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MLET
일 시 : 2011. 10 .20 ~ 2011. 12. 17
장 소 : 유니버설 아트센터
음악 / 대본 : 야넥 레데츠키 , 원작자 : W.셰익스피어
연 출 : 로버트 요한슨, 음악감독 : 원미솔
관극일 : 2011. 12. 17 (토) 15:00 | 햄릿 - 박은태, 레어티스 - 전동석, 클로디어스 - 윤영석, 폴로니우스 - 김장섭
2011. 12. 17 (토) 19:00 | 햄릿 - 김수용, 레어티스 - 강태을, 클로디어스 - 서범석, 폴로니우스 - 김성기
오필리어 - 윤공주, 거트루트 - 신영숙, 호레이쇼 - 이경수, 헬레나 - 이미경, 길던스턴 - 이용진, 로젠크렌츠 - 홍현표, 유랑극단 단장 - 장대웅, 사제 - 구원모, 유랑극단 여왕대역 - 이고운, 이정화(오필리어 얼터), 김승환, 박수진, 김용남, 박유덕, 오미영, 윤정열, 김솔잎(스윙)
- 햄릿의 서울 공연 막공일, 정말 끝까지 총막공을 가야하나 고민을 많이 했더랬다. 전에도 썼지만, 난 버릇이 있는 배우의 연기에는 집중을 하기 힘든 데다가, 발성이나 창법도 그렇지만, 용릿이 잡은 햄릿의 해석이 나와는 맞지 않는다는 걸, 여실히 깨달았기 때문에 끝까지 고민하다가, 그래도 가자고 마음 먹었던 건, 내가 회전문 가열차게 달려온 애정 공연에 대한 예의가 아닌가 싶은 마음이 반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덕질에 의무감은 필요악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래도 그냥 '악'이 아니라, '필요'악이니까, 다음에도 이번과 비슷한 경우가 닥치면, 나는 또 고민 끝에 결국은 보고나서 후회하는 쪽을 선택하겠지. 하여간 총막 공연을 보고나서 너무 허탈한 마음에 '내 햄릿은 아직 남아있다. 아직 고양 공연이 남아있어.'라고 수없이 되뇌었다. 그러니 은릿은 아직 햄릿을 털어버리면 아니되오!!!
- 처음에 햄릿 스케줄 나왔을 때 용릿이 첫공이라서, 그래도 더블인데, 그럼 은릿이 막공이겠네...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다가, 총막공도 용릿이라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스케줄 나온 거 보니까 OB/YB 나누어서 OB에게 첫공, 막공 맡긴 듯.
OB : 김수용(`76) / 서범석(`70) / 강태을(`80) / 김성기(`65)
YB : 박은태(`81) / 윤영석(`71) / 전동석(`88) / 김장섭(`69)
그래도, 은릿 막공 조합이 내가 좋아하는 조합의 배우들이라 불만은 없다. 게다가 첫공에서 나한테 평이 안 좋았던 윤클로의 눈부신 발전, 그리고 내 최애 폴로니우스로 등극하신, 햄릿과도 케미가 만들어지는 섭폴로에, 섭폴로일때 케미가 제일 좋은 동레어 까지. 첫공 조합으로 막공을 볼 수 있다는 건 어떤 의미에선 극의 성장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좋았다.
- 낮공, 내가 정말 좋아하는 극의 시작, 엘시노어 성벽에 비춰지는, 덴마크 왕실에 닥칠 비극을 상징하는 먹구름 짙게 드리운 하늘을 보고있는데, 시작부터 영상/음향 미스 작렬. 이때부터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지만, 결국 오필리어 매드씬에서 오케스트라가 대박으로 미스를 내서 배우가 당황해서 타이밍 놓치고, 겨우 겨우 맞춰 들어가게 만들었지. 이 장면에서 배우의 몰입이 얼마나 중요한데, 그걸 오케가 산산히 부셔버리는지. 원미솔 음감은 참 끝까지 화해를 할 수 없게 만든다고 투덜댔으나, 뭐 이것도 오늘로 끝. 어차피 고양은 MR로 공연할테니 차라리 그게 더 안정감 있을 것 같다는 이 슬픈 현실. 생각해보면 레전드 공연일 땐 거의 부음감이었더랬지. -_-`
- 음, 쓰려다보니 결국은 은릿 막공 위주에, 총막공이 뒤섞인 후기가 될 것 같은데, 이날 용릿의 목상태가 재앙 수준이었다는 걸 배제하더라도, 내가 용릿은 총막공으로 2번째 관극이라는 걸 생각하면, 두 햄릿을 비교하며 후기를 쓰는 건 언페어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나와 이렇게까지 해석이 갈리는 건 윤필리어 이후에 용릿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아서 아마도 별로 좋은 소리는 안 나오지 싶다;
- 나는 극의 시작 부분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관객을 객석이라는 현실에서 극으로 몰입시키기 위한 기선제압이라고 할지, 캐릭터를 얼마나 빠른 시간 안에 이해시키는가에 따라 극에 대한 집중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뮤지컬 햄릿의 막이 없이 개방된 무대는 관객을 장례식에 초대하는 의미도 되지만, 막이 오른다거나, 암전과 같이 이제 시작이다 하는 느낌은 좀 덜한 감이 있다. 그러나 곧바로 이어지는 비장한 분위기의 장례식이 시선을 압도하고, 그 엄숙한 공기 위로 여리게 물기에 젖어 파르르 떨리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음성, 통곡하듯 힘있게 쭉 올려주는 선명한 고음, 은릿의 목소리가 불러일으키는 시리고 차가운 북구의 느낌이 나는 정말 좋다.
