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MLET
일   시 : 2011. 10 .20 ~ 2011. 12. 17
장   소 : 유니버설 아트센터
관극일 : 2011. 11. 03 (목) 20:00
음악 / 대본 : 야넥 레데츠키 , 원작자 : W.셰익스피어
연   출 : 로버트 요한슨, 음악감독 : 원미솔
캐스트 : 햄릿 - 박은태, 오필리어 - 윤공주, 레어티스 - 강태을, 거트루트 - 신영숙, 클로디우스 - 서범석, 폴로니우스 - 김성기

- 이놈의 오케스트라는 언제 정신차리려는가. 하루라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구나. 이번엔 1막의 하이라이트에서 기타가 맛이 갔다. 마치 조율이 안 된 것처럼, 줄이 늘어진 것 같은, 아니면 줄 하나가 끊어져서 음을 못 내는 것 같은 불안한 소리를 내서 식겁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은릿이 흔들리지 않고 제대로 음정 잡아서 노래는 끝까지 클린하게 해줬지만, 공연이 무슨 리허설도 아니고. 오케스트라 석이 개방형이 아니라서 뭔가 애로사항이라도 있는 걸까.

- 은릿의 연기는 점점 더 깊어지고 있고, 그럼에 따라 감정의 진폭도 커졌다. 이제는 슬슬 다크포스도 제대로 뿜어주고 있고. Why me에서 첫번째 '덴마크여~ 울고있나~' 는 역시 관객을 덴마크 국민들로 가정하고 부르는 것 같다. 오늘 더 확실하게 느껴지더라. 이 장면에서 호레이쇼와 주고받는 표정도 참 좋다. 짜증이 그득히 담겨있지만, 옆에서 깐족(;)대며 엄살떨지마라고 하면 표정 확 굳어져서 돌아보는 거 하며, 점점 깨알같은 디테일들이 파이 층처럼 겹겹이 쌓여가는 걸 보는 재미에 회전문을 도는 거지.

- 오늘 특히 '수녀원에 가' -> '증거가 필요해'로 넘어가는 감정선이 정말 좋았는데, 아프지만 잔인해질 수 밖에 없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 내 마음 한 조각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질풍노도의 햄릿의 감정을 절절하게 잘 표현해줬다. 전에는 괴롭혀놓고 죄책감도 못 느끼고, 그냥 자기가 처한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있구나 했는데, 이제는 갈피를 못잡고 내가 왜 이럴까...라고 헤매는 감정까지 손에 잡힐 듯 느껴진다. 1막 마지막의 플라멩코도 이젠 오그라들지 않고 볼 수 있을 정도가 되었고. ^^; 이제 그 분노와 복수심에 불타는 감정이 춤과 노래로 제대로 전달이 된다. 그런데, 오케스트라가 그걸 까먹는 짓을 하고 있으니 ㅠ.ㅠ

- 내가 정화 오필리어를 보기 전엔, 그래도 윤 오필리어도 꽤 괜찮다고 생각했었다. ㅠ.ㅠ 그런데 한 번 보고났더니, 이건 자꾸 아쉽고, 생각나고, 비교되고. 초반에 사랑에 빠진 순진한 소녀까지는 뭐 별다를 게 없지만, 햄릿에게 수녀원에나 가라는 폭언을 듣고 난 다음, 연극에서 재회하는 장면에서 두 오필리어가 참 다른 거라. 정화 오필리어는 싸늘하게 변한 햄릿이 다시 다가오는게 무섭지만, 그래도 햄릿을 밀어내지 않는다. 그런데, 윤 오필리어는 여기에서 햄릿에게 완전히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다. 아무리 폭언을 들었어도, 거기서 그렇게 마음을 닫아버리면, 이후에 아버지가 햄릿에게 죽임을 당한 걸 알고나서 미쳐버리는 게 좀 설득력이 없지 않나. 아직 햄릿을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있으니 미치는 거지, 그렇지 않다면 오빠랑 같이 원수를 갚겠다고 하는 편이 더 이해가 가지.

