樂/시청각

11. 11. 17 - HAMLET (박은태/강태을/윤영석/김장섭).

Lei 2011. 11. 18. 14:43
HAMLET
일   시 : 2011. 10 .20 ~ 2011. 12. 17
장   소 : 유니버설 아트센터
관극일 : 2011. 11. 17 (목) 20:00
음악 / 대본 : 야넥 레데츠키 , 원작자 : W.셰익스피어
연   출 : 로버트 요한슨, 음악감독 : 원미솔
캐스트 : 햄릿 - 박은태, 오필리어 - 윤공주, 레어티스 - 강태을, 거트루트 - 신영숙, 클로디어스 - 윤영석, 폴로니우스 - 김장섭

- 뮤지컬의 태생적인 한계[각주:1]를 뛰어넘어 정극에 맞먹는 비극을 선보여 놓고, 끝에 가서 그 비극적인 정서를 다 말아먹은 커튼콜. ㅋㅋㅋㅋㅋㅋㅋㅋ 아놔~ 진짜 그 장면 밖에 생각이 안나.ㅋㅋㅋ 그렇다고 그 유쾌한 커튼콜을 포기할 수도 없으니 진짜 딜레마다.
분명히 햄릿이 공연 초기에는 적응 안되는 랩에 태권브이 유령에 너무 원색으로만 뽑은 의상 등등 해서 햄릿에 병맛이라니, 연출가 양반 이게 웬말이요~ 했던걸, 공연이 진행되면서 배우들의 열연으로 정말 2막은 제대로 된 비극을 보여주고서는, 그걸 커튼콜에서 산산히 부셔버린다 그랬더니, 아놔~ 오늘 공연은 진짜 그 정점이었다. 어떻게 커튼콜에서의 그 강력한 한 방 때문에, 오늘 공연이 얼마나 좋았는데, 얼마나 비극적이고 처절했는데, 그거 다 휘발시켜버리냐고. ㅋㅋㅋ 그 장면만 생각하면 시도 때도 없이 실실 웃음이 터져나와서 미치겠닼ㅋㅋㅋ 어쩔거야, 햄릿 배우분들은 비극을 하다보니 오히려 대조적으로 커튼콜에서 개그에 욕심내시는 건가ㅋㅋㅋ
그러나 난 정말 오랜만에 윤공주 씨의 오필리어와 화해했고, 신영숙 님이 절정의 거트루트를 보여주셨고, 윤 클로디어스와도 어느 정도 화해의 가능성을 발견한 공연이었으니, 진짜로 다 휘발되기 전에 어떻게든 후기를 적어보련다. 그치만, 인간적으로 정말 너무 강력한 한방이었다. ㅠ.ㅠ`

- 일단, 오늘 조명 오퍼레이터는 누구였는지, 시작할 때 핀조명 켜야 할 거 잘못해서 무대 오른쪽 전체 조명 켜버리고, 이후로도 조명이 꼭 한 타이밍 씩 늦어서 참 쓰릴하게 만들었다. 들어올 때도 늦고, 꺼져야 할 때도 늦고 신입이신가요 -_-

- 신영숙 님의 거트루트는 그 폭발적인 가창력에 연기력이 묻히는 감이 좀 있다고 할까. 참 연기도 잘하시는 분인데, 노래가 워낙 훌륭하시니까 상대적으로 그 연기에 대한 평이 잘 없더라. 처음엔 거트루트라는 역에 신영숙 님은 너무 우아하고 고상한 캐릭터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들었는데, 뭐 죽은 남편 버리고 새 남편을 맞은 여자라고 우아함이나 고상한 기품이 없으란 법 있나. 게다가 클로디어스가 평생을 꿈꿔온 여인인데. 물론 신영숙 님의 거트루트는 왕비님이라기보다는 여왕님이라는 데에서 취향이 갈릴 수도 있겠다만.