아버지를 떠나보낼 준비가 아직 되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벌써 새 왕을 맞아 그 발밑에 무릎을 꿇고 그를 떠받든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다 그들이 다 떠난 뒤에야 아버지의 무덤으로 향하는 은릿. 막공까지도 이 장면에서 디테일에 살짝 변화가 생겼는데, 전에는 떠나는 행렬 쪽에 시선을 준 적이 없었는데, 16일 공연에서도 그렇고 그들을 향해 흘깃 시선을 한 번 주고는 무덤으로 걸어간다. 마치 이것으로 당신들의 애도는 끝인가...라는 듯한 시선. 무덤을 향해 내딛는 발걸음이 무덤에 다가갈수록 느려지면서 슬픔의 무게도 더해져, 애도의 마음을 담아 꽃 한송이를 던지고 돌아서는 얼굴에는 비통함이 한 가득. 차마 소리내어 울지도 못하고, 눈물도 없이 속으로만 울고있는 은릿. 이 장면에서 오히려 용릿이 더 담담하게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듯해서 이것도 의외라면 의외.
- 결혼식 장면. '사랑 오직 사랑' 넘버가 흘러나올 때, 가만히 뒤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은릿과 달리 용릿은 훨씬 적극적으로 구경한다. 은릿이 꼿꼿하게 선 채 눈만 내리깔고 반쯤 체념을 품고, 반쯤 비난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 장면에서, 나는 은릿이 만들어낸 햄릿은 자존심이 높고 결벽하고 예민한, 그리고 왕자의 품격을 갖춘 그런 캐릭터라고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그 캐릭터가 일관성있게 유지되기도 하고.
이 장면에서 용릿은 몸을 앞으로 쑥 내밀고 결혼 피로연 하객들을 품평하듯 적극적으로 찾아보고, 경멸을 표시하고 있었다. 아직 그걸로 어떤 햄릿이라고 파악하기엔 부족해서, 결혼식 이후에 이어지는 Why me를 보고서야 용릿이 잡은 햄릿이 파악이 되었다. 한마디로 "청년 14세"
전에 용릿 공연을 보고나서 용릿은 청년보다 소년의 인상이 강하다 했는데, 그 때 봤던 것보다 감정 표현이나, 고뇌의 깊이, 분노의 정도가 더 어려져서 갸우뚱하게 만들더니, 다소 산만한 고갯짓, 입술이 마르는지 자주 입술을 핥는 동작, 어딘지 모르게 흐느적거리는 듯한 몸짓에서 난 햄릿보다 '바스켓볼 다이어리'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강하게 연상됐다. 그런데, 정말 상체 탈의한 씬에서도 그렇고 놀라울 만큼 디카프리오와 싱크로율이 높아서 극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 내가 Why me 넘버를 개인적으로 좋아하기도 하고, 은릿과 이경수 호레이쇼가 워낙 절창으로 잘 불러주기도 해서 참 좋아하는데, 이게 초반에는 아직 배우의 해석이 다 녹아들어가지 못해서, 이 모든 짜증나는 상황이 왜 나한테 벌어진 거냐고 사춘기 중2병 왕자님이 찡얼찡얼대는 노래로 밖에 안들렸는데, 갈수록 배우의 해석이 들어가면서 이렇게 다르게 들리는구나 제대로 경험하게 해준 노래다.
은릿은 위대한 왕이신 아버지를 존경하고, 아름다운 어머니를 사랑하고, 그에 뒤지지 않게 스스로 소양을 키우며 (어쨌든, 깊이 사색하는 성격에 검술에도 어느 정도 실력이 있는 것으로 보아), 덴마크의 왕자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자부심이 아버지의 죽음, 어머니의 재혼으로 타격을 입고, 2막에서 거트루트의 고백 - 너의 아버지는 훌륭한 왕이었지만, 우리 결혼은 불행했단다 - 에 가서는 흔적도 없이 박살이 난거다.
그러나 은릿이 그 태생에 대한 자부심에 금이 갔다고 분노를 터트리는 거였다면, 이렇게까지 공감은 가지 않았을 것이다. 이 왕자님의 결벽한 자존심은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원래 세상은 다 그런 거라며 부정을 묵인하고 용인하는 덴마크를 허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덴마크는 썩어가고 있다고 열변을 토하며 분노하는 것이다.
그런 은릿을 보고 절친이라는 호레이쇼가 친구를 이해해주거나 다독이기는 커녕, 뒤로 갈수록 빙글빙글 웃으며 그를 희롱하기나 하다 외계지렁이 시선이나 받는게 안타깝다고 그랬는데, 저녁공을 보고 깨달았다. 이거 용릿에 맞춘 노선이구나.
