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잡상

비는 멀리서 내리는 바다

Lei 2005. 8. 10. 12:48

정확한 문구는 기억이 안나는데, 언젠가 페이퍼 실린 빗방울이 맺힌 버스 창문 사진 한장과 그 아래 저런 문장이 있었다.
오늘처럼 비가 앞이 안보이도록 쏟아져내리는 날에는 저 문구에 깊이 공감한다.
작은 삼단 우산 하나로는 쏟아져 내리는 바다를 버틸 재간이 없다.

사실은 이렇게 거침없이 쏟아지는 폭우를 좋아한다.
집안에서 비 구경하는 건 원래 좋아했지만, 이렇게까지 쏟아지는 날에는 그 속을 걸어봐도 좋겠다 싶을 정도로.
길에는 사람도 별로 없고, 우산 하나에 의지해서 물속을 걷는 것같은 느낌이라.

처음엔 신발 젖지 않게 웅덩이도 피하고, 조금이라도 비를 맞지 않게 우산을 바람의 방향으로 기울이고 하지만, 감당이 안될 정도로 쏟아지는 비 앞에서는 자포자기, 물 웅덩이도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고, 비 좀 맞으면 어때, 가방 좀 젖으면 어때...매여 놓은 것이 풀리는 듯한, 뭔가 그 순간의 일탈하는 느낌이 좋다.
어렸을 땐 비오는 날 비옷을 입고, 장화를 신으면 괜히 천하무적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는데...

길 위로 흐르는 빗물은 배수로의 용량을 넘쳐서 마치 강물처럼 더러운 것들을 싹 쓸어간다.
센과 치히로에서 본 비가 온 후 생긴 바다를 보는 기분으로 그 광경을 구경하다 진짜 어깨까지 다 젖었다.
결국 머리를 제외한 온몸이 흠뻑 젖었지만 오랜만에 후련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