이날 가장 좋은 연기는 역시 I'm untrue. 선왕 살해의 진실을 보여주려고 햄릿이 꾸민 연극이 파국으로 끝나고, 모두 떠나버린 연회장에 홀로 덩그러니 남은 거트루트는 파리하게 질려있는데, 그러면서도 굉장히 지친 모습이다. 자신은 그저 사랑받고 살고 싶었을 뿐인데, 눈 앞에 들이밀어진 진실에 눈돌리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지금 난 괜찮고, 행복하다 되뇌어도 그것은 공허한 울림일 뿐. 여기서 보여주는 영숙님의 거트루트는 어떤 느낌이냐면, 굉장히 잘 나가는 커리어 우먼이 사실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게 소원이라, 남들은 그 능력이 아깝다고 하는데도 뿌리치고 좋아하는 남자 만나서 가정에 안착하려고 했더니만, 이놈의 팔자는 왜 이 모냥인가 뭐 이런 느낌? 자기 자신의 행복도 중요하지만, 사랑하는 아들도 행복하기를 바라는 어머니로서 이 현실이 그냥 지치고 힘들다. 그래도 어느 하나 손에서 놓을 수 없기에 그녀의 갈등은 점점 더 깊어지고, 그만큼 상처도 많이 받는다.

아들놈이 아버지를 배신했다며 행패를 부릴 때도 그렇게 절망하진 않았는데, 오필리어의 죽음으로 슬픔에 빠진 아들을 위로하는 손길이 매정하게 뿌리쳐지자, 거트루트는 그 때 진심으로 절망하며 가슴 아파한다. 아들에게 완벽하게 거부당했다는 데서 오는 충격으로 신에게 차라리 나를 벌하지 그러셨냐며 자책하는 거트루트의 연기가 진짜 눈물 나더라. 그리고 죽어가는 순간에 햄릿을 찾으며 나를 용서하라고, 그리고 나를 기억해달라고 당부하는 거트루트는 그 때 이미 햄릿도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얼마나 더 절망했을까. 차라리 모르고 가셔서 다행이어요. ㅠ.ㅠ

- 내가 이제까지 윤공주 오필리어에 참 기대치가 높았는지, 사실 그 정도면 누가 봐도 훌륭한 오필리어였는데도 내 마음에는 차지 않았었는데, 이 날 공연에서는 그동안 투덜댔던 게 다 미안해질 정도로 너무너무 훌륭하게 오필리어를 연기하셔서 아주 감복했다. 실성한 오필리어가 첫 등장할 때 그 부담스러운 눈빛도 많이 죽이셨고, 한 눈에 미쳤구나 싶지 않은 내가 딱 바라던 적정 수준의 오필리어. 그리고 해맑게 웃는 얼굴 위로 의식하지 않았지만 흐르는 눈물. 그게 너무 좋았다. 이미 미쳐버린 오필리어는 슬프다는 생각 따위 없겠지만, 자기도 모르게 계속 눈물이 흘러넘치는 거지. 정말 나는 이런 오필리어가 보고싶었다. 그리고 그런 오필리어를 바라보는 태을 레어티스는 또 얼마나 가슴 아픈 오빠 연기를 잘 하시는지. 동레어가 격하고 화려하게 감정표현을 한다면, 태을 레어티스는 정말 그 표현하는 감정이 딱 오빠의 감정 표현이라 참 좋더라.

- 그리고 오늘 너무 재미있으셨던 김장섭 폴로니우스. 결혼식 장면에서 여자 앙상블 사이에서 같이 춤추시고 덩실덩실 하시는 거 진짜 깨알같이 귀여우시고, 아들 프랑스로 유학 가는데, 이 나라의 기둥이 될 훌륭한 남자가 되어 돌아오길 기원한다고 해야할 걸, 훌륭한 "왕자"가 되어 돌아오길 바란다고 하셔가지고, 이젠 역성 혁명을 꿈꾸시는 거냐며ㅋㅋㅋ
내가 초반에는 좀 광대스러운 김성기 폴로니우스 쪽에 기울었는데, 이젠 귀족스러운 재상 폴로니우스가 더 좋다. 역시 사람은 잘생기고 볼 일인가. 김장섭 님은 참으로 훈훈한 중년 미남이신데다 기럭지도 훌륭하셔서. 프랑스로 유학가는 레어티스를 배웅하는 자리에서 김장섭 님 검은 코트가 얼마나 멋들어지게 잘 어울리시는지, 남들은 두 남매 꽁냥거리는데 시선이 가있을 때, 나는 장섭님 모델 워킹 보느라 정신이 팔려있지.
저렇게 댄디한 아버지, 훤칠한 오빠를 둔 오필리어는 날 때부터 눈이 이마에 가 붙어있었을 테고, 진짜 "왕자님" 아닌 다음엔 눈에 차지도 않았겠다 싶다.
하여간 이 장면에서 김장섭 폴로니우스가 두 남매에게 보여주는 부정은 너무나 훈훈하고 애틋해서, 이 후에 비극성이 더 높아지는 것같다. 사랑한다, 송충이들~ 이라고 하시는 거 하며, 앙상블과 함께 퇴장하시면서도 '솔잎을 먹어야 해~' 하시며 깨알같이 애드립. 그런데, 이렇게 마구 유쾌하게 아들과 이별하셔도 되는 거냐며ㅋㅋㅋ 덕분에 레어티스와 오필리어가 이별 인사를 나누는 장면까지 그 웃음기가 남아 뒤에 감정 잡는 게 좀 힘들지 않았나 싶었다.