용릿과 은릿은 그 분노의 크기, 깊이, 온도차가 상당하다. 피로연을 장식한 장미꽃 리스를 집어던지는 동작 하나에서도 은릿은 정말 화가 잔뜩나서 있는 힘껏 집어던진다면, 용릿은 매우 얌전하게 그저 장식을 떼어내 치워버린다는 수준이라, 은릿에 익숙한 내게 용릿은 너무 밋밋하고, 아마도 용릿에 익숙한 사람들은 은릿이 초반부터 폭주하는 걸로 비치겠다 싶더라. 그리고 호레이쇼의 리액션은 용릿과 만나니까 왜 저렇게 반응하는지 이해가 됐지만, 더블 캐스팅의 주인공들이 이렇게 완전히 다른 캐릭터로 연기를 하면, 원캐로 대응하는 배우는 양쪽에 맞게 연기를 해야하는 거 아닌가 싶은 아쉬움은 남았다. 이건 이경수 호레이쇼의 실력이 출중하고 잘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그 와중에 윤필리어는 참 일관되게 연기하더라;)
- 프랑스로 유학가는 레어티스를 배웅하며 장섭 폴로니우스의 잔소리가 이어지는 장면. 섭폴로, 동레어도 같이 막공이었는데, 이날 특히 장섭 폴로님께서 제대로 막공 삘을 타셔서, 사실 첫 등장 할 때 입가에 점을 보고 구느님처럼 점 하나 찍고 딴사람이 되시려고 그랬나 싶어 혼자 키득댔다. 원래도 참 자식 사랑 절절한 다정한 아버님이셨지만, 이날 따라 어찌나 물고 빨고 하시는 분위기인지. 그런데다 아버지 잔소리하다 손등에 침 좀 튀었다고 그걸 아빠 손등에 닦아내는 동레어나, 그걸 또 아들 볼에다 쓱 문지르시는 섭폴로님이나 아주 이리 다정한 부자지간이 또 있을까 싶게 훈훈한 분위기. 그런데 이날 앙상블들이 짰는지 원래 퇴장할 때 섭폴로님 떠메들고 나가야하는데, 그냥 내려놓고 자기들끼리 퇴장해버려서 당황하신 장섭님이 "얘들아~" 이러고 쫒아가셨더랬다. 그리고 장섭님의 수난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ㅋㅋㅋ
- 이날 동레어가 Sister 넘버에서 평소보다 힘을 많이 빼줘서 어딘지 처연한 레어티스를 보여줘서 참 좋았다. 내가 오빠 모드를 부르짖기는 했지만, 동석인 아직 어리니까효. 이만큼이라도 오빠 모드를 연기하려고 노력해준 것만으로도 대견하다. 동레어의 완급 조절이 매번 참 아쉽다 그랬는데, 그래도 막공에 와서는 어떻게 힘을 빼야하는지 조금은 터득하게 된 것 같더라. 2막 killer's name이야 아빠가 섭폴로님이면 충분이 납득이 가는 폭주라 논외로 치고. 이날 오필리어 매드씬에서 오케스트라 미스가 뼈아팠지만, 미쳐버린 오필리어를 보고 모든 기력을 잃고 슬픔에 빠져서 Sister rep.을 부르는데, 난 이렇게 처량하고 불쌍한 동레어는 처음이었다. 동생이 저리 된 것에 대한 슬픔과 자책이 너무 커서 햄릿에 대한 증오를 불태우는 것 조차 버거운 레어티스라니. 그리고 그 슬픔의 감정을 모조리 쏟아부어 햄릿과 결투하는 씬은 항상 그렇듯 저러다 은릿 죽일 기세라, 그걸 받아내는 은릿이 용하다 싶을 정도였다.
전에도 썼지만, 태을 레어가 독 묻은 칼을 잡기를 주저하는 연기도 그렇고, 태을 레어는 내 검실력으로 널 죽여주겠다는 쪽이라 죽기살기로 덤벼들지는 않는데, 동레어는 내가 치명상을 입든 말든 무조건 너 하나는 죽이고 말겠다라는 기세라서 방어는 없이 공격만 해대는 그런 인상. 그래서 은릿 - 동레어 결투씬은 뒤로 갈수록 그 박진감이 장난이 아니었는데, 막공이라고 봐주는 거 없이 또 엄청 격하더라. 거기에 비해 저녁공의 용릿 - 태을 레어의 결투씬은 어떻게 봐도 태을 레어가 살살해주는 게 보여서; 그리고 은릿 - 동레어/태을레어 일땐 비슷한 또래의 젊은 남자들의 대결같이 보이는데, 용릿은 '청년 14세'라, 안그래도 어른스러운 태을 레어랑 붙으니 이건 어른이 아이를 상대로 싸우는 것 같;
- 순서가 뒤죽 박죽이 되버렸지만, 내가 매 공연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는 '피는 피로써' 넘버. 사실 Let's rise above this world에서부터 목상태가 별로 안 좋구나 싶기는 했다. 가성이 뻑뻑하게 나오는 거 같아서. 그러더니, 피는 피로써 넘버에서 진짜 목 안 좋은 티가 났는데, 그럼에도 마지막 절규는 또 더 처절하게 질러줘서, 기백으로 극복하는구나 싶더라.
