지.
- 이어지는 '수녀원에 가', '증거가 필요해', '오늘 밤을 위해'에서 보여주는 낙차 큰 감정의 표변, 폭발적인 가창력은 뭐 이제 칭찬하는 것도 입 아플 지경이다. 특히 '오늘 밤을 위해'에서 이젠 탭댄스 출 때의 표정이 정말 근사해졌다. 어깨에 힘이 확실하게 빠지면서 살짝 그루브도 타기 시작했고, '사랑하는 내 모든 것, 시간이 지나면 연기처럼 사라져~' 부분에서 보여주는 그 절실한 표정과 유려한 손 동작도 참 마음에 든다. 제일 좋은 건 피날레 부분에서 단독으로 '산다는 게 연극 같아' 할때, '피가 끓고! 울고 웃기도 하겠지' 하면서 턴을 하는데, 턴 할 때 흩날리는 땀방울이 난 그렇게 좋더라.
- 그리고 사실 제일 걱정 많이하고, 그만큼 기대하고 있던 2막의 시작 '사느냐 죽느냐' 넘버. 가성을 써서 투명하고 맑은 음색으로 그 시린 감성을 표현해야 하기에 제대로 목소리가 나와주려나 했는데, 역시나 기우였고, 너무 너무 깨끗하고 선명한 음색이었다. 사는 거나 죽는 거나 나에겐 매한가지라는 저 우울한 왕자님을 어쩌면 좋냐. 복수가 이미 그를 갉아먹고, 그 마음은 녹슨 꿈을 찾아 헤매는데, 오히려 이성은 더더욱 차갑고 또렷해져서, 차마 눈뜨고 보기 힘겨운 현실을 뜨거운 감성으로 속일 수도, 외면할 수도 없게 된 저 가여운 왕자님.
연극을 통해 클로디어스의 악행이 드러난 순간 정말 그 분노의 오라가 이글이글 가시적으로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만큼 온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서 부들부들 떠는데, 진심으로 오싹했다.
- 저 클로디어스를 향한 분노의 감정선이 Chapel -> 거트루트의 침실 장면 -> 폴로니우스 살해 장면으로 이어지며 폴로니우스 살해 장면에서 그 분노의 감정이 일시에 와해되는데, 오늘 이 장면에서 새롭게 디테일이 바뀌면서 좀더 햄릿이라는 캐릭터를 박은태화 시켰다고할까. 아, 하여간 오늘 이 장면에서의 연기는 내게 깜짝 상자와도 같은 충격이었다.
클로디어스를 죽이려다 기도하는 모습에 포기하고 단검을 손에 든 채 살기 등등한 모습으로 어머니─를 세번이나 부르며 달려들어온 은릿. 아들 손에 들린 칼을 보고 겁을 먹지만, 그래도 너는 사랑하는 내 아들이라며 품어주려는 어머니를 차마 칼든 손으로 안길 수 없어 뿌리치고 뒤돌아 가려는 제스춰를 했었는데, 이날은 어머니의 저 회유하는 말에 괴로워하며 머리를 감싸쥐는 걸로 디테일이 바뀌었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하면 네가 다시 웃을 수 있겠니'라는 거트루트에 말에 홱 돌아서 바위에 칼을 꽂는데, 저렇게 바뀐 디테일이 더 햄릿의 감정을 확실하게 보여줘서 도대체 얼마나 연구하고 매달리는 건가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어머니를 향해 진실을 보라며 행패부리는 정도는 갈수록 업되어가고 있고, 그런 만큼 어머니가 자신을 이해해 달라며, 네 아버지와의 결혼 생활은 불행했다고 하는 장면에서 슬픔은 더 깊어졌다. 거트루트도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고, 저렇게 버럭대는 아들을 보며 답답한 마음에 속내를 털어놨겠지만, 난 사실 네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노라고 하면, 그 아이가 받을 충격은 어쩌라는 건가.
알고싶지 않았던 불편한 진실(;)까지 복수심에 끼얹어 진짜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태인 은릿이 선왕의 유령까지 보게되면서 결국 살인을 저지르는데, 여기서도 연기에 디테일이 붙어서 선왕의 유령이 외면하고나자 힘이 풀려서 휘청이다 손에 든 피묻은 칼을 보고 경악하는 그 과정이 하나 하나 확실하게 눈에 들어오게 바뀌었다.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혼란스럽고 겁이 나서 어쩔 줄 몰라하다 어머니가 끌어안아주니 간신히 진정을 하고 과연 내가 찌른 사람은 누군가 확인하는데, 그게 오필리어의 아버지, 폴로니우스라고 밝혀지자 이 왕자님 정신줄을 놓기 시작한다. 내가 진짜로 폴로니우스를 죽인 건가 믿고싶지 않아서 폴로니우스를 끌어안고 추는 시체춤. 정신차려, 춤 춰야지- 는 마치 어린애들이 '야 장난치지 말고 일어나' 라고 하는 것 같다. 믿고싶지 않지만 이게 현실이라는 걸 깨닫고 당황하고 놀라서 폴로니우스의 시체를 커튼에 싣고 유기하는 장면에서 전에도 참 실감나게 연기 잘 한다 싶었는데, 이 날은 시체를 끌고 가며 다리 힘 풀려 주저않을 것 같은 디테일도 추가해서 속으로 '이 자식~' 하고 감탄했다. 어디까지 계산한 거니 싶어서.