- 그리고 2막에서 미쳐서 등장하는 씬에서도 그렇다. 정화 오필리어는 얼핏보면 정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다 한 순간 뭔가 좀 이상한데..? 싶게 변모하는 거지. 윤 오필리어는 딱 등장하는 순간부터 미쳤구나, 그것도 완전 광년이로구나 싶다. 그런데, 이러면 레어티스가 오필리어를 발견하고 웃으며 다가가는 장면이 이상하잖아. 첫눈에 딱 봐도 상태가 이상한데 오빠가 그걸 못 알아차린다는게. 그래서 이 부분 윤공주 씨의 연기가 너무 과하게 앞서나간 것 같아 아쉽다. 오필리어가 미쳐버리기는 했지만, 정상과 비정상을 넘나드는 정도의 절제가 필요해보인다.

- 회전문을 돌다보면 이야기에 살을 붙이고, 상상으로 구멍을 메우다 정이 들어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오늘은 무덤지기 씬을 보며 원작과도 살짝 다른 이 장면이 이렇게 해석이 되더라.
폴로니우스를 본의 아니게(;) 죽이고 나서 햄릿은 아마도 몸을 숨겼을 거다. 아무리 일국의 왕자라 해도, 살인죄를 저질렀고, 클로디어스는 연극 상연 이후 벼르고 있었으니. (원작에선 영국으로 보내버렸지만, 뮤지컬 햄릿에선 생략되었음.)
그럴 때 제일 기댈 수 있는 사람은 절친한 호레이쇼였을 것이고, 호레이쇼는 햄릿을 은신처 같은 곳에 적당히 숨겨줬을 것이다. 그러다 숨어서 지내는 걸 갑갑해하는 햄릿을 생각해서 뭔가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 괴짜에 유쾌한 미치광이 무덤지기 소문을 들었을 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공동묘지라면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 곳. 이만한 자리가 없겠다 싶어 햄릿을 공동묘지로 데려간 게 아니었을까.
이 무덤지기 씬에서 보면 초반에 무덤지기 솔로가 진행되다가, 무대 뒤에서 호레이쇼가 먼저 나와 사방을 살피고, 썩 내켜하지 않는 햄릿을 데리고 등장한다. 햄릿은 그냥 돌아가겠다는 듯이 굴지만, 호레이쇼는 한 번 보기라도 하라는 듯 무덤지기 쪽으로 햄릿을 민다. 그리고 햄릿도 도피 생활에 갑갑하던 차에 무덤지기와 대화를 시작하는 거다. 그러다 무덤지기와의 대화가 점점 즐거워져서 자기도 모르게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씐나씐나~ 확실하게 기분전환~ 뭐 이런 분위기. 그러다 오필리어의 장례 행렬이 들어오니, 사람들 눈을 피해 다시 몸을 숨기고. 음~ 호레이쇼는 참 좋은 친구다. 그냥 친구라고 하기엔 묘한 기류가 흐르기는 해도ㅋㅋ

- 레어티스와의 결투, 어머니의 독살, 모든 사실이 밝혀지고 터트리는 절규까지, 극의 마지막으로 갈수록 폭발력이 대단하다. 1막 시작할 때의 그 얼음왕자 햄릿을 생각해보면, 그 감정의 변동폭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그걸 차근차근 쌓아올려서 일시에 폭발적으로 터트리고, 하얗게 재가되어 죽어가는 장면에서 오늘은 전에 없이 울컥 치밀어오르는 것이 있었다. 참 성장이 빠른 배우다. 다음 공연이 이렇게 기다려질 수가 없다.

- 오늘 커튼콜에서 강레어티스는 아예 오필리어를 공주님 안기로 탈취해가버렸다. 그걸 멍하니 바라보다 헤실헤실 웃고있는 은릿을 보고 있자니, 이눔아, 그러니까 햄릿과 오필리어 사이에 케미가 그 모양인 거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