안그래도 16일 공연에서 그분이 오신 듯 뒤돌아볼 것 없이 터트려주더니, 사실 내가 본 중에 이날 은태 목 상태가 제일 안 좋았다. 그래도 공연 중에는 음이탈 없이 넘버를 모두 소화해냈고 (커튼콜에서의 삑사리는 애교로 봐주자;), 목상태가 안 좋을 땐 그걸 커버하기 위해 다른 부분에서 더 역량을 쥐어짜서 그 간극을 메우기 때문에 이날 공연도 완성도 면에서는 참으로 만족스러웠다. 무엇보다 공연 타이틀 롤로서 68회 공연 중 38회를 달려오면서 이 정도 목상태를 유지하며 막공을 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높은 성과라고 생각한다.
- 'He's crazy'에서 은릿이 오도방정이라고 했던 거, 저녁공의 용릿 보고나니 저건 그래도 점잖은 축에 속하는 거였구나 싶었다. 솔직히 저렇게 경박한 햄릿은 내 햄릿이 아니야 싶어서 눈물이 ㅠ.ㅠ
- '수녀원에 가'도 은릿과 용릿은 해석이 전혀 다르더라. 은릿이 일부러 더 잔인하게 굴어서 오필리어를 떼어놓으려고 한다는 걸 보여준다면, 용릿은 오필리어를 사랑하기에, 진심으로 오필리어가 수녀원에 가기를 바라는 것 같다고 할까. 그래서 굳이 잔인하게 굴지 않고, 진심을 담아 수녀원에 가라고 호소하는 느낌이다. 은릿이 일부러 상처주고, 그러면서 자신도 더 깊이 상처받는 그런 느낌이라 낙차 폭이 큰 그 표정 연기 보는 맛이 있었는데, 용릿은 그런 표변하는 감정선이 아니었다. (넘버 마지막 클라이막스 부분 수녀원↗에나 가~ 하는 부분을 용릿은 플랫하게 불러줘서 잠시 짜식;) 그리고, 그렇게 서로 다른 노선을 잡은 이유는 이 뒤에 드러나는데, 휘장막을 떼어낼 때, 은릿은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보이고, 용릿은 그 뒤에 폴로니우스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배신감을 느끼고 당혹해하는 쪽이었다. 은릿은 장막 뒤에 그들이 있다는 걸 알고 일부러 더 잔인하게 굴었다는 설정이고, 용릿은 그들이 있다는 걸 몰랐지만, 오필리어가 자신의 곁을 떠나 수녀원에서 보호받기를 바라는 마음인 듯 했다.
- 그렇게 두 햄릿의 '수녀원에 가'에서의 해석이 갈리니까 이후에 이어지는 '증거가 필요해'에서 괴로워하는 포인트도 달라진다. 용릿이 배신감에 고통스러워하는 쪽이라면, 은릿은 복수를 위해서 사랑하는 연인마저 상처입히는 내가 나인가, 나라는 사람이 복수를 위해서는 이렇게 잔인해질 수 있는가, 복수심에 사로잡혀 점점 변해가는 자신이 무섭고, 자신이 과연 어디까지 변해갈 것인지 생각하면 두렵고 혼란스럽기만 하다.
단 하나의 연인도 복수를 위해 버렸고, 세상에 혼자 남은 먹먹함을 위로해줄 유일한 친구 호레이쇼. 용릿과 호레이쇼는 그래도 어느 정도 얘기가 통하는 친구라는 느낌인데 반해서, 은릿은 호레이쇼에게 마저도 속내를 털어놓지 않는다는 느낌이다. (Why me에서의 대응을 생각해보면, 은릿이 저러는 게 이해가 되지만;) 이날 은릿 막공에서 그저 친구가 힘들어 하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하는 호레이쇼가 결국에 폭발해서 '내게 말해봐!' 라고 호소하는 대사를 '내게 말을 해!' 버럭으로 바뀐 게 납득이 될 정도였으니.
- '오늘 밤을 위해'는 넘버 자체가 플라멩코 풍에 춤까지 곁들여서 신나고 흥겨운 분위기인데, 가사 내용은 굉장히 철학적이다. '산다는 게 연극같아'라는 가사에 담긴 함축적인 의미도 그렇지만, '사랑하는 내 모든 것 / 시간이 지나면 먼지 처럼 사라져 / 언젠가는 우리도 사라지겠지 / 그러니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에 담긴 인생무상에 대한 내용도 그렇고.
이렇게 강렬하게 대비되는 묵직한 가사와 흥겨운 멜로디의 이중성이 바로 뮤지컬 햄릿의 매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극을 다루고 있지만, 가볍게, 너무 무겁지 않게.