- 무덤지기와 한바탕 흥겹게 놀고 바로 이어지는 오필리어의 장례식 장면. 아, 지금까지 언급을 안했는데, 오늘 동석 레어티스는 폭주 기관차였다. 1막, 2막 할 거 없이 어찌나 감정과잉에 날뛰어주시는지; 특히 2막 Killer's name에서 자꾸 폭주하는 바람에 후음 길게 빼서 듀엣 맞춰줘야 하는 범클로를 엇박치게 만들었다.
하여간 동레어가 절절하게 오필리어를 무덤에 눕히고 절망속에 '너 없는 이세상 무슨 의미가 있을까'에서 그나마 살짝 힘을 빼줘서 참 좋았던 그 뒤로 은릿이 휘청거리며 등장, 또 너무 절절하게 오필리어에게 용서를 구하며, 그대로 무덤속에 따라 들어가 누울 기세. 동레어 눈이 뒤집혀서 네가 무슨 염치로 여기에 나타나, 가식 떨지 말라며 달려들자, 은릿도 거기에 맞받아쳐서 강하게 나오는데, 나는 이런 둘의 작용 - 반작용이 참 좋더라. 상대 배우에 따라 반응이 달라지는 게 어쩌면 당연한 건데, 그 당연한 걸 또 너무 적절하게 수위 조절해가며 대응해주니까 균형이 맞아서 어느 한 쪽이 밀고 밀리고 하지 않는 게 마음에 든다. 하여간 폭주하는 동레어에 맞게 같이 감정 터트리며, 나도 죽을만큼 힘들다고 온 몸으로 부딪혀오는 은릿을 볼 수 있어서, 내가 태을 레어를 좀 더 애정하지만, 동레어도 놓을 수가 없는 거지.
저렇게 둘이 활활 불타오르니, 이후 결투씬은 안봐도 비디오, 칼싸움이 참 이렇게 격렬한 거 처음 본 듯. 동레어 진짜 죽을둥 살둥 덤벼들어서 은릿은 간신히 간신히 막아내는 형국이다가 동레어에게 한 방 얻어맞고 호승심 끓어오르는 거 참 좋더라. 그래도 그 전엔 지가 지은 죄가 있으니 손속을 좀 두다가 저렇게 한 방 먹고 달려들려다가 거트루트가 갑자기 너희의 평화를 위해 이 잔을 들겠다고 하자, 잠시 소강상태에서 어머니의 축배(그게 독배인 줄 모르니까)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다가갔다가 레어티스의 불의의 일격을 맞게 되는데, 독에 대한 건 아무것도 모르는 햄릿은 그저 레어티스의 비겁한 일격에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서 덤벼들게 되고, 극은 비극적 몰살을 향해 달려간다.
- 모든 사건의 배후에 클로디어스가 있음을 알게된 후 지르는 '클라우디우스──'는 들을 때마다 전율이다. 그 목소리에 담긴 원망, 분노, 살의, 절망 그리고 허무. 내 심장도 같이 산산히 부서지는 것 같은 느낌. 혹은 산산히 깨진 유리 파편이 심장에 박히는 것 같은 느낌. 진짜 어떻게 저런 목소리를 내지.
극의 마지막, 사는 게 죽는 것과 다를 게 없다는 저 아프고 힘겨운 왕자님이 그저 평안한 안식을 얻기를 바라며, 나도 호레이쇼와 같은 마음이 된다. 그리고 이렇게 아름다운 비극을 선사해준 배우분들에게 박수를~
+ 자잘한 사건 하나. 범클로께서 햄릿의 연극 때문에 분노하는 장면에서 폴로니우스의 충언에 열받아서 '듣기 싫다! 당장 꺼져─!' 하시는데, 저 꺼져~할때 갑자기 목소리가 뒤집히시는 바람에 웃음이 터지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어제 노담콘이 남긴 영향이라고 믿겠습니다ㅋㅋㅋㅋㅋㅋㅋ
++ 이날 뮤지컬 배우 정성화 씨가 햄릿을 보러오셨다. 티켓 찾는 줄에서 정성화 씨를 보고 긴가민가 하고 있었는데, '박은태 지인..'이라고 하셔서, 맞구나 했다. 소심한 나는 사인 요청도 못하고 그냥 보내드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