- 은릿 얘기를 안 하고 넘어갈 수가 없는데, 정말 매일 조금씩 조금씩 변화하는 게 보여서 이걸 뭐라고 해야하나. 이제는 한 대사를 치면서도 표정이 서너가지 확확 변화하는 단계까지 왔다. 대표적으로 참 별거 아닌(?) 장면이지만, 2막에서 연극을 시작할 때, 무대 앞으로 나와서 객석을 향해 '신사 숙녀 여러분, 연극의 막을 올립니다.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하고 관객의 박수를 유도하는 저 한 소절 안에서도 표정이 확확 바뀌는 거다. 영업용 스마일로 시작해서 섬뜩하게 눈빛을 빛내다 냉소로 바뀌는 그 변화가 순식간에 보이는데 이래서 앞자리 덕후는 다시는 뒤로 못간다는;;

'수녀원에 가' 넘버에서도 오필리어를 3번 뿌리치는데, 그 강도가 조절이 되어서, 전에는 처음부터 강하게 뿌리치는 거였다면, 이제는 서서히 강도가 세지는 게 보이더라. 처음엔 그냥 타이르듯 수녀원에나 가라고 하고, 두번째는 연애편지를 구기면서 좀 더 강한 의사 표현, 그리고 세번째에 가서 굳은 결심을 하고 아주 퍼붓는 거다. 제발 내 말좀 들어! 라는 듯. 저 세번째의 수녀원↗에나 가─를 참 언제 들어도 서슬 퍼렇게 질러줘서, 오필리어가 너무 가엽다....이러고 있는데, 또 뒤돌아 혼자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은릿을 보고 있자면, 이쪽도 만만찮게 인생 꼬여서 너무 불쌍한 거지. ㅠ.ㅠ
그리고 나날이 마지막 장면에서의 감정선이 숨도 못 쉴만큼 밀도가 높아져가는데, 진짜 매번 울컥울컥 하게 되는데, 그 여운을 음미할 시간이 너무 짧단말이지. 이것이 뮤지컬 햄릿의 원죄로다 ㅠ.ㅠ

- 이날 커튼콜을 시작할 때만해도 그냥 평소대로 씐나씌나 하며 진행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는데, 김장섭 씨가 무덤지기로 등장할 때 보통은 옆으로 누운 자세로 올라오는데, 가부좌를 튼 부처님 모습으로 올라오셔서 한 번 빵 터트려주시더니, 이 날의 대박 사건은 마지막에 터지고야 말았다.
평소대로 은릿이 퇴장하려는 오필리어를 잡아당겨 포옹하고 오빠 레어티스가 등장해서 햄릿을 밀치길래, 오늘은 그냥 데려갈까 공주님 안기를 할까 이러고 있었는데 세상에 거기서 태을 레어티스가 은릿을 끌어안는 거다. 꼭 동생과 포옹하는 은릿 떼어놓고 나도 안아줘~라는 것 처럼. 아오, 진짜 이때 완전 머릿속 어딘가에서 '펑─'하고 터지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니까.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장면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냐면, 그 처절한 비극이고, 배우들의 열연이고 다 휘발시켜버릴 정도였다. 지금도 그 장면만 떠올리면 웃음이 터져나와 미치겠다. 아오, 그래도 이걸 두 눈으로 봤으니 다행이지 전해들었다면 난 또 얼마나 아쉬워했을 것이냐.ㅋㅋㅋ
오필리어~ 그와 헤어지면 안되겠니~♪ (feat. 레어티스) , 오빤 아빠보다 더 나빠 (feat. 오필리어) 그랬구나~오호홍홍홍

  1. 연극과 달리 대사, 연기를 노래와 춤으로 표현 해야하기 때문에 어떻게 해도 뮤지컬은 "쇼"적인 요소가 강해서, 연극만큼 몰입하기 어려운 조건이다. 대사 하다말고 노래하는 게 일반적인 건 아니니까.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