+ 쓰고 또 써도 후기가 끝나지를 않아. ㅠ.ㅠ 2막은 TBD
일 시 : 2011. 10 .20 ~ 2011. 12. 17
장 소 : 유니버설 아트센터
음악 / 대본 : 야넥 레데츠키 , 원작자 : W.셰익스피어
연 출 : 로버트 요한슨, 음악감독 : 원미솔
관극일 : 2011. 12. 17 (토) 15:00 | 햄릿 - 박은태, 레어티스 - 전동석, 클로디어스 - 윤영석, 폴로니우스 - 김장섭
2011. 12. 17 (토) 19:00 | 햄릿 - 김수용, 레어티스 - 강태을, 클로디어스 - 서범석, 폴로니우스 - 김성기
오필리어 - 윤공주, 거트루트 - 신영숙, 호레이쇼 - 이경수, 헬레나 - 이미경, 길던스턴 - 이용진, 로젠크렌츠 - 홍현표, 유랑극단 단장 - 장대웅, 사제 - 구원모, 유랑극단 여왕대역 - 이고운, 이정화(오필리어 얼터), 김승환, 박수진, 김용남, 박유덕, 오미영, 윤정열, 김솔잎(스윙)
- 햄릿의 서울 공연 막공일, 정말 끝까지 총막공을 가야하나 고민을 많이 했더랬다. 전에도 썼지만, 난 버릇이 있는 배우의 연기에는 집중을 하기 힘든 데다가, 발성이나 창법도 그렇지만, 용릿이 잡은 햄릿의 해석이 나와는 맞지 않는다는 걸, 여실히 깨달았기 때문에 끝까지 고민하다가, 그래도 가자고 마음 먹었던 건, 내가 회전문 가열차게 달려온 애정 공연에 대한 예의가 아닌가 싶은 마음이 반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덕질에 의무감은 필요악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래도 그냥 '악'이 아니라, '필요'악이니까, 다음에도 이번과 비슷한 경우가 닥치면, 나는 또 고민 끝에 결국은 보고나서 후회하는 쪽을 선택하겠지. 하여간 총막 공연을 보고나서 너무 허탈한 마음에 '내 햄릿은 아직 남아있다. 아직 고양 공연이 남아있어.'라고 수없이 되뇌었다. 그러니 은릿은 아직 햄릿을 털어버리면 아니되오!!!
- 처음에 햄릿 스케줄 나왔을 때 용릿이 첫공이라서, 그래도 더블인데, 그럼 은릿이 막공이겠네...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다가, 총막공도 용릿이라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스케줄 나온 거 보니까 OB/YB 나누어서 OB에게 첫공, 막공 맡긴 듯.
OB : 김수용(`76) / 서범석(`70) / 강태을(`80) / 김성기(`65)
YB : 박은태(`81) / 윤영석(`71) / 전동석(`88) / 김장섭(`69)
그래도, 은릿 막공 조합이 내가 좋아하는 조합의 배우들이라 불만은 없다. 게다가 첫공에서 나한테 평이 안 좋았던 윤클로의 눈부신 발전, 그리고 내 최애 폴로니우스로 등극하신, 햄릿과도 케미가 만들어지는 섭폴로에, 섭폴로일때 케미가 제일 좋은 동레어 까지. 첫공 조합으로 막공을 볼 수 있다는 건 어떤 의미에선 극의 성장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좋았다.
- 낮공, 내가 정말 좋아하는 극의 시작, 엘시노어 성벽에 비춰지는, 덴마크 왕실에 닥칠 비극을 상징하는 먹구름 짙게 드리운 하늘을 보고있는데, 시작부터 영상/음향 미스 작렬. 이때부터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지만, 결국 오필리어 매드씬에서 오케스트라가 대박으로 미스를 내서 배우가 당황해서 타이밍 놓치고, 겨우 겨우 맞춰 들어가게 만들었지. 이 장면에서 배우의 몰입이 얼마나 중요한데, 그걸 오케가 산산히 부셔버리는지. 원미솔 음감은 참 끝까지 화해를 할 수 없게 만든다고 투덜댔으나, 뭐 이것도 오늘로 끝. 어차피 고양은 MR로 공연할테니 차라리 그게 더 안정감 있을 것 같다는 이 슬픈 현실. 생각해보면 레전드 공연일 땐 거의 부음감이었더랬지. -_-`
- 음, 쓰려다보니 결국은 은릿 막공 위주에, 총막공이 뒤섞인 후기가 될 것 같은데, 이날 용릿의 목상태가 재앙 수준이었다는 걸 배제하더라도, 내가 용릿은 총막공으로 2번째 관극이라는 걸 생각하면, 두 햄릿을 비교하며 후기를 쓰는 건 언페어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나와 이렇게까지 해석이 갈리는 건 윤필리어 이후에 용릿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아서 아마도 별로 좋은 소리는 안 나오지 싶다;
- 나는 극의 시작 부분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관객을 객석이라는 현실에서 극으로 몰입시키기 위한 기선제압이라고 할지, 캐릭터를 얼마나 빠른 시간 안에 이해시키는가에 따라 극에 대한 집중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뮤지컬 햄릿의 막이 없이 개방된 무대는 관객을 장례식에 초대하는 의미도 되지만, 막이 오른다거나, 암전과 같이 이제 시작이다 하는 느낌은 좀 덜한 감이 있다. 그러나 곧바로 이어지는 비장한 분위기의 장례식이 시선을 압도하고, 그 엄숙한 공기 위로 여리게 물기에 젖어 파르르 떨리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음성, 통곡하듯 힘있게 쭉 올려주는 선명한 고음, 은릿의 목소리가 불러일으키는 시리고 차가운 북구의 느낌이 나는 정말 좋다.
아버지를 떠나보낼 준비가 아직 되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벌써 새 왕을 맞아 그 발밑에 무릎을 꿇고 그를 떠받든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다 그들이 다 떠난 뒤에야 아버지의 무덤으로 향하는 은릿. 막공까지도 이 장면에서 디테일에 살짝 변화가 생겼는데, 전에는 떠나는 행렬 쪽에 시선을 준 적이 없었는데, 16일 공연에서도 그렇고 그들을 향해 흘깃 시선을 한 번 주고는 무덤으로 걸어간다. 마치 이것으로 당신들의 애도는 끝인가...라는 듯한 시선. 무덤을 향해 내딛는 발걸음이 무덤에 다가갈수록 느려지면서 슬픔의 무게도 더해져, 애도의 마음을 담아 꽃 한송이를 던지고 돌아서는 얼굴에는 비통함이 한 가득. 차마 소리내어 울지도 못하고, 눈물도 없이 속으로만 울고있는 은릿. 이 장면에서 오히려 용릿이 더 담담하게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듯해서 이것도 의외라면 의외.
- 결혼식 장면. '사랑 오직 사랑' 넘버가 흘러나올 때, 가만히 뒤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은릿과 달리 용릿은 훨씬 적극적으로 구경한다. 은릿이 꼿꼿하게 선 채 눈만 내리깔고 반쯤 체념을 품고, 반쯤 비난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 장면에서, 나는 은릿이 만들어낸 햄릿은 자존심이 높고 결벽하고 예민한, 그리고 왕자의 품격을 갖춘 그런 캐릭터라고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그 캐릭터가 일관성있게 유지되기도 하고.
이 장면에서 용릿은 몸을 앞으로 쑥 내밀고 결혼 피로연 하객들을 품평하듯 적극적으로 찾아보고, 경멸을 표시하고 있었다. 아직 그걸로 어떤 햄릿이라고 파악하기엔 부족해서, 결혼식 이후에 이어지는 Why me를 보고서야 용릿이 잡은 햄릿이 파악이 되었다. 한마디로 "청년 14세"
전에 용릿 공연을 보고나서 용릿은 청년보다 소년의 인상이 강하다 했는데, 그 때 봤던 것보다 감정 표현이나, 고뇌의 깊이, 분노의 정도가 더 어려져서 갸우뚱하게 만들더니, 다소 산만한 고갯짓, 입술이 마르는지 자주 입술을 핥는 동작, 어딘지 모르게 흐느적거리는 듯한 몸짓에서 난 햄릿보다 '바스켓볼 다이어리'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강하게 연상됐다. 그런데, 정말 상체 탈의한 씬에서도 그렇고 놀라울 만큼 디카프리오와 싱크로율이 높아서 극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 내가 Why me 넘버를 개인적으로 좋아하기도 하고, 은릿과 이경수 호레이쇼가 워낙 절창으로 잘 불러주기도 해서 참 좋아하는데, 이게 초반에는 아직 배우의 해석이 다 녹아들어가지 못해서, 이 모든 짜증나는 상황이 왜 나한테 벌어진 거냐고 사춘기 중2병 왕자님이 찡얼찡얼대는 노래로 밖에 안들렸는데, 갈수록 배우의 해석이 들어가면서 이렇게 다르게 들리는구나 제대로 경험하게 해준 노래다.
은릿은 위대한 왕이신 아버지를 존경하고, 아름다운 어머니를 사랑하고, 그에 뒤지지 않게 스스로 소양을 키우며 (어쨌든, 깊이 사색하는 성격에 검술에도 어느 정도 실력이 있는 것으로 보아), 덴마크의 왕자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자부심이 아버지의 죽음, 어머니의 재혼으로 타격을 입고, 2막에서 거트루트의 고백 - 너의 아버지는 훌륭한 왕이었지만, 우리 결혼은 불행했단다 - 에 가서는 흔적도 없이 박살이 난거다.
그러나 은릿이 그 태생에 대한 자부심에 금이 갔다고 분노를 터트리는 거였다면, 이렇게까지 공감은 가지 않았을 것이다. 이 왕자님의 결벽한 자존심은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원래 세상은 다 그런 거라며 부정을 묵인하고 용인하는 덴마크를 허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덴마크는 썩어가고 있다고 열변을 토하며 분노하는 것이다.
그런 은릿을 보고 절친이라는 호레이쇼가 친구를 이해해주거나 다독이기는 커녕, 뒤로 갈수록 빙글빙글 웃으며 그를 희롱하기나 하다 외계지렁이 시선이나 받는게 안타깝다고 그랬는데, 저녁공을 보고 깨달았다. 이거 용릿에 맞춘 노선이구나.
용릿과 은릿은 그 분노의 크기, 깊이, 온도차가 상당하다. 피로연을 장식한 장미꽃 리스를 집어던지는 동작 하나에서도 은릿은 정말 화가 잔뜩나서 있는 힘껏 집어던진다면, 용릿은 매우 얌전하게 그저 장식을 떼어내 치워버린다는 수준이라, 은릿에 익숙한 내게 용릿은 너무 밋밋하고, 아마도 용릿에 익숙한 사람들은 은릿이 초반부터 폭주하는 걸로 비치겠다 싶더라. 그리고 호레이쇼의 리액션은 용릿과 만나니까 왜 저렇게 반응하는지 이해가 됐지만, 더블 캐스팅의 주인공들이 이렇게 완전히 다른 캐릭터로 연기를 하면, 원캐로 대응하는 배우는 양쪽에 맞게 연기를 해야하는 거 아닌가 싶은 아쉬움은 남았다. 이건 이경수 호레이쇼의 실력이 출중하고 잘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그 와중에 윤필리어는 참 일관되게 연기하더라;)
- 프랑스로 유학가는 레어티스를 배웅하며 장섭 폴로니우스의 잔소리가 이어지는 장면. 섭폴로, 동레어도 같이 막공이었는데, 이날 특히 장섭 폴로님께서 제대로 막공 삘을 타셔서, 사실 첫 등장 할 때 입가에 점을 보고 구느님처럼 점 하나 찍고 딴사람이 되시려고 그랬나 싶어 혼자 키득댔다. 원래도 참 자식 사랑 절절한 다정한 아버님이셨지만, 이날 따라 어찌나 물고 빨고 하시는 분위기인지. 그런데다 아버지 잔소리하다 손등에 침 좀 튀었다고 그걸 아빠 손등에 닦아내는 동레어나, 그걸 또 아들 볼에다 쓱 문지르시는 섭폴로님이나 아주 이리 다정한 부자지간이 또 있을까 싶게 훈훈한 분위기. 그런데 이날 앙상블들이 짰는지 원래 퇴장할 때 섭폴로님 떠메들고 나가야하는데, 그냥 내려놓고 자기들끼리 퇴장해버려서 당황하신 장섭님이 "얘들아~" 이러고 쫒아가셨더랬다. 그리고 장섭님의 수난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ㅋㅋㅋ
- 이날 동레어가 Sister 넘버에서 평소보다 힘을 많이 빼줘서 어딘지 처연한 레어티스를 보여줘서 참 좋았다. 내가 오빠 모드를 부르짖기는 했지만, 동석인 아직 어리니까효. 이만큼이라도 오빠 모드를 연기하려고 노력해준 것만으로도 대견하다. 동레어의 완급 조절이 매번 참 아쉽다 그랬는데, 그래도 막공에 와서는 어떻게 힘을 빼야하는지 조금은 터득하게 된 것 같더라. 2막 killer's name이야 아빠가 섭폴로님이면 충분이 납득이 가는 폭주라 논외로 치고. 이날 오필리어 매드씬에서 오케스트라 미스가 뼈아팠지만, 미쳐버린 오필리어를 보고 모든 기력을 잃고 슬픔에 빠져서 Sister rep.을 부르는데, 난 이렇게 처량하고 불쌍한 동레어는 처음이었다. 동생이 저리 된 것에 대한 슬픔과 자책이 너무 커서 햄릿에 대한 증오를 불태우는 것 조차 버거운 레어티스라니. 그리고 그 슬픔의 감정을 모조리 쏟아부어 햄릿과 결투하는 씬은 항상 그렇듯 저러다 은릿 죽일 기세라, 그걸 받아내는 은릿이 용하다 싶을 정도였다.
전에도 썼지만, 태을 레어가 독 묻은 칼을 잡기를 주저하는 연기도 그렇고, 태을 레어는 내 검실력으로 널 죽여주겠다는 쪽이라 죽기살기로 덤벼들지는 않는데, 동레어는 내가 치명상을 입든 말든 무조건 너 하나는 죽이고 말겠다라는 기세라서 방어는 없이 공격만 해대는 그런 인상. 그래서 은릿 - 동레어 결투씬은 뒤로 갈수록 그 박진감이 장난이 아니었는데, 막공이라고 봐주는 거 없이 또 엄청 격하더라. 거기에 비해 저녁공의 용릿 - 태을 레어의 결투씬은 어떻게 봐도 태을 레어가 살살해주는 게 보여서; 그리고 은릿 - 동레어/태을레어 일땐 비슷한 또래의 젊은 남자들의 대결같이 보이는데, 용릿은 '청년 14세'라, 안그래도 어른스러운 태을 레어랑 붙으니 이건 어른이 아이를 상대로 싸우는 것 같;
- 순서가 뒤죽 박죽이 되버렸지만, 내가 매 공연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는 '피는 피로써' 넘버. 사실 Let's rise above this world에서부터 목상태가 별로 안 좋구나 싶기는 했다. 가성이 뻑뻑하게 나오는 거 같아서. 그러더니, 피는 피로써 넘버에서 진짜 목 안 좋은 티가 났는데, 그럼에도 마지막 절규는 또 더 처절하게 질러줘서, 기백으로 극복하는구나 싶더라.
안그래도 16일 공연에서 그분이 오신 듯 뒤돌아볼 것 없이 터트려주더니, 사실 내가 본 중에 이날 은태 목 상태가 제일 안 좋았다. 그래도 공연 중에는 음이탈 없이 넘버를 모두 소화해냈고 (커튼콜에서의 삑사리는 애교로 봐주자;), 목상태가 안 좋을 땐 그걸 커버하기 위해 다른 부분에서 더 역량을 쥐어짜서 그 간극을 메우기 때문에 이날 공연도 완성도 면에서는 참으로 만족스러웠다. 무엇보다 공연 타이틀 롤로서 68회 공연 중 38회를 달려오면서 이 정도 목상태를 유지하며 막공을 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높은 성과라고 생각한다.
- 'He's crazy'에서 은릿이 오도방정이라고 했던 거, 저녁공의 용릿 보고나니 저건 그래도 점잖은 축에 속하는 거였구나 싶었다. 솔직히 저렇게 경박한 햄릿은 내 햄릿이 아니야 싶어서 눈물이 ㅠ.ㅠ
- '수녀원에 가'도 은릿과 용릿은 해석이 전혀 다르더라. 은릿이 일부러 더 잔인하게 굴어서 오필리어를 떼어놓으려고 한다는 걸 보여준다면, 용릿은 오필리어를 사랑하기에, 진심으로 오필리어가 수녀원에 가기를 바라는 것 같다고 할까. 그래서 굳이 잔인하게 굴지 않고, 진심을 담아 수녀원에 가라고 호소하는 느낌이다. 은릿이 일부러 상처주고, 그러면서 자신도 더 깊이 상처받는 그런 느낌이라 낙차 폭이 큰 그 표정 연기 보는 맛이 있었는데, 용릿은 그런 표변하는 감정선이 아니었다. (넘버 마지막 클라이막스 부분 수녀원↗에나 가~ 하는 부분을 용릿은 플랫하게 불러줘서 잠시 짜식;) 그리고, 그렇게 서로 다른 노선을 잡은 이유는 이 뒤에 드러나는데, 휘장막을 떼어낼 때, 은릿은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보이고, 용릿은 그 뒤에 폴로니우스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배신감을 느끼고 당혹해하는 쪽이었다. 은릿은 장막 뒤에 그들이 있다는 걸 알고 일부러 더 잔인하게 굴었다는 설정이고, 용릿은 그들이 있다는 걸 몰랐지만, 오필리어가 자신의 곁을 떠나 수녀원에서 보호받기를 바라는 마음인 듯 했다.
- 그렇게 두 햄릿의 '수녀원에 가'에서의 해석이 갈리니까 이후에 이어지는 '증거가 필요해'에서 괴로워하는 포인트도 달라진다. 용릿이 배신감에 고통스러워하는 쪽이라면, 은릿은 복수를 위해서 사랑하는 연인마저 상처입히는 내가 나인가, 나라는 사람이 복수를 위해서는 이렇게 잔인해질 수 있는가, 복수심에 사로잡혀 점점 변해가는 자신이 무섭고, 자신이 과연 어디까지 변해갈 것인지 생각하면 두렵고 혼란스럽기만 하다.
단 하나의 연인도 복수를 위해 버렸고, 세상에 혼자 남은 먹먹함을 위로해줄 유일한 친구 호레이쇼. 용릿과 호레이쇼는 그래도 어느 정도 얘기가 통하는 친구라는 느낌인데 반해서, 은릿은 호레이쇼에게 마저도 속내를 털어놓지 않는다는 느낌이다. (Why me에서의 대응을 생각해보면, 은릿이 저러는 게 이해가 되지만;) 이날 은릿 막공에서 그저 친구가 힘들어 하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하는 호레이쇼가 결국에 폭발해서 '내게 말해봐!' 라고 호소하는 대사를 '내게 말을 해!' 버럭으로 바뀐 게 납득이 될 정도였으니.
- '오늘 밤을 위해'는 넘버 자체가 플라멩코 풍에 춤까지 곁들여서 신나고 흥겨운 분위기인데, 가사 내용은 굉장히 철학적이다. '산다는 게 연극같아'라는 가사에 담긴 함축적인 의미도 그렇지만, '사랑하는 내 모든 것 / 시간이 지나면 먼지 처럼 사라져 / 언젠가는 우리도 사라지겠지 / 그러니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에 담긴 인생무상에 대한 내용도 그렇고.
이렇게 강렬하게 대비되는 묵직한 가사와 흥겨운 멜로디의 이중성이 바로 뮤지컬 햄릿의 매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극을 다루고 있지만, 가볍게, 너무 무겁지 않게.
+ 쓰고 또 써도 후기가 끝나지를 않아. ㅠ.ㅠ 2막은